모세의 노래
신명기 32:8-14절 2015/12/27 송년주일
32:8 지극히 높으신 자가 민족들에게 기업을 주실 때에, 인종을 나누실 때에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대로 백성들의 경계를 정하셨도다
32:9 여호와의 분깃은 자기 백성이라 야곱은 그가 택하신 기업이로다
32:10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
32:11 마치 독수리가 자기의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자기의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의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의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32:12 여호와께서 홀로 그를 인도하셨고 그와 함께 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
32:13 여호와께서 그가 땅의 높은 곳을 타고 다니게 하시며 밭의 소산을 먹게 하시며 반석에서 꿀을, 굳은 반석에서 기름을 빨게 하시며
32:14 소의 엉긴 젖과 양의 젖과 어린 양의 기름과 바산에서 난 숫양과 염소와 지극히 아름다운 밀을 먹이시며 또 포도즙의 붉은 술을 마시게 하셨도다
2015년, 참 잘 살아내셨습니다.
일일이 찾아뵙고 칭찬해 주고 싶을 만큼 잘 견디셨고 잘 살아내셨습니다.
감사한 것은 우리 주님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이 멈추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이 아니었다면 이 험한 세상, 살아내기 참 힘들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들과 다사다난했던 한 해를 함께 마무리할 수 있는 기회가 또 주어지는 것을 보면, 은혜입니다.
지난한주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그 옛날 제사장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린 속죄의 제물과 화목의 제물을 먹고 살았는데 오늘날 목사는 무엇을 먹고 살까?
목사는 무엇을 먹고 살까요?
육의 양식인 밥을 먹고 살겠지요.
밥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목회자의 가정을 염려하여 성미를 모아 정성껏 드리는 것 아니겠습니까?
목회자의 가정 밥 굶지 말라고.
고맙습니다.
잘 먹었습니다.
그런데요.
제가 여러분들로부터 얻어먹은 것이 하나 더 있다는 것을 부끄럽지만 얼마 전에 깨달았습니다.
‘기도의 밥’입니다.
기도의 밥, 그 밥 힘 때문에 목회를 잘 감달 할 수 있었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해 마다 연말이 되면 교수신문이 설문조사를 통해 그 해의 사자성어를 정합니다.
올해 사자성어는 ‘혼용무도昏庸無道’입니다.
문자적으로 풀이하면 ‘세상이 온통 어지럽고 무도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말에는 이런 깊은 뜻도 숨어 있습니다.
‘혼용’ 어리석은 군주, 어리석은 지도자가 ‘무도’ 세상을 어지럽히고 있다라는 뜻입니다. ‘도’를 세워야할 지도자가 ‘도’를 무너뜨리고 있다는 말입니다.
‘혼용무도昏庸無道’
이것은 교회 밖 세상 풍경만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우리 교회 안에 풍경도 그렇게 흘러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교회 안에 ‘혼용무도昏庸無道’
이것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목회자를 위한 여러분들의 중보 기도입니다.
여러분들의 중보기도만이 교회 안에 ‘혼용무도昏庸無道’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임을 잊지 마시고 여러분의 목회자가 여러분들이 정성껏 짓는 기도의 밥, 그 밥 힘으로 목회 사역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오늘은 송년주일입니다.
제가 오늘 여러분들과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하는 말씀은 신명기 32장에 기록된 ‘모세의 노래’입니다.
어느 날 모세는 직감하게 됩니다.
40년 광야 생활이 다다르자 자신의 남은 날과 사역이 멀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자 모세는 지난날 하나님이 베푸신 사랑들이 몸서리치게 다가옵니다.
광야 40년, 정말 아찔한 삶이였습니다.
‘삶’이라기보다는 ‘광야’라는 말처럼 고난과 역경 그 자체였습니다.
물론 하나님을 못 믿는 것은 아니지만 혹 내일 아침 하늘에서 만나가 내리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마실 물을 구하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 이방민족이 길을 막고 전쟁을 하자고 덤벼들면 어떻게 할까?
돌이켜 생각해볼수록 기가 막힌 세월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한 가지 깨달은 사실을 유언처럼 고백하게 됩니다.
32:1 하늘이여 귀를 기울이라 내가 말하리라 땅은 내 입의 말을 들을지어다
32:2 내 교훈은 비처럼 내리고 내 말은 이슬처럼 맺히나니 연한 풀 위의 가는 비 같고 채소 위의 단비 같도다
32:3 내가 여호와의 이름을 전파하리니 너희는 우리 하나님께 위엄을 돌릴지어다
32:4 그는 반석이시니 그가 하신 일이 완전하고 그의 모든 길이 정의롭고 진실하고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니 공의로우시고 바르시도다
여기서 주목할 말씀은 4절입니다.
첫째, 하나님은 반석이시다.
변함이 없는 신실한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둘째, 그가 하신 일은 완전할 뿐만 아니라 정의롭고 진실하고 거짓이 없으며 공의 로우며 바르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40년 광야 생활 속에서 만나 모세의 하나님입니다.
모세는 이것을 믿음의 후예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노래를 하나 지어 부른 것이 오늘 본문 신명기 32장입니다.
1-43절까지 내용은 길지만 요약하면 두 가지입니다.
첫째, 애굽에서 구출해내시고 광야에서 이끌어주신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절대로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둘째, 배은망덕하지 말고 하나님이 주신 명령대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딴 생각 품지 말고 하나님이 당부한 말씀대로 신실하게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모세는 자신의 노래에서 고통 받는 백성 곧 종살이 하는 이스라엘 백성가운데 찾아오셔서 그들을 구원하시고 인도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 의지를 몇 가지 단어를 가지고 설명합니다.
32:9 여호와의 분깃은 자기 백성이라 야곱은 그가 택하신 기업이로다
32:10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
32:11 마치 독수리가 자기의 보금자리를 어지럽게 하며 자기의 새끼 위에 너풀거리며 그의 날개를 펴서 새끼를 받으며 그의 날개 위에 그것을 업는 것 같이
32:12 여호와께서 홀로 그를 인도하셨고 그와 함께 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
9절 ‘택하시고’, 10절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지키셨다’.
11절 ‘업으며’, 그리고 12절 ‘인도하셨다’
하나 같이 이 단어들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추상이 아니라 구체적 현실임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독수리가 그 날개로 새끼들을 업어 나르듯이 하나님은 그 백성을 그렇게 돌보셨습니다.
추상적 돌봄이 아니라 실재적인 돌봄입니다.
광야 40년 동안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았지만 배고파 죽고 목말라 죽은 사람이 광야에서 단 한 사람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구원은 손끝 발끝에서 감지할 수 있는 실재적인 구원의 역사였던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의 망각입니다.
고통과 시련 속에서 하나님을 갈급하게 찾다가도 그 시간이 지나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싶게 하나님을 잊어버린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망각입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너무 싶게 잊는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참 이상하지요.
악하고 더러운 일, 섭섭한 일은 쉽게 잊혀 지지 않습니다.
이를 갈지요.
하지만 남에게 진 사랑의 빚은요, 받은 은혜는요?
너무 싶게 잊고 살아갑니다.
왜 그럴까?
왜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 그리고 남에게 진 사랑의 빚을 너무 싶게 잊고 살아가는 것일까요?
첫째는 분주함 때문입니다.
망각, 풀어 보면 이런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분주할 망忙 잊을 망忘입니다.
역설적이게도 두 글자 모두 공통적으로 '마음 심'자가 들어갑니다.
하지만 그 마음이 은혜로 그리고 감사함으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분주함 때문입니다.
분주하면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잊게 마련입니다.
그리고는 곧장 자기 합리화, 핑계를 댑니다.
‘먹고 살려면 어쩔 수 없잖아?’
두 번째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누리는 여유와 태만 때문입니다.
15절입니다.
32:15 그런데 여수룬이 기름지매 발로 찼도다 네가 살찌고 비대하고 윤택하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업신여겼도다
여기서 언급한 ‘여수룬’은 이스라엘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의 또 다른 이름이 ‘여수룬’인데 모두 다 야곱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야곱, 이스라엘, 여수룬입니다.
여수룬, 그 뜻은 야곱의 뜻과 정반대입니다.
야곱이 속이는 자 사기꾼을 뜻한다면 여수룬은 정직한 자 거짓이 없는 자 심지가 곧은 자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영광스러운 이름 여수룬이 하나님을 어떻게 대합니까?
15절 말씀을 새번역으로 다시 읽어드리겠습니다.
32:15 (여수룬)이스라엘은 부자가 되더니, 반역자가 되었다. 먹거리가 넉넉해지고, 실컷 먹고 나더니, 자기들을 지으신 하나님을 저버리고, 자기들의 반석이신 구원자를 업신여겼다.
여기서 모세는 망각의 또 다른 이유를 확실하게 밝혀줍니다.
‘부자가 되더니, 먹거리가 넉넉하더니, 실컷 먹고 나더니’
한 마디로 배에 기름기가 가득 차더니 여유와 태만 그 사이에서 왔다갔다만 할 뿐이지 하나님의 은혜, 생각지도 않는 다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지낼 때 그들은 만나와 메추라기만으로도 만족했습니다.
매일 같은 재료 같은 식사였지만 그래도 감사했습니다.
또한 반석에서 터져 나오는 물로 마른 목을 축였지만 그래도 감사했습니다.
어쩌면 그 때가 하나님을 적극적으로 신뢰했던 시절일 것입니다.
하지만 생존의 어려움이 사라진 순간, 배고픔의 문제가 사라지는 순간 하나님은 마치 불필요한 존재처럼 되고 만 것입니다.
더 나아가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는 부담스런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슬그머니 등을 돌리는 것입니다.
타락의 시작이지요.
등을 돌이는 순간 하나님과 이스라엘은 불편한 관계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 불편한 마음을 메우기 위해 이스라엘 사람들이 택한 것이 바로 우상 숭배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마치 하나님인양 섬기는 우상숭배의 죄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그런 이스라엘, 정직의 이름을 가지고도 정직함을 잃어버린 여수룬을 가만 둘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32:20 그가 말씀하시기를 내가 내 얼굴을 그들에게서 숨겨 그들의 종말이 어떠함을 보리니 그들은 심히 패역한 세대요 진실이 없는 자녀임이로다
첫째, 하나님, 당신의 얼굴을 숨기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얼굴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얼굴을 숨기시겠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너희 가운데 임재, 거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망각의 결과는 진실이 없는 자녀, 곧 패역한 세대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두 번째 심판의 말씀이 가장 무섭습니다.
‘여수룬’ 그 이름값도 하지 못하는 존재가 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심히 패역한 세대요 진실이 없는 자녀’
저는 이 말씀이 가장 무섭습니다.
목사라는 이름값도 못하는 놈으로 살아갈까 그것이 가장 두렵습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이제 한 해가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품고 있는지요. 아니면 분주함 속에서 망각 속에서 또 한 해를 그냥 그렇게 의미 없이 보내고 있습니까?
주님을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에서 공통적으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마 10:38, 16:24, 막 8:34, 눅 14:27)입니다.
‘자기 밥그릇 들고 나를 따르라’ 그렇게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여러분 손에 무엇이 들려 있습니까?
자기 십자가 입니까 아니면 자기 밥그릇입니까?
하나님의 은혜.
망각하지 마십시오.
망각하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는 자기 밥그릇이 아니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를 때 빛이 나는 법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자기 십자가를 넉넉히 지고 여유와 태만에서 벗어나 오직 생명의 주인이신 우리 주님을 따르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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