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석 유영모

박재순, 유영모 영성

心貧者 2009. 6. 17. 12:49

유영모의 영성


박재순 박사


1강, “유영모 사상의 사상사적 위치와 현대적 의미”


1. 유영모는 누구인가? 신선 같은 도인


‘공자’ 강의로 유명한 김용옥이 “유영모를 만나 보지 못 한 게 천추(千秋)의 한(恨)”이라고 아쉬워했다는 데 나는 운 좋게 유영모 선생님의 말년인 1975년경에 세검정에 있는 댁에서 두 시간 가량 말씀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그때 유 선생님 댁 앞에는 맑은 계곡물이 흘렀고 작은 다리를 건너 마당에 들어서니 복숭아꽃이 가득했다. 80대 후반의 유 선생님은 신선처럼 보였다. 머리털과 눈썹은 눈처럼 희고 분을 바른 듯 하얀 얼굴에는 붉은 복숭아 빛이 가득했고 입술은 어린아이처럼 빨갰다. 하루 한끼 먹고 육욕을 버리고 온 종일 무릎 꿇고 앉아서 하나님의 말씀만 생각했기 때문에 신선의 몸이 된 것일까?


2. 다석의 삶과 사상


다석은 조선왕조가 몰락해가고 서구문물이 본격적으로 유입되는 시기에 1890년에 태어났다. 이 때는 가톨릭 전교 100년이 지나고 개신교 선교가 시작되는 시기였다. 서당에서 한학을 익히고 소학교와 중학교에서 신학문을 배웠다. 그는 특히 수학과 물리를 좋아하고 천문학에 매료되었다. 성격이 곧고 이지적이었다. 동경에서 예과인 물리학교를 마쳤다. 한학의 대가로서 서구근대학문의 세례를 받았다.

죽음에 대한 심각한 고민, 톨스토이, 동양사상은 정통신앙에서 벗어나게 했고 구도자적인 신앙의 길로 가게 했다. 동경에서 예과를 마치고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농사꾼으로 살기 위해 귀국했다. 조선왕조는 남에게 일시키고 놀고 먹으며 족보 자랑하는 양반도덕으로 망했다고 보았다. “지식을 취하려 대학에 가는 것은 편해 보자, 대우받자 하는 생각에서입니다. 이것은 양반사상, 관존 민비 사상입니다.” “이마에 땀 흘리며 사는 농부”(진리 上 204쪽)를 이상으로 알았다. 일하며 섬기는 삶을 추구했다. 노동자 농민이 세상의 짐을 지는 어린양이다. 빨래하고 청소하는 사람이 貴人, 閑士들의 贖垢主다(제소리). 다석은 풀뿌리 민주주의자다.

민족정신사의 중심에 서 있다. 오산학교에서 남강 이승훈을 스승으로 함석헌을 제자로 사귀었다. 성서조선에 기고하면서 김교신을 가까이 했고 최남선, 정인보, 이광수와 사귀었다. 이들은 모두 민족적 주체적 근대문화정신을 추구했다. 서구의 민주정신과 과학정신, 기독교신앙을 받아들이고 동양적 한국적 사상과 영성을 추구했다. 기독교 신앙에 서면서도 다른 종교들과 철학사상에 회통하는 신앙과 사상의 세계를 열었다.



3. 동서의 융합


유영모의 영성과 사상은 동양정신과 서양정신의 창조적 결합이다. 첫째 서구의 기독교 신앙을 동양적 한국적 정신으로 풀었다. 그의 사상은 기독교적 한국사상, 한국적 기독교사상이다. 예수와 민족혼의 만남이고 성경과 동양사상의 결합이다. 둘째 서구의 근대철학의 원리와 정신을 받아들여 민주적이고 이성적이며 영적인 사상을 형성했다. 한국전통사상과 근대정신의 종합이다.

서구근대철학과 유영모 사상의 관계를 살펴보자. 서구근대 철학의 핵심원리는 이성주의이며 이것은 데카르트에 의해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으로 표현되었다. 생각하는 이성이 철학적 사유의 주체이고 사회활동의 주체이다. 18세기 계몽주의는 이 원리를 관철시키는 운동이었다. 계몽이란 “미성숙한 인간을 성숙한 인간으로 일깨우는 일”이며 성숙이란 “남의 도움 없이 이성을 바르게 사용하는 것”이다.

유영모는 생각을 사상과 영성의 중심에 세웠다. 생각이 삶의 중심이다. “있는 것은 나뿐이다. 특히 (‘나’ 가운데서도) 생각뿐이다.” 함석헌이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고 한 것은 생각을 삶과 정신의 중심으로 본 것을 뜻한다.

유영모가 데카르트와 다른 것은 서구의 정복주의적 사유를 거부한 데 있다. 유영모에게서 생각은 이성의 주체적 사용에 머물지 않고 존재와 삶의 근본행위이다. “생각은 내 존재의 끝을 불사르며 위로 오르는 것”이다. 생각은 내 존재를 불사름으로써 나를 곧게 세우는 것이다. 성숙은 지식을 넘어서고 진리를 깨우치고 죽음을 넘어서는 것이다. “죽음을 넘어선다는 것은 미성년을 넘어서는 것이다.” “지식에 사로잡힌 사람이 미성년이요 지식을 넘어선 사람이 진리를 깨달은 사람...성숙한 사람”이다.(“꽃피” 1, 825-8)


4. 현대사상과 다석사상


현대사상과 정신을 규정한 대표적 사상가는 칼 마르크스, 시그문트 프로이트, 프리드리히 니체다. 이들의 사상이 현대사상과 정신을 풍토를 형성했다고 본다. 이들에 비추어 보면 유영모의 정신과 사상의 의미와 성격을 가늠할 수 있다.

마르크스는 유물사관에 기초해서 물질적 생산력을 강조하고 노동계급의 해방을 위한 투쟁을 내세웠다. 노동에 기초한 평등사회를 내세운 것이다. 유영모도 노동을 강조하고 민주적 평등을 강조한 것은 일치한다. 그러나 유영모는 “스스로 십자가를 지는” 자발적 헌신성(사랑)에 기초하고 물질적 생산력보다는 생각과 영성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다르다.

프로이트는 인간이성이 주도하는 의식보다 무의식이 인간의 존재와 행동을 규정한다는 것을 밝히고 무의식에서 리비도(육욕)가 인간의 의식을 지배한다고 봄으로써 인간내면의 심층적 차원을 드러내고 성의 해방을 가져왔다. 유영모는 의식보다 무의식, 밝음보다 어두움이 인간의 본성을 드러내고 규정한다고 본 점에서 인간의 내면세계를 깊이 파고들어 내면의 심층세계를 탐구하고 드러냈다는 점에서 프로이트와 통한다. 그러나 유영모는 식색을 끊고 육욕에서 자유로워져서 육신과 물질의 세계를 초월한 정신과 영성의 세계를 추구했다는 점에서 프로이트에 정면 도전했다.

니체는 서구의 이성적 도덕적 사유와 기독교 인생관에 맞서 “신은 죽었다”고 선언하고 선과 악의 피안에서 원초적 생명력을 긍정하며 원초적 생명의지에 따라 아무 속박이나 매임 없이 살 것을 추구했다. 유영모도 근원적 생명기운(元氣)에로 돌아가려 하고 살고 죽고 선하고 악하고 높고 낮고의 규정과 차이를 넘어서서 있는 것은 ‘이제, 여기’의 ‘나’뿐이라고 한 것은 니체의 생각과 상통한다. 하나님을 없이 계신 님이라 하고 空에서 하나님의 마음과 존재를 보고, ‘나’를 중심에 놓은 것도 니체와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본능적 생명력을 넘어서 육욕의 부정과 자기부정을 통해 하나님과 일치하려 하고 타자와의 근원적 일치, 타자를 섬기는 사랑과 어짐을 강조한 것은 니체와 다르다. 타자와의 화해와 일치, 서로 살리고 돌보는 생태학적 원리를 추구한 유영모는 원초적 본능적 생명력, 신화적 힘을 추구한 니체와는 다르다. 니체는 서구의 비윤리적 생명력, 정복자적이고 전투적인 생명력 사상과 통한다. 자아와 타자(자연과 타인)의 갈등과 대립을 전제한 서구철학에서는 생명력에 대한 열광과 허무주의와 불안이 공존한다. 자연친화적이고 타자와의 공생을 추구한 동양사상에서는 허무와 불안이 나타나지 않는다.


5. 다석사상의 현대적 의미와 성격


(1) 타자와 공생과 상생을 이루는 생태학적 사고이다. 서구의 생명사상은 해와 빛에 기초한 생명력사상이다. 유영모는 몸과 숨을 강조하지만 낮보다 저녁, 빛보다 어둠을 존중한다. 이성과 물질에 기초한 태양숭배를 거부한다. 어둠이 빛보다 크다. 해와 달은 없는 것이다. 物은 空이다. 생각으로 내 속의 속을 파고들어 어둠의 신령한 세계, 영원한 생명, 초월과 일치로의 귀일, 하나님의 세계를 추구한다.


(2) 한국전통사상과 현대적 사상을 결합했다. 19세기 한민족의 독창적인 민중종교사상인 동학과 다석사상은 ‘시천주’(侍天主), ‘인내천’(人乃天), ‘사인여천’(事人如天)을 말하는데서 일치한다. 동학과 다석이 다른 점은 동학은 부적과 주문을 사용함으로써 신비주의적 비합리적 경향을 보인데 대하여 다석은 생각을 강조함으로써 개성과 과학적 합리성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보다 현대적이라는 것이다.


(3) 결정론을 거부하고 未定論을 내세웠다. 인생은 끝날 때까지 미정이다. 따라서 무슨 종교, 신조, 사상으로 평안을 얻지 못한다. “마음을 마음대로”함으로써 미정의 인생을 완결해 간다.(1, 809-12)


(4) 기독교에 기초한 종교원주의사상이다. 그의 종교다원주의는 머리에서 이론적으로 제시된 게 아니라 삶과 정신 속에서 체험적으로 나온 것이다. 깨닫고 체험하고서 종교다원의 생각이 나왔다.


(5) 다석의 사상은 동서를 아우르는 종합적인 歸一의 사상이다. 함석헌의 씨사상, 민중신학, 종교다원주의 한국신학의 선구이고 깊은 샘이다. 신학과 철학, 과학과 윤리를 통하고 몸과 마음, 이성과 영혼을 통전하는 사상이다. 우주적 폭과 실존적 깊이를 지녔다. 일상의 삶 속에서 이제 여기 이 순간의 삶에서 처음과 끝, 영원과 절대 곧 하나님과 더불어 살려 했다.

        


2강, “삶과 죽음의 가운데 길”


1 죽어야 산다.


‘죽어서 사는 진리’


   죽음을 통해서 다시 산다는 가르침은 기독교의 근본내용이다. 다석은 죽음을 통해서 산다는 기독교 신앙원리를 동양적 한국적으로 받아들이고 실천한 것으로 여겨진다. 유영모에게 죽어야 산다는 것은 기독교의 진리일 뿐 아니라 씨앗이 죽어서 생명이 싹트는 자연의 원리이고 인생의 보편적 원리이다.


“절대에는 일체여니 상하가 나누일 데가 없다...전일체에서 무엇이나 누구나 私하는자는 近小로 말라죽고 공하는데에 원대한 생명을 완성하는 자리니 죽고 또 죽어라 살고 또 살리라!”(1,665-666)


   다석은 1956년 4월 26을 죽을 날로 잡아놓고 1955년 4월 26일부터 1년 동안 하루 하루를 죽음의 연습과 삶의 해방을 위한 날로 삼았다. 그 해 5월 23일에 일기에서 ‘올(1955)’이라는 제목 아래 세로로 크게 “今大自紀念年祀”(올해는 특별히 자기를 불살라 하나님께 바치는 해)라고 썼다. ”나를 불살라 없애는 해요 하나님의 빛이 가득 차는 해“다.


‘멸망이라는 확정판결을 받은 인생’


   다석은 “自然的 人生의 끝은 멸망이다. 멸망이라는 확정판결을 받고 나온 것이 인생이다.”라고 단언한다. “망할 놈이라 하면 욕이라 하고 아조 싫어하면서도 집행유예적 망할 놈으로의 현실 살림에 무심히 취하였으니.”(같은 글. 1,637)


‘죽어야 산다’


   삶은 죽는 연습이다. “종교의 핵심은 죽음이다....죽음은 밀알캥이를 심는 일이다.”(1,821-4) 다석의 삶은 날마다 죽는 삶이었고 죽음 속에서 영원한 삶, 참된 삶의 밀알캥이를 심는 삶이었다.


2 몸으로 드리는 산 제사


‘허파와 염통의 제사’


   다석은 먹고 숨쉬는 몸의 생리작용 자체를 제사로 본다. 먼저 숨쉬는 허파와 새 피를 돌리는 염통이 제사를 드린다. 묵은 피와 먹이로서의 생명을 불살라 새 피를 내는 일이 허파가 드리는 제사이다. 염통은 새 피를 “온 몸에 벌려 있는 4백조 세포에 돌려 이바지어 드리려는 밖에 없는” 제사장, 드림 맡은이, 교황(Pope)이다.


‘거룩한 생각의 제사’


   “새 피가 깊은 허리 기둥뼈 안쪽으로 굳게 달린 콩팥에 가서 알짬 샘물로 되어 잠근 동산 덮은 움물로 간직된다. 또 그 움물 가에서는 알짬샘물[精力]이 구름 피우듯이 온 몸 우로 떠오르도다.” 사람의 얼은 그 떠오르는 구름으로 살이 찌고 살이 찐 얼은 “다시 거룩한 생각의 구름을 피여 올린다.” 다석에 따르면 피여 오르는 거룩한 생각의 구름이 “한우님께로 올라가는 기름이요 빛”이다. 그것은 “참 목숨의 기림빛...빛난 기름”이다. 이것은 “참 받으실 만한 목을 드림이다.”


‘속죄의 길, 영생의 길’


   죽는다는 것은 자유롭게 섬기자는 것이다. 유영모는 상놈의 교, 봉사하는 종교가 좋다고 한다. “세상에 예수처럼 내가 십자가를 지겠다는 놈은 하나도 없고 남에게 십자가를 지우겠다는 놈만 가득찼다...” 세상의 무거운 짐을 지고 신음하는 가난한 민중이 오늘의 예수다. “특히 무식한 어머니들, 우리들의 더러움을 대신지는 어머니들 농민들 노동자들 이들은 우리를 대신해서 짐을 지는 예수들입니다.”(짐짐. 1,789-92) 이들이 사회의 희생양이요 이들의 삶이 희생제사이다. 더 나아가서 서로 밥이 되는 “일체가 대속이다...야채, 고기 다 말 못하고 죽는 대속물이다.”(같은 글) 다석의 시에 “新陳代謝妙 自然相贖殷”이란 구절이 있다. 신진대사 곧 먹고 싸는 일이 묘하고 자연은 서로 대속하여 융성해진다. “대속물에게는 반드시 영생이 있다. 억울하게 죽은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절대 버리지 않는다.”(짐짐. 1, 789-92)


3 생사의 사이길: 예수의 길


‘죽음을 통해 영원한 삶에로 솟아오르는 길’


   다석은 ‘우리 아는 예수’라는 신앙 시에서 “...예수는 믿은 이 높·낮, 잘·못, 살·죽---가온대로---솟아오를 길 있음 믿은 이...예수는 믿은 이 없이 계심 믿은 이“(일지1,921)라고 읊었다. 높음과 낮음, 잘함과 못함, 삶과 죽음의 사이 한 가운데로 하늘로 솟아오를 길이 있다.


   다석은 1942년에 믿은 지 38년 되는 해에 새로운 신앙체험을 하고 쓴 시 ‘우리가 뉘게도 가리이까’에서 “솟아날 門이 열리며 한나신 아들(獨生子) 오시니, 시원타. 죽어 산 길에 그 사랑을 펴셨네...十字架, 가로 가던 누리는 가로대에 못백히고 바로 솟아 나갈 얼만 머리우로 솟구치니, 영원을 허전타 마라 길히길히 삶이다.”(1, 663)고 노래했다. 우리가 솟아날 하늘 문이 열리고 독생자 예수가 오셨고 예수의 십자가에서 “가로 가던 누리는 [십자가의] 가로대에 못박히고 바로 솟아 나갈 얼만 머리 위로 솟구쳤다.” 세상욕심, 부귀영화 버리고 얻은 영원한 삶은 허전하게 여겨질지 모르나 그것이 길히길히 삶, 영생이다.



‘죽음은 생명의 꽃’


   “마지막을 거룩하게 끝내야 끝이 힘을 줍니다...인생의 끝은 죽음인데 죽음이 끝이요 꽃입니다. 죽음이야말로 엄숙하고 거룩한 것입니다.”(진다2. 367) 우리는 대장부처럼 “저녁에 잠자리 들어가듯이 한번 웃고 죽는 길에 들어설 수 있다.”(인간사상. 1,813-6) “죽음은 천국에 도착하는 것이고 제2목적은 하나님을 만나는 것”(1,821-4)이기 때문이다.

참 생명의 자리에서 보면 죽음은 없다. “죽음이란 없다. 하늘에도 땅에도 죽음이란 없는 것인데 사람들이 죽음의 노예가 돼 있다.”(1,50) 유영모에 따르면 인간의 몸과 마음은 “죽어도 죽지 않는 영원과 연결된 긋을 가지고 있다...이긋이 자라고 움직이면 깃이 되어 날아간다...죽을 때는 이 세상 바닷가를 넘어서 영원의 날개를 펴는 날이다.”(1,756)

십자가는 “죽음이 삶에 삼키우는 것”이다. 죽음은 “정신이 육체를 이기는 것”이다. (꽃피. 1,828) “...몸은 흙 속으로 그러나 마음은 희망과 같이 울려 퍼진다.”(1,841-4)


4 죽음을 넘는 자유의 길: 빈탕한데 맞혀 놀이(與空配享)


‘대로, 몸되게’


   삶에 매이지 않고 죽음의 두려움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삶의 경지를 다석은 ‘을 대로 하고, 몸은 몸대로 되게’로 표현한다. “사람은 사람 노릇하고 몬(物)은 몬들 절로 되게!”하라는 것이다. 대로 절로의 길은 허공 속에 있다. “道는 길이고 허공이 진리다.”(주기도. 1. 837-40) 그 길은 집착 없는 삶에 이른다. “예술가는 得意作 속에 거주하거나 자족하지 않으며 시인이 自成品 속에 해골을 눕힐 수는 없다. 종교가가 자설법 속에 열반할 수는 없을 것이다...작품 시집 업적 경전 보감 의사당, 교회 사회등등은 色界의 그림자다.”(빛. 1,853-6) 자신의 생명, 몸, 영혼, 생각과 업적, 이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불살라 제사 지내고 하나님을 향해 솟아올라야 한다. 모든 것을 버리고 태우고 솟아오를 때 맘대로 절로의 길에 이른다.


‘제사: 빈탕 한데서 노는 삶’


   이런 자유는 자신의 몸과 마음을 제사 드리는 사람이 누리는 자유이다. 제사는 자아를 불살라 허공, 빈탕한데 하늘에 올리는 일이다. 다석은 제사(祭祀)를 ‘놀이’라고 한다. 더 나아가서 “세상 일은 사실 다 놀이라고 볼 수 있다. 자고 일어나고 활동하는 것 모두가 다 놀이다. 하나님 앞에서 한 어린아이로서 이 세상을 지낸다면 그거야 말로 참 놀이가 될 수 있다.”

꾸밈없이 자유롭게 놀려면 “빈탕한데 얼(魂)이 연락되어야 한다....(번쩍거리는 세상물건에)...우리의 얼을 덜다가는 정말 ‘얼빠진 나’가 되고 만다...우리는 묶고 묶이는 큰 짐을 크고 넓은 ‘한데’에다 다 실리고 홀가분한 몸으로 놀며 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종당에는 이 몸까지도 벗어버려야 한다...다 벗어버리고 홀가분한 몸이 되어 빈탕한데로 날아가야 한다.“(빈탕한데 맞혀 놀이. 1,889-898)       

        

        

3강, “하루살이 - 하루를 영원처럼”

- 식욕과 육욕에서 벗어나 몸 성히, 맘 놓이, 뜻(바탈) 태우는 삶 -



1. 하루를 영원처럼


다석은 일찍부터 오늘 하루에 집중하는 사상과 삶을 추구했다. 다석의 하루살이는 지금 여기의 삶을 존중하는 한국적 사유의 전통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다석이 하루를 세기 시작한 것은 시편 “우리에게 날수를 제대로 헤아릴 줄 알게 하시고 우리의 마음이 지혜에 이르게 하소서.”(시편90:12)에서 비롯된 것이고 마태복음에 나오는 예수의 말씀 “내일을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1,684)을 실현한 것이다.

유영모는 아침에 잠이 깨어 눈을 뜨는 것이 태어나는 것이고, 저녁에 잠자리에 들어 잠드는 것이 죽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르자면 하루 동안에 일생을 산다는 일일일생주의(一日一生主義)이다. 이를 바꿔 말하면 ‘하루살이’요 ‘오늘살이’다.“(진다1, 288)

어제는 오늘의 諡號이고 내일은 오늘의 豫名일 뿐 있는 것은 오늘밖에 없다. 유영모는 오늘이 ‘오! 늘’이라고 보고 오늘 하루의 시간에서 영원에로 솟아오를 수 있다고 보았다. 시간을 타는 방법은 하나님을 그리워하는 길밖에 없다.(1,315)


2 다석의 하루살이 모습


김흥호에 따르면 다석은 하루한끼, 새벽 일찍 일어나기(3시), 찬물 수건 몸 문지르기, 시간 약속 잘 지키기, 늘 걸어다니기, 늘 꿇어앉음을 실행했다. 경어쓰기, 남에게 잔 심부름 안 시키기, 한복입기, 시계 안 차기, 차 음료수 안 마시기, 얼음과자 안 먹기, 음식점 안 가기, 약 잘 안 먹기, 비싼 과일 안 먹기, 부채질 안 하기를 했다. 새벽에 일어나 한 시간 가량 몸을 푸는 체조를 했다. 마치 하루를 영원처럼 알고 하루가 일생인 듯이 살았다.

다석의 삶은 두루 통하는 삶이었다. 一食, 一仁, 一坐, 一言으로 꿰뚫린 삶이었다.(55.12,24) 다석의 삶을 꿰뚫는 도(道)는 “본성을 회복하고 지극한 정성으로 해탈의 경지에 이르는 것”(復性寢恩 至誠坐忘)이다.


3. 금식과 일중식(日中食)


다석은 유대인은 금식을 자주 했고 인도인은 하루에 한끼 먹는 일중식을 했다고 한다. 금식이나 일중식은 모두 밥을 줄임으로써 육으로가 아니라 정신으로 살고, 저만을 위하지 않고 남을 위해 公과 全을 위해 살고 몸과 마음이 건강하고 편안해져서 하늘의 뜻대로 신령하게 살자는 것이다.



일식

하나님이 몸을 우리에게 밥으로 주셨으니 아침은 내 몸을 하나님께 밥으로 드리고 점심은 이웃에게 내 몸을 밥으로 드리고 저녁은 나를 위해 밥을 먹는다면서 다석은 일일 일식을 했다. 다석은 삶의 7가지 원칙이 식사할애(食思割愛) “食物은 할애로만 보겠다.”는데서 비롯된다(55.7.14)고 했다. 밥을 나누어 사랑을 베푸는 것을 삶의 기본원칙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다석은 먹고 남는 양식을 나누는 게 아니라 먹는 밥을 사랑으로 나누어 먹으려 한다. 사람마다 밥을 잘 먹으면 평화롭다. “사람마다 입(말)이 있다. 人口도 신(信)과 같은 믿을 信자다. 사람마다의 입이 밥(벼)으로 배가 부르면 평화롭다(和).”(진다1, 310)

창자가 비면 몸을 소중히 여기고 생명을 절실히 느끼며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간절히 그리워하게 된다. 굶주린 시간은 은총의 시간, 신령한 시간이다. 배부르면 목마르지만 배고프면 군침이 돌고 목마른 줄 모른다.


밥 먹음이 예배다

다석은 밥을 제물로 알고 밥 먹음을 예배로 안다. 밥 먹는 것은 “내가 먹는 것이 아니라...내 속에 계시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맙. 버39 1,857-60) 사람이 되면 “언제나 죽을 수...십자가에 달릴 수...제물이 될 수 있다. 인생의 목적은 제물이 되는 것이다...인생의 목적이 밥이 되는 것이기에 인생은 밥을 먹는 것이다.”(맙. 버39 1,857-60) 하나님과 이웃에게 밥과 제물이 되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다.


굶어야 산다

다석은 밥 먹기에 대해 독특한 생각을 제시한다. 끼니는 끄니(끊이)라며 먼저 끊고 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끄니(끼니)는 끊어야 하는데 잇기만 하려고 합니다. 끊는 것이 먼저이지 잇는 것은 나중입니다...”(진다2. 19) 다석은 우주자연세계도 사람도 탈이 나면 먹기를 끊고 몸과 마음을 곧게 해야 낫는다고 보았다: “큰 빈탕에도 큰 쓰림이 있느니라. 이것이 한늘의 한숨이다. 한늘이나 사람이나 탈은 고디를 직혀야만 곧힌다. 속이 쓰린 거시 낫도록 먹기를 끊는 거시 고디다.”(55,11,1) 금식을 통해 병이 낫고 영이 충만해지고 정신이 살아난다.


은혜로 먹는다

밥은 약으로 먹을 뿐 아니라 은혜로 먹는다. 내가 밥을 먹을 수 있는 것은 내게 자격이 있어서도 아니고 내 힘으로 먹는 것도 아니다. 다석에 따르면 “...하나님의 은혜로 수많은 사람의 덕으로 대자연의 공로로 주어져서 먹는 것이다...돈은 밥의 가치의 몇 억분의 일도 안 된다...사람들이 수고한 대가의 일부를 지불하는 것뿐이다...(밥은) 순수하며 거저 받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다석은 밥과 말씀을 결합한다: “...밥에는 말씀이 있다...인생은 하나님의 말씀을 바칠 수 있는 밥이다...밥을 먹고 육체를 기르고 이 육체 속에는 다시 성령의 말씀이 영글어 정신적인 밥 말씀을 내놓을 수 있는 존재다...목숨은 껍데기요 말씀이 속알이다...밥은 제사드릴 때는 맙이라고 했다.”( 맙. 버39 1,857-60)


4. 아름답고 깨끗한 삶


다석은 어제의 매임에서 벗어나고 내일의 염려에서 자유로운 오늘살이를 했다. 물욕과 명예욕에 물들지 않은 높푸른 하늘의 빈탕에서 살았던 다석의 삶은 건강하고 아름답고 깨끗했다.

1) 몸성히, 맘놓이 뜻 태우

다석은 영생보다도 ‘몸성히’를 감사한다고 했다. 몸이 성하면 마음이 놓이고 마음이 놓이면 개성이 살아난다는 것이다. 개성이 자랄수록 더 깊은 바탈을 느끼게 되고 “...자기의 바탈을 파고 들어가는데 인생은 한없이 발전해” 가며 “이 바탈을 타고 우리는 하늘에까지 도달”한다. 다석은 ‘바탈 타기’가 인생의 가장 즐겁고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했다.(건. 1,793)

몸이 성하고 마음이 놓이면 바탈에서 생각을 하게 되고 생각하면 뜻이 타오른다. 뜻은 인생의 의미이고 목적이며 지향이다. 뜻이 타오르면 “...지혜의 광명으로 만물을 비추게 된다.” 그런데 정신의 광명을 흐리게 하는 게 노여워하고 화내는 것(瞋恚)이다. 그래서 다석은 “뜻 태워 만인을 살리는데 화가 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했다.(몸성히, 맘놓이, 뜻태우 버24. 1. 797-800)


2) 깨끗

다석은 깨끗을 깨어서 끝에 서는 것이라고 했고 더러움을 덜없음, 部分無라 했고 完全無를 깨끗이라 보았다. 거룩(聖)을 깨끗으로 보았다. “더럽은 것이란 덜 업은 것”이며 ‘덜업다’는 “덜림을 업고 있다”는 말이다. 물질은 덜리는 것, 닳고 소멸하는 것, 따라서 때묻고 더러워지는 것이다. “땅도 하늘도 덜 것이다. 덜 것은 다 덜어야 깨끗할 것이니 그것은 빈탕 밖에 무엇이랴? 빈탕은 맘이다.”(제소리) 덜 것은 다 덜고 마음의 빈탕에서 사는 게 깨끗한 삶이다.

깨끗은 나·너, 생·사, 유·무를 초월한 삶이다. “깨끗은 나남없는 이제다...하루하루가 다 영원한 현재다. 오늘이 오!늘이다. 하루가 영원이란 말이다...생사를 초월한 사람은 깬 사람이요 끝에서 사는 사람이다...끝은 유무를 초월한 세계다. 생사를 초월하면 유무도 초월한다...저승에 깨어나 그 나라에 끝마침이 깨끗이다. 이 세상을 끝내고 저 세상을 사는 것이다.”(말씀 버 46. 1, 885-888)

서러운 씨알을 섬기고 벗을 깊이 사귀는 깨끗한 삶의 원칙은 “그저 나므름 업시 제게로부터”(55. 9.11)이다. ‘그저’ 군소리 없이, 변명이나 자기 정당화 없이 남을 탓하거나 나무람(나므름)없이 살아야 한다. 남에게 기대거나 남을 탓하면 지저분해진다. 남과의 관계에서 깨끗하려면 남에게 기대지 말고 남을 탓하지 말고 스스로 제 바탈에 힘입어 ‘제게로부터’ 살아야 한다. 그것은 “언제나 불평불만없이 제 속에서 무한한 존재를 끄집어내는 것이다.”(1, 166) ‘제게로부터’, ‘스스로 함, ’이것이 풀뿌리 민주주의의 기초다. 스스로 함이 자유와 평등의 기초다. 씨알처럼 낮아지고 참의 벗에게 활짝 열렸던 다석의 겸허하고 자유로운 삶은 하늘처럼 크고 깨끗하고 아름다웠다.


※ 다석의 체조

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두 다리를 나란히 앞으로 뻗는다. 1) 두 팔을 어깨 폭과 높이로 들어 올린다. 2) 두 팔을 어깨 높이로 가슴껏 뒤로 벌린다. 3) 두 팔을 안으로 오므려 굽히면서 두 손등끼리 몸통 앞뒤로 부딛친다. 4) 두 팔을 앞으로 뻗치면서 두 팔을 붙인 채 손바닥으로 위로 향하게 하여 밖으로 비튼다. 5) 그대로 머리 위로 손을 넘겨 두 손바닥으로 뒤 잔등을 소리나게 친다. 6) 두 팔을 앞으로 돌려 어깨 높이로 나란히 든다. 7) 허리를 굽히며 두 손을 뻗친 발바닥을 잡을 수 있도록 힘껏 엎드려 뻗친다. 8) 같은 자세로 한번 더 허리를 굽혀 두 손으로 각각 발바닥을 잡고 힘을 준다. 9) 허리를 바로 하며 두 손으로 앞으로 나란히 뻗는다. 10) 두 팔을 두 다리 위에 내려놓는다. 이상의 몸놀림을 30분 이상씩 날마다 아침저녁으로 해야 한다.(진2. 49)      

        

        

4강, “가온찌기”

- 이제, 여기 나의 삶 속에서 영원한 생명의 중심을 찍기 -


                               


다석이 신분질서를 강조하고 복고적인 유교전통을 강력히 비판하면서도 가온찌기, 중심을 찍는 것에 대한 그의 논의는 유교, 특히 공자의 중용사상을 받아들이고 있다. “공자가 중용을 왜 말했는가? 사람의 목숨은 정중용(正中庸)에 있고 용기가 나와서 일을 바로잡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의 목적을 가진 과녁과 같다. 몸은 활이고 고디 정신은 화살이다. 몸이란 활에다 정신이란 화살을 끼워 쏘아 중정(中正)을 얻을 수 있다.” 여기서 다석이 몸을 활로 보고 마음의 곧음을 화살로 봄으로써 몸과 맘의 긴밀한 관계를 드러내고 몸의 중요성을 강조했다고 본다.


1. 지금 여기서 사는 나


가온찌기는 지금 여기 사는 나의 몸과 마음에 대한 집중이다.


1) 이제 여기에 나는 없다

모든 삶은 지금 여기에 사는 나의 삶이다. 다석은 ‘나의 삶’에 집중하고 파고든다. 그에 따르면 “이제 여기에 나는 없다.” ‘나’는 零, 제로, 無다. 이제 여기의 點일 뿐 시간 공간을 쓸 수 없다. 자리만 있을 뿐 없는 존재다(位而無).

이제에 사는 사람은 아무 걸림이 없고 자기의 때를 사는 것이므로 흥겹고 자유롭다. 詩經에서 詩는 時 도는 是와 통한다면서 이제의 삶이 나 자신의 자유롭고 흥겨운 삶임을 말한다: “詩軸이 서 가지고야 올(理)이고 이(是-)고가 날 것입니다. 詩는 일어나는 짓거리입니다.(興於詩) 詩經에 時, 是로 통합니다. 사는 때는 사는 이의 때, 이 때, 제 때 -이제-ㅂ니다. 이것이 목숨의 올(命理)이요 살라는 말씀(生命)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 짓이 안 날 놈이 어디 있겠으며 제로라 일어나지 않을 이가 있으리까?”(제소리. 새벽 1955. 7월호. 다902)


2. 가온찌기


‘나’는 오직 걸어가는 한 점 ‘.’이요, 지순한 진리에 명중하는 것은 ‘한울’이다. “거름거름 걸어만 가고지고, 내가 세상에 있기는 消息하는 ‘.’요. 한울이로다, 지순한 진리에 명중하기는!”(1,650) 오직 내가 할 일은 진리와 생명의 중심인 ‘하늘’을 맞추는 일이다. 이것이 인생의 목적이고 사명이다.


빛나려면 깨져야지

진리와 생명의 중심인 하늘을 내가 맞추려면 사욕에 사로잡힌 내가 깨져야 한다. 몸의 사욕과 물욕에 사로잡히면 시간과 공간에 붙잡히고 세상을 옆으로 기게 된다. 그러므로 몸뚱이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삶은 물질을 섬기는 우상숭배생활이다. “목숨은 썩는 거야 그러나 말씀은 빛나는 거야. 빛 날래면 깨야지, 깨져야지. 죽어야지.”(1,841-4) 내 뜻 없이 볼 때 바로 보고 분열 없는 절대의 진리에 이를 수 있다. 그럴 때 비로소 “영원한 평화가 깃들이는 그늘...완전과 성숙이 영그는 영원한 그늘에...들게 된다.”(1,841-4)


가온찌기

하나님께 위로 솟아오르려면 먼저 마음에 한 점을 찍어야 한다. 다석은 가온찌기를 이렇게 표현한다: “心線路 接境이오 一線이다 前進이 一路다 直上 一點心.” 풀어보면 “마음에 길이 생기고 끝에 이른다. 하나의 선밖에 없다. 앞으로 나가는 한 길밖에 없다. 곧게 위로 올라 마음에 한 점을 찍는다.” 마음이 경계에 부딪치면 앞으로 나아갈 길은 마음에 한 점을 찍고 위로 곧게 올라가는 길 밖에 없다. 내 속에 영원전부터 내려오는 생명줄이 있고 이 줄의 끄트머리가 ‘나’다. “우리의 숨줄은 하늘에서부터 내려온 나다. 우리의 숨줄, 영원한 생명줄을 붙잡아야 한다. 이 숨줄 끝을 붙잡는 게 가온찌기다.”(정2. 1,737-40)

가온찌기는 영원의 한복판을 찍어 진리를 깨닫는 것이다. “가온찌기는 고디고디 신성하고 영특한 영원의 한복판을 명중시켜 진리를 깨닫는 것이다.”(1,734) 가온찌기는 ‘’, ‘ ’이며, “가고가고 영원히 가고 오고오고 영원히 오는 그 한복판을 탁 찍는 가온찌기, 진리를 깨닫는 순간, 찰라 속에 영원을 보는 것”(1,734)이다.

다석은 가온찌기를 한글 ㅡ ㅣ 로 푼다. “ㅡ ㅣ ·는 수평선 수직선 태극점, 세상 죄의 수평선을 義의 수직선이 뚫고 올라가서 아버지 가슴 한가운데 도달하는 가온찍이 점심이 으이아요 십자가다.”(1,288) 한글과 십자가 신앙이 절묘하게 결합되었다. 가온찌기는 세상 죄의 수평선(ㅡ)을 義의 수직선(ㅣ)이 뚫고 아버지 가슴 한가운데() 도달하는 것이다. 가온찌기는 위로 솟아올라 하늘 아버지 가슴 한가운데 이르는 것이다.

다석은 가온찌기를 가온, 으로 쓰고, 을 ㄱ, ㄴ,  로도 풀이한다. 은 무한과 영원에 끝을 찍는 것이다. “무한과 영원에 끝이 찍힌다. 영원한 기역(ㄱ)과 영원한 니은(ㄴ) 가운데 한 점(․)이 찍힌다. 가온찌기(․)가 끝이다.” 그리고 가온찌기한 끝은 “一點靈明, 우주의 켜진 하나의 불꽃이다.”(깨끗. 1, 753-6)


바탈 살려라

사람은 만물의 근원이요 밑둥이다.(건. 버23. 1, 793-6) 사람의 바탈이 하늘과 통하고 영원에 닿아 있기 때문에 바탈, 속알을 꿰뚫고 자기 생명의 목적과 사명을 완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국전통사상의 핵심을 나타내는 것으로 여겨지는 삼일신고 진리훈의 문귀 ‘성통공완시’(性通功完 是)를 다석은 “바탈을 트고 마틈을 마츰이 이다”고 풀이한다.(55.10.6) “바탈이 뚫리고 통하여 자기 사명을 완성하는 일이 나의 일이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자기 본성을 통하고 역사와 사회 속에서 하늘이 준 사명을 이루는 것이다. 삼일신고 마지막 결론에 “안으로 본성을 통하고 밖으로 사명을 이룬 사람은 영원한 즐거움을 얻는다”(性通功完者 永得快樂)고 했다.

3. 가온찌기 無等 세상


‘나’를 한 점으로 찍고 하늘과 영원을 살면 걸림 없이 자유로우면서 서로 하나되고(大同) 평등한 세상을 이룰 수 있다.


1) 未定論과 窮神知化

지금 여기 나의 한가운데를 점으로 찍으면 이 한 점밖에 없고 이 한 점에서 영원한 하나님과 통할 수 있다. 과거도 미래도 없고 있는 것은 오직 지금, 여기만 있으므로 모든 일은 지금 여기의 한 점에서 결정된다. 그러므로 다석은 기정론, 결정론을 거부하고 미정론을 내세운다. 하나님과 내가 한 점으로 만나는 가온찌기에서 모든 일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욕심과 집착에 매인 마음에 가온찌기로 한 점을 찍으면 ‘마음을 마음대로’하게 되고 마음이 자유로워지면 일을 이룰 수 있다.(하게 되게. 1, 809-12)

다석은 ‘이 세상 中道를 사는 노래’( 노래 누리 )에서 몸 하루를 가온찌기로 살면 늘 법도에 어긋나지 않고, “오늘 하루가 자기의 날이고 영원을 사는 날”이라고 했다. 불평불만없이 기쁘게 사는 삶이 “늘늘늘늘 늘느리야” 노랫가락이 터져 나온다고 했다. 다가 올 “하늘 나라를 위하여 ”오늘 우리가 “새것, 옳은 것을 힘껏 하여...햇것, 올것이 밝아지는 하루”가 되어야 한다. 여기서는 마음을 모으고 살고 “마는 마음이 모인 몸”은 하늘에 있으면 오늘 삶은 늘어난다.

가온찌기를 통해 “은 항상 窮神하는 자리에 가 있어야 한다.” 궁신은 위로 하나님을 탐구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탐구하면 지화(知化), 자연 자체의 변화를 알게 된다. 하나님을 탐구해서 하나님과 통하면 모든 인간, 만물과 통할 수 있다. 그러면 “맴에서 떠나 자유, 몸에서 떠나 평등이다.”(매임과 모음이 아니! 버10. 1, 741-744)


2) 가온찌기 無等 세상

다석의 가온찌기는 신비한 명상과 내면적 수행에 머물지 않고 끝끝내 표현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의 욕심과 주장을 점으로 가온 찍어 버리면 자유롭게 되고 남을 섬기는 평등, 無等 세상을 이룰 수 있다. 가온찌기는 사사로운 자기의 중심을 비우는 것이고 참된 중심, 하나님 중심을 세우는 것이다.

이것을 다석은 ‘아 가온따위 가온맨꼭대’라는 글로 표현한다.


내를 내가 가지고 제절롤 제가 쓰뉠

맨들 수 잇사오릿가 돼됨도[될 수가] 잇사오릿가

두어라둘[하나님 아들] 솀판 땅땅따딜 따위가온(다6. 26)


내 마음에 가온 ·을 찍어 하늘을 맞춤이 땅 위에 하늘나라를 든든히 세우는 일이다. 

        

        

        

5강, “생각”

- 내 존재의 끝을 불사르며 위로 오르는 것 -


                                


1. 사람은 생각하는 존재


1)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데카르트)


“Cogito, ergo sum."(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말은 생각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의 주체성을 확인하는 서구근대철학의 원리이다. 데카르트는 다른 모든 존재를 의심할 수 있어도 ‘생각하는 주체로서의 나의 존재’는 의심할 수 없다고 보았다. 데카르트에게 생각은 ‘나’의 기능적, 술어적 행위다. 생각의 주체인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했을 뿐 ‘생각하는 나’ 자신에 대한 의심과 문제제기는 없었다.


2) 사람은 생각하는 존재(다석)


다석이 “해요 달, 저게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이다. 있는 것은 오직 나뿐, 그 중에서도 생각뿐이다.”(1, 853-6)고 했을 때 그는 데카르트의 관심과 원리를 넘어섰다. 해와 달의 객관적인 존재와 운동에 대한 자연과학적 관심을 넘어서서 ‘생각하는 나’와 내가 지금 하는 ‘생각’의 세계, 주체성의 세계로 나아갔다.


3) 생각하는 주체의 성숙과 해방


서구의 계몽철학이 타율적 전통과 비합리적 권위로부터, 다시 말해 타자(타인, 자연, 하나님)의 지배로부터 인간 자아의 해방을 추구했다면 다석은 더 나아가서 자아로부터 타자를 위한 삶, 자아와 타자가 귀일되는 삶에로의 해방을 추구했다. 성숙한 사람은 생·사를 넘어서고, 이·해(利害)의 시비에서 벗어난 사람이다. 생각하는 존재로서 성숙한 인간은 자아로부터 자유로운 존재, 타자를 위해 열린 존재이다.


2. 존재행위로서의 생각


1) 존재의 끝을 사름


“(나는)...생각의 끝머리요 생각의 불꽃이다.”(1,740) “생각의 끄트머리가 불꽃처럼 자꾸 피어오르기 때문에 ‘나는 존재한다’.”(1,740) 다석에게 생각은 단순히 인식론적, 추론적 행위가 아니라 나의 존재와 본질을 형성하는 행위이다. 그에게 생각은 순수한 논리적 추론이 아니라 “사랑이 있을 때 피어나는 하나의 정신의 불꽃”(정2. 1,740)이다.


2) 말씀 사름


말씀의 근원은 하나님의 가운데이고 그 말씀이 사람 속에서 불타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속에서 불타는 것이 바로 생각이다. “사람은 말씀이 타는 화로다.”(신. 1,882-3) 다석은 이것을 中庸으로 설명한다. “말씀은 우리 속에 타는 불이다...中庸이란 속에서 쓰여진다는 말이다. 우리 속에서 영원한 생명...하나님의 말씀이 타고 있다.”(신. 1,882-3) 속에서 말씀의 불, 생각의 불이 타오르면 중용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3) 솟아오름 : 살리는 생각


다석에게 생각은 근심, 걱정, 번민이 아니며, 헛된 공상이 아니다. “머리를 무겁게 수겨 떨어뜨리며 하는 생각은 사람을 죽게 하는 생각”이다. 제 머리를 무겁게 하는 생각을 하는 이는 썩은 졸개(腐卒)이며, “거룩한 불꽃을 도적질하는 자라 스스로 심판이나 기다리는 자가 된다.”(1,907)

생각을 해야 사람노릇을 할 수 있다. 생각은 일상적인 삶을 위한 실천적인 일이다. “생각 없이 되는 대로 먹고 입고 자고 이는 사람은 食蟲이다.” 먹고 입고 자고 일어나는 일을 어떻게 잘 할까 생각하면서 사는 사람은 철학자이고 제사(祭司)라고 할 수 있다.(1,907)


3. 신통과 한통: 나는 생각, 하는 생각


다석에게 생각하는 것은 합리적 논리적 추론에 머물지 않고 깨달음과 영감으로 이어진다.


1) 깨달음의 학문


서양에서 학문을 ‘science', 'Wissenschaft'라고 하는데 모두 ‘앎’, ‘지식’을 뜻한다. 서양에서는 객관적인 지식과 정보, 논리를 탐구하는 경향이 있다. 동북아시아에서 학은 “모르는 것을 배우고(學), 의혹을 묻는 것(問)이다.” ‘學’은 “학교에서 선생이 가르치고 학생이 배우는 것을 나타낸” 그림말이다. 서경(書經)에서는 학(學)을 “가르침을 받아서 깨달음을 전하는 것”(受敎傳覺悟)이라고 했다. ‘배움’을 뜻하는 ‘學’은 가르침과 깨달음이 몸과 맘에 ‘배게’ 하는 것이다. 동양의 글읽기는 글이 몸과 맘에 배게 하는 것이다.

생각은 역사, 사회, 우주의 얼크러진 삶의 실마리를 푸는 일이다. 우주만물은 ‘올’이고 ‘끈’이고 ‘줄’이다. 생각은 이 ‘끈’과 ‘줄’을 ‘맨 처음 말씀과 함께 계심’에 매는 일이다.(제소리. 1,908) 말씀과 함께 계신 하나님께 매어질 때 삶은 시원하게 뚫린다.


2) 신통 : 궁신지화


신을 탐구하고 인간의 바탈을 탐구해서 신과 바탈에 통해야 한다. 신과 인간과 자연에 두루 통하는 것은 말씀이다. 생각은 말씀을 사르는 것이고 말씀은 두루 통해서 한통누리를 이루게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주에 찼다. 우주가 다 하나님의 말씀이다...말이 통하고 이치가 통하고 신이 통하여 한통 누리를 이루어야 한다.”(속알. 1,861-4)

“마음이 뚫리고 앎음알이가 뚫려야 정말 속알이 엉큼 엄큼 자라게 된다.”(속알. 1,861-4) “입에 밥이 통하고 코에 공기가 통하고 귀에 말이 통하고 마음에 신이 통한다...우주와 지구를 통째로 싸고 있는 호연지기가 나다.”(속알. 1,861-4) ‘나’는 우주를 싸고 있는 호연지기이고 신은 “없이 계신 분이다.” 생각해서 호연지기와 통하고 빈탕한데 계신 신과 통하면 시원하다. 다석은 “(없이 계신) 신은 언제나 시원하다.”(밀알1. 1,817-20)고 말한다. 신에 통하면 영생에 이르고 “죽음은 없다.”(밀알1. 1,817-20)


3) 하나님에게서 오는 생각


“하느님이 성령으로 내게 건네 주는 것이 거룩한 생각이다...거룩한 참 생각은 하느님과의 연락에서 생겨난다.”(1,53-54) “하느님과 연락이 끊어지면...질컥질컥 지저분하게 사는 짐승이다.”(1,55) 하나님과 교통하며 생각의 불꽃을 피어 올릴 때 사람 구실을 한다.

참된 생각, 거룩한 생각은 하나님과 연락된 것일 뿐 아니라 하나님과 뗄 수 없이 결합되어 있다. “사람이 생각하는 곳에 하느님이 계신다.(念在神在)”(1,53-54)


4. 깨어서 끝에 사는 삶


생각하는 사람은 옳고 그름에 매인 상대적인 지식을 넘어서 진리를 깨우친 사람이요, 생사를 초월해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에 통하는 사람이다. 생각하는 것은 존재와 삶의 끝에서 말 숨을 쉬는 것이다. “말숨 쉼은 영원을 사는 것이요 죽음 이후를 사는 것이다.”(신. 1,882-3) 생사를 초월한 사람은 “깬 사람이요 끝에서 사는 사람이다.” “생사를 초월하면 유무도 초월한다. 있어도 걸리지 않고 없어도 걸리지 않는다.”(말씀. 1,888) 생각하는 사람은 주체적인 자유인이다.

        

        

        


6강, “숨과 영성”

- 숨이 첨과 끝을 잇는 생명줄이며 ‘나’와 하늘을 잇는 영의 줄이다. -


                                 



다석사상을 신학적으로 새김


다석사상에서 가장 중요하게 쓰이는 말이 ‘솟아 올라간다’, ‘불사른다’, ‘가온찍기’, ‘끝’인데 모두 기독교적인 말이다. 위로 하나님께 솟아오른다는 것은 유불선 삼교에는 나오지 않는 말이다. ‘불사른다’는 말은 기독교 , 성서의 말이다. 몸을 산 제물로 드린다고 할 때, 번제물, 희생제물로 드림이고 불태우는 것이다. 가온찍기는 하나님을 삶의 중심인 하나님, 역사의 중심인 그리스도를 찍고 붙잡는 일이다. 끝은 기독교의 말이다. 유교에서는 끝, 마지막을 좋게 안 본다. 이단, 말단하면 좋지 않다. 불교에서도 끝, 경계는 넘어서야 할 것, 없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끝, 경계는 인간의 실존과 하나님의 바깥, 초월을 뜻하고 존중되고 지켜져야 할 것이다. 생각은 끝에 서는 것인데 끝은 그리스도 안에서 종말, 마지막을 뜻한다. 존재의 끝은 그리스도, 십자가(죽음)이고 끝에 서서 말씀과 영의 숨을 쉬는 것은 기도이다. 삶의 끝은 죽음이고 율법의 마침은 그리스도이다. 죽음의 자리 십자가에서 새 삶이 시작된다. 다석은 특별히 기독교를 내세우지 않으나 깊이 들어갈수록 기독교신앙의 색채가 드러난다.


마음이 놓여야 생각이 나고 잘 통하고 말숨이 잘 쉬어진다.

마음이 놓이려면 몸이 성해야 하는데 몸이 성하려면 숨을 잘 쉬어야 한다.


1. 몸과  : 척주는 율려  거믄고


1) 건강한 육체는 건강한 정신을 낳는 모체

다석은 평생 몸을 깨끗이 하고 몸에 기운이 가득 차도록 힘썼다. 몸과 영혼을 이원론적으로 구별하는 금욕적인 경향을 보이면서도 몸을 적극적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몸 세포의 각성에 전체 인격이 구성되고 “건강한 육체는 건강한 정신을 낳는 모체”라는 말에서 몸의 중요성은 최대로 강조된다. 다석은 사백조 세포들 위에 정신적 인격이 있듯이, 억조창생, 우주만물이 뭉친 우주 위에는 하나의 영원한 인격이 있다고 믿는다.(깨끗. 1,753-6)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이 흙을 빚어 몸을 지으시고 코에 하나님의 숨을 불어넣어 사람을 지으셨다고 함으로써 몸(흙)과 숨(하늘기운)을 긴밀히 결합시켰다. 창세기의 인간 창조설화는 생태학적 깊이를 지니고 있다. 성만찬에서 예수의 살과 피는 건강한 인격과 영혼을 낳는다. 기독교에서는 몸과 영, 몸과 말씀이 일치된다.

다석도 몸과 道를 일치시켰다. 그는 도(道)를 “...흙으로 빚고 코로 숨쉬는 것”으로 갈파했다. “배고프면 먹어 흙을 빚고 고단하면 자고 코로 숨쉰다.”(1, 852)



2) 척주는 율려,  거문고

다석은 “脊柱는 律呂,  거믄고”(1955, 4.27)라고 했다. 율려(律呂)는 풍류, 음악을 뜻한다. 율은 음의 조율(tuning)을 뜻하고 려는 풍류를 뜻한다.

다석은 척주를 율려라고 함으로써 몸을 음악의 기본으로 보고 을 거문고라고 함으로써 맘을 악기로 보았다. 몸과 마음의 예술적 일치를 말한 것이다. 몸과 마음의 중심을 척주로 보고 척주가 곧고 바르게 조율이 될 때 마음에서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있다.


2. 숨 : 消息


1) 숨은 생명의 풀무질

다석은 숨을 산화작용으로 생명의 불꽃을 일으키는 풀무질로 본다. “숨쉰다는 것은 산화작용을 한다는 것이다. 사람은 산화작용을 하는 생명이야...생명의 불꽃을 일으킨다.”(1,745-8) 숨은 개인의 몸의 생리작용만이 아니라 우주적이고 영적인 생명원리이다. “몸이 숨을 쉬듯이 우주도 숨을 쉰다. 성신도 숨을 쉰다. 성신의 숨쉼이 말씀이다.”(1,825-8)

다석은 숨을 인간생활의 핵심으로 보았다. 그는 숨을 消息으로 설명했다. “消息, 氣息, 숨은 인간생활의 핵심이다. 자는 鼻의 本자요 心은 염통이니 코와 염통을 대어놓은 형상으로 숨쉰다는 息자를 이룬 것도 묘하고...”(소식 성서조선 154호. 1,642 )

소식은 “생활동정 그것만이 아니고 한 생활동정이 다른데 영향하는 것”이다. 한 사람이 날마다 하늘 뜻을 받들어 살면 다시 말해 “바른 생활동정을 하면 그것이 自個生活에만 끊칠리 없고 반듯이 他衆에 영향하니 이 곧 소식이 소문이오 통신”(소식. 1,642)이라고 한다. 생활동정의 핵심은 숨쉬는 일이고 숨을 편안히 깊게 잘 쉬면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2) 精力과 氣와 神

다석은 정력(精力)을 바꾸어 단(丹)을 이룬다는 도교의 가르침을 받아들인다. “도교에서는 精氣神이라 하여 정에서 기운이 나오고 기운에서 신이 나온다고 생각했다.”(남녀. 1,865-8)

다석은 여러 가지 장생법과 양생법을 실험해 보고 나서 “몸과 마음을 곧게 하는 것밖에 없다”고 결론을 내린다. “입 다물고 몸과 마음을 곧게 하면 숨이 저절로 깊어지고 숨이 깊고 고르면 몸과 마음이 성하다.”(진2. 41)


3) 삶을 위한 살림

다석은 삶과 살림을 구별한다. “삶은 숨이 위주요 살림(집, 솥)은 먹는 게 위주다. 삶은 하늘이 주신 풍부함을 감사해야 한다.”(1,642-3) 다석은 “삶을 위한 살림은 가하나 살림을 위한 삶은 애초에 없는 것이다.”라고 단언한다. 살림은 지상에서 삶을 평면으로 넓고 크게 펼치자는 것이고 삶은 숨을 깊게 쉼으로써 정에서 기로, 기에서 신으로 더욱 높이 솟아오르자는 것이다. “살림만 크게 하랴다가는...살림에 치어죽는다. 전에도 그랬고 후에도 그렇다. 쌀 속에 묻혀 죽는 생쥐와 같이.”(1,647) 지상에서 평면적인 살림을 끊임없이 확장하려는 사람은 살림에 치어 죽는다고 한다.

4) 숨 : 생명의 실올

다석은 숨을 생명 줄로 본다. 사람의 목숨은 맨 처음부터 이어온 생명의 실올이다. ‘바른 목숨’이란 글에서 “한바람 목숨실올을 바로 세웨지이다.”(4,89)고 말한다. 숨쉬는 일은 속알이 밝아지는 일로 그리고 하늘 나라를 찾는 일로 이어진다. 숨 줄은 내가 지금 살아가는 줄이고 살아갈 줄이다. 큰 숨이 자라 나라가 이루어진다.

다석은 숨에는 세 가지 목숨, 말숨, 우숨(웃음, 위를 쉬는 숨)이 있다고 보았다.(다1,28) 목으로 쉬는 숨, 말씀으로 쉬는 숨(소통), 위 하나님과 통하는 숨. 숨은 삶의 꼭대기(위이 없는 첫 자리)에서 한얼(절대령)과 통하고 밑이 없는 빈탕까지 채우고 남는 깊은 힘을 싣고 있다.(제소리. 1. 903)


3. 영성 : 어둠 속에 빛나는 생명


1) 얼굴 : 얼의 골짜기

“숨은 그립고 얼은 울린다...맑은 숨과 얼은 제 그ㅓ림이오, 절로 울림이어라.”(56,1,24)

숨은 영원한 생명에 대한 그리움을 품고 있고 얼은 서로 울리고 통한다. 맑은 숨과 얼은 스스로 그리워하고 저절로 울린다. “내 정신과 신이 통할 때 눈에 정기가 있고 말에 힘이 있다.”(밀알2.1,821-4) 사람의 사명은 신과 통하여 바른 기운을 가득 품고 사는 것이다.

“영혼을 드러내는 골짜기가 얼굴이다.”(사람꼴 버5. 1,721) “얼굴을 보니 그 골짜기가 한없이 깊다...소뇌, 대뇌를 넘어서 우주의 무한한 신비가 얼굴 뒤로 연결되어 있다.”(722) “...별 하늘 뒤에 뒤에 천천만만의 별 하늘...그 뒤의 생각의 바다가 있고 신의 보좌가 있고 얼굴의 골짜기 한없이 깊다. 그 깊은 그윽한 곳에 얼굴의 주인인 진짜 얼이 계신 것이다....우주의 가장 깊고 깊은 성스러운 지성소 속에 튼튼하고 곧 바르게 곧이 곧게...들여 박혀 있다. 우주의 신비와 인간의 신성은 한없이 깊은 곳에 담겨져 있는 것이 인생의 본체다.”(1, 722)


2) 어둠 속에서 빛나는 영성

숨과 영은 낮보다는 밤에, 빛보다는 어둠 속에서 잘 통하고 깊어진다. 다석은 이미 32세 때 “어둠이 분명 빛보다 크다”(저녁 찬송. 1,639)고 했다. “...참으로 넓고 큰 것은 빛 없는 캄캄한 곳이다...어떤 光明이 黑暗을 쫓는 것을 보았는가? 宇宙는 호대한 흑암이다...호대한 것은 흑암이요 광체는 미미한 것이다.”(1,895)

햇빛은 물질을 밝히는 빛이므로 “대낮에 영원과 사귀겠다는 것은 허영이다...한낮의 밝음은 우주의 신비와 영혼의 속삭임을 방해하는 것이다...숨길은 밤중에야 잘 뚫린다.”(빛. 버7 1,731) 밤을 없애면 영원과의 통신이 끊어진다.

태양의 밝음은 물질의 밝음과 힘이고 세상적 영광과 힘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어둠이다. 어둠 속에 떠오르는 새로운 태양이다. 세상 힘과 영광은 햇빛에서 온다. 십자가 죽음은 햇빛 꺼지는 어둠이다. 그리스도는 깜깜한 밤에 새로 뜨는 해다. 그리스도는 욕망과 허영, 미움과 분노의 해가 꺼지고 겸허한 빈 마음에 뜨는 해이다. 그리스도는 소외되고 그늘진 곳에 뜨는 해님이다.

        

        

        

7강, “막대철학(한글주체철학)”

하늘을 머리에 이고 하늘과 땅 사이에 곧게 선사람, 하늘로 고디(곧게) 솟아오르는 사람

                                


1. 한글로 철학하기


다석에 따르면 생명과 소통하고 사귀려는 하나님의 뜻과 의지가 말 속에 이미 담겨 있다. “성경에는 천지만물이 말씀으로 지었다고 하고 말씀만이 남는다고 하였습니다. 말씀은 존재이며, 말 가운데 으뜸가는 말이 말씨입니다.”(진다2. 167) 말씀은 내 속의 속이 뚫려 하나님과 통하는 것이다. 다석에 따르면 말(言은) 우리가 하나님께 타고 갈 “말”(馬)이다.(진다2. 168-9)


우리말 갈고 닦기


다석이 찾아내거나 만들어낸 말들은 다음과 같다.


알맞이(철학), 마침보람(졸업), 알짬(精), 짓수(예술), 빈탕(허공), 살알(細胞), 환빛(榮光), 힘입(은혜), 몬(物), 고디(정조), 덛(시간), 긋(점), 속알(덕), 읊이(詩), 예(여기, 상대세계), 숨줄(생명), 다세움(民主), 외누리(독재), 사람새(人間), 가온쓸(中庸), 여름질(농사), 씨알(民), 밑일(기초공사), 굶고뱀(고학), 빛골(光州), 잎글(엽서), 잘몬(萬物), 싶뜻(욕심), 푸른나이(청년), 조히(無故), 한늘(우주), 맘줄(心經), 꼴위(形而上), 꼴아래(形而下), 엉큼(마하트마), 없귻(無極), 어둠맺이(婚姻), 같이늙(偕老), 맘아들(弟子), 여름아비(農夫)


모호한 말뜻을 살려내려 했다.


사나이(산 아이), 깨끗(끝까지 깨다), 모름지기(모름은 꼭 지키는), 더욱(더 위로), 어버이(

업을 이), 이튿날(이어트인 날), 아침(아 처음), 여덟(열에 둘 없는), 아홉(아 없는), 열(열리는), 얼굴(얼이 든 골자구니).(진다2. 179-80)


2. 한글의 구조와 철학


1) 한글은 소리글이면서 뜻글이다


다석은 한글이 소리글자일 뿐 아니라 깊은 철학원리에 따라 지어졌고 깊은 철학과 뜻을 나타내는 뜻글자로 보았다. 한글은 “우리 뜻을 낸 소리로 쓴 우리글씨”이고, 뜻을 나타낸 소리이면서 바른 소리를 그대로 쓰면 글씨가 된다. 우리의 뜻과 소리를 나타내는 한글을 쓰면 “우리 속”이 “솟는”다.(진다2. 173)



2) 하늘과 땅과 사람을 나타내는 한글의 원리


세종임금이 한글을 지을 때 자연의 원리에 입각하여 만들었기 때문에 모음·자음이 그 나름대로 뜻을 가지고 있다. 한글의 자음은 입(목구멍·입천장·혀·입술·이)의 모양을 본떠 만들고 음의 강도에 따라 삼단계화하였다. 한글의 모음은 (天)ㅡ(地) ㅣ(人)을 으뜸으로 하여 만들었다. 한글 모음의 으뜸 모음인 를 안 쓰게 된 것은 잘못이라고 했다.(진다2. 176)


하늘과 땅을 나타내는 ㄱ과 ㄴ


다석은 한글 자음 ㄱ 과 ㄴ이 지닌 깊은 뜻을 밝혔다. 글이란 “天地, 人事, 萬有를 실어내고 그려내려는 말씀을 거듭 그리는” 것이다.(제소리.1, 905-6) “머리가 하늘을 어르는 어름을 그어 가지고 북(北) 곧 배후를 방어하는 금을 긋게 되는 것이 自然이다. 우리 머리 두는 데가 ㄱ 되는 수밖에 없다.”(제소리.1, 905-6) 다석에 따르면 ㄱ꼴은 “天生 그늘! 그윽함을 사람의 거처의 상부곡선을 표시한다.”(제소리.1, 905-6)

또한 ㄴ은 “아래턱 안바닥으로 가라앉은 혓바닥의 꼴을 그린 것”을 나타내고, “발바닥이 땅바닥을 디딘 선”을 나타낸다. 사람은 “크나 적으나 땅에 닿는 데다 ㄴ 비슷한 기구를 쓰는” 존재이기 때문에 “ㄴ이 둘째 자리에 간 것이다.”(제소리.1, 905-6)


하늘과 사람과 땅 :  ㅣㅡ


는 우리말의 원음을 나타내며 “ㅡㅏㅗㅡ가 합동한 근원적 소리”이다. “말소리 밋동은 모음, 밋동의 밋동은 · ㅡ ㅣ 셋. 셋의 밑은 이다.”(55.10,17) 다석은 가 모든 것이 하늘(天)에 근원을 두고 하늘에서 시작하고 하늘로 돌아가는 원만을 나타낸다고 보았다. 하늘은 모든 것의 처음이고 원만이므로 한 점 으로 나타낸다는 것이다. ㅇ은 “하늘에 대하여 아들된 우리의 發展大圓滿을 그려” 보이는 子音이다.

ㅡ는 “우리 눈 앞에 벌어진 平地 곧 世上을 보이며, 동시에 으音을 낼 때는 조금 틈만 벌린 입의 꼴 그대로도 된 것”이다. 다석에 따르면 “문명민의 글 가운데 ㅡ음을 기록한 것은 우리밖에 없다.”(55.10,17)

ㅣ(이)는 “最近稱, 꼴은 사람이 꼿꼿이 선 꼴을 法받은 것이다.” 이는 “그이 저이 福男이, 광주리, 빨강이, 人稱, 物稱, 名形格을 보이는 소리로 世界的이다. 漢語로는 伊, 일어로는 ㅅ...英語國民은 ㅣ를 보고...自我라 한다.”(제소리. 1,906)  ‘ㅣ’의 “正(바른) 끗은 י (요드) 끗, 發芽의 끗, 사람의 의식의 끗, 最初一念인 끗, 誠意, 차라리 母意이다.”(1,906)


3. ㅣ: 막대 철학


1) 막대 철학이란?


다석의 막대기(ㅣ) 철학은 성서조선이 폐간된 뒤에 얻어진 것이다. 짐작하건대 1943년 2월 5일 북악산 마루에서 천지인(천지인) 합일(합일)의 체험에서 얻어진 것으로 생각된다.(진다2. 143) 이 신앙체험은 하나님체험이며 기독교, 예수 그리스도에게 돌아오는 체험이었다. 다석의 신앙체험이 기독교 신앙체험이면서 주체적인 한글철학, 막대기철학으로 나타난 것은 매우 깊은 뜻을 담고 있다.

막대기 ㅣ(사람)는 하늘과 땅을 ‘곧게 잇는’ 몸과 정신을 나타내고, ‘하늘을 머리에 인’ 존재이며, 처음(태초)과 끝(종말)을 ‘잇는’ 존재이다.

2) 끗 字의 숨결


다석에 따르면 ‘나’는 영원한 생명의 한 끝점, ‘긋’이다. 긋에 대한 다석의 글자 풀이는 의미가 깊다. ‘긋’에서 “ㄱ은 하늘, ㅡ는 이 세상 ㅅ은 생기를 뜻한다. 영원한 하늘과 무한한 땅과 신비한 생명이 하나가 된 것이 긋이다. 영원한 시간이 공간으로 잘려서 산 막대기가 된 것이 나 인생이다.”(깨끗. 1, 753-6) 사람은 “죽어도 죽지 않는 영원한 연결된 긋을 가지고 있다.”(깨끗. 1, 753-6)


3) 막대기처럼 곧게


다석은 막대기처럼 곧게 하늘로 오르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고 천명이라고 본다. 다석은 인간의 “천성은 원래 直이므로 直으로만 가면 영생할 것”이라면서 “나는 性直設을 내세우고 싶다.”(최원극, “유영모 스승” 1954, 1,3 말1, 900)고 한다. 글과 진리는 통해야 하는데 “통하는 것이 고디(貞)다.”라고 했다. “화살처럼 정직해야 뚫고 나갈 수 있다...고디만이 하나님과 통할 수 있다.”(말씀.1,885-8)다.

‘우리’는 “우를 이는 것”(1, 840)이라 했다. 사람은 “아래에 있으면서 하늘 위를 생각한다. 우를 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이’이다...‘우’를 이는 것이 ‘우리’이다.”(1,837-40) ‘더욱’은 “더 우로!”가 된다.(1,837-40)

위로 오르려면 몸이나 마음이 막대기처럼 꼿꼿이 서야 한다. “마음은 놓고 몸은 꼿꼿이 이것이 참선이다. 내 마음은 고은 재와 같이 가라앉히고 내 몸은 막대기처럼 꼿꼿이 세워야 한다.”(깨끗. 1,841-4) 그러나 마음이 막대기처럼 꼿꼿이 서야 몸이 위로 일어설 수 있다. “몸은 몬으로 된 꺼풀이기에 내버려두면 묽어지고 썩어지고 주저앉는다. 막대기처럼 일으켜 세워야 한다. 무슨 막대기인가. 정신이란 막대기다. 정신이 강하면 몸은 일어선다.”(깨끗. 1,841-4)

막대기처럼 꼿꼿이 선 정신과 육체가 건강한 것이고 건강한 정신과 육체는 ‘깨끗하다’.(깨끗. 1, 753-6) ‘정고’(貞固)란 글에서 다석은 “생리와 심리는 장엄하고 오묘하다”(生理心理 莊嚴奧妙)면서 “음란하고 더러운 생활은 늑막염과 폐병을 일으켜 몸을 망가뜨리고”(淫亂褻瀆 肋肺祝融), “곧고 깨끗한 마음은 정신을 형통하게 한다”(貞固淸幹 情神亨通)고 했다.(다일. 1,311-12)


4. 한글과 십자가의 만남


한글의 기본모음은 ㅡ ㅣ 는 예수의 십자가 나무 막대기를 나타내고 (하늘)와 ㅡ(땅)을 잇는 나무 막대기 ㅣ(정신)는 겨레의 뿌리인 단군, 다시 말해 나무 등걸과 ‘둥글’ 나무(朴)를 나타낸다. 막대기는 세상을 뚫고 솟아오르는 십자가와 겨레의 얼과 뿌리를 나타낸다.

십자가의 곧음(기독교)과 나무의 동글암(겨레 얼)이 결합되었다.

        

        

        

8강, “예수 그리스도”

- 예수를 따라 그리스도로 살면서 그리스도를 찬미함 -


                                 


1. 한국 · 아시아적 예수 이해


스리랑카의 뛰어난 신학자 알로이스 피어리스(1934-)에 따르면 아시아에서는 서구의 전통적인 선교방식이 성공할 수 없다. 비그리스도교 영성에 참여하는 수행모델이 아시아에서는 옳다. 유영모는 피어리스가 말하는 비그리스도교 영성에 참여하는 수행모델을 피어리스가 태어나기 전부터 추구하고 아시아적 영성의 기독교를 형성했다.

요한신학의 특성은 아시아의 영성과 서로 통한다. 요한복음은 사랑, 일치, 공동체에 초점을 두었다. 나와 그리스도와 하나님과 이웃의 일치와 사귐을 강조했다. 또한 지금 여기의 삶을 강조했고 앎과 믿음과 행함의 일치를 말했다. 매우 영성적이고 실천적이므로 아시아의 영성과 통할 수 있다.

다석은 요한 8,12에서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는 빛으로 왔다. 빛을 얻어라.”고 한 말씀이 “참 적극적이다...속죄는 너무도 소극적이다.”(1,817-20)고 했다. 속죄는 십자가를 믿고 수동적으로 구원얻는 것을 말한다면 “그리스도가 빛이니 빛을 얻어라.”는 요한의 말씀은 믿는 사람이 적극적, 능동적으로 빛을 얻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2. 유영모의 신앙체험과 예수이해


다석이 18000일 되는 날에 “내게 실천력을 주는 이가 있으면 그가 곧 나의 구주시다”고 했다. “내가 예수를 따르되 실행력이 예수께로부터 친수되지 않는 限, 예수만 바라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 담긴 말이었다. 다석이 “중생한 오늘에 증거할 말슴은 ‘예수의 이름은 오늘도 진리의 성신으로 생명력을 풍성하게 내리신다.’입니다.” 다석에게는 실천력을 주는 이가 구주다. 그런데 신앙체험을 한 후 예수가 실천력을 주는 구주임을 체험했다.

인간으로서의 예수를 다석은 의중의 인물, 스승으로 삼았다. 그 점에서 석가, 공자, 노자보다 예수를 더 존중했고 예수를 스승으로 선택했다고 할 수 있다. 다석은 서슴없이 예수가 제일 좋다고 말한다. 다석에 따르면 “예수는 하나님 아버지와 父子有親(부자유친)하였다. 예수는 유교를 제치고 하나님 아버지께 유친(有親)하자 들이덤볐다. 불서(佛書)는 사고무친(四顧無親)이다.”(진다1, 395-6)

예수를 세로로 위에서 아래로 보면 “목수(木手) 요셉의 아들 예수가 서른 살에 하늘문을 세울 일을 맡었다면...(예수의 몸은) 묵은 꺼풀인망정 밀알같이 영근 몸이다. 사람이 거두어서 땅에 내려 묻었더니 묻은지 사흘만에 새 생명의 싹이 나서 다시 살아났다면...곧이 들을까? 이것이 한나신 아들로 33년간에 이룬 성역(聖役)! 새 천지의 개벽은 이로 좇아 시작이다. 그 뒤로 인간은 천문(天門)으로 통하게 되었다.”(유일1, 664)

다석은 “우(하나님)에서 오는 성령이 믿음을 일으킨다”(진다1,399)고 했다. 성령이 믿음을 창조한다는 것은 복음주의 신학을 내세우는 칼빈의 주장과 일치한다.

다석은 서슴없이 예수를 ‘우리 님’이라 하고 ‘한나신 아들’(독생자)이라고도 한다. 더 나아가서 예수를 ‘한우임’이라고도 한다. “오 예수여 내 에 한우임 그리스트.” 내 마음에서 하나님의 자리에서 볼 때 예수는 ‘한우임’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독생자이고 하나님을 온전히 드러낸 분이며 ‘내 마음’에서는 ‘한우임’, ‘한우를 인 분’이다. 다석에게서 ‘임’과 ‘님’이 통하고 아들과 아버지를 일치된다는 점에서 보면 예수는 ‘한우님’이다. 예수는 그리스트이고 ‘임’(主)이신 그리스트는 ‘늘 삶’이다.


3. 속죄론 이해


십자가 속죄신앙도 나의 삶과 유리된 것이라면 객관적, 주술적인 미신이 되고 만다. 나는 가만있고 예수의 피흘림을 믿으면 된다는 것은 미신이라는 것이다. 다석과 함석헌이 속죄교리를 부정했다고 해서 정통신앙인과 무교회교인들에게 비난을 받았다.

다석이나 함석헌이 십자가에서 예수가 의로운 피를 흘린 것이 지닌 의미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을 개별적 자아로 본 서구자유주의신학자들처럼 오늘의 ‘나’와 2천년 전의 ‘예수’ 사이에 만남이 없다고 보지 않았다. 오히려 다석은 ‘나’가 개별적 자아를 넘어서 하나님, 이웃, 우주전체의 생명과 하나되고 상통한다고 보았다. 영원한 나, 신적인 나는 십자가의 그리스도와 일치된 나이고 우주전체의 생명과 하나된 나이다.

그러므로 다석은 십자가에서 흘린 예수의 피는 말할 것도 없고 모든 의인의 피가 속죄의 능력이 있다고 보았다. “의인의 피는 다 꽃의 피요, 그리스도의 피다. 아무리 악한 세상도 이 피로 씻으면 정결케 된다.”(1, 827)

다석의 십자가 신앙은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속죄교리가 아니라 개방적이고 참여적인 속죄교리를 가지고 있다. 개방적이라는 것은 2천년 전에 흘린 예수의 피만이 아니라 모든 의인의 피가 그리스도의 피와 함께 또는 그리스도의 피 안에서 속죄와 속량의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참여적이라는 것은 제삼자로서 객관적으로 바깥에 있는 예수를 피를 믿으면 구원받는 게 아니라 예수의 십자가 고난과 죽음, 피흘림에 예수의 존재와 삶에 참여함으로써 속죄의 사건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믿는 사람이 실존적으로 참여하지 않으면 예수의 피는 믿는 사람에게 효과가 없다는 것이다.


4. 우리 님 예수 : 예수와 함께 예수를 찬미하며 예수의 길을 감


다석도 예수를 믿는다. 다석이 예수를 믿는 것은 예수를 나와는 다른 존재로 신격화 우상화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죽지 않는 생명임을 알기 위해서 믿는 것이다. 내가 하늘에서 온 씨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예수도 씨요 나도 씨다. 예수가 처음 익은 열매요 나도 익은 열매가 되어야 한다.” 다석은 이렇게 말한다: “예수를 믿고 하나님을 믿고 나를 믿어야 한다. 나를 믿는 것이 예수를 믿는 것이다.” 다석에게는 예수 믿는 것이 결국 나의 문제가 된다. 다석에게 나의 문제는 하나님의 문제이기도 하다. 여기서 다석은 주체의 문제로 돌아간다. “나는 생각의 주체고 하나님은 생명의 주체다. 나, 예수, 하나님은...보이지 않는 주체다...주체이기 때문에 절대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생각하는 것이 있다는 증거다...내가 있으면 신도 있고 예수도 있다.”(1, 825-8)

다석에게 그리스도 예수는 결코 인간적인 타자로 머물지 않는다. 역사적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 예수는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 자신과 일치된다. 다석이 “우리의 몸도 하나님이 먹이시고 길러주시기 때문에 있는 것뿐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창조된 작품이다...”(맙. 1,857-60)라고 말할 때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 아버지와 일치시켜서 보고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본 것이다.

여기서 다석이 예수를 역사적으로 신체적으로 제약된 존재로 볼 때 한 말과 예수를 하나님과 일치되는 자리에서 보고 말한 것은 전혀 다르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 님: 예수’라는 말을 자주 한 것은 예수를 인격적으로 가깝게 느끼고 ‘나’, 예수, 하나님의 인격적 일치를 추구한 것으로 보인다.

다석의 말이 충격적으로 들리기도 하지만 따지고 보면 기독교신앙의 기본틀을 거부하거나 배격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한국적인 정신문화의 바탕에서 창조적으로 확대하고 심화시켰다고 볼 수 있다. 흔히 예수를 인성과 신성을 아울러 지닌 존재로 말하는데 다석도 예수를 인간적인 측면에서 보기도 하고 신적인 측면에서 보기도 한다. 다만 다석은 ‘오늘 여기의 나’에게 초점을 두고 예수를 해석했고 나와 하나님과 자연과 이웃이 일치되고 화해되는 자리에서 예수를 보았다.

더 나아가서 다석은 예수가 오늘 내 가슴에 태어난다고 말한다. “‘기쁘다 구주 오셨네’라 하는 것은 오늘 내 가슴 속에 예수가 나셨다고 할 수 있는 자만이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란 바로 된 목숨이요 본래의 면목입니다. 그리스도란 얼의 나로 몸에 속박되지 않는 자유하는 생명입니다. 성탄이란 내가 얼의 나로 거듭나는 내 일이지 남의 일이 아닙니다. 내 가슴 속에 순간순간 그리스도가 탄생해야 합니다.”(진다1. 418)


인간의 아름다운 모습, 본연의 모습은 섬김에 있다. “하나님을 섬기고 사람은 섬기신 가장 으뜸가는 목숨은 그리스도 아닐까요? 온 인류로 하여금 그리스도로 그렇게 살도록 보이기 위해서 섬김에 섬기신 목숨, 봉사의 봉사이신 생명,...섬김 자체인 어머니처럼 하나님과 인류를 섬김을 자기의 생명으로 삼으신 섬김에 섬기신 목숨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기름, 진정으로 찬미함 긺 찬미 그리스도를 찬미하고 찬미함. 그것이 인간의 자연 아닐까? 궁신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요, 그리스도를 찬미함이 인간의 자연이리라.”(1,741-4)

예수와 함께 영원한 생명의 줄을 이어간다. “(영원한 생명의) 이 한줄기가 이어닿은 여기가 ‘예’다. ‘예’는 아들이 아버지가 되어가는 글자이다. 영원에서 상대적으로 벌어져서 몸부림치는 여기가 ‘예’이다. 바로 여기에서 이보다 더 낫을 수가 없을까 하고 능력을 찾는다. 이것이 ‘수’다. ‘수’에다 ‘ㅁ’을 더하면 ‘예수ㅁ’, 곧 ‘예’에서 ‘숨’을 찾는 것이 된다. ‘이어이 예 숨’하고 불러보면 몇 천 년 전에서 몇 천 년 후까지 툭 터서 살고 있는 것 같다. 이것이 진실한 기도 소리가 아니겠는가?”(주기도. 1,837-40)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이 세상이 잘못 되었으니 바로 잡자는 것”이며 세상을 바로 잡는 일이 구원인데 구원은 “외적 제도가 아니라 내적 일을 바로 잡는 것이다.”(밀알1. 1. 817-20)

        

        

        

9강, “유교·불교·도교의 회통”

- 유교의 부자유친(父子有親), 불교의 공사상,

                      도교의 무위자연과 양생. 빈탕 한데 맞혀 노리(與空配享) -


                                

다석은 1910년대 초반부터 기독교신앙에 기초하면서도 자유롭게 다른 종교의 경계를 넘나들며 진리와 신앙의 세계를 펼쳤다. 다석은 기독교사상을 바탕으로 유교불교선교를 회통(會通)시켰다. “예수·석가는 우리와 똑같다...유교·불교·예수교가 따로 있는 것 아니다. 오직 정신을 ‘하나’로 고동(鼓動)시키는 것뿐이다.”(다석어록. 진다2. 383)


1. 다석의 유교이해


1) 중용 풀이

다석은 “속의 속이 중(中)인데 중이 참나”라고 했다. 참나는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성령이다. 유영모가 중용을 ‘줄곧 뚫림’이라고 한 것은 성령이 예수의 말처럼 마음 속에서 생수처럼 줄곧 뿜어져 나온다는 것이다.(진다2. 194-5)

다석이 마음의 가운데가 뚫려서 하나님의 성령과 통하고 신통(神通)하는 것을 중용이라고 본 것은 중용을 기독교 신앙의 자리에서 본 것으로 파악된다. 유교가 태극(太極)과 음양(陰陽)만을 말하고 그 위의 무극(無極)을 말하지 않음으로써 인본적인 종교로 흐른 것을 다석은 비판했다.(진다1, 414)


2) 부자유친(父子有親)

다석은 땅에 있는 어버이에 대한 효보다 하느님 아버지에 대한 효가 앞서야 한다고 하였다. “유교에서는 우(上)를 받든다는 것은 부모나 조상을 받드는 것을 말한다. 예수는 우(上)를 하느님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유교가 태극에서 음양만 말하듯 그 윗자리인 무극(無極)을 잊은 것이다. 유교가 활발한 발전을 못 본 것은 우주의 근원을 잊었기 때문이다...효도뿐 아니라 천도(天道)가 망하는 것도 처자식 때문이다...하나님을 바로 아는 사람이라야 땅의 부모에게도 최선의 효를 할 수 있다.”(진다1, 414) 다석은 유교의 부자유친을 기독교신앙의 말로 바꾸었다. 하나님 아버지를 받들어 모심으로써 가족주의를 넘어서서 온 인류가 평등하고 하나되는 길이 열린다.


3) 격물치지(格物致知): 안과 밖의 완성

격물치지(格物致知)는 ‘대학(大學)’의 8조목 가운데 처음 두 조목이다. 정이천과 주희는 격물을 이치에 대한 탐구로 보고 왕양명은 마음의 뜻과 생각을 바로 잡는 것으로 보았다. 격물에 대한 논의에서 전자가 사물과 인간본성의 이치를 탐구하고 후자가 사람의 마음을 바로 잡는 것에 힘썼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반해 다석은 사물과 타인과 자기를 완성시키는 것으로 격물을 이해했다. 격물치지(格物致知)에 대해서 “진리를 파악해서 생명을 완성시킨다. 물성을 알아서 그것을 온전히 이루도록 하는 것이다...물건을 완성시켜야 나도 완성된다.”고 했다.(여오. 1,831)

온갖 시비판단을 넘어서서 물성과 인간을 완성시키는 일은 “나쁘게 가는 마음을 참고 어질게 가는 마음을 살려 모두를 잘 살게 하자”는 신의 마음에 이르러야 한다. 오직 하나님께 가야 편견을 넘어서고 만물을 살릴 수 있다.


2. 다석의 불교이해


1) 마음과 삼독(三毒)

선불교에서는 흔히 마음이 곧 부처라고 한다. 유영모는 이렇게 말했다. “마음이라는 것은 어떠한 의미로서는 영원한 생명인 얼을 대표할 수 있다. 그러나 마음이라는 것은 그대로는 안 된다...마음도 멸거(滅去)하여야 한다. 그러한 뒤에 즉진(卽眞)하여야 한다...여러가지 말을 해서도...참에 도달하지 않으면 아무짝에도 못 쓴다.”(진다1, 409)

유영모는 52세 때 새롭게 신앙체험을 할 때 자기 마음 속에서 말씀의 생수가 터져 나오는 것을 경험하였다. “...이 나란 맘을 이 만물보다 거짓된 나란 맘을 뿌리째 뽑아주옵소서 그리되오면 그 뿌리뽑힌 속의 속에서 용솟음쳐 나오는 산물(生水)이 강이 되어 흐를 줄 믿습나이다.”(성서조선 158호 1942년 3월호) “이 만물보다 거짓된 나란 맘”은 삼독이 뿌리박힌 맘이고 삼독(에 물든 맘)의 뿌리가 뽑힌 “속의 속에서 용솟음쳐 나오는 산물(生水)이 강이 되어 흐른다”는 것은 기독교적인 표현이다. 


2) 아름답고 깨끗한 빔(空)

석가의 가르침을 따라서 다석은 만물을 빔(空)으로 보았다. “허공이 참이다.” “허공(虛空)의 공상(空相)은 장엄하다. 이 우주...만물이 전부 동원해서 겨우 허공의 존재를 드러내고 있다.”(진다2. 199) “우주만물이 허공을 드러낸다고 하지만 만물을 있게 하고 만물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것은 허공이다. “우리가 꽃을 볼 때 보통 꽃 테두리 안의 꽃만 보지 꽃 테두리 겉인 허공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꽃을 있게 하는 것은 허공이다.”(진다2. 199) “꽃이 아름답다고 하지만 꽃의 아름다운 윤곽을 드러내 주는 것은 허공뿐이다.”(지건. 1,808)

“허공은 깨끗하고 아름답다.”(진다2. 328) 허공을 알고 허공을 존중하여 품고 살 때만 아름답고 깨끗한 삶을 살 수 있다. 따라서 허공을 멸시하면 자기를 멸시하는 것이고 자기가 허공임을 증명하는 것이다.(지건. 1,808)


3) 허공은 하나님의 마음

유영모는 허공을 ‘하나님의 마음’이라 했고 신령한 허공을 하나님이라 생각하였다.(진다2. 199) 다석은 “...허공이야말로 가장 다정(多情)한 것으로 느껴진다.”고 했다. 다석은 공을 참된 실재, 진리로 보고 공을 친밀하고 다정하게 느낀다고 했다. 더 나아가서 다석은 ‘빔’을 최고로 높고 밝고 거룩한 것으로 보았다. “빔처럼 높고, 밝고, 거룩한 것은 없다.”(진다2. 328) 최고로 높고 밝고 거룩한 존재는 하나님밖에 없다.  

허공은 만물을 엄마처럼 친근하게 감싸주는 마음이다. 다석은 “색계는 잡다하나 허공은 단일하다”(單一虛空色界雜)면서 “하나님의 마음이 있다면 아마 그건 허공일 것”이라고 생각한다.(1,895-6) 다석은 하나님의 마음과 계시인 단일허공, 대허공과의 일치를 추구한다. “언제나 속(마음)은 곧게 밖(몸)은 바르게 이것이 허공과 하나되는 비결이다.”(지건. 1,808) 허공과 하나되어 “지건대축(至健大畜)[하늘에 머물러 크게 쌓음)할 수 있는 사람만이 공색일여할 수 있다.”(지건. 1,808)


3. 다석의 도교이해


1) 몸을 닦은 들사람

‘빈탕한데’, 대자연 속에서 살려 했던 다석은 몸을 닦고 길러서 신선의 풍모를 얻었으나 몸을 가지고 장생불사하려는 도교의 경향을 비판했다. 노자는 “물체란 한창이면 늙는다. 이것은 도가 아니다.”(物壯則老--노자 30장)라고 말했다. 몸과 마음을 곧게 닦아서 “몸에 기름이 가득 차고 마음에 심지가 꼿꼿하고 정신에 지혜가 빛난다.”(몸성히, 맘놓이, 뜻태우. 1, 797-800)


2) 무극(無極): 없이 계신 하나님

다석은 하나님을 ‘없이 계신 분’으로 이해했다. 없이 계신 하나님은 유와 무를 종합한 전체로서의 하나님이다. “유무를 합쳐 신을 만들고(固有虛無一合神), 천지유무를 통하는 것이 신통이다. 신은 하나이다.”(1,829-32) 전체로서의 하나님의 자리는 온갖 시비를 넘어서서 하나됨에 이르는 자리이다. “시시비비 따지는 것은 내가 지은 망령이요...하나님을 믿고 만족하면 일체의 문제가 그치고 만다. 시비의 끄트머리는 철인의 경지에 가야 끝이 나고 알고 모르는 것은 유일신에 가야 넘어서게 된다.”(1,829-32)


3) 대로, 절로 되게(無爲自然)

자연(自然)은 되어가는(변화하는) 것이다.  다석은 자연의 생명원리에 따르는 것을 ‘맘대로 하고’, ‘몸대로 되게’라 하고 이것을 몸과 마음의 자유로운 경지로 본다.(하게 되게. 1,809)

다석은 이것을 ‘절로, 제절로’의 이치이고 길이라고 한다. 이것이 뭇 생명과 사물이 제 본성에 따르고 제 바탈(本性)을 실현하는 진리의 길이다.(하게 되게. 1,810) 이것은 내 마음이 자유로운 주체가 되어 물성과 생명이 완성되도록 섬기는 길이다.


4. 회통의 사상적 근거


서로 다른 종교사상들을 하나로 꿰뚫고 통전시킬 수 있었던 것은 서로 다른 것들을 일치시키고 동화시키는 한사상의 원리, 한민족의 정신문화적 경향과 원리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유교·불교·도교·기독교를 종합하는 뼈대는 기독교의 하나님 신앙이다. 하나님 신앙이 유불도를 꿰뚫고 있다. 부자유친을 하나님관계로 보고, 허공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보고, 유와 무, 태극과 무극의 전체와 통합을 하나님으로 보았다.

        

        

        

10강, “귀일사상”

- 하나, 하나님께 돌아가기. 모든 것을 하나로 꿰뚫는 한국적 종합사상 -



1. 서로 다름과 하나됨


지구화시대의 가장 큰 문제는 서로 다름을 인정하면서 어떻게 공존·공생하는가에 있다. 지난 인류역사는 타자에 대한 정복과 폭력의 역사였다. 죄는 타자(의 경계)에 대한 두려움, 분노, 미움을 품는다.

한국·아시아인은 ‘나’가 우리 속에 해소되는 경향이 있다. ‘우리’ 속에 하나되는 경향이 두드러지지만 타자의 다름을 용납하지 못하고 ‘우리’ 안에 갇히는 경향도 있다. 다른 것에 대한 두려움이 깔려 있다.

히브리즘과 기독교는 타자인 하나님에 대한 존경과 신뢰가 있으나 다른 인종종교문화에 대한 배타성을 지니고 있다. 개체의 고유한 인격과 개성을 강조하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됨을 추구한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면서 하나되는 차원을 열고 있다.


2. 다석사상의 핵심: 귀일(歸一)


다석 사상의 핵심은 ‘하나로 돌아감’(歸一)에 있다. ‘위로 솟아오름’, ‘가온찍기’도 하나에 이름이다. 그가 늘 말하는 ‘고디 곧게’(貞)도 몸과 마음의 하나됨을 뜻한다. 위, 하늘도 하나이고 한가운데도 한 점이고 허공도 ‘없음’도 무극(無極)도 하나님도 하나이다. 다석에게 ‘빔’과 ‘없음’의 절대세계는 나뉠 수 없는 하나이다.

다석에 따르면 예수가 이루려 했던 하나님의 뜻은 “우주전체(宇宙全體)의 생명(生命)이 서로 사랑함으로 하나이 되게 하시랴는 아버지의 뜻”(요한복음 17장 22-3절)이다.(유1, 663)

다석은 한사상을 바탕으로 ‘한’을 추구했다고 본다. 1964년 12월 25일에 천부경을 옮겼다. ‘한’을 근원과 밑둥으로 보았다. 첫 귀절 一始無始一을 “한 비롯 없는 비롯 하나”로 옮겼고 끝 구절 一終無終一을 “한마침 없는 마침 하나”로 풀었다.(다일4. 497) 한문을 그대로 우리 글로 옮겼으나 ‘한’이 근원과 밑둥임을 잘 드러냈다.

삼일신고에서 집일함삼(執一含三) 회삼귀일(會三歸一)을 원리로 내세운다. “하나를 잡아서 셋을 포함하고, 셋이 만나서 하나로 돌아간다.”(한단고기. 235-6쪽) 하나와 셋의 만남과 일치는 삼위일체와 통한다. 국악인 황병기는 한국예술문화에는 “서로 다른 것들을 하나로 결합하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한’과 ‘셋’의 일치는 서로 다른 것을 회통하고 귀일시키는 경향과 원리를 품고 있다.


3. 귀일(歸一): 하나님께 돌아감


1) 하나님께 돌아가는 인생

다석에 따르면 인생과 만물은 하나로 돌아가는 것(歸一)이다. “[모든 것이] 하나로 시작해서 종당에는 하나로 돌아간다. 대종교가나 대사상가가 믿는다는 것이나 말한다는 것은 다 ‘하나’를 구하고 믿고 말한다는 것이다.”(까막눈. 1,833-36) “인간은 사랑의 대상을 찾는다...마음 그릇이 커감에 따라 자꾸 높은 님으로 바뀐다. 그 기량이 아주 크면 사랑의 대상을 영원절대인 하나님에 둔다.(1,33)

“동양에서는 음양오행을 찾다가 멸망한 것이다...유교가 발전하지 못한 것은 우주의 근원인 무극(無極)을 잊어버리고 천상(天上)을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다석어록. 명상록 330)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왔기에 언제나 하늘로 머리를 두고 언제나 하늘을 사모하며 곧이 곧장 일어서서 하늘을 그리워하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다석은 “하나님을 찾아가는 窮神은 식물의 向日性과 같이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는 인간의 본성”이라고 한다. 그리고 하나님을 찾는 이 본성 때문에 인간은 “만물을 이기고 극복하고 지배하고 살아갈 수 있다.”(1, 1,741-4)

그러나 ‘하나’님을 그리워하고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은 ‘하나’님과 통하는 나의 바탈, 뿌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생각하고 추리하여 영원에 들어가는 길은 자기의 속알을 깨치고 자기의 뿌리로 돌아가는 길밖에 없다.”(하나. 1, 757-60)


2) 하나님은 하나이다

톨스토이는 참회록에서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을 때 우주만물이 살아나고 하나님은 없다고 생각할 때 우주만물이 죽어간다.”(1,30)고 했다. 하나님을 믿을 때 ‘나’와 우주만물이 이어지고 생동하는 관계 속에 있게 된다. 다석은 ‘빔’(空)을 “맨 처음으로 생명의 근원이요, 일체의 뿌리...곧 하나님”이라 하고 인격적인 하나님을 “유무를 초월”한 “맨 처음 일체”(진2. 86)로 보았다. 하나님은 우주 전체를 생동하게 하는 ‘하나’이며, 예배의 대상이 되는 유일한 분이다.(진다2. 138)

다석은 하나님을 ‘하나’라고 했는데 ‘하나’는 무엇인가? 주관과 객관이 분리되는 이성적 인식으로는 ‘하나’는 인식될 수 없고 설명될 수 없다. “하나(一)는 아무 것도 알 수 없는 영원한 신비다.”(명상록 328) “(‘하나’인) 절대에서는 있다 없다가 무엇인지 우리는 생각할 수가 없다...상대적 유도 상대적 무도 아닌 것이 不二다.” 나뉠 수 없는 ‘하나’, 곧 둘이 아닌 ‘하나’는 물건이 아니므로 소유할 수 없다. 그래서 다석은 “둘이 아니면 가질 수 없다.”고 한다. “물건에 만족을 느끼면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까막눈. 1,833-36)

다석은 허무를 무극(無極)으로 고유(固有)를 태극(太極)으로 보고 태극과 무극은 하나이고 하나는 하나님이라고 한다.(진다2. 371-2) 다석이 하나님을 하나라고 할 때 그것은 관념적인 서술이 아니다. ‘하나’로서의 하나님은 인격적이고 주체적인 존재이며 그 하나의 실재는 ‘사랑’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에서 터져 나온 것이 하늘과 땅이다.”라고 했다.

그러나 ‘하나’인 하나님은 상대적 물질의 세계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모른다. 세상을 미워하는 사람에게만 하나님이 걸어온다.”(하나. 1, 757-60) 그러므로 하나님은 세상에서는 ‘없는’ 분이다. 그러나 절대, 사랑, 믿음의 세계에서는 ‘계신’ 분이다. 따라서 다석은  하나님을 ‘없이 계신 분’이라고 한다.(진다2, 372)

없이 계신 하나님과 통하는 길은 ‘고디’뿐이다.(말씀. 1,887) 고디는 하나됨에서 나온다. 마음의 통일, 온전함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하나됨’으로써만 ‘하나’에 이른다.


4. 통일(統一): 하나님 안에서 하나됨


1) 통일은 하나님의 일이다

다석은 통일을 하나님의 일로 보고 사람이 통일을 말하는 것을 싫어했다. 사람은 오직 하나님께 돌아갈 뿐이라는 것이다. 사람의 일은 귀일(歸一)이다. “나는 통일은 싫어한다. 통일은 되는 게 아니다.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귀일(歸一)이라야 한다.”(다석어록. 진다2, 393) 통일은 하나님이 이루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로 돌아가는 귀일을 할 뿐이다. 귀일은 타자에 대한 존중을 전제한다.

사람이 ‘하나’이신 하나님께 귀일하면 하나님이 인간 사이에 통일을 이루어 주신다. ‘하나’는 삶의 밑둥이므로 하나로 돌아가면 살 수 있다. 삶의 “큰 밑둥”인 “하나(壹)에서 살리심을 받자와, 내가 살고(알고), 남이 살고(알고), 여럿이 살고, 아는 것”이다. 여러 사람이 저마다 제 머리를 위로 받들고 올라갈 생각을 가지고 살 때 서로 다른 타자들이 “곧잘들 나남없이 살게” 된다.

상대세계의 물질에 집착하고 향락하면서 땅 위를 기면, 혼란에 빠져 멸망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을 향해 위로 솟아오를 때 열리는 하늘나라는 “...곧디를 가진 사람들의 나라다. 그것은 하나로 통일된 한데나라다.” 하나이신 하나님을 향해 올라갈 때 남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고 남과 하나될 수 있다. 서로의 삶과 존재에 참여하여 “아픔과 쓴맛을 같이 맛볼 때에만 나와 남 사이를 가로막는 산과 골짜기를 넘어서서 온 세상에 넘치고 넘치는 늠실늠실 춤을 추는 꿈을 이룰 수가 있을 것이다.”(속알. 1,861-4)

하나님 안에서 깨어나면 천국이다. 다석은 하나님의 품을 ‘그늘’이라고 한다. “그 품 속에 앉아 주는 것이 그느름이요 이것이 統治다...그늘에는 금이 없다. 갈라짐...싸움이 없다. 제그늘은 자기가 통치하는 자유의 왕국이다.”(깨끗. 1,841-4) 하나님의 품인 그늘을 또 이렇게 말한다: “절대세계에는 분열이 없고 문제가 없고 조건이 없다. 거기는 영원한 평화만이 깃들이는 그늘이요 완전과 성숙이 영그는 영원한 그늘이다.”(깨끗. 1,841-4)


2) 하나를 품은 삶

다석은 ‘득일’(得一)이라는 한시에서 “다른 게 없어 하나(전체)를 붙잡아 하느님 속으로”(무타(無他得日大我中)이라고 했다.(명상록 381) 하나는 전체이며 중심이어서 하나를 잃으면 어지럽고 혼란스럽다. 하나를 잡으면 삶에 중심이 생기고 서로 통하고 힘이 생긴다.

반탕한데는 절대의 세계, 절대무(絶對無)이며, 절대무는 ‘깨끗이’다. 그러나 부분무(部分無)는 ‘덜 없다’(더럽다).(제소리) 절대적인 빔과 없음에서만 깨끗한 ‘하나’, 하나님을 만나고 볼 수 있다. 절대의 빔과 없음을 맘에 지니면 상대적 존재도 알차게 된다.(명상록 326)

자기를 비우고 깨뜨린 ‘빔’과 ‘없음’에서 ‘하나’가 드러나고 이 ‘하나’가 진리이다. ‘하나’만 꽉 붙들면 무서울 것은 저절로 없어진다.”(진리파지 버 16 1, 765-8) 빔과 없음의 ‘하나’를 잡은 사람은 욕심이 없고, “정말 욕심이 없으면 생사도 넘어설 수가 있다...생사를 초월하면...자유요 진리요 사랑이요 무한이요 믿음이다.”(속알. 1,861-4)

‘하나’를 본 사람은 ‘나와 너’의 일치, 하나님과 나의 일치에 이른다. 그러므로 ‘하나’이신 하나님을 보는 것은 모든 것을 그만 두는 때요, 모든 것을 그만 두고 쓰러지는 때는 “제 눈 제 보기”(56. 3,2)다. 제 눈으로 제 눈을 보고 하나님을 보면 “하나님과 하나가 될 수 있는 내”가 된다. 그리고 “내 정신과 신이 통할 때 눈에 정기가 있고 말에 힘이 있다.”(밀알2. 1,8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