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유영모 선생님
제소리 - 다석 류영모 강의록
김흥호, 솔출판사, 2001
내가 유선생님을 처음 뵌 것은 서울역전 기독교청년회 총무 현동완씨 댁에서 모인다는 일요집회에서였다. 나는 그때 정인보 선생이 주관하는 국민대학에서 철학개론을 강의하고 있었다. 그때 국학대학에는 양주동, 방종현, 이숭녕 같은 국문학 선생들이 여러분 보였다. 나는 그때 아직 20대의 어린 나이로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도 모르고 대학 강단에 서곤 하였다. 학생들 가운데는 오십대의 나이 든 분도 있었다. 그들은 한학을 오랫동안 전공했고, 정 인보 선생을 존경하여 국학을 이룩하기 위하여 모인 분들이다. 그분들 가운데는 주역을 줄줄 따로 외우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는 동양 것을 좀 알아야겠다고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정인보 선생에게서 가끔 양명학에 관한 말씀을 들었다. 그런데 그것으로는 부족하여 춘원 이광수를 찾았다. 그분은 유영모 선생을 소개하면서 선생님은 시계 같은 분이라고 말했다. 정인보 선생께서도 유영모 선생 말씀을 하셨다. 속으로 유영모가 어떤 사람인가 하고 퍽 궁금해하던 차에, 길가에서 조영재 목사를 만나 우연히 말이 유영모 선생님에게 미치게 되자, 현동완씨 댁에서 집회를 한다고 가르쳐 주었다.
나는 용기를 내어 서울역전 철도관사로 유영모 선생님을 찾아갔다. 굵은 돋보기를 쓰고 한복을 입고 성경을 읽으시며 강의를 하셨다. 도중에 일식(日蝕)이 있어서 강의를 하시다가 멈추고 모두 마당으로 나가 보았다. 어느 날인지는 모르나 하여튼 1948년 봄 일식하는 날이었다. 다시 들어와 천문 기상에 관한 이야기도 많이 하셨다. 나는 맨 마지막까지 앉아 있다가 선생님에게 이런 질문을 하였다.
"선생님, 하나 둘 셋이 무엇입니까?"
내가 그때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 모르겠다. 아마 그때에는 그런 것을 가지고 많이 생각했던 것 같다. 그 질문에 대하여 선생님께서 무엇이라고 열심히 설명을 해주셨지만, 나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다만 무엇인가 선생님에게 끌려서 그 다음 주일에도 다시 서울역전에서 모이는 선생님 집회로 나간 것뿐이다. 이후로 한번도 빠지지 않고 쫓아다녔다. 향린원에서 있었고, 청년회에서도 있었고, 나중에는 선생님 댁에서도 있었다. 다른데서는 대개 두 시간 말씀을 하는 것이 보통이었으나 댁에서는 늘 길어지곤 하였다. 언제나 아침 7시에 시작한다. 나는 집이 신촌에 있어서 그때는 별로 탈것도 마땅치 않아, 언제나 5시에 일어나서 두 시간을 걸어가면 겨우 7시 제시간에 댈 수가 있었다. 그때는 노자익(老子翼)을 읽어갔다.
선생님은 아무것도 깔지 않고 딱딱한 온돌방에서 무릎을 굴하고 대여섯 시간씩 천연스럽게 앉아 있었다. 나는 방석을 깔고도 5분만 앉아 있으면 다리가 저려서 아무 감각도 없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래도 선생님 앞에서 굴하고 앉는 공부를 열심히 했다. 그럭저럭 나도 방석을 깔고는 몇 시간씩 앉아 있을 수 있게 되었다.
한번은 선생님과 우리 몇 사람이 북한산에 등산을 갔다. 선생님은 점심을 두개나 준비해 가지고 가셨다. 산에 올라가서 선생님은 하나도 잡숫지 않고 점심을 가져오지 않은 사람에게 나누어 주셨다. 산에서 내려 왔을 때 우리는 고단함을 견디어 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선생님께 '얼마나 힘이 드시느냐'고 했더니, 선생님 말씀이 자기는 어제도 인천에 볼 일이 있어서 걸어갔다 왔는데, 오늘 또 산에 올라왔지만 조금도 피곤한 줄을 모르겠다고 하셨다. 옆에서 듣고 섰던 함석헌 씨가 주먹을 불끈 쥐면서, ‘선생님은 어제 저녁 한끼 잡수시고도 오늘 산길을 팔팔 나는데, 나는 세끼씩 먹고 이것이 무엇이람’ 하고 무슨 결심을 하는 것같이 보였다. 그 후에 말을 들으니 함 선생이 한끼를 먹는다는 소문이 났다. 나도 한번 해볼 생각으로 한 8일간 한끼를 먹었다. 어떻게 기운이 없고 죽을 것 같은지, 세상이 샛노래서 뱅뱅 도는 것만 같았다. 나는 그만 땅에 쓰러져서 그 다음날부터는 또 세끼를 꾸역꾸역 먹었다.
그 동안에 6. 25가 터져 서로 길이 막혔다. 선생님도 인민군에게 잡혀서 총살을 당하는 줄 알고 최후를 각오하고 앉았는데 한참 있다 보니 인민군이 가버렸다고 한다. 그때 아무런 생각이 없었는데 무엇인지 손목이 자꾸 재릿 재릿 하더라고 했다. 재정 때에도 붙잡혀 간 일이 있었는데, 그때에도 아침에 일어나서 심상치 않은 것은 다 숨겨 놓았는데, 형사들이 들이닥쳐서 붙들려 갔으나 별로 문제가 되지 않고 나온 적도 있었다고 한다.
선생님은 그때까지 여러 해를 하루에 한끼씩 저녁에 식사를 하셨다. 그리고 자기 호를 다석(多夕)이라고 했다. 세끼를 합쳐서 저녁을 먹는다는 것이다.
매주 금요일 두시부터 네시나 다섯시까지 종로 청년회관에서 성경 강의가 있었다. 기독교 성경이 주였지만 유교경전, 도교, 불교, 기타 가지각색이었다. 하여튼 흰 종이에 먹으로 강의 요점을 적어서 걸어놓고 그것을 몇 시간씩 설명을 하셨다. 선생님 말씀이 너무도 괴팍해서 듣는 사람들은 몇 사람 정도에 불과하였다. 6.25후에 청년회에는 화덕도 없어서 겨울에는 냉방에서 두세 시간씩 앉아 있었다. 선생님은 언제나 무명 두루마기에 털모자를 쓰고 헝겊으로 만든 책보자기에 헌 성경책과 먹으로 적은 백로지를 가지고 오셨다.
어떤 때는 나까지 결석한 적이 있었다. 그 다음 출석하여 지난 주일은 누가 나왔었느냐고 물으면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차차 나는 내 책임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내가 결석하면 선생님이 거저 이 십리 길을 헛걸음하는 것이 아닌가. 그 후부터 나는 될 수 있는 대로 결석하지 않기로 했다.
선생님은 어떤 때는 두주일 동안 물 한 방울 밥 한술 드시지도 않고 금식하면서 청년회에 나오시기도 하였다. 선생님의 눈시울이 우묵 들어가고 선생님의 혈색이 참 좋지 않았다. 그럴 때는 선생님 사모님이 언제나 뒤를 따랐다. 선생님은 칠판에 인도의 바가밧 기타의 단식인전생심소(斷食人前生心消)라는 긴 시를 적어 놓으시고 단식 후의 자기 체험담을 세밀하게 말씀해 주셨다. 그때 앵두가 한창인데, 앵두를 먹지 않고 보기만 해도 그대로 먹는 것 같은 느낌이라고 하시기도 하였다.
나도 선생님을 따라 다닌지 근 삼년이 지난 어느날, 삼각산 보헌봉 남녹 큰 바위가 있고 폭포가 있는 곳으로 야외 예배를 갔다. 선생님은 요한복음의,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제목을 설명하셨다. 그때 나는 내 귀가 뚫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선생님의 말씀이 무엇인지 알아지기 시작하였다.
그후 나는 건강이 좋지 못하여 몇 번이고 죽을 고비를 넘겼다. 한번은 앓아서 누워있는데 선생님이 호도를 사 가지고 문병을 오셨다. 나는 병석에서 나의 불효를 깊이 아파했다. 나는 여러 가지 병이 겹쳐 내일이면 죽는다고 하는 때도 있었다. 그러나 단 한가지 나에게는 끊어지지 않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생각이었다. 나는 무엇인가 계속 생각하고 있었다. 그 후 병이 조금 회복되어 선생님 집회를 나갔지만, 이번에는 선생님이 돌아가신다고 야단들이었다. 선생님은 그전에 작별하는 강연을 여러 번 했다. 목요강좌라고 신문에 내고 해서 그때는 백여 명 청중이 모이는 때도 있었다. 하여튼 나도 그때에는 선생님의 마지막 강의를 보존하기 위하여 한 일년 속기사에게 의뢰하여 강의를 속기하기도 하였다.
선생님이 67세가 되던 4월 26일 이었다. 그 날은 선생님 댁에 오지 말라고 하여 나는 집에 있었다. 지성껏 가르쳐 주신 선생님이 오늘 세상을 떠난다고 생각하니 기가 막혔다. 나는 그동안에 선생님께 배운 것이 무엇인가 하고 생각하여 한 서너줄 적어 보았다. 4월 27일 선생님의 장례를 치르려고 터벅터벅 산길을 올라갔다. 자하문까지 걸어갔을 때 선생님이 책보를 들고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나도 아무소리 없고 선생님도 아무 말씀이 없었다. 그 날이 금요일이었던가 보다. 청년회 집회에 나오시고 있었다. 나는 청년회의 컴컴한 방에 가서 내가 적은 몇 줄을 선생님께 보여 올렸다. 선생님은 무언가 크게 긍정해 주시는 데가 있었다. 나는 4월 26일은 선생님이 죽은 날이 아니라 내가 죽은 것 같은 느낌을 가졌다.
그후 나는 결혼문제로 퍽 애를 썼다. 선생님은 말끝마다 결혼에 반대하는 태도였다. 나는 그때 심신이 극도로 허약해져 있었다. 물에 빠진 사람처럼 아무것이라도 붙잡고 싶었다. 그리고 오랜 길을 걸은 사람처럼 아무데나 들러서 좀 쉬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때 내 앞은 너무도 캄캄했다. 올라가야 할 길은 한없이 높고 나의 발은 한없이 무거웠다.
나는 선생님의 인연을 끊기로 하고 육신의 연약을 이길 수가 없어서 결혼을 하고 우선 숨을 돌려 쉬기로 하였다. 선생님에게는 알리지도 못하고 다시는 선생님의 말씀을 못들을 각오로 결혼을 할 것이다. 그러나 결혼은 했어도 생각은 끊어지질 않았다. 나는 또 다시 고군분투하였다.
그때에 내가 파고 든 것은 주역이었다. 매일 한과씩 종이 위에 그려놓고 종일 들여다보고 있었다. 어느덧 겨울도 지나갔다. 이른 봄 3월 17일 오전 9시 5분 골치가 좀 아픈 듯 하여 책도 읽혀지지 않고 잠도 오지 않았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어 나는 연필을 들고 종이 위에 무엇인가 적고 있었다.
斷斷無爲自然聲 郞心如龜兎成佛 三位復活靈一體 天圓地方中庸仁
나는 이 글을 통하여 무엇인가 보이는 것이 있었다. 나는 이글을 가만히 보관할 수가 없었다. 무엇인가 선생님께 보이고 싶었다. 그러나 선생님께 갈 수가 없다.
이날부터 나에게도 한끼가 시작된다. 우선 조반을 끊었다. 일생 조반을 못 먹을 생각을 하니 눈물이 좍 쏟아졌다. 우선 일식은 12년으로 정해졌다. 그러한 준비로 우선 아침만 끊고 점심은 계속하다가 9월 초하루부터 시작할 것을 계획하였다. 마음으로는 오늘부터 시작하는 것이지만 우선 어머니와 아내에게 너무 고통을 주지 않기 위해서 다소 여유를 둔 셈이다. 결혼한 지 석달도 못되어 한끼를 시작할 줄 알았더라면 선생님의 의견대로 결혼을 안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이미 일은 저지른 후다.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6월 5일 '대학'을 우리말로 옮겼다. 그리고 용기를 내어 선생님 댁에 찾아갔다. 그리고 아무 소리 없이 대학국역을 선생님께 드리고 돌아왔다. 6월 12일 '중용'을 다시 우리말로 옮겼다. 그것을 또 선생님께 드리려고 선생님 댁을 찾아가니 선생님은 어떤 분과 말씀 중이셨다. 얼핏 옆에서 듣노라니 선생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
"이 글은 공자님께서 번역을 하셨어도 이 이상은 할 수 없을 것 같군요."
나는 선생님 손에 든 종이를 한번 넘겨다보았다. 그것은 분명히 내가 적은 것이었다. 나는 다만 부끄럽다는 표시를 하였다. 그랬더니 선생님께서,
"이것은 김군이 하기는 하였지만 김군이 한 것이 아니요."
하고 나의 중용 국역도 받아 보셨다. 그 해 12월 12일에 나는 또 다시 글을 지어 가지고 선생님께 가서 보여드렸다. 그리고 그 다음 봄에 나의 생각을 다시 정리해서 그것을 선생님께 보였더니, 그 다음 주간에 청년회에서 내 글을 칠판에 적어 놓으시고, 이 글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글이라고 한 두어 시간 가량 풀이를 해주셨다. 나는 손에 땀을 쥐고 선생님의 말씀을 열심히 들었다. 그후 어떤 봄날 내가 선생님을 찾아서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에 선생님은 나에게 호를 하나 지어 주셨다.
그후 얼마 되지 않아 선생님이 이층에서 떨어져 수십 일을 혼수상태에 계셨다. 내가 서울대학병원에 선생님을 찾아갔을 때는 분명치 않은 의식으로 한끼 먹는 말씀을 하셨다. 의식이 회복된 후에 또 다시 강의는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같은 말을 자꾸 반복하는 것이 현저하게 드러났다. 그런데 선생님은 그것을 전혀 느끼시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어떤 때는 그전 주간에 말씀하신 것을 그대로 되풀이하실 때도 있었다. 나는 선생님에게 강의를 중단하실 것을 요구하고 나도 선생님 강의에 나가지 않았다. 그래도 선생님은 삼십년 매주 금요일이면 청년회에 오셔서 하루같이 계속하던 강의를 끊기가 섭섭하셨던지 어디서든지 요청만 있으면 계속하셨다. 한동안은 적십자사 관사에서도 몇 해를 또 강의를 계속하셨다. 나도 몇 번 찾아갔으나 역시 반복이 심했다. 그 후부터 나는 일년에 한두 번 선생님을 찾아뵙는 정도였다.
그런데 선생님의 건강이 완전히 회복된 것을 느꼈다. 이번에는 내가 다시 선생님에게 말씀해 주실 것을 요청했다. 선생님은 쾌히 허락하셨다. 매주 토요일 아침 일곱시만 되면 선생님 댁을 찾아갔다. 선생님을 처음 만날 때 나는 이십대였다. 그런데 내 나이도 벌써 오십대가 되었다. 선생님도 어언 팔십이 넘으셨다.
선생님의 하루는 새벽 몇시에 시작되는지 모른다. 한글날에는 우리나라 바른 소리를 생각하시느라고 아침 세시반부터 줄곧 깨어계셨다고 한다. 그동안 세종대왕의 훈민정음을 하늘의 계시처럼 생각하신다. 그리고 이 백성이 정말 세종대왕의 뜻을 받들어 훈민정음을 바로 깨치게 되면 이 나라의 이러한 경사는 없다고 말씀하신다.
아침이 되면 으레 냉수마찰을 하신다. 그것은 거의 일생을 계속하시는 모양이다. 옛날 정주 오산에 계실 때도 냉수마찰은 하신 듯하다. 그리고 으레 옛날 선배들이 집안에서 하는 운동체조를 하신다. 그리고 낮에는 찾아오는 분들에게 말씀을 들려주시기도 하고 또 찾아가서 말씀을 들려주기도 한다. 한해에 한번쯤은 광주를 가신다. 광주의 동광원이라는 요양소에 가셔서 한동안씩 묵으면서 말씀하신다. 서울시내에서는 어디를 가시든지 걸어가신다. 인천도 걸어 가셨다니 시내에서 걷는 것은 문제도 안된다. 그리고 저녁때가 되면 스물 네시간 만에 처음으로 저녁을 잡수신다. 나는 어느 날 저녁 잡숫는 것을 보기 위해서 일부러 저녁때 찾아갔던 일도 있었다. 밥 한 그릇에 배추 국 한그릇 그리고 한두 가지 간소한 반찬이 있었다. 고기는 어느 정도 잡수시느냐고 물었더니 일년 가야 한두 근 먹을 정도하고 하셨다. 계란도 없었고 찌개도 없었다. 정말 소식이었다.
저녁엔 몇 시에 주무시는지 나는 모른다. 청년들과 다락원이나 기타 캠프에 가면 밤새도록 이야기하시기도 한다. 그러나 한번 잠이 들면 깊은 잠을 잔다. 선생님께 가끔 꿈을 꾸느냐고 물은 일이 있다. 꿈도 별로 안꾸시는 모양이다. 하루에 몇 시간이나 주무시느냐고 물었더니, 네시간 주무신다고 하셨다. 침대는 두세치 되는 나무 판대기다. 그 위에 홑이불을 깔고 목침을 베고 누워서 잔다. 마치 칠성판에 누운 것 같다. 선생님은 잠자는 것이나 죽는 것이나 거의 같이 생각한다. 잠자는 것이 선생님에게는 죽는 일이다. 그리고 깨나면 또 다시 새날을 산다. 그런 의미에서 선생님은 언제나 하루살이다. 선생님에게는 어제도 없고, 오늘도 없고, 내일도 없다. 영원히 하루다.
선생님은 언제나 자기의 날을 세면서 살아간다. 67세까지 자기의 생은 끝이 났고, 그 다음부터는 더 가짐으로 살아간다. 선생님은 언제나 갈 준비가 되어 있다. 그리고 우리가 옆에서 보아도 이 세상에 대해서 아무 애착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이미 죽어서 사는 사람에게는 사는 것에 아무것도 걸릴 것이 없을 것이다.
언젠가 선생님은 인생은 죽음으로부터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인생 팔십은 어머니 뱃속의 열달이나 마찬가지라고 하셨다. 마음 눈은 결국 죽은 후에 필요할 것이요, 말씀 쉼도 육신의 코가 떨어졌을 때부터 제구실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그때는 마음을 먹고 살 것이고 그때야말로 바른 소리를 듣고 살 것이라고 한다. 선생님은 지금 전생(전생)에서 살고 있다. 이 세상을 떠나가야 선생님의 현생이 될 것이다.
선생님은 열여섯에 예수 믿기를 시작했다. 예수를 그는 유일한 효자라고 생각한다. 하나님과 그는 일체라는 믿음이 꽉 들어있다. 믿음이란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효성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죽음은 그대로 하나님과 같이 사는 관문으로 생각한다. 죽기 전에도 하나님 나라와 전화연락 정도는 할 수 있지만 육신을 쓰고 있는 동안까지는 아무래도 자유롭지 않은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세상에 있는 동안까지는 자기에게 허락된 기한을 옹글게 채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후의 세계는 아무 말도 안 하시고 장횡거(長橫渠)의 서명(西銘)에 나오는 몰이영(沒而寧)이라는 말을 자주 하신다. 죽은 후에는 여하튼 편안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때 묵시록 마지막의 해와 달이 없고 집이 없어 하나님의 생명이 그대로 집이요, 하나님의 진리가 그대로 빛일 것이라고 한다. 선생님은 아버지 한마디에 그런 형이상이나 내세의 모든 문제를 포함시킨다. 아버지 품안에 드는 것뿐이다. 그리고 기독교가 아버지 종교란 말은 하늘의 종교지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선생님은 세상을 식(食)과 색(色)으로 표현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인생이 먹는 문제와 남녀문제에 끌려다니는 것을 가엾게 생각한다. 아버지란 별것이 아니다. 식과 색을 초월하신 분이 아버지다. 예수는 그런 의미에서 아버지의 외아들이라는 것이다. 사람은 우선 먹는 문제와 남녀 문제에 대하여 확실한 견해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식색에 끌리면 진리와는 멀다는 것이다.
선생님은 식색을 초월한 간디를 좋아하셨다. 그리고 가끔 간디 이야기를 하셨다. 그리고 간디뿐만 아니라 간디가 영향 받았다는 톨스토이도 좋아하셨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선생님이 좋아하시는 분은 석가와 공자와 노자다. '노자'는 선생님께서 번역도 하셨다. 지금 사색 시리즈 8권에 우리말로 옮긴 노자가 선생님 것이다. 그리고 '중용'도 번역하셨다. 우리들의 연경회에서는 '논어'는 언제나 선생님 입에 붙어 다닌다. 시경 서경 역경 등 동양의 고전들도 여러번 강의하셨다. 그리고 불경도 자주 화제에 올랐다. 우리 모임에는 불교계 승려도 가끔 참석하였다. 그리고 성리학도 늘 말씀하셨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것들은 다 참고에 불과하며 언제나 흰 백로지에 적어 오시는 글은 선생님의 독특한 한글 풀이다. '제소리'의 말씀이라는 부분이 선생님의 글이다.
선생님이 너무 여러 번 한글에 신비가 있다고 하셔서, 요새는 나도 무엇인지 한글에 신비가 있지 않나 하고 생각하는 때가 있다. "이 따윗말은 그만두고 이웃소리 듣소." 라고 한다. 얼핏 들으면 무슨 말인지 모른다. 선생님이 하시고자 하는 말씀은, '이 따(地) 위(上) 말 말고, 이 웃(上)소리 듣소.' 즉, 하늘 아버지의 바른소리(正音)를 들으라는 말이다. 그리고는 산색종침묵(山色終沈?) 계광초투철(溪光初妬徹)이라고 신이 나게 읊으신다. 인자요산(仁者樂山)이요 지자요수(知者樂水)란 뜻도 있지만, 현상세계는 어느 정도쯤 침묵을 지키는 것이 좋고, 절대실재가 시냇물 흐르듯이 현상계를 뚫고 나타나기를 원한다.
선생님은 ‘몸맘 맘몸’이라고도 한다. 몸은 그만하고 마음을 통일하라는 뜻이다. 그리고 인간은 정신으로써 살아야 한다며 실지로 정신생활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 주신다. 그것은 땅에 붙은 생활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생활이요,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사는 생활이다. 선생님의 말씀은 이 꽃 저 꽃에서 모아온 꿀처럼 달다. 그리고 선생님 자신이 꽃 위에서 꿀을 따는 벌이 아닌가 싶다. 언젠가는 유정유일봉세계(唯精唯一蜂世界)라는 선생님의 시가 있지만, 선생님이야말로 한평생을 벌들이 따다 주는 꿀을 먹고 살아오신 분이다. 나는 선생님 자체가 벌처럼 느껴진다. 벌 세계야말로 이상세계라고 하지만 선생님의 세계야말로 이상세계인 것 같다.
가끔 나는 선생님을 닭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매일 한알씩 알을 낳는 닭처럼 선생님은 매일처럼 지혜가 넘쳐흐르는 말씀 한마디를 내어놓으신다. 우리들은 두어 시간씩 지혜의 향연에서 포식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는, '오늘도 알찌개로 배를 불렸다'고 농담을 하였다. 어떤 때는 선생님을 시계라고 불러 보기도 한다. 선생님처럼 그렇게 시간을 잘 지킬 수는 없다. 수십년 강의를 계속했지만 지각을 하거나 시간을 어긴 일이 없다. 선생님은 시계 자체인지도 모른다. 하여튼 선생님은 무엇보다도 기체(氣體)인 것만은 사실이다. 선생님의 기체후는 언제나 일향만강하시다. 산에 오르면서도 힘든 줄 모르고, 굴하고 앉아도 발저린 줄도 모른다. 언제나 가볍게 걸으시는 선생님. 그리고 주무실 때는 우주의 기운을 통째로 몰아다 마시는 것 같은 선생님. 선생님은 가끔 성신을 숨님이라고 한다. 우리는 선생님 자신이 숨님인 것 같다. 숨어서 말숨 쉬는 숨님, 이것이 선생님을 제일 잘 표현했을 지도 모른다.
선생님은 세상에 일하러 온 분이 아니다. 열달 동안 어머니 뱃속에 숨어서 쉬러 오셨다. 팔십 평생 한숨쉬고 깨는 그 날에는 누구보다 힘차게 일하실 분은 선생님이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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