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석 유영모

한글과 기독교 -문화신학의 과제로서 한글로 신학하기

心貧者 2008. 3. 13. 21:13
 

한글과 기독교 -문화신학의 과제로서 한글로 신학하기

-유영모와 김흥호의 한글풀이를 중심으로-


이정배

감리교 신학 대학교 신학과 조직신학 교수

  


글에 앞서


   김흥호 선생을 만나 뵙고 배움을 얻은 지도 15년 가까운 시간이 흐르고 있다. 1986년 가을 감신대 교수로 부임하면서 나는 선생님 연구실 바로 옆방을 사용하게 되었고, 그때부터 그분과의 만남을 자연스레 가질 수 있었다. 당시 감신대 명예 대우 교수로서 가르치셨던 그분과의 뜻밖의 만남은 유학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나에게 있어서 커다란 은총이었다. 많은 말씀을 주시지는 않았으나 그분에게서 느껴지는 삶의 무게는 언제나 내 자신을 돌아보도록 했고 그분을 거울삼아 살고 싶은 내적 욕망을 불러 일으켰기 때문이다. 때론 그분의 삶이 근접하지 못할 만큼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으나 더 많은 경우 일상의 걱정과 염려를 함께 나눌 수 있을 만큼 선생님은 우리의 삶 한 가운데 계셨다. 그동안 선생님으로부터 듣고 얻었던 삶의 지혜가 결코 적지 않았음을 고백한다.

  

   어느해 정초 세배드리러 갔을 때 선생님의 책상위에는 손수 쓰신 원고 뭉치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당신의 스승 유영모의 일지(다석일지)를 원고지 일만 이천장 분량으로 정리해 놓으신 것이라 들었다. 이미 여든을 넘기신 고령의 선생께서 당신의 스승을 기리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작업하신 그 정성, 그 마음을 생각하니 온 몸이 전율하기 시작하였다. 예수께서 하느님을 유일한 스승으로 생각하며 일생을 사신 모습을 떠올릴 수 있었다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 스승에 대한 제자의 태도가 어떤 것인지를 절실하게 느낄 수 있는 기회였다. 다석 유영모 선생 역시 예수를 스승으로 모시고 그분만을 생각하며 평생을 사신 분인데1) 나는 이 분들의 삶 속에서 스승의 존재가 그 어떤 인간들 간의 관계보다도 직접적이며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런 맥락에서 필자는 본래 유영모 선생과 예수 그리고 김흥호의 관계를 토대로  스승론의 기독론적의미를 문화신학의 과제로서 탐색하고 싶었다. 스승론이 기독론이해의 한국적 준거틀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선불교 철학자 케이지 니시다니가 그의 스승 니시다에 대해 쓴 책2)을 읽으며  스승론에 대해 이런 저런 구상을 해보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생각이 골똘해 질수록 예수, 유영모 그리고 김흥호 이 분들의 관계를 실존적으로 이해하여 서술해내는 것이 너무도 힘든 것임을 알게 되었다. 관념이 아니라 실재를 추구했던 이 분들 간의 인격적, 신비적 관계를 논리를 세워 이성적으로 논변하는 것이 무리한 일임을 알게 되었다.3)  스승이란 말이 이분들에게 있어서는 실존적이며 직접적인 경험(고백)의 산물인 것인데, 그분들의 삶에 감히 근접할 수 없는 필자가 본 주제를 다룬다는 것이 너무도 가당찮은 일로 여겨졌다. 이런 이유로 나는 스승론의 신학적 고찰을 내 자신의 삶이 진리에 좀 더 가까워졌을 때 쓰기로 하고 금번 문화신학회 논문으로 다소 객관적인 내용을 다루기로 마음먹었다. 그것이 바로 본 논문의 제목인 이 분들의 한글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에 관한 것이다.  그럼에도 본래 쓰고자 했던  스승론은  향후 필자의 신학에 있어서 중요한 주제가 되어 적당한 때에 한국적 기독론의 모습으로 전개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


   필자가 보기에  김흥호 선생은 다석 유영모 사상을 기독교 서구에서 출원한 종교다원주의의 한 모습으로 이해하는 제 시도에 대해 달가워하지 않으며 다석이야 말로 기독교를 동양적으로 이해한 참다운 기독교 신앙인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4) 더욱더 선생은 다석의 사상 속에서 동양적 기독교만이 아니라 한국적 기독교를 보고 있느바, 이는 한국을 십자가와 부활을 두 축으로 하는 기독교 신앙의 빛에서 설명하려는 것이다. 두분 선생님들에게 있어서 한글은 공히 한국민족을 십자가와 부활의 길로 인도하는 하느님계시로서 언표되며 그 빛에서 한글 자체가 소리글자로서만이 아니라 중국어와도 같은 뜻글자로 이해되고 있다. 다시 말해 한글의 자음하나 모음하나가 저마다 인간을 하늘에로 이끄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본 것이다. 따라서 다석을 서구적 의미의 종교다원론자가 아니라 참된 한국적 신앙인으로 읽어 내려는 김흥호 선생의 단호한 의지는 한글에 대한 다석의 신학적 이해를 풀이하는 데서 잘 들어나고 있다. 본 논문은 그렇기에 다석 일지에 나타난 유영모 선생의 한글이해와 그것을 다시 풀어 정리하신 김흥호 선생님의 수고에 전적으로 의지하여 전개될 것이다. 김흥호 선생의 풀고 엮은 수고가 없었더라면 다석의 한글이해는 일반 학계는 물론 기독교 신학분야에 주목 받지 못하였을 것이다.


   한글을 신학적 ‘뜻’을 담은 언어로 이해하는 이분들의 작업은 오늘날 탈식민지적 해석학의 이름 하에 그 정당성을 입증 받을 수 있다. 서구적 진리체계를 보편적인 것으로 인식하기 보다는 자신의 전통을 근거로 학문이론을 재구성하려는 주체적 노력이 요구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한 민족의 언어는 대단히 중요한 것이 된다. 언어란 한민족 공동체의 근간을 이루며 사유의 공통기반을 형성하는 것으로서 어느 누구도 언어가 지닌 세계관적 영향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국의 음양오행론을 비롯하여 한국 고유의 삼재사상의 토대하에 창제된 한글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소리문자인 한글을 ‘뜻글자’로 읽어내고 상형문자로 봄으로써 그 속에서 신학적 의미를 풀어낸 두분 선생들의 한글로 신학하기는 탈식민적 학문성을 선취한 중요한 역사적 예라고 하겠다. 최근 우리말 사전을 펴냈으며 ‘한글로 철학하기’란 명제 하에 유영모 선생을 조망하는 하이데거 연구가 이기상 교수의 작업이 필자에게 본 글을 쓰도록 신선한 자극을 주었다.5) 그러나 두분 선생님은 이기상 교수처럼 한자를 과격하게 제거하는데 목적을 두지 않았으며, 오히려 한자 언어를 통해 표현된 동양사상이 한글로 인해 그 진리성을 더 잘 드러낼 수 있음을 말하려 하였다. 이는 한글로 신학하되(차이의 강조), 그 의미의 보편성을 강조하려는 의도로 읽혀질 수 있다고 본다. 이런 맥락하에서  본고는 다음 순서로 전개되어 나갈 것이다. 첫째, 탈현대 시대의 동도동기론적 해석학. 둘째, 훈민정음의 세계관과 한글의 구조-음양오행과 삼재사상을 중심으로. 셋째, 한글의 신학적 해석학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글로 신학하기의 영성.(한국적 기독교)



제1장: 탈현대시대의 동도동기론적 해석학


   지금껏 한국을 위시한 제 3세계 국가들의 종교와 문화는 있는 대로 존재하지 못하고 기독교 서구에 의해 보여지고 읽혀진 대로 존재해 왔다. E. 사이드의 말대로 서구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동양적, 또는 한국적이란 담론은 동양을 지배하고 재구성하기 위한 언설로서 언제든 동서간의 서열을 상정하여 동양 열등주의를 확대 재생산해 온 것이다.6) 그러나 신자유주의 이념 하에 전개되는 세계화가 서구화를 의미하는 현실에서 오늘날 비서구인들은 점차 자신들의 인종, 종교 그리고 언어들의 특수문화에 의지하여 반 서구화를 말하기 시작하였다. 보편성으로 위장된 서구문화에 대한 비서구인들의 저항인 것이다. 최근 포스트모던 사조와 결합된 소위 탈 식민주의 해석학은 더욱 근본적인 맥락에서 서구화가 곧 보편화(세계화)라는 도식을 거부하고 있다. 포스트모던 사조가 서구적 중심가치인 이성과 보편성에 대한 비판을 토대로 역사의 절대중심으로 자처해온 기독교 서구에 대해 근본적 회의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본래 인간은 다양한 시공간적 토양에서 각기 상이한 세계를 형성해 왔던 것인데 서구문화는 동일성의 형식 논리에 다양성을 환원시켜 버렸던 것이다. 서구적 이성, 내지는 기독교 교리가 초역사적, 보편적 주체가 되어 구체적인 다양한 경험을 전체화, 가치 서열화 시킴으로서 문화들간의 차이 및 다름의 가치가 무시, 생략되어 버렸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인류가 오랜 역사를 통해 만들어온 다양한 가치체계, 언어, 문화, 종교들이 폄하되거나 사라져 버리는 것이 생물학적으로 종의 다양성이 파괴 멸종되어 가는 것 이상으로 인류의 미래를 위해 불행한 일이 된다는 사실이다. 그렇기에 포스트모던 철학은 더 이상의 초 역사적 주체, 보편적인 해석학적 주체가 역사상에 존립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실상 자신들의 목적, 기획, 그리고 선입견에 따라 대상적 존재를 서구인인 자신들에게 종속되도록 변경시켰던 서구적 이성, 또는 서구적 기독교에 대한 근본적인 이의제기이다. 따라서 포스트모던 철학은 오늘날 인류가 추구하는 세계화(지구화)란 전 세계문화가 강력한 문화중심(영어권, 신자유주의, 기독교)에 동화되는 유토피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 민족, 그리고 종교를 이질적인 것들이 공존하는 세계 곧 헤테로피아가 추구되어야 한다고 말한다.7) 이것은 주변부에 무게 중심을 두는 다중심주의적 세계화라고 부를 수 있는 것으로서 약한 것을 돕는 성령의 수행적 활동과 유비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이로부터 우리는 한국을 위시한 동북아시아 문화전통을 서구적 잣대로서가 아니라 한국적, 아시아적 시각에서 이해해야 하는 소위 동도동기론적 해석학을 필요로 한다.8) 다시 말해 모든 문화 속에는 그것을 만들어 내고 구성해온 원리와 세계관이 항시 내재되어 있음으로서 저마다 문화는 자신의 구성원리에 입각하여 해석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즉 동도동기론적 해석학은 시공간적, 문화적 상황 속에 얽혀져 있는 주체로서의 인간이 자신이 누구인지를 말하는 과정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이다. 동북아시아라는 특별한 시공간적 영역안에서 일어난 자신들의 하느님 경험을 이해하고 개념화하는 것이 동도동기론적 해석학이 추구하는 신학의 일차적 과제인 것이다.

   후기 하이데거의 언어이론에 빚지고 있는 가다머는 『진리와 방법』을 통해 이러한 시공간적 문화적 상황을 언어 및 존재의 시각에서 적극적으로 통찰한 바 있다.9) 인간을 주관적 순수의식으로 보지 않고 세계 내 존재(In-der-Welt-Sein)로 이해한 가다머에게 세계란 단순히 주위환경이 아니라 인간 삶이 이루어지고 그 의미가 살아있는 생활세계, 삶의 총체적 존재구조가 들어 나는 곳이었다. 따라서 인간은 이런 세계를 소유할 수 없고 오히려 그에 의해 구성될 수밖에 없음을 가다머는 역설하였다. 여기에서 가다머는 해석자 자신의 이런 고유상황(역사)이 神(존재)에 대한 이해를 촉발시킬 수 있는 일차적 원인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가 ‘정당한 선입견’으로 명명했던 것은 바로 이를 일컫는 말이다. 그러나 가다머의 해석학은 여기에서 머무르지 않는다. 진리란 세계 내 존재인 인간이 자신의 세계를 이해하고 자신과 전혀 다른 지평을 만나고 해석하는 과정에서 들어 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점에서 언어는 상호 다른 삶의 경험이 만나서 해석될 수 있는 존재론적 기반이 된다.10) 다시 말해 인간이 역사, 곧 세계 내 경험을 이해의 선 구조로 갖고 있듯이 언어 또한 인간 의식 및 이해의 선험조건이 된다는 사실이다. 언어가 단순히 인간의 표현수단이 아니라 인간으로 하여금 세계를 갖게 하는 기능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가다머 식의 언어의 존재론적 보편성을 따라 가기 보다는 개별언어 속에 내포된 독특한 의미체계, 세계관 그리고 삶의 문법 등에 대해 먼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언어의 보편성이 이해의 보편성으로 이행되어 개별 전통의 역사성을 오히려 간과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언어란 본래 특정 민족의 운명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서 일명 민족의 집단적 기억이라 불리워 지기도 하는 것이다.11) 물론 동서양의 각기 다른 공간이 이해의 영역에서 상호 공속되며 열려진 공간이 되는 것은 언어를 통한 세계경험 때문이기도 하지만, 가다머의 경우처럼 언어의 보편성을 근거로 시공간적 통전성을 획득하려는 그의 지평 융합론은 언어를 이데올로기화, 절대화시키는 누를 범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한국인인 우리가 대부분의 경우 사유와 행동의 전제를 함께 지니며 사는 것은 한글이라는 모국어 덕택이며, 바로 이 언어를 통하여 다른 민족 공동체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것이다. 이점에서 두분 선생님들 역시 언어들의 공통적 이해구조를 부정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글을 통해서 한자개념을 풀어내고 한자어속에서 기독교성을 얼마든지 발견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서구 중심주의가 몰락하고 주변성의 의미가 부각되는 탈현대적, 탈식민지적 사조속에서 모국어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특정 민족 공동체의 토대가 되는 언어 그 자체의 깊이와 넓이가 바로 문화와 사상을 규정한다고 보기 때문이다.12) 이점에서 훈민정음, 곧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를 뜻하는 한글에 대한 이해는 동도동기론적 해석학(신학)의 근간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 세종대왕께서 창제한 훈민정음, 그것을 구성하는 원리들 그리고 그로부터 들어나는 세계관등을 신적 계시의 사실로 이해하여 소리글자인 한글을 뜻글자로 읽어내는 유영모, 김흥호 선생님의 정당한 선입견은 차이를 강조하는 탈 현대적 토양 속에서 한글로 신학하는 가능성을 후학들에게 제시한 것으로 보여진다. 


제2장: 한글의 구성원리와 세계관-삼재론 중심의 음양오행론

 

   필자는 다석 유영모 선생에 대한 이전 논문13)에서 다석사상을 동양적 종교이해를 바탕으로 성서를 읽고 해석함으로써 기독교의 비서구적 모형을 제시한 것으로 평가, 정리한 바 있다. 이것은 필자만의 생각이 아니라 현재(鉉齋) 김흥호 선생의 다석 이해와도 일치하는 부분이다.14) 다시 말해 유불선으로 대표되는 동양사상이 다석의 세계내 경험, 곧 그의 이해의 선구조가 되어 기독교(성서)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시도할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표현하자면 다석의 기독교 이해는 노장적 사유(道)와 불교적 토대(空)위에 유교적 내용(孝)으로 살을 붙여서 그리스도가 지닌 생명신학적 특성, 소위 그의 ‘얼(성령)기독론’을 정초하였다는 사실이다. 다석은 성서가 증언하는 영(靈),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얼’이란 동양적 언어로 즐겨 명명하였는데-예수의 얼이 그분에게는 곧 성령이었다-어느 누구에게도 성령의 임재가 그친적이 없으며 그리스도 역시 어느 특정개인이 아니라 우주적, 역사적, 전인류적 얼로서 그의 생명(얼)이 결코 둘로 끊어져 본적이 없었다고 힘주어 말하곤 하였다.15) 이점에서 다석은 언어는 모두 하느님이 주신 것이며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글을 통하여 하느님을 찾아 나설수 있다고 한것이다. 다시 말해 언어란 다석에게 있어서 한번도 끊어진 적이 없는 성령의 또 다른 표현이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유영모 선생은 겨레의 얼이 담긴 한글 속에서 하느님의 계시를 보았고 한글로서 하느님 말씀을 풀어내고자 노력하게 되었다. 김흥호 선생에 따르면 하느님의 말씀을 겨레의 언어인 한글로 이해하여 자기 말로 바꾸는 것을 성육신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16) 한글을 복음의 그릇(용기)이라고 부르며 현재 사용하고 있는 한글 24자 만이 아니라 훈민정음 창제시의 28자 모두를 사용해야 한다17)고 주장한 다석 유영모의 ‘한글로 신학하기’는 이점에서 독창적인 한국적 신학의 면모를 지니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겨레의 언어인 한글의 구성원리를 탐구하고 그 원리들이 한국 고유의 세계관과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 것인지, 그리고 이런 한글 속에서 기독교 복음이 어떻게 풀어졌는지 등에 관한 끊임없는 질문과 탐구를 본장에서 서술해 보고자 한다. 한글이 중국언어를 기초로 하였으되, 음양오행론과 천지인 삼재사상을 통합하여 과학적으로 실용적으로 독특하게 만들어진 언어라는 사실을 증명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1) 한국전통문화의 구성원리와 한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訓民正音)을 뜻하는 한글은 음양오행설에 입각한 중국의 음운학(洪武正韻)을 바탕으로 창제된 것이지만 그럼에도 중국의 역학적 이론체계에 완전히 의존하지 않고 민족고유의 삼재 사상의 빛에서 독창적으로 만들어졌다.18) 초성과 종성으로만 구성된 중국문자와 달리 초, 중, 종성의 세음소로 문자를 이루는 모습도 그렇거니와 모음 열한자 전체가 천(․)지(ㅡ)인(ㅣ)삼재를 상형하여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이를 잘 증명하고 있다. 이점에서 우실하는 한국전통문화의 구성원리를 ‘삼재론 중심의 음양오행론’으로 보고 한글이 시종일관 이 원리에 근거하여 만들어진 것임을 역설한다.19) 비록 유교 문화권 하에 살아온 우리 민족이 역(易)사상, 음양오행론등의 중국적 사유체계를 벗어날 수는 없었으나 한국전통문화는 삼재론을 바탕으로 하여 이것들을 창조적으로 수용해온 독특한 역사적, 문화적 과정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이다. 음양을 품고 있는 중국식 태극(太極)과는 달리 천지인 삼재를 들어내는 삼태극의 현존, 하나에서 셋으로 분화하고 셋을 모아 하나로 돌아가는 『천부경』, 『삼일신고』등의 고대경전의 사유구조,  한국 시조에만 있는 고유한 삼장(三章)형식, 그리고 3이라는 숫자 속에 담겨진 한글의 길조어, 흉조어들 모두는 바로 초중종성으로 구성된 한글의 제자원리와 함께 한국 전통문화속에 구현된 삼재 사상의 흔적들로 이해되고 있다. 최근 김지하 시인이 율려 사상을 통해 한국적 바탕음을 천존지비(음양)를 근간으로 하는 중국적 황종에서가 아니라 무질서한 음을 뜻하는 협종(사이음)에서 찾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설명될수 있는 것이다.20) 율려란 본래 인간과 우주의 근원적 관계를 소리(音)로 표현한 것인데, 이러한 본음(本音)이 어떻게 설정되느냐에 따라 한나라의 정치, 사회, 과학 교육전반이 결정될 만큼 그것은 문화의 중심개념이었다.21) 김시인은 한국적 바탕음을 황종적 협종이라 부르는데 이것은 사이음인 협종이 주가 되지만 황종자체를 거부하지 않고 그와 더불어 제 3의 창조적 생성을 이루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22) 다시 말해 음양으로 상징되던 남성성/여성성, 몸/마음, 빛/그늘 그리고 코스모스/카오스 등의 이원적 관계가 총칭하여 카오스적 질서(카오스모시스)인 제 3의 상태로 들어나는 것으로서 여기에서 우리는 중국의 음양론을 ‘삼재’중심으로 새롭게 배합해온 민족 고유의 흔적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삼재 중심의 음양오행론, 곧 음양론과 삼재사상을 결합시킨 한국 전통문화의 구성원리는 종교문화사적으로 말하자면 샤마니즘을 토대로 한 북방수렵문화와 중국의 남방 농경문화(유교)의 만남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삼재사상을 기초지었던 수렵문화란 본래 생존을 위해 동물을 먹거리로 취하는 문화였던 바, 늘상 동물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죽음 이후에 대한 개념 또는 사후 영혼에 대한 생각을 발달시켜 왔다. 여기에서 영의 세계로서의 하늘(天)과 육체 및 죽음의 세계인 땅(地) 그리고 하늘과 땅을 잇는 영적 매개자로서 샤먼(人) 곧 인간세계의 삼재론이 시작된 것이다.23) 이렇듯 샤만을 매개로 하는 천지인 삼재론은 언제든지 공간을 수직으로 보는 이해의 틀을 가지고 있으며 보이지 않는 영혼의 세계에 대한 관심으로 인해 있음보다는 없음(無)을 강조하는 세계상을 나타내 보이고 있다. 반면에 농경문화는 계절을 파종기와 수확기로 양분하는 2분법의 논리와 농사의 대상인 땅을 4방, 8방으로 나누어 보는, 즉 공간을 수평으로 분할하여 이해하는 인식 틀을 지니고 있었다. 농경문화권에서 생겨난 유교가 항시 없음보다 있음(太極)을 강조해 온 것도 수렵문화와 대비되는 현상중의 하나라고 하겠다. 우실하는 여기에서 백두대간의 동쪽지역은 토착적 삼재론이 우세하였고 그 반대 지역에서는 음양오행론이 지배적이었으나 신라의 삼국통일로 인해 한국 전통문화의 구성원리가 삼재론 중심의 음양오행론으로 정착될 수 있었다고 말한다.24) 또한 보이지 않는 영(靈)의 세계를 강조하는 삼재론은 하늘세계를 지배한다고 생각되는 삼신(三神)사상을 발전시켰고 세발달린 까마귀(三足烏)와 같이 3수의 비밀을 형상화한 상징물들을 존귀하게 생각해 왔다. 앞서 말했던 『천부경』『삼일신고』등도 수렵문화의 핵심인 천지인 삼재사상을 기초로 하여 쓰여진 것으로서 이런 삼신에 대한 구체적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25) 이는 김지하가 풍류도, 동학 그리고 정역을 비롯한 한국종교문화의 실상이 『천부경』등의 이들 사상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보는 점과 일맥상통한다. 다시말해 배달민족의 고유경전인『천부경』『삼일신고』등은 한국적 전통문화의 구성원리인 삼재론중심의 음양오행론에 입각하여 구성된 한민족 최초의 종교경전이라는 사실이다.

   주지하듯 대략 9000여년전 부터 전해지는 81자의 천부경의 핵심은 “一始無始一, 析三極, 無盡本, 天一一地一二人一三”의 글속에 나타난다.26) 자신의 입으로 꼬리를 물고 있는 뱀의 형상처럼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완전한 하나의 세계가 셋으로, 곧 하늘과 땅과 인간으로 나누어지며 갈라진 셋은 다시 하나가 되는데, 이러한 하나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극(無極)과 같은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렇듯 셋을 머금고 있는 삼태극 으로서의 하나는 삼라만상의 무진장한 소멸되지 않는 근본(無盡本)이 된다. 바로 81이란 천부경의 글자 수는 삼태극의 무궁무진한 활동을 3진법적으로 풀어내는 방식인 것이다.27) 이러한 삼태극과 함께 천부경은 일적십거(一積十鉅)란 말로서 음양오행설을 설명하고 있다. 일적십거는 흑점 45개와 백점 55개로 상징화되어 있는 것으로 멈춤과 움직임의 연결고리를 나타내는데, 역경 계사전의 일음 일양 지도(一陰一陽地道)가 이로부터 비롯된 것이라 추정되어진다. 45는 1에서부터 9까지의 아홉 숫자가 일으키는 변화를 뜻하며 55는 1에서 10까지의 열의 숫자가 일으키는 변화를 일컫는 바 전자가 상극오행이라면 후자는 상생오행을 지시하는 것이다.28) 그렇기에 음양과 오행을 품고있는 일적십거는 상생과 상극의 대립작용으로 인해 세계자체가 중심 없는 혼돈임을 드러낸다. 이점에서 시작도 끝도 없는 변화의 세계를 설명하는 일적십거는 삼태극도와 더불어 민족문화를 구성하는 근본원리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편 『천부경』이 삼태극을 통하여 변화무쌍한 현실세계를 강조한다면 『삼일신고』는 하나가 셋이 되고 셋이 하나가 되는 무궁무진한 세계를 없이 계신 하나, 곧 하느님의 시각에서 설명하는 책이다. 다시 말해 모든 인간의 공통된 중심으로서의 하느님(一神降衷)을 강조하며 그로부터 혼돈 속에서 질서를 얻고자 하는 노력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29) 인간 속에 내재된 신(神)의 빛(소우주)을 따름으로 인간은 후덕해지고 땅은 밝아지며 하늘이 선하게 된다고 말한다. 이는 인간만이 아니라 변화하는 모든 사물에 접하여 그것들 모두를 이롭게 하고 완성시켜내는 우주적 생명운동을 말하는 것으로서 동학이 말하는 接化群生이란 말의 본원처가 된다고도 할 수 있겠다.30) 이러한 일신강충은 『천부경』속에서는 ‘人中天地一’로 명기되어 있기도 한데,31) 이것은 인간이 우주적 영성, 곧 삼신의 세덕목(厚, 淸, 善, 또는 力, 慧, 德)을 얻음으로써 사회, 지구 및 우주가 질서를 회복할 것이라는 믿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다시 말해 『삼일신고』는 『천부경』의 무궁한 세계를 인간이 神이 되었다는 자각을 통하여 완성해 보려는 의지를 나타내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이상으로 짧게 설명한 두 책들은 모두 우랄알타이 지역에서 발전된 샤머니즘 사상과 그로부터 생겨난 천지인 삼재론의 틀 속에서 비롯된 사상체계이다. 여기에서 음양오행론과 역사상조차도 근본적으로는 삼재사상의 틀 속에서 생겨난 것으로 보는 시각도 드러난다. 여하간 삼재론 중심의 음양오행론은 우주의 무궁무진한 변화와 혼동 속에서 질서를 찾고자 했던 민족문화의 구성원리가 되는 것으로서 역시 한글 속에서도 중심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자음보다도 모음을 중시하였으며 초중종성 셋으로 글자꼴을 이루어갔고 더더욱 삼단계의 변증법적인 생성과정을 보여주는 한글 속에서 우리는 이러한 원리를 찾아 확인해 볼수 있다.


2) 삼재론 중심의 음양오행론에서 본 한글

  

   고교시절에 배운 기억을 되살려보면 훈민정음 서문에는 다음과 같은 한글창제의 목적이 실려있다. 나라말씀이 중국과 달라 문자가 서로 통하지 않기에 백성들이 표현하고픈 바가 있어도 그 뜻을 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를 위해 28자로 새글을 만들어 백성들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하여 일상생활에서 어려움없이 하겠다는 것이다. 언어에 대한 민족주의적 관점과 어리석은 백성들을 염려하는 인권주의적 시각이 짙게 배여 있는 글이라 하였다. 혹자는 한글 창제를 왕권을 제약하는 호족들을 견제하기 위해 백성들과 직접적으로 관계를 맺으려는 세종의 정치적 목적의 산물로 평가절하 하는 사람도 있지만 한자어와 본질적 차이를 인지하고 무식한 백성 및 어린이를 깨우치고자 때론 그림으로 표현한 삼강행실도를 만들 만큼 약자를 배려했다는 사실은 예사로운 일이 아닐 것이다.32) 이와 함께 훈민정음 해례본, 즉 한글 28자를 설명해 놓은 부분에는 한글창제의 사상적 배경 및 그 구성원리가 잘 드러나고 있다.


   “하늘과 땅의 이치는 하나의 음양과 오행뿐이다. 坤卦와 復卦사이가 태극이 되고 움직이고 고요한 후에 음양이 된다. 무릇 생명을 가진 무리로서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것 음양을 두고 어디로 가랴. 그러므로 사람의 목소리도 다 음양의 이치가 있건마는 도리어 사람이 살피지 못할 뿐이다. 이제 처음 지으신 것도 애초에 꾀를 일삼고 찾아낸 것이 아니라 다만 그 목소리에 따라 그 이치를 다하였을 뿐이다. 이치가 둘이 아닌즉 어찌 천지 귀신으로 더불어 그음과 같이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정음(正音) 28자를 각각 그 형상을 본떠서 만들었다.”33)


    본문 속에서 우리는 세상의 모든 이치가 음양과 오행일 뿐이라는 것과 사람의 목소리 역시 음양의 이치로 되어 있기에 한글 28자가 음양오행의 변화(用)의 형상을 따랄 지어졌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즉 훈민정음에 있어서 언어의 생성원리를 음양으로 보았고 그 조직 원리를 오행으로 설명하였다는 것이다. 음양이란 존재하는 모든 것들간의 상대상보적 관계, 즉 서로 다르면서도 서로를 필요로 하는 작용이며 오행이란 인간 생활에 필요한 五材(목․화․토․금․수)를 추상화하여 우주만물의 현상을 상생․상극적으로 설명하는 방식이다. 해례본에는 아설순치후의 다섯소리가 오행(五行), 오시(五時), 오방(五方)과 연결되어 있고, 모음 역시 음양원리를 따라 양성모음과 음성모음으로 나뉘어 설명되고 있다.34) 그러나 앞서도 말했듯이 훈민정음 창제는 초성과 종성으로 자음을 이분화시킨 중국음운학과 달리 그것을 초․중․종 삼성의 삼분법으로 고찰한 점이 새롭다. 비록 종성을 따로 만들지 않았지만 초성과 함께 사용함으로써 3분법의 의미를 살려낸 것이다. 더욱 이런 3분법이 민족 고유의 천지인 삼재를 상형하여 생겨난 모음 자체의 특성과 내적 관련성이 있다는 발견은 중요하다. 이는 자음이 동국정운(東國正韻)이라는 중국 음운학의 영향하에서 음양오행론에 따라 발음기관을 상형화한 것과는 크게 대비되는 부분인 것이다. 물론 모음 10자가 기본자 셋․ㅡㅣ의 상호 다른 공간적 결합으로 이루어져 이 역시 역경의 상호교역(相互交易)의 산물로서 이해되지만 모음을 형성하는 삼재사상이 중국한자어의 음운학 영향으로부터 완전 벗어나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우선 훈민정음의 자음은 목화토금수에 해당하는 5개의 기본음 ㄱ(牙音: 어금니 소리), ㄴ(舌音: 혀 소리), ㅁ(脣音: 입술 소리), ㅂ(齒音: 잇 소리), 그리고 o(喉音: 목구멍 소리)에 각기 획을 더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ㄱㅋㆁ은 혀가 꼬부라져 목구멍을 막은 모양을 상형한 것이고, ㄴㄷㅌ(ㄹ)은 혓바닥이 입천장에 닿은 모양을 본 뜬 것이며, ㅁㅂㅍ은 입술이 막혔다가 열어지며 나오는 소리들이며, ㅅㅈㅊ(△)은 이빨 사이로 새어 나오는 소리로서 치아 모양을 그린 것이고 마지막으로 oㆆㅎ은 목구멍의 둥근 형태를 묘사한 것이다. 이러한 아음․설음․순음․치음․후음 등 닿소리 17자는 저마다 방위, 계절, 오장, 오상(五常) 등의 5행 배당과 일치하여 만들어진 것으로서 과학적 합리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 한글의 어금니 소리계열인 ㄱ, ㅋ의 관계를 영어의 g와 k의 관계와 비교할 때 그 형태의 체계성, 일관성을 높게 평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정호 선생은 『훈민정음의 구성원리』속에서 한글의 우수성을 과학적인 면에서만 보지 않고 소리글자인 닿소리가 뜻글자로 해석될 수 있는 창조적 상상력의 면에서 통찰하고 있다.35) 이 점은 유영모, 김흥호 님의 한글에 대한 신학적 해석, 한글로 신학하기를 통해 더 잘 드러나는 부분인바 이분들간의 내용적 유사성이 많다. 소리글자인 한글을 뜻글자로, 때로는 상형문자적 의미로 이해하고 그 근거를 밝혀내는 점에서 이분들의 입장은 다르지 않다. 기독교적, 신학적 관점이 두분 선생님들 사이에 더 더욱 강조, 첨가되었을 뿐이다. 이 점은 다음 장에서 다룰 주제이기에 여기서는 이정호의 담론을 5개의 기본음을 중심으로 먼저 소개해 보겠다.36)

  먼저 혀뿌리가 목구멍을 닫은 형상인 ‘ㄱ'은 위로부터 무엇인가를 수직적으로 내려보내는 모습을 하고 있는데 이것은 역경에서 말하는 건원(乾元)같이 하늘에서 생명의 씨가 땅에 내려오는(수직적 사랑) 뜻을 머금고 있다. 우리말의 거룩, 검(神)등이 ㄱ으로 시작된다는 것은 이점에서 일리가 있는 일이다. 혀끝의 예리함을 보여주는 ‘ㄴ’은 하늘에서 내려주는 그 무엇을 순히 받드는 뜻을 담고 있다. 이웃과 자연에서 받은 원리를 되돌려주고 ㄱ에 대한 인간의 윤리적 태도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말의 나다(生), 날다(飛)등이 ㄴ으로 시작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입의 형상을 본뜬 순음 ‘ㅁ'은 언어의 시초이며 근본이 되는 것으로서 입과 관계된 모든 일, 육체적(먹는 것), 정신적(말하는 것)인 것 모두가 이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마신다, 먹는다, 문다 등의 말들이 바로 ㅁ으로 부터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ㅅ'은 두 다리로 서 있는 생명적이며 약동적인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다. 유일하게 머리를 하늘에 두고 직립하여 사는 인간은 하늘을 본 받고 땅을 따르는 인격의 소유자가 되어야 함을 뜻한다. 사람, 삶, 숨, 싹, 씨 등이 ㅅ으로 시작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이다. 끝으로 목구멍 소리인 ‘o’은 그 상에서 보듯이 空이다. 空은 시간성의 근원이자 공간성의 근본이 된다. o은 아무 작용도 없이 존재하는 것(to be) 그것 자체이다. 우리말의 ‘~이다’란 것이 o으로 시작되는 이유를 여기서 찾을 수 있다고 본다. 그 외 기본음에 한 획씩 첨가하여 만들어진 나머지 자음들은 모두 개개 기본음의 의미가 확대되어 발전해 가는 과정을 담아내고 있다. 이 부분의 내용은 유영모의 신학적 해석을 통해 더 잘 나타나게 될 것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 하나는 이정호 선생이 초성기본음의 입체도37)를 삼재론에 입각하여 다음처럼 그렸다는 사실이다.






   여기에서 ○은 머리(首)의 상이며 허공(天圖)을 뜻한다. 이 속에 神明이 모여 있음을 보여주며 기본음 o을 지시하고 있다. □은 배(腹)의 상이며 땅을 상징하는 것으로 하늘의 계시를 구체화시키는 공간이다. □은 기본음 ㄱ(보냄)과 ㄴ(받음)이 만나서 이루어지는 형태이기도 하다. ∧은 다리(脚)의 상이며 사람을 상징하는 것으로 천지의 이치를 지탱하고 보호하며 그 일을 대행하는 존재, 곧 인도(人道)를 보여준다. 특히 본 그림이 머리가 육체보다 큰 어린아이의 모습을 담고 있는 것은 인간이 정신적 존재로 살아야 함을 의미한다. 자음의 기본도는 인간이 하늘의 말씀을 듣고 진리를 알며 땅을 딛고 서서 위로 오르는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바로 이점에서 이정호 선생의 한글 이해는 유영모 님의 신학적 한글 해석과 의미론적으로 일치한다.

   이처럼 음양오행론의 틀 속에서 한글 자음이 창제되었으나 한글의 기본음 자체를 삼재사상의 구조로 해석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삼재론 중심의 음양오행론이라는 민족문화의 구성원리 때문이다. 이것은 자음체계가 기존한자음의 분석을 전제로 했던 것에 반하여38), 삼재론에 근거한 모음체계가 중국 한자어의 음운학적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한국 독자적인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는 사실과 관계가 있다. 이제 기본음의 입체도에서 보이는 대로 공간을 수직으로 이어 해석하는 인식틀은 모음의 창제 원리 속에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난다.

   주지하듯 모음 11자는 천지인 삼재를 상징하는 ․(天), ㅡ(地), ㅣ(人) 3개의 기본음이 음양의 원리를 포함하면서 형성되어진 것이다. 훈민정음에는 모음이 오늘과는 달리 하도기원설(河圖起源說)을 따라 ․ㅡㅣㅗㅏㅜㅓㅛㅑㅠㅕ의 순서로 발생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39) 우선 천(․) 지(ㅡ) 인(ㅣ) 삼재를 보면40) ․는 목구멍의 가장 깊은 곳에서 나오는 소리로서 이치로는 태극이며 실체로는 하늘을 의미한다. ․는 ○으로 확장되어 무극의 모습으로도 나타날 수 있다. ㅡ는 중간 정도로 입을 벌려 나는 소리로서 ․이 좌우로 펼쳐진 평평한 땅의 모습을 본뜬 것이다. 이것은 공평과 균형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겸도(謙道)를 보여준다. ㅣ는 구강의 얕은 부분에서 나는 소리로서 ․가 아래로 확장된 형태를 지시한다. 다시 말해 하늘을 머리에 이고 땅에 서서 위로는 하늘의 중심에 통하고 아래로는 땅의 중심에 뿌리내린 인간의 자태라는 것이다. 또한 이렇듯 중성의 제 1기본형인 ․가 ㅡ의 상하, ㅣ의 좌우 어느 쪽에 위치하느냐에 따라 양모음과 음모음이 생겨나는 것인데 모음 발생 순서를 설명하는 하도(河圖)는 삼재론과 음양오행의 관계를 잘 보여주고 있다. 즉 ․로부터 ㅗㅏ가, ㅡ로부터 ㅜㅓ가 만들어지며 이들 각각이 水(북), 木(동), 火(남), 金(서)과 대응하게 되고 이들에 ㅣ를 한점씩 더 보태 만든 중모음(ㅛㅑㅠㅕ)역시 하도의 수에 따라 음양오행의 구조 속에서 설명되고 있는 것이다.41)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중성 11자중에서 사람을 뜻하는 ㅣ의 활용이 제일 많으며, ㅣ만이 음양과 오행의 방위와 정수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필시 만물 중 신령한 존재인 인간을 어떤 특정한 고립된 수와 방위로 설명할 수 없음을 말하는 것으로 사람은 이미 음양과 오행을 갖추고 있으며 하늘과 땅의 성질을 동시에 경험할 수 있는 존재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42) 이것은 人中天地一이란 『천부경』개념의 재확인으로 보인다. 결국 한글은 매 글자를 삼재론에 입각해서 초성, 중성, 종성으로 구성했으며 초성과 종성을 이루는 자음을 음양오행론에 입각해서 만들고 중성인 모음은 천지인 삼재를 뜻하는 기본모음 셋(․ㅡㅣ)을 바탕으로 하도의 수에 따라 음양이 조화되도록 배열해 나간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훈민정음 해례본에는 삼재론에 근거한 한글의 구성을 다음처럼 철학적, 신학적 맥락에서 설명하고 있다.


   “․․․․초성은 피어나 움직이는 뜻이 있으니 하늘의 일이요, 종성은 그쳐 멈추려는 뜻이 있으니 땅의 일이요, 중성은 초성의 생하는 것을 받아서 종성이 이루는 것을 이어주는 사람의 일이다. 대개 글자의 운(字韻)의 긴요함은 중성에 있다. 중성이 초성과 종성을 합하여 글자의 音을 이루는 것은 마치 하늘과 땅이 만물을 생성하고 이루기는 하지만 그것을 마르재어 이루고 보필하여 돕는 것은 반드시 사람의 힘에 의존하는 것과 같다.”43)

 

   이점에서 유영모 선생은 이 땅을 세운 단군 선조와 훈민정음을 창제한 세종대왕에게 한없는 감사를 드리고 있다.

  

    “․․․대한 반도 한가운데 하늘 문이 열리고 모든 국민이 한글을 공부해서 내 속에 깊이 숨어 있는 뜻을 온 세계에 펼쳐가게 되었다. 하늘 문이 열리고 속뜻을 펼 수 있게 한 두 어른에게 진심으로 감사한다. 우리 나라 에서는 하늘에 올라갈 수 있게 되었고 우리의 글로 우리의 뜻을 펼 수 있게 되었다. 한국은 천국이요 한글은 천문(天文)이다.”44)




제 3장: 한글의 신학적 해석학- 다석과 현재의 한글로 신학하기


   현재 김흥호 선생은 스승인 유영모의 ‘생명사상’에 관한 글 속에서 한글이야말로 그림(像)처럼 진리를 계시하여 줄 수 있는 글이며, 한국사람이 한글을 사랑하기만 하면 무궁무진한 진리를 얻을 수 있다고 하였다. 한글을 하느님이 세종대왕의 손을 빌려 계시한 글이라고 한것이다.45) 이것은 다석의 삶과 사상을 통해서 배웠던 현재선생 자신의 확신에 찬 언명이다. 따라서 이 두분 선생님에 의해 한글의 계시적, 신학적 의미가 어떻게 찾아질 수 있었는지를 묻는 우리의 탐색은 대단히 중요하다. 앞서 말한 대로 주역과 정역 연구의 대가인 이정호 선생은 다석 유영모 선생으로부터 훈민정음을 배웠고 그 배움에 기초하여 『훈민정음 구성 원리』를 저술하였다. 또한 유영모 선생은 당대의 한글학자 서상덕씨의 주장대로 통용되고 있던 24자 이외에 ․△ ㆆㆁ 등의 자음을 모두 사용해야 한글의 계시적 특성이 밝혀질 수 있다는 사실을 수용했다. 서상덕, 유영모, 이정호 그리고 김흥호님으로 이어지는 사상적 계보 속에서 우리는 한글의 신학적 해석학, 한글로 신학하기의 토대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본고에서는 이분들간의 사상적 연계성을 밝혀내는 일에 집중하기보다는 한글의 구성원리를 근간으로 무수한 조어를 만들고 그 속에서 신학적, 종교적 의미를 발견, 전달하는 유영모, 김흥호 두분 선생님의 사상을 정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두 분 선생님들은 한글이 한국문화의 핵심이며 한국속에 하느님의 뜻이 담겨져 있음을 믿는다. 김흥호 선생은 이 땅에 살고 있는 백성 모두가 하느님의 높은 보좌로부터 왔으나 한문으로 인해 갈곳을 모르게 되었다고 말한다. 아버지께로 올라가는 것은 한글에 대한 이해를 통해서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자기 뜻을 실어 펴지 못하는 어리석은 백성에 대한 세종의 염려가 이제 자신이 가야할 곳, 하느님께로 가는 길을 모르는 무지한 백성으로 이해되고 있는 것이다. 유영모, 김흥호 두분 선생님께서 한자어를 한글로 풀어내고 없는 한글말을 만들어 가면서 까지 노자, 중용, 주역 등 동양의 고전들을 풀어내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여기에는 모국어인 한글을 통해 심리저층에 깔린 민족의식을 이끌어 낼 수 있다는 언어 심리학적 판단과 한글 속에 담겨진 종교 신학적 의미에 대한 확신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46) 이는 두분 선생님의 기독교 이해가 유불선을 꿰뚫는 삼재중심의 음양오행론을 통해 해석학적으로 새롭게 구성되어졌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필자가 보기에 두분 선생님들의 한글에 대한 신학적 해석학은 다음과 같은 특성을 지니고 있다고 보인다. 첫째로 삼재 중심의 음양오행론의 시각에서 본 모음과 자음의 신학적 의미, 둘째는 소리글자인 한글 자체를 뜻글자, 상형문자로 이해함으로써 생겨나는 의미론적 발견, 셋째는 한문 및 한자어를 순수 한국말로 풀어 가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기독교성. 본 장에서는 두 분의 한글관속에 내재된 이런 세 측면을 분석하고 예증함으로써 한글로 신학하는 동도동기론적 해석학의 본질을 탐구해 보려고 한다.

   우선 두분 선생님들에게 있어 모음과 자음은 각기 상이한 신학적 의미로 이해되고 있다. 모음이 우주의 아버지이며 어머니이신 하느님이 인류를 부르는 소리라고 한다면 자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아는 인간이 자신의 몸을 드려 하늘의 소리에 응답하여 하늘에 이르는 길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모음이 하늘로부터 인간에게 내려오는 계시적 특성을 지닌다면 자음은 그 사건을 근간으로 하느님에게 도달하려는 인간의 수행과정으로 이해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두 분께서 모음을 순수 한국어인 계소리(그곳의 소리)로 풀고 자음을 제소리(자기 소리)로 부르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47) 그러나 모음과 자음은 각기 상이한 의미만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실상은 둘이 합쳐져서 정음(正音), 곧 바른소리가 되듯이 하느님과 그리스도를 알게 하여 우리 민족을 그곳(계)으로 이끄는 구원의 메세지가 되는 것이다. 이점에서 한글은 그 자체로 하느님의 길을 담고 있는 복음이라 할 수 있다. 다석의 이러한 한글관은 삼재론을 토대로 한 이정호 선생의 중성기본음의 평면도와 입체도속에 잘 나타나 있다.48)




               (평면도)                      (입체도)

  

   또한 다석 선생은 ㅏㅑㅓㅕㅗㅛㅜㅠㅡㅣ라는 10글자의 모음을 다음처럼 풀어낸다. “ㅏㅑ아해들아 ㅓㅕ어서 ㅗㅛ와요, ㅜㅠ우흐(위)로 ㅡㅣ세상을 꿰뚫고 곧이 곧장”49) 이처럼 모음이란 이 세상을 꿰뚫고 하느님 계신 곳(계)으로 인간을 부르고 계신 하느님의 사랑, 마치 탕자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어버이의 간절한 마음을 계시하는 언어이다. 모음은 그 모습에서 드러나듯이 천지인 삼재(․ㅡㅣ)로 구성되어 ㅡㅣ를 뺀 나머지 8글자에 ․가 꿰어져 있으며 중모음에 사람을 뜻하는 ㅣ가 하나씩 첨가되어 있는 꼴을 취하고 있다. 이정호 선생은 이러한 중성, 곧 가운뎃 소리 모두에서 강조되는 것은 무엇보다 하늘의 역할이고 그 다음이 인간의 구실이라고 하였다.50) 다시 말해 모음 속에는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 되도록 하는 하늘의 끊임없는 활동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음양의 조화로 모든 만물이 생겨나며 사람이 하늘과 땅의 일에 참여하여 천지인 합일을 이루어 내라는 하늘의 명령이 바로 그것이다. 성리학자들이 우주의 본질을 誠이라고 불렀던 것도, 중용이 하늘의 본질을 誠者로 인간은 思誠者로 이해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일 것이다.

   모음을 구성하는 원리인 천지인 삼재에 대한 유영모의 신학적 해석 역시 이런 선상에 있다. 즉 ㅡ는 세상이며 ㅣ는 세상을 꿰뚫고 곧장 올라가는 고디신이고 ․는 태극의 신학적 풀이로서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 평등, 박애의 상징이 되고 있다. 본래 ․는 아무것도 없는 곳(무극)으로부터 점하나가 찍힌 현상, 즉 텅빈 무에서 어떤 것이 나오는 것으로서 태초의 시작을 감탄하는 소리인 것이다.51) 천지인 삼재의 순서를 거꾸로 하면서 유영모 선생은 삼재를 (ㅡ ㅣ ․)으이아로 부르고 있다.52) 우주의 원음으로서 으이아도 인간이 세상의 탐진치(욕심, 미움, 거짓)를 끊고 하늘로 올라가기 위한 힘씀(성품)으로 이해한다. 다시 말해 으이아로 세상죄의 수평선을 의의 수직선으로 뚫고 올라가서 아버지의 가슴 한 가운데 도달하는 가온찍이(點心)가 십자가라는 것이다.53) ㅡ와 ㅣ가 만나는 곳에서 생겨난 가온찍이 , 곧 십자가는 이정호 선생이 그린 기본 중성의 평면도 ╋를 통해서 그 의미를 전달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으이아는 극기복례와도 같은 것이라고 선생님은 보았다.54) 신과 자연과 인생의 일치(천지인 합일)가 십자가 와 같은 것이듯이 유교의 仁(극기복례)역시 천지인 삼재가 모여 인간 자신 속에서 하느님을 나타내 보이려는(제소리) 노력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다석 선생이 예수의 ‘예’를 계속 이어진다는 이어(시간)와, 여기라는  이에(공간)로 풀고 시간과 공간 속에서 가온찍이를 하는 분, 즉 가고 가고 영원히 가고 오고 오고 영원히 오는 시간의 한복판 속에서 자신의 참나를 만난 분으로 이해한 것도 역시 삼재론의 개념범주 속에서 가능한 일이었다.55) 결국 삼재론에 근거한 모음은 인간은 위에 갈 목적으로 이 땅에 온 것이며, 몸 속에서 정신이 터져나오는 절대시간과 절대공간을 얻고자 함을 알리는 하느님의 계시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음이해는, 필연코 자음을 만나야 민족을 구원하는 바른 소리(正音)가 된다.

   통용되는 한글 자음 14자 가나다라마바사아자차카타파하는 두분 선생님들에게 있어 인간이 하느님 말씀을 듣는 존재일 뿐만 아니라 땅을 딛고 서서 깨달은 진리를 실천에 옮길 책임이 있는 존재임을 알리는 하느님 은총의 산물이다. 구체적으로 자음이 하느님에게로 나아가는 길을 제시한다고 보는 것이다. 자음 14자에 대한 두분 선생님들의 풀이는 다음과 같다.56) 가: 내가 가야한다.(終日乾乾) 나: 나가마.(進德) 다: 모든 사람이 다 나간다.(修業) 라: 기쁨으로 나간다. 마: 어머니. 바: 아버지 어머니께로 나간다. 사: 살기 위해서 나가고, 아: 알기 위해서 나가고, 자: 자라기 위해서 나가고, 차: 찾기 위해 나가고, 카: 크기 위해 나가고, 타: 구름타고 나가고, 파: 꽃을 피우기 위해 나간다. 하: 하느님 끝에까지 나간다(進德修業). 이런 식의 자음 풀이는 발음기관을 형상화하여 만든 소리글자를 기독교적인 뜻글자로 읽어가려는 노력의 산물이라고 생각된다. 여하튼 두분 선생님들은 하느님께 나아가는 길을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를 통해 본을 보이셨다고 믿으며 자음의 발음을 변형시켜 자음속에 담겨진 구원의 메시지를 다음처럼 읽어내고 있다.57) 기니디리미비시이지치키티피히. ‘기니’: 그리스도께서, ‘디리미’: 십자가 위에서 자기자신을 제물로 바치는 것이, ‘비시이지’: 보이지 않느냐. ‘치’: 인류를 치켜 올리고, ‘키’: 인류를 키워 올리고, ‘티’: 인류의 좁은 속을 피워 깨치고, ‘피’: 진리의 꽃 보혈의 꽃 문화의 꽃을 피우고 ‘히’: 무한한 하늘 나라에 까지 끌어올린다. 기미란 본래 군자, 성인, 잘난 남자를 뜻하는 전라도 지역의 사투리라고 하는데 전통적으로 써오던 민중의 언어를 신학적으로 풀고 소리글자를 ‘뜻’으로 이해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준 길을 자음을 통해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음이란 하느님 아들 예수가 드리는 피(십자가)로 인해 모든 인류가 하느님에게로 향할 수 있게 되었다는 메시지라는 것이다. 그러나 인류를 하느님에게 이끄는 예수 그리스도는 정통적 의미의 속죄주 그리스도 역할과는 다르다. 바로 자음을 제소리로 명명한 것은 대속적 죽음에 대한 인습적 믿음을 요청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 생명이 계시된 세계에 대한 직접적 참여, 곧 관념적 자아가 아니라 실재적 자아에로의 인간 실존의 전환을 희망하였기 때문이다.  “네게메”란 다석의 조어는 이점을 잘 들어내고 있다. “니은(ㄴ)과 기역(ㄱ)이 합치면 미음(ㅁ)이다. 네와 게를 합치면 메다. 메는 먹는 것, 하느님께 드리는 제물이다. 나는 아버지께 드리는 제물이다. . .”58) 예수의 십자가를 아버지와 아들이 둘이 아니고 하나가 되는 (父子不二) 孝로 이해한 것도 같은 의미를 지닌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를 만큼 없이 계신 절대존대와 不二的관계를 맺어 얼나(가온찍이)로 거듭난 이런 예수가 두분 선생님들에게 ‘제소리로서 직접적으로 체험된 것이다.

  

   “제소리란 내가 나를 보았을 때 나오는 소리요 내가 나를 알았을 때 말하는 소리이다. 자기가 자기를 보지 못하며 자기가 자기를 알지도 못하는 하늘소리는 제소리가 아니다. 그것은 아무리 말해도 남의 소리요, 그것은 남의 말을 전하는 것  뿐이다.”59)


   자음이 제소리가 되기 위하여 아설순치후 다섯 소리가 제각기 변증법적인 발전과정으로 설명되는 것도 두분 선생님의 한글관에서 보여지는 특색이다. 3단계의 변증법적 경과는 역시 삼재관에 입각한 발상이라고 이해되고 있다. 앞서 본대로 한글학자 이정호는 어금니소리 ㄱㅋㅎ, 혓소리 ㄴㄷㄹㅌ, 입술소리 ㅁㅂㅍ, 잇소리 ㅅ△ㅈㅊ, 마지막으로 목구멍 소리 oㆆㅎ 등의 소리가 어디로부터 나온 것이며 무슨 형상을 본뜬 것이고 그리고 이 자음으로부터 시작된 단어들이 어떤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지를 밝혀 주었다. 여기서 보듯이 한글한자음은 저마다 삼단계로 발전한다. 그러나 이들의 변화는 다순히 양적이지 않고 질적이며 변증법적이다. 즉 ㅁㅂㅍ가 물불풀로 되는 것을 다석은 땅에서 물이 올라오고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서 이 땅위에 풀(생명)을 자라게 한다로 풀어내었다.60) 이것은 하늘과 땅이 만나 사람을 키워내야 한다는 뜻으로도 이해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물불풀은 무름, 부름, 푸름으로 이어지는데, 무름이란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아 자기가 없다는 맥락에서 하늘의 본성을 뜻하며, 부름이란 하늘의 뜻을 따르는 것이고 그리고 푸름이란 모든 것이 해결되어 큰 기쁨을 누리는 것으로서 그 의미가 질적으로 진전됨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무름이란 하느님(계소리)이요, 부름은 그리스도(가운소리) 그리고 푸름은 성령 안에서의 의와 평강과 희락(제소리)으로 해석된다. 天命之謂性, 率性之謂道, 修道之謂敎가 각기 이에 상응하는 개념으로 이해되는 것도 재미있는 부분이다.61) ㅅㅈㅊ이 삶잠참으로 전개되는 것도 같은 이치이다. 애벌레가 자고 나서 나비가 되듯이 땅의 인간이 하늘에 꼭 닿을 수 있는 인간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ㅅ이란 본래 인간의 생각처럼 생명의 새 싻이 날카롭게 위를 행해 자라나는 형상인바 삶이 잠이 되는 것은 생명이 억압되는 고난을 의미하며 잠이 참이 되는 것은 그 막혀진 고난 위로 새로운 희망의 점이 생겨나서 하늘 길을 향해 나가는 모습으로 풀어질 수 있는 것이다. oㆆㅎ도 이와 같은 이치로 설명된다. 무한성을 뜻하는 o이 ㅡ으로 인해 제한되고 막혀 있다가 그 위로 솟는 종점(終點)으로 인해 무한의 기운이 밖으로 소통되는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하늘에 이르러 안도의 숨(휴우)을 쉬는 것과 같다고 하겠다. ㅇㆆㅎ를 다석은 아들이 아버지를 찾는 울부짖음으로 보았다.62) 이렇듯 한글에 대한 신학적 해석은 삼단계의 변증법을 소리글자인 한글이 뜻 글자로 밝혀지는 도상에서 창조되어지고 있는바, 이 점에서 ․ㆆ△ㆁ 등의 사라진 글자를 되살려내야 한다는 다석의 주장은 호소력을 갖고 있는 것이다. 독립해서사는 사람을 뜻하는 ‘슨사온’이란 시에서 근긋귿���이란 표현이 여러번 나온다.63) ㄱ에다 ㄴㄷㅌ, ㅅㅈㅊ을 붙여서 생겨난 조어들이다. 이들 역시 자신들이 하느님 아들임에도(근긋) 그것을 잊고 이 세상의 탐욕과 더러운 정욕 등에 갖혀 살고 있었는데(귿�) 끌어올려 자기발로 선 온전한 사람(��)으로 만들고자 하는 뜻으로 풀어내었다. 목숨, 말씀, 말숨의 관계도 흥미롭다.64) 유영모는 하느님 말씀을 말씀이 내 안에서 자리하여 훨훨 타오르는 말숨(正音)으로 이해하는데, 여전히 삼단계의 질적 변증법을 통해 하느님께 이르는 길, 십자가(제소리)의 삶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외에도 선생님은 한글을 가지고 너무도 많은 말씀을 하셨다. 그가 남긴 『다석일지』는 한글을 가지고 힘차게 진리를 발견하여 하느님을 아는 백성이 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김흥호 선생에 의하면 다석의 한글이해는 몸으로 케내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한글 속에 숨어있는 진리를 밝히는 것이 소위 생각하는 사람들이 할 일이며 한글 속에 숨겨진 하느님 뜻이 풀리는 순간 한국에 정신문화가 수립되고 그로 인해 전세계가 생명력을 얻을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두분 선생님은 결코 국수주의자, 협소한 민족주의자가 결코 아니었다. 중국어로 쓰여진 고귀한 정신 세계를 모음과 자음의 세계에 맞게 한글로 풀어내어 의미론적 소통을 가능케 한 것이 구체적인 증거이다. 간혹 영어나 독일어까지도 한글의 진리를 담아낼 수 있는 그릇으로 사용하신 흔적도 남기셨다. 즉 곧귿곧귿(God good good God), 즉 하느님은 선하시고 선한분은 하느님이다.65) 한국인의 존재의 집인 한글 속에서 신학적, 종교적 의미를 발견하고 그를 근거로 보편성을 추구했던 다석과 현재 선생님의 작업을 동도동기론적 해석학으로 명명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제 궁극적 사유개념들을 삼재론에 입각하여 한글로 풀어내신 선생님의 몇몇 사상의 궤적을 살펴보고자 한다. 두분 선생님들은 중국 경전 속에 담겨진 심오한 뜻을 한글로 풀어내며 그것을 다시 신학적 언어로 언표함으로써 한자문명권 안에서 기독교의 토착화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두 분의 공헌은 한문을 철폐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신학적으로 풀이된 한글(뜻글자)을 통하여 한문으로 쓰여진 유불선의 저작들을 새롭게 읽어 내셨다는 사실에 있다. 바로 다석 선생의 노자 번역은 한문개념을 순수 한글로 풀어낸 대표적 작업으로 평가된다.66) 예컨대 聖人을 씻어난이, 無爲를 하잡없이, 無極을 없꼭데기, 그리고 虛空을 빈탕, 萬物을 잘몬, 君子를 그이로 번역하였다. 또한 使命을 ‘하여금’으로 풀어 무엇을 하되 한계(금)를 알고 하는 행위로 이해하였으며 成人은 얼을 지닌 존재, 곧 ‘얼은’으로 설명하기도 했다. 한글학회 위원인 홍일증은 다석 선생의 번역의도를 다음처럼 이해한다. 언어의 생리구조와 사고방식은 어느 민족이나 같지만 언어를 사용하는 사회관습이 저마다 다르기에 특정집단의 사고방식을 사용했으며, 따라서 어머니 말인 한글이 인간 심리저층에 깔린 의식을 잘 이끌어 낼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라고 했다.67) 그러나 이렇듯 그가 한자 개념을 한글로 풀어놓은 것은 결국 한글로 철학하는데 그치지 않고 민족이 한글을 통해 기독심(基督心)을 회복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基督心에 대한 유영모 선생의 글과 김흥호 선생님의 풀이를 읽어보면 분명해진다.68)


   “自行自止 夢朧弄幻 貪厭淫淪沈沒我 命生命死覺省悟 忘食貞烈炎吾.” : 내 마음대로 하고 내 마음대로 멎고, 그렇게 자기 중심으로 사는 것은 꿈이요 희롱이요 환상이다. 하느님의 명령으로 살고 하느님의 명령을 따라 죽는 것이 깬사람이요, 반성하는 사람이요, 주인이 되어 사는 사람이다. 먹기 싫도록 처먹고 응달에 빠져 사는 나는 지옥에 빠져 사는 나이다. 밥을 잊어 먹고 진리를 탐구하고 남녀를 잊어먹고 하느님 나라를 일으켜 세워가는 이가 하느님의 불꽃이요, 하느님의 아들이요, 이 세상의 주인이다. 그리스도는 생명의 근원이요, 세상의 주인이다. 그리스도인은 생명의 근원이요 세상의 주인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옷’에 대한 김흥호 선생님 자신의 글 곳에서도 한글의 신학적 해석학은 분명하게 나타난다.69) ○(하늘) ㅣ(사람) ㅡ(땅)을 가지고도 풀리지 않는 인간의 문제가 자기 밖의 한점인 人, 곧 그리스도라는 받침을 갖게 될 때 탐진치로부터 해방되어 인간이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직도 옷 입지 못하고 벌거숭이로 살고 있는 이 민족에게 그리스도의 옷(人)을 입힐 때 민족의 구원이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바로 이것이 본래 ‘위’를 뜻했던 ‘옷’에 대한 신학적 이해이다. 그러나 이분들에게 있어 그리스도란 무엇인가? 신과 자연과 인생을 일치시켜내는 것, 즉 가고가고 여전히 가고 오고오고 여전히 오는 시간의 한복판에서 자신의 참나를 만나는 일, 몸속에서 정신이 터져나온 절대시간과 절대공간의 자리를 말함이 아니던가? 시간과 공간 속에서 자신을 찍음으로 스스로 가온소리가 되어 계소리와 하나되는 제소리를 내게 하며 없이 계신 그분과 절대 귀일 하는 세계로 우리를 이끄시는 분이시다. 이는 인간의 목숨이 하느님 말숨(말씀)을 만나 얼숨이 되는 과정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을 찾는 것은 말씀을 통하는 길밖에 없는데 말씀은 글이라고 하고 그리스도라고도 한다.”70) 즉 글을 그를 그리는 것으로, 월을 위에 간 얼로 푸신 것은 한글이야말로 이 민족으로 하여금 거기(계)를 향해 올라가도록 이끄는 안내문, 곧 계시적 특성을 지니고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71) 여기에서 말숨은 바로 한글인데 문장(文章)을 글월로 번역한 다석 선생의 해석이 참으로 의미깊다.



4장: 한글로 신학하기의 영성- 동도동기론적 기독교 이해


   이상에서처럼 두분 선생님은 한글 속에서 하느님 계시를 보았고 그 뜻을 민족에게 구원의 소식으로 널리 알리고자 하셨다. 두분에게 있어서 한글의 존재는 하느님의 영이 우리 민족에게 한번도 단절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징표이기도 하다. 이러한 신학적 해석학은 한글이 중국의 역학체계로부터 비롯되었지만, 삼재론 중심의 음양오행론을 근본원리로 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다고 보인다. 그렇다면 한글의 신학적 해석학 속에 담겨있는 영성적, 세계관적, 실천적 의미는 무엇인가?

   앞서도 말했듯이 한글로 신학함에 있어서 근본적인 것은 모음의 기초를 이루는 삼재사상이었다. 다석 선생은 모음을 계소리, 인간을 부르시는 하느님의 계시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계’란 눈에 보이는 현실 세계에 속하여 있지 않다. 이는 삼재론의 세계관이 보이지 않는 영의 실재를 강조하였고, 공간을 수직으로 이어보는 이해의 눈을 가졌으며 그리고 하늘과 땅을 잇는 인간의 역할을 중요하게 인식하였다는 사실과 맥을 같이 한다. 특별히 사고의 출발점을 보이지 않는 세계(靈)로서의 ‘없음’에서 이해하는 것이 삼재론의 특징이었다. 삼재론의 이런 특성은 없이 계신분으로서의 하느님 이해를 촉발시켰다. 모든 류의 상대세계를 부정하고 이를 존재케 하는 하나로서의 절대세계를 그리도록 했던 것이다. 여기는 불교로부터 배운 바도 적지 않다. “不二면 卽無이다. 상대가 없으면 절대이다. 절대는 無이다. 상대적 有, 상대적 無도 아닌 것이 不二이다. . . . 우리가 참으로 不二卽無하면 상대세계의 종노릇을 벗어날 수 있다”72) 바로 유일무이한 절대근거는 다석에게 절대공, 빈탕 그리고 허공이라는 불교적 용어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다석이 현실 유교를 비판한 것도 이런 맥락 하에 있다. 즉 본래 없이계신 하느님과 父子不二관계에 있어야할 유교가 없이계신 분과의 관계를 망각하고 가시적 대상인 임금과 조상에 대한 충성과 섬김으로 변질되어 갔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다석 선생은 송대 성리학이 발견했던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이란 이론에 주목하였다. 눈에 보이는 대상에 집착된 타락한 유교의 종교성을 구할 수 있는 길을 주렴계의 태극도설, 곧 태극의 근원적 절대성을 무극으로 표현하여 궁극적 존재인 태극의 규정불가능성을 말한 이 학설에서 찾고자 했던 것이다.73) 이는 다석 선생에게 있어 인간을 부르시는 하느님의 자리, 계가 현실세계에서는 인식될 수 없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점에서 철학자 이기상은 있는것(存在, 有)에만 관심이 머물러 한번도 사유의 대상이 되어보지 못한 없는 것(無, 허공)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서구 기독교에게 부여했다고 적극적으로 평가한다.74) 어둠이 빛보다 크고, 무가 유보다 깊으며 존재보다 비존재가 더욱 근본적인 것을 가르쳐 주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성스러움과 거룩함의 영역을 없음, 무, 빈탈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작은 물체를 있다고 하고 큰 허공을 없다고 한다. 無는 빈 것이요 有는 찬 것이다. 사람은 찬 것을 좋아하고 빈 것을 싫어한다. 동시에 큰 것을 좋아하고 작은 것을 싫어한다. 이것이 모순이 아니겠는가. 큰 것을 좋아하며 빈 것을 싫어하고 찬 것을 좋아하고 작은 것을 싫어하니 모순이 아니겠는가. 큰 것은 비고 찬 것은 작은 것인데 큰 것을 가지며 빈 것은 버리고 찬 것은 가지며 작은 것을 버리겠다니 말이 않된다. 작고 작을수록 아름답고 조심스러우며 크고 클수록 안전하고 원대하다. 가장 작은 것이 나고 가장 큰 것이 하느님이다. 나는 언제나 조심하고 하느님께는 언제나 간절하여야 한다.”75)


   이기상은 또한 이러한 빈탈(없음)이 존재의 세계가 아니라 되어감(생성)의 세계의 근간이 됨을 지적한다.76) 종일 건건(終日乾乾)을 자신에게 주어진 명령(生命)으로 알고 사셨던 다석의 삶이 그렇듯이 끊임없이 변화해 가는 우주생명과정에 참여하기 위하여 인간은 자신을 고집하지도, 시공간에 집착하거나 매달리지 않고 변화속에 자신을 맡겨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변화와 생성 중에 있는 우주 생명성의 본질적 근원을 직관했을 때 그로부터 터져 나오는 근본 개념이 바로 없음(無)이란 사실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자신의 삶을 소진시켜 다른 삶을 만들고 스스로 無속으로 사라져 버린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종일건건토록 살도록 삶을 명령으로 받는 존재는 없이 계신 분을 따라 삶이 계속 이어지도록 자신의 삶을 불사를 책임이 있다. 이로부터 우리는 천지인, 곧 하늘과 땅과 인간이 하나가 되어 상호 교감하여 살리는 삼재론의 의미를 재창출해낼 수 있다고 본다. 이렇듯 우주생성 과정 속에 존재하는 없이 계신 하느님은 우주의 역사가 150억 년 이상 되었고 지금도 우주가 계속해서 확장되고 있다는 과학적 발견들이 제시되고 있는 시점에서, 그리고 46억만년 이상 된 하나밖에 없는 생명공간인 지구가 인간의 탐욕과 무절제로 사실 적 종말의 위기 하에 있다는 현실 속에서 동양적 기독교가 제시할 수 있는 복음, 구원의 소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 본다.

   이와 연관된 사안으로서 삼재론의 두 번째 특성은 하늘과 땅을 잇는 인간역할의 강조이다. ․ㅡㅣ를 근간으로 단모음이 만들어지고 모든 단모음에 인간을 뜻하는 ㅣ가 하나씩 첨가되어 중모음이 만들어지는 것을 우리는 앞서 지적했었다. 다석 선생님은 하늘과 땅 사이를 잇는, 하늘을 이고 땅위에 사는 인간의 모습을 ‘긋’이라고 말하였다.77) 소리글자인 한글을 뜻글자로 상형문자로 읽으려 했던 유영모 선생님은 긋을 가로로 그은 ㅡ을 세상으로, 그 밑의 人은 사람으로, ㅡ위에 있는 ㄱ은 하늘로부터 무엇인가 아래로 내려보내는 정신으로 설명하셨다. 다시 말해 ‘긋’이란 몸속에서 하늘의 정신이 터져나와(제소리) 그 끄트머리를 들어낸 것을 뜻한다. 마치 땅 밑씨알의 싹이 하늘의 빛이 그리워 움트듯이 이 땅에 사는 인간이 하늘을 뚫고 올라 하늘을 이마에 이고 어깨에 지는 삶을 사는 것이다. 이마란 본래 니마라고 하늘에 있는 神을 뜻하는 고대어에서 나온 것이다.78) 그렇기에 유영모 선생은 이마를 내님을 맞을 이마라고 하였다. 이마를 지닌 인간은 향일성의 식물처럼 하느님을 그리워하고 찾으려는 본성을 자신 속에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다. 바로 이 본성이 터져나와 그 끄트머리를 드러낸 것이 긋이며 그 끝이 나왔다고 해서 나(生)이며 나(我)가 된다고 했다. 그렇기에 이땅에 태어난 인간인 자신이 자신의 주인이 될 수 없다. 태어난 나는 하늘의 긋이며 없이 계신 분의 긋이며 얼의 긋이기 때문이다.

   이점에서 다석 선생은 인간의 바탈, 인간의 본성, 곧 얼나에 대해서 많은 말을 하고 있다. 없이 계신 하느님, 인간의 이성으로 알 수 없는 이러한 무(無)를 다석은 얼 이라고 보았고 그로부터 나온 나를 바로 얼나(얼은)라고 했던 것이다. 현대적 관점에서 말하자면 얼이란 인간이성과 구별되는 영성에 해당하는바 없이 계신 분께 가는 길이 자기 마음속으로 들어가는 길 밖에 없음을 지시한다.


   “예수의 생명과 神의 생명은 얼의 생명으로는 한 생명이다. 예수의 얼을 씨라고 하면 한아님의 얼은 나무다. 나무는 씨의 근원이다. 예수도 한아님으로부터 왔다. 그리고 씨가 터나오면 또 나무가 된다. 이것이 하느님께로 돌아간 것이다. 예수의 얼만 씨가 아니라 모든 사람의 얼도 다씨다. 이것을 알려주는 것이 종교이다.”79)


  이점에서 다석은 주기도문을 대단히 애송하였다. 얼나로 거듭나서 없이계신 하느님과 하나되기를 바라는 인간의 참말이며 숨쉼이기 때문이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어 이에(예수) 숨쉬는 우리 속에 밝은 속알(바탕)이 밝아 더욱 나라 찾음 이어지이다. 우리는 삶에 힘씀으로 우리 새힘이 나고 우리 지는 짐이 우리를 누르지는 않게 되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먹이를 주옵시고 우리의 오늘이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데 먹히어지이다. 우리가 이제 땅에 부딪힌 몸이 되었아오나 오히려 님을 따라 위로 솟아 갈 줄 믿습니다. 사람사람이 서로 바꿔 생각을 깊이 할 수 있게 하옵소서. 고루 사랑을 널리 할 줄을 알게 하여 주옵소서”80)


   그러나 다석 선생은 인간 삶속에 있는 탐진치의 실상을 결코 간과하지 않았다. 인간의 몸 자체를 부정하지 않았으나 몸과 결부된 식과 색의 욕망을 극복하기가 쉽지 않음을 인정한 것이다. 여기서 유영모는 무, 없음의 자아 부정의 원리 속에 유교적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실천원리를 채워 넣음으로 본 문제를 극복하려고 하였다. 삼재론의 세계속에서 불교와 유교가 창조적으로 만나게 되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분에게 있어서 유교의 효(孝)란 본래 없이 계신 하느님과 하나가 되고 父子有親하려는 유교적 종교성을 뜻한다. 이점에서 예수도 하느님 영을 받아 얼나로 솟아나서 절대일자와 부자(父子)불이(不二)적 관계를 이루신 분, 부자유친을 이룸으로 땅의 집착과 몸의 유혹이 끊어지고 얼나로서의 절대 생명으로 탄생하신(얼은) 분으로 고백된다. 이런 예수의 얼이 하느님의 영이며 이 영은 언제라도 그쳐진 적이 없으며 어떤 인간에게도 없어 본적이 없다고 말한다. 내 속에 있는 하느님의 씨, 속알이 바로 예수의 참 생명이자 나의 참 생명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다석 선생의 동양적 기독교는 존재 중심적이고 로고스(이성)중심적 또는 인간 중심주의적이지 않다. 없이 계신 하느님(無)이 중심이듯이 대속적 죽음을 강조한 전통적 속죄론과는 다르게 성령론적으로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다.81) 얼나를 깨닫는 것이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고 그리스도를 아는 자는 이미 없이 계신 하느님과 만난 것으로 보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성령 중심의 기독교 이해는 모든 인간이 머리를 하늘을 향해 두며, 끊임없이 형이상학적 욕망을 갖고 살아가는 존재라고 하는 성선론적인 동양적 인간관과 만나며 특별히 ․ㅣㅡ 기본음에 ㅣ를 첨가하여 만들어진 모음이 인간을 위로 부르는 하늘의 소리라고 하는 삼재 중심의 한글이해로부터 가능한 담론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상과 같은 한글로 신학하기의 영성, 곧 동양적 기독교의 본질에는 땅과 관계된 것, 여성적인 부분이 생략된 것처럼 보인다. 보이지 않는 영의 세계와, 하늘과 땅을 잇는 얼나로서의 종교적 영성만이 강조된 듯 생각되는 것이다. 그러나 한글의 자음이 농경문화의 산물인 음양오행론에 근거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땅의 논리를 반영함을 부정할 수 없다. 영의 세계만이 아니라 인간 중심의 사회가 말해지고 하늘과 땅의 수직 구조로부터 수평구조로의 이행이 언급되고 있는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땅의 논리가 삼재론과 전혀 무관한 것은 아니다. 즉 음양행론에 따라 발음기관을 본따서 만든 자음이 ㄴㄷㅌ, ㅁㅂㅍ, ㅅㅈㅊ, ㅇㆆ-ㅎ 등이 생명의 변증법적 전개 과정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땅에서 생겨난 일상의 일로부터 하늘을 향하는 전 과정이 세 단계로 표현되어 있다는 사실은 음양오행론이 삼재론 중심으로 재구성되었음을 뜻하는 바이다. 물불풀, 삶잠참에 대한 해석 등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이 점에서 정호환은 배달겨례의 전통적인 믿음의 대상은 ‘님’ 혹은 니마로 불리우는 하늘(소원)神과 ‘고마’로 일컫는 땅의 神이었다고 본다.82) 따라서 모든 생명은 니마와 고마, 곧 하늘과 땅이 함께 만들어 낸 산물인 것이다. 이것은 하늘의 소리를 듣고 땅으로부터 삼단계의 질적 변화를 통해 하늘로 올라 얼나가 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땅으로부터 생명이 움트는 역동적 과정을 보며 한국인들은 믿음의 세계로 들어 갈 수 있었다.83) 오늘날의 밑에 해당하는 단어 ‘믿’이있는데, 이것은 공간적․시간적 바탕이자 심리적인 근원적 의미로 환치될 수 있는 것이다. 더욱 본질적으로 이것은 ‘믿’의 초성인 순음 ㅁ이 갓난아이가 처음 말을 배울 때 ㅁ(엄)소리를 내는 것처럼 모든 언어의 시초이며 근본이 됨을 환기시켜준다. 이러한 땅의 소리는 생명 작용을 뜻하는 살다라는 단어의 의미를 통해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살다란 본래 불사름을 뜻하는 다(燒)에서 온 것으로 사람이란 말이 이로부터 파생되었어진 것이다.84) 또한 죽었던 불이 다시 타오르는 것을 살아난다고 하며 시들어 메마르던 풀이 단비를 머금고 소생하는 것도 ‘살아난다’고 하며 반대로 꺼져가는 것을 사라진다라고 일컫는 것도 모두 불사름과 관계된다. 이점에서 인간의  살이 먹은 음식의 연소현상으로 인해 생겨난 것이듯이 지구의 살이자 삶의 바탕인 흙도 화산작용을 통해 이루워 진 것인바 이 흙의 옛 형태인 이 본래 같은 말이었다고 하는 것도 의미 깊다.85) 생태학의 어원인 희랍어 οίκος가 생명 공간, 즉 모든 생명체가 거주하는 집을 뜻하며 생명공간 내의 으뜸법칙이 모든 것을 모든 것과 더불어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해 본다면 서로 만나서 관계를 맺고 자신을 불살라 변증법적으로 생성해 가는 전 과정을 보여주는 한글 자음은 땅의 논리, 곧 생명 사상의 모든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말의 살림살이 역시 살리는 일을 사는 것인바 이것은 영어의 살다(live)라는 말보다 몇 배의 강도를 갖고 있는 것으로 자음의 속뜻을 반영하고 있다고 본다. 이 점에서 사랑이란 것이 인간과 인간간의 관계에서만이 아니라 전 생명체들 간의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살림살이의 대 원칙이라고 본다면 사랑이란 말 또한 (燒)앙〉랑을 어원으로 하여 유래되었다고 보는 관점이 타당성을 갖을 수 있다.86) 동학의 시천주(侍天主), 양천주(良天主), 체천주(体天主), 즉 우주의 생명(얼)을 내 안에 모셔서 자라게 하고 그것을 이 땅에 구현시켜 내려는 사상, 모든 만물과 만나 그것들을 살려내는 일을 하겠다는 접화군생(接化群生)의 풍류도는 모두 사랑의 우주 생명적 의미를 밝혀 내주는 것이라 하겠다. 앞서도 언급했듯 김지하가 율려 사상을 통해 고통받고 있는 우주는 자신의 대 변혁을 위해 우주적 휴머니즘의 비전을 체득한 영성적 인간(신인간)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탄식하고 있는 전 피조물들이 하느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성서 말씀(롬 8:18-25)을 상기시킨다. 바로 삼재론 중심의 음양오행론을 근간으로 구성된 한글 28자로부터 우리는 이런 新人間, 神人間을 기대할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이 민족을 예수의 얼로 거듭나게 하는 존재 생기의 사건이 한글을 통해 가능한 것은 분명 성령의 역사임에 틀림없다. 다석 유영모는 이런 글을 기도를 통해 얻으셨고, 현재 김흥호 선생 역시 기도를 통해 그 뜻을 우리에게 풀어내어 주신 것이다.


나가는 글.

   이상에서처럼 두분 선생님들은 한글을 하느님의 계시가 담겨진 그릇(祭器)으로 보았다. 천지인 삼재 사상을 근간으로 만든 모음과 음양오행론에 따라 발음기관의 모양으로 만들어진 자음을 각기 인간을 부르는 하늘의 소리로, 인간이 땅으로부터 전적으로 변화하여 하늘에 이르는 응답으로 해석되었다. 소리글자인 한글이 뜻글자로서, 더욱이 신학적, 계시적인 의미로 읽혀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한글로 신학하기는 이땅의 백성이면 누구나가 할 수 있는 일이다. 종교적 진리가 머리를 사용하는 소수의 전문 지식인에 의해 독점되는 것이 아니라 삼재론 중심의 음양오행론의 틀 속에서 생활해온 생활 민중들에 의해 해독될 수 있는 것이다. 한자가 아니라 한글로 제 뜻을 펴기 원했던 것처럼 한글로 하느님 계시, 하느님 존재를 자신 안에서 깨달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는 이를 동도동기론적 해석학이라 불렀고 한번도 끊어져 본적이 없는 성령의 활동으로 이해하였다.

   유영모, 김흥호 두분 선생님은 한글 속에서 없이 계신 하느님을 말했다. 우주적 생명의 본질이 본래 있음에 있지 않고 비움에 있음을 깨닫게 하신 것이다. 동시에 이러한 비움은 철저하게 ‘我’의 흔적을 버릴 것을 요청하고 있다. 하늘의 소리에 응답하기 위해 자신의 삶을 불살라야 한다는 것이다. 비움 속에서만 인간은 하늘의 소리에 응답하며 그와 하나가 될 수 있다. 이 점에서 효(孝)는 없이 계신 아버지 하느님과 하나가 되려는 인간 살음의 목적이자 사람의 존재이유가 된다. 비움은 또한 우주생명의 화육을 돕는 생명원리의 길이기도 하다. 我가 사라진 빈탈의 상태에서 진리가 인식되며 우주의 공진화를 이룰 수 있는 참된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믿음이 대상(有)을 지향하게 되고 율법화, 교조화되고 있는 시점에서 없이 계신 분에 대한 자각은 신학적 행위가 머리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몸의 깨달음과 관계됨을 환기시켜 준다. 이것은 하느님 형상이란 개념이 이성적 존재, 정신, 영적 특성이 아니라 인간의 구체적 몸으로 이해되기 시작했음과 일치를 이루는 부분이다.87) 없이 계신 하느님에 대한 신앙적, 신학적 깨달음으로 ‘얼’이란 말이 다석 선생님에게 많이 사용되고 있는데, 이는 몸과 무관한 정신이라기 보다는 영육을 아우르는 하느님 형상에 대한 동양적 표현이라 생각한다. 본래 얼은 우주 창생의 근원인 태극이자 삼재의 으뜸인 天(․)을 안쪽에 품고 있는 형상으로 아직 그 존재를 드러내지 않고 있는 상태를 뜻한다. 다시 말해 우주 전체를 가득 채우고 있되 그 형태를 드러내지 않는, 없이 있는 것이 바로 얼이라고 하는 것이다. 바로 이 얼로부터 태어난 인간이 씨이다. 자신속에 하느님 얼을 바탈로 지니고 있음을 온몸으로 깨달아 우주 변화 및 화육의 주체로서 존재해야 하는 것이다. 인간은 바로 이런 변화를 땅에서부터 경험할 수밖에 없다. 땅은 한글 자음이 지시하듯 성숙과 완성을 위해 변증법적 변화과정이 일어나는 공간이다. 씨의 ㄹ이 바로 활용하는 생명, 곧 변화자체를 의미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분열과 상처, 파괴가 난무한 현 세계 안에서 씨로서의 우리의 자각은 변화의 방향을 하늘로 이끌어 간 것이다. 바로 이것이 한글이 주는 신학적 의미이며 하느님 계시의 드러남이라고 믿는다. 가온소리로서의 예수의 얼은 이렇듯 우리에게 제소리를 내도록 이끄는 성령의 역사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