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석 유영모

유영모 - 기독교의 동양적 이해

心貧者 2008. 3. 13. 21:28
 

유영모 - 기독교의 동양적 이해

- 多夕선생 탄생 101주기, 서거 10주기 기념강연 -

김흥호 (감신대 교수)


선생님은 어려서 의사로부터 30을 넘길 수 없다는 진단을 받고 철든 후부터 선생의 스승으로부터 배웠다는 건강체조와 냉수마찰을 했다고 한다. 오산학교 교장이 되었을 때 교장실 의자의 등받이 부분을 톱으로 잘라 버렸다니 얼마나 정좌에 힘썼는지 알 수 있다. 교장실에는 왕양명의 험이(險夷)의 시를 적어 걸어 놓았다고 한다. 30까지 살기 어려울 것이라는 의사의 말을 듣고 일찍이 생의 허무를 깨달아 철학에 몰두하였다. 25․6세 때에는 당시의 문인 최남선, 문일평 등과 같이 문학지에 글을 실었다. 그때 쓴 ‘무한대’는 그의 우주관을 보여주는 걸작이다. 30세에 조만식 선생의 뒤를 이어 오산학교 교장으로 발탁될 정도로 그분은 뛰어난 인품을 지니고 있었다. 40대에는 월남 이상재의 뒤를 따라 YMCA의 선생이 된다. 선생님은 참으로 일찍 된 사람이었고 참사람이었다. 또 진인무몽(眞人無夢)이라고 하지만 선생님은 정말 꿈 없이 산 사람이었다. 선생님은 92세에 세상을 떠났다. 그때 안병무 선생을 비롯하여 그분을 따르던 후학들이 벽제에 가서 장례를 치뤘다. 그분을 가장 오랫동안 모신 분은 함석헌 선생이고 그밖에 많은 사람들이 그분의 감화를 받았다.


선생님의 기독교 이해는 한마디로 기독교의 동양적 이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선생은 한학에 능하여 동양의 고전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유교의 성리학, 불교의 선학, 도교의 현학에 깊이 통하여 있었고, 기독교의 성경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 분의 성경책은, 줄을 긋고 점을 찍고 주를 붙이며 얼마나 열심히 일었는지 위편삼절(韋編三絶)할 정도였다. 그는 신학을 공부한 일은 없고 내촌감삼(內村鑑三)의 성서연구 정도를 읽었을 것이다.

유교의 핵심은 효(孝) 사상이고 부자유친이 유고의 전부이다. 그는 기독교를 부자유친의 완성태라고 본다. 예수를 효자의 극치로 보며,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데서 신앙의 본질을 찾는다. 그가 운명하기 전 마지막으로 한 말은 “아바디”였다. 여기서 ‘아’는 감탄사, ‘바’는 밝다는 빛의 구현이며, ‘디’는 디딘다는 실천의 삶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삶. 이것이 동양의 특징이다.


선생의 도는 네 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일좌식(一坐食) 일언인(一言仁)이다. 일좌(一坐)라는 것은 언제나 무릎을 굽히고 앉는 것이다. 그것을 위좌(危坐)라고도 하고 정좌(正坐)라고도 한다. 일식(一食)은 일일일식(一日一食)이다. 일언(一言)은 남녀관계를 끊어버리는 것이다. 일인(一仁)은 언제나 걸어 다니는 것이다. 선생님은 댁에서 YMCA까지 20리 길을 언제나 걸어 다니셨다. 선생님은 우리에게 남녀관계를 끊으라고 말씀하셨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은 자는 진리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자이며 희노애락을 넘어서야 진리의 세계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정욕을 초월하는 데서 진리를 발견한다는 것이다. 그는 또 일식(一食)을 권면하였다. 식욕은 모든 욕심의 근원이다. 욕심의 근원이 식욕이요 죄의 근원이 성욕이다. 일식의 일은 끊는다는 뜻이다. 일식으로 식욕을 끊고, 일언으로 성욕을 끊고, 일인으로 명예욕을 끊는다. 도라고 하는 것은 욕을 끊어버리는 것이다. 무욕이다. 욕심이 없는 상태를 무(無)라고 한다. 무가 되어야 진리의 세계를 살 수 있다. 진리의 세계를 사는 것이 도덕이다. 그는 현실적으로 진리의 세계를 사는 사람을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하였다. 말하는 사람이 아니고 사는 사람. 그런 사람을 참사람이라고 하였다. 참사람이 되어야 예수를 믿는다고 할 수 있다. 믿을 신(信) 자는 말과 사람이 하나가 되었다는 뜻이다. 말을 실천하는 것이 믿음이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실천하였다.

그는 하루에 저녁 한 끼만 먹었다. 아침과 점심과 저녁을 함께 먹는다고 해서 그는 자기의 호를 다석(多夕)이라고 하였다. 저녁 석 자를 세 개 합친 것이다.


그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을 십자가에서 본다. 부자유친의 극치를 십자가에서 본다. 그는 요한복음 13장 31절을 그 나름대로 이렇게 번역한다. “이제 아들이 뚜렸하고 한울님도 아들 안에 뚜렷하시도다. 한울님이 아들 안에 뚜렷하시면 한울님도 한울님 안에 아들을 뚜렷하게 하시리니 곧 아들을 뚜렷하게 하시리라.” 그는 십자가를 환 빛이라고 하였다. 영광이라는 말이다. 하늘과 땅 사이의 십자가 그것은 임금 왕(王) 자이다. 십자가는 그리스도가 만왕의 왕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십자가를 천명지위성(性)이라고 하고 십자가의 보혈을 꽃피라고 하였다. 꽃피는 꽃이 핀다는 것이다. 꽃이 피는 것이 견성이요 천명이다. 그는 십자가에서 꽃 피를 본다. 그는 세상의 집착을 끊어버린다. 식(食)을 끊어버리고 색(色)을 끊어버린다. 지(知)를 끊어버리고 명(名)을 끊어버리고 일식 일언 일좌 일인을 하는 하나의 천체가 된다. 그것이 천명이다.  부자유친이 될 때 땅의 집착은 끊어지고 일식은 저절로 이루어진다. 유 선생은 일식이 성만찬이요 일식이야말로 하나님께 드리는 진짜 제사요 산 예배라고 한다. 그는 성만찬으로만 살았다는 성녀 젬마를 좋아하여 젬마 전기를 사서 우리에게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 일식은 동양의 오랜 전통이다. 소강절(邵康節)도 일식을 하였다. 소강절이 67세를 살았다고 하여 유 선생도 67세를 살고 가겠다고 말할 만큼 그는 소강절을 좋아하였다. 석가가 일식한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석가가 일식하기 전에 인도에는 일식하는 사람이 많이 있었던 모양이다. 일식은 불교 이전의 힌두교 전통이다. 간디도 일식을 하였다.


유영모는 16살에 세례 받고 연동교회의 교인이 되었다가 38년 만에 십자가의 빛을 보고 믿음으로 들어감이라는 글을 성서조선에 실렸다.

“믿음에 들어간 이의 노래” 

“나는 시름 없고 나 인제부터 시름 없다. 님이 나를 차지하사 님이 나를 맡으셨네. 내거라곤 다 버렸네. 죽기 전에 뭘 할까도, 남의 말은 어쩔까도 다 없어진 셈이로다. 새로 삶의 몸으로는 저 말씀을 모셔 입고, 새로 삶의 낯으로는 이 우주를 나타내고, 모든 행동선을 그으니 만유물질 늘어섰다. 온 세상을 뒤져봐도 거죽에는 다 없으니 위이무(位而無) 탈사아(脫私我) 되어 반짝 빛 요한복음 일장 사절 ‘님을 대한 낯으로요 말씀(道) 체득(體得)한 빛이로다.’ 님 뵈옵잔 낯이요 말씀 읽을 몸이라.”

그래서 유영모는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에서 노자신(老子身)도 아니요 석가심(釋迦心)도 아니고 공자가(孔子家)도 아니고 인자 예수라고 결론을 내렸다. “인자 예수 말씀(道)으로 몸 이루고 뜻을 받어 말하시니 한울 밖엔 집이 없고 걸음걸이 참과 옳음 뵈오니 한나신 아들 예수신가 하노라”

그는 십자가를 일식으로, 부활을 일언으로, 승천을 일좌로, 재림을 일인으로 생각했다. 그는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과 재림이 기독교 교리이며, 그 교리를 현실적으로 사는 것이 일식일언 일좌일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성만찬을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식만이 내 살과 내 피를 마시는 삶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제사요 몸으로 산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빵이 예수님의 살이라는 화체설(化體設)도 있고, 빵이 있는 곳에 예수님도 길이 있다는 공생설(共生設)도 있으며 단지 예수님의 죽음을 기념한다는 기념설도 있고 그밖에 많은 학설이 있지만 그에게 있어 성만찬은 예수님의 살과 피인 동시에 내 살과 내 피를 먹고 마시는 것이다. 일식은 가장 짧은 금식이다. 금식은 역시 자기의 살과 피를 마시고 사는 것이다. 자기의 살과 피를 마시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살아가고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 신령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라고 생각한다. 마음과 몸으로 드리는 예배가 참 예배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생각이다.


유영모에게는 일식이 예배다. 일식 뿐만 아니라 사는 것이 예배였다. 일식이 찬송이요 일언이 기도며 일좌가 성경이고 일인이 설교였다. 하루가 그대로 예배였다. 그래서 유영모는 하루를 산다고 하여 하루살이라고 했다.

유영모는 자기가 난 날부터 매일매일 날수를 계산하면서 살아갔다. 하루를 사는 그에게는 한 달이니 일년이니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언제나 하루를 사는 것이다. 그는 하루를 오늘이라고 하였다. 오늘은 하루라는 뜻도 되지만, ‘오’는 감탄사요 ‘늘’은 영원이라는 뜻을 갖는 의미로 볼 수도 있다고 했다. 하루 하루 속에 영원을 살아가는 감격으로 하루 하루를 살아간 이가 유영모였다. 유영모에게는 내일이 없다. 어제도 없다. 다만 오늘이 있을 뿐이다. 영원한 현재, 그것이 그의 하루였다. 기독교는 하루를 사는 종교다.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과 재림 그것이 하루다. 유영모는 그런 하루를 살았다. 그것이 영원한 하루다. 그는 인생은 죽음으로부터라고 늘 말하였다. 죽음이야말로 십자가요 그것은 하늘 궤도에 오른 순간이요 죽어서 부활하는 것이 참 사는 것이었다. 그는 십자가와 부활을 따로 생각하지 않았다.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과 재림은 유교의 인의예지처럼 언제나 하나의 여러 모습이다. 마치 성부와 성자와 성령과 교회가 언제나 하나인 것처럼 성부는 십자가요 성자는 부활이요 성령은 승천이요 교회는 재림이었다.


그는 성령을 숨님이라고 번역하였다. 목숨을 쉬고 말숨을 쉬는 것이 다 숨님의 역사라고 생각하였다. 또 그는 기쁨을 기가 뿜어 나오는 것이라고 했다. 기가 뿜어 나오기 때문에 그는 터져 나오는 화산처럼 수없이 많은 말씀을 뿜어냈다.  유영모는 기도를 숨쉼이라고 하여 삶을 기도로 본다. 유영모의 삶은 숨쉼이며 기도였다. 숨님이 유영모의 주체요 숨쉼이 유영모의 활동이었다.  유영모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기도를 하였다. 일식 일언 일좌 일인이 모두 몸으로 드리는 산 기도였다. 그는 숨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였다. 어떤 때는 숨이라는 도장을 새겨 가지고 와서 우리들 공책에 찍어 주기도 하였다. 그 도장은 엽전만한 것으로 밖은 둥글고 가운데는 네모난 구멍이 뚫려 있다. 세로로는 무상생(無常生) 가로로는 비상명(非常命)이라고 새겨진 것이다. 뜻은 생필무상(生必無常)이요 명시비상(命是非常)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유영모의 숨에 대한 해석이다. 인생은 무상하다. 그러나 천명은 비상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의 인생관이다. 무상한 인생 속에서 헤매지 말고 비상한 천명 속에서 뜻을 찾으란 말이다.


유영모는 “호흡”(呼吸)이라는 그의 시에서 ‘ 지상처중(知常處中)하면 어동어서(於東於西)에 무비생명(無非生命).’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유영모가 말하고 싶은 것은 지상처중이면 무비생명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알고 하나님 안에 있으면 어디 살든지 생명 아님이 없다는 것이다.

그는 기도(祈禱)를 기도(氣道)라고도 하였다. 숨님의 길이라는 것이다. 바람과 숨이 하나인 것처럼 하나님과 나는 한숨으로 통하여 사는 것이다.

그는 십자가를 가로 가는 세상을 뚫고 하늘로 올라가는 세로 가는 삶을 들어낸 모습이라고 보기도 하였다.


유영모의 신앙은 한마디로 ‘아바지 아들’신앙이다.

유영모는 언제나 아바디 아바디 하고 소리내서 불렸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소리만이 아니라. ‘아’는 감탄사요 ‘바’는 밝은 빛이요 ‘디’는 실천이다. 인생은 하나의 감격이다. 하나님을 뫼시고 사는 삶은 감격이 아닐 수 없다. 그는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그의 삶을 보고 기뻐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다. 그 기쁨은 진리에서 솟아나오는 기쁨이요 그리스도로부터 터져 나오는 기쁨이다. 그러기에 그것은 진리의 충만이요 영광의 충만이다. 그래서 그는 아바디라고 했다. 아바디는 단순히 진리의 충만 뿐이 아니다. 그 뒤에는 생명의 충만이 있고 힘의 충만이 있다. 그 힘으로 그는 이 세상을 이기고 높은 하늘로 올라갈 수가 있다. 그는 욕심과 정욕을 끊어버리고 오로지 깨끗과 거룩을 살았다. 그것이 그의 실천이다. 그는 죄악을 소멸하고 하늘의 별처럼 빛을 발하며 살았다. 그것이 도다. 도는 억지로 하는 율법이 아니다. 성령의 부음으로  거룩한 생활을 하는 하나님의 힘이다. 그것은 하나의 유희다. 하나님 앞에서 어린 아이가 되어 노는 것이다. 그것이 일식, 일언, 일좌, 일인이다. 그것은 윤리의 실천도 아니고 초월의 방법도 아니다. 사랑인 것뿐이다. 그것은 은혜요, 율법이 아니다. 그것은 태초에 나온 말씀이요, 하늘의 목숨이요, 아버지의 길이다. 여기에 유영모의 기독교가 갖는 특색이 있다.

십자가는 생의 초월이요, 부활은 사의 초월이다.


마지막으로 그의 주기도문을 적어 본다. “이것이 주의 기도요. 나의 소원이다.” ‘한울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우리도 주와 같이 세상을 이기므로 아버지의 영광을 볼 수 있게 하옵시며 아버지 나라에 살 수 있게 하옵시며 아버지의 뜻이 길고 멀게 이루시는 것과 같이 오늘 여기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먹이를 주옵시며 우리가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먹이도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우리가 서로 남의 짐만 되는 거짓살림에서 벗어나 남의 힘이 될 수 있는 참 삶에 들어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가 세상에 끄을림이 없이 다만 주를 따라 �으로 솟아남을 얻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람 사람이 서로 널리 생각할 수 있게 하옵시며 깊이 사랑할 수 있게 하옵소서. 아버지와 주께서, 하나이 되사 영 삶에 계신 것처럼 우리들도 서로 하나이 될 수 있는 사랑을 가지고 참말 삶에 들어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