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와 참말을 모시고 산 유영모의 영성
김흥호
기독교사상 2000-12월호, 통권 504호, 2000
유영모 선생님은 경신학교 2년을 마치고 이십대에 오산학교의 물리화학 선생이 되었다. 그는 천문학을 조리하여 5, 60배의 망원경을 가지고 별의 운행을 관측하는 것이 취미였다. 그 때 같이 간 사람이 이광수였는데, 춘원은 영어, 국어를 가르쳤다. 이들은 당시 최고의 지성들이다. 그들은 확고한 인생관과 민족애를 가지고 민족을 살리자는 계몽잡지에 힘있는 글을 싣는 작가들이었다. 그 당시 실은 글들 가운데 유영모의 '무한대'라는 장시(長詩)는 현대인의 눈으로 읽어도 그 장엄한 우주관에 옷깃을 여미게 한다. 이광수는 유영모를 시계와 같은 사람이라고 했다.
유영모는 30대에 조만식의 뒤를 이어 오산학교의 교장이 되었다. 그때 4학년 학생이던 함석헌에 의하면 교장실 의자는 등받이가 잘려 있었고, 벽에는 왕양명의 험이(險夷)의 시가 걸려 있었다고 한다. 등받이가 잘렸다는 말은 아무 것에도 의지하지 않는다는 독립정신을 상징한다. 영하 25-6도로 내려가는 평북에 가서도 유영모는 아침마다 냉수마찰은 거르지 않았다. 청결을 유지하려는 버릇은 평생 마찬가지였다. 그는 조만식 선생을 흠모하였다. 엄동설한에 새벽에 일어나서 아이들이 자는 학교기숙사에 새벽불을 때어 아침방을 데워 주고 대변소의 분봉(糞峯)을 깨고 소변소의 빙판을 깨는 것이 고당 조만식 선생의 일상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단추 달린 노동복을 입고 언제나 학생들 앞에서 첫째 단추는 깨끗, 둘째 단추는 정직, 셋째는 진실, 넷째는 근면, 다섯째는 절약이라고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유영모는 오산에 가서도 성경강의를 계속했는데, 이승훈도 가끔 참석하였다고 한다. 그 당시의 신앙생활은 조국애와 다른 것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조국의 해방을 주시는 하나님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국을 해방시킬 군사는 깬 젊은이들이기에 그들에게 교육은 해방의 유일한 방법이었다. 안창호가 대성학교를 세우고, 이승훈이 오산학교를 세우는 것도, 그것이 독립의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산에서 돌아온 후에도 유영모는 이상재의 뒤를 이어 종로 기독청년회에서 민중계몽강연과 매주 금요일 성경강의를 했다. 뜻있는 젊은이들이 모여드는 곳이었다. 성경강의는 45년 계속되었다.
그런데 유영모에게는 언제나 고민과 불안이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만이 조국독립을 가져다줄 수 있는 해방주이기에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는 이스라엘백성처럼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데, 유영모는 도무지 믿음이 생기지 않는 것이었다. 승동교회에서 16살에 세례를 받고 밤낮 성경을 읽으며 남에게 예수 믿으라고 성경을 가르치면서도 자기 자신은 믿음이 생기지 않는 것이다. 애국정열에 불타던 유영모에게 다른 사람을 가르치던 전도자에게 믿음이 없다는 것은 치명적인 고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그가 말하는 믿음이 없다는 내용이 무엇인지 물어본 적이 없다. 다만 그가 믿음을 영생 (요 3:16) 이라고 해석하고, 하나님을 알고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 (요 17:3) 이라고 주장한 것을 회상해 볼 때, 유영모에게는 하나님의 부활과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언제나 걸림돌이 된 것이 아닐까 짐작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그가 얼마나 처절한 고민에 빠져 괴로워했을 것인지는 아는 사람만이 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빨리 믿음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베데스다 못가에서 38년이나 기다리던 앉은뱅이처럼 유영모도 38년만에 하나님의 연못으로 뛰어들게 된다. 그는 처음으로 하나님의 말씀(命令)이 영생임을 깨닫게 된다 (요 12). 그는 자기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를 믿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그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셨기 때문이다. 나는 유영모가 본 하나님의 형상이 어떤 것이었는지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이었는지 역시 물어보지 못했다. 그는 다만 '빛'이라고만 말하고 '생명'이라고만 말했으며, 그 날이 1월 4일이기에, 요한복음 1장 4절 '생명은 빛'이라고만 적어놓았다.
유영모가 그때까지 꼭 한 가지 빈 것은, "옳은 이를 뵙자고, 참을 찾자고 반백년 동안 목이 말랐었습니다. 누리를 하나 되게 하실 이가 과연 누구일까요. 옳으신 그 어른이리니 우리 님이시여, 꼭 한 가지만 이루어 주시옵소서. 이 나의 마음을, 이 만물보다 거짓된 나의 마음을 뿌리째 뽑아 버려 주옵소서. 그리 되오면, 그 뿌리 뽑힌 속의 속에서 용솟음쳐 나오는 샘물이 강이 되어 흐를 줄 믿겠나이다." (요 7:37, 예레 17:9) 였다.
"이것 나는 죄, 저것 세상은 악인데 가운데 한 길이 있으니, 의(義)이니, 예수이니, 세상을 이기고 �으로 (위로) 솟아나려는 이만 갈 길이다. 아멘, 옳습니다 (제소리 360). 꼭 하나의 기도는 종래 이루어진다. 내가 형제들에게 간증해야 할 것은, 내가 과거에 형제들에게 분명히 말한 것처럼, 내게 실천력을 주는 이가 있으면 그가 곧 나의 구주시다."
내가 예수를 따르되 실행력이 예수로부터 친원(親援)되지 않는 한, 예수만 바라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 내포된 말이었다.
"생(生)이 중생(重生)한 오늘에 증거할 말씀은, 예수의 이름은 오늘도 진리의 성신으로 생명력을 풍성하게 내리신다 이다."
"주와 나 : 주는 누구시뇨. 말씀이시다. 나는 무엇일까. 믿음이다. 주는 한울(하늘)에 가셨다 하나 말씀은 여기 계시다. 나는 죽겠으나 믿음은 살겠다."
말씀대로 믿음. 무조건 항복
1. 아버지께 가는데 예수 길 되시니
참말 삶에 나감은 믿음으로 얻네
진리의 성신이 퍼붓듯 오실 제
죄와 의와 심판이 바로 �저 나네
註) 내가 곧 길이요, 삶이니 나로 말미암지 아니하면 아버지께로 올 사람이 없으리라 (요 14: 6).
2. 모든 걸림 헤치며 아바 찾아 옐
졔 세상 이긴 인자로 앞을 서 주시네
註) 세상에 있을 제 너희가 환란을 받으나 안심하라.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 (요 16: 33).
3. 일 다 일운 말씀이 집에 돌아갈 제
보혜사를 보내마, 떡먹듯이 했네 (요 16: 7) (제소리 357).
유영모는 부르신 지 38년만에 믿음으로 들어간 경로를 김교신이 발행하는 성서조선에 상세하게 적었다 (제소리 353). 그리고 믿음에 들어간 이의 노래를 적었다.
나는 시름 없고나, 이제부터 시름없다.
님이 나를 차지하사 (占領) 님이 나를 맡으셨네 (保管).
님이 나를 가지셨네 (所有).
몸도 낯도 다 버리네. 내 것이라고는 다 버렸다.
죽기 전에 무엇을 할까. 남의 말은 어떻게 할까. 다 없어진 셈이다.
새로 삶의 몸으로는 저 '말씀'을 모셔 입고
새로 삶의 낯으로는 이 우주(宇宙)가 나타나고 모든 행동(行動) 선(線)을 그니
만유물질(萬有物質) 늘어서 있다.
온 세상을 뒤져 봐도 그 곳에는 나 없으니
위이무(位而無)인 탈사아(脫私我)되어 반짝 빛 (요 1: 4).
님을 대한 낯으로요, 말씀 체(體本)한 빛이로다.
님 뵈옵자는 낯이요, 말씀 읽을 몸이라.
사랑하실 낯이요, 뜻을 받들 몸이다.
하나님은 유영모에게 나타나 주셨다. 유영모의 낯은 님 뵈옵자는 낯이 되고 만 것이다. 하나님은 유영모를 믿게 되었다. 그는 38년만에 믿음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유영모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유영모를 믿게 된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빛, 환빛, 영광으로밖에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는 진리를 깨달은 참사람이 된 것이다. 함석헌에 끌려 유영모를 찾아간 서영훈은 유영모를 보는 순간 참사람이라는 깊은 인상을 받았다. 하나님을 만난 순간 유영모의 영성은 깨어나기 시작한다. 그는 믿음의 반석 위에 높이 서게 되었고, 그의 시간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잘리게 되었으며, 그의 눈빛은 날아가는 새의 그림자도 그릴 수 있을 만큼 강한 직관력을 가지게 된다. 하나님을 만나는 순수직관은 그에게 만유를 보게 하는 본질 직관의 눈을 뜨게 하였으며, 하나님을 만나는 근원적 체험은 그에게 근원적 시간을 살게 했다.
유영모가 하나님의 모습을 빛으로 밖에 표현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모습을 알 길이 없다. 또 그가 받은 생명은 말씀에 있고 말씀은 사람의 빛이라 하였는데, 그 말씀이 어떤 말씀인지 물어보지 못했으니 영 알 길이 없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난 후 그의 사는 모습을 보아 우리는 그 말씀이 어떤 것인지 대충 짐작할 수가 있다. 그것은 유영모가 받은 하나님의 새 계명이다. 그것은 하루에 밥은 한끼만 먹는 것, 남녀관계를 끊는 것 (그는 자기 아내와 해혼을 한다), 앉을 때는 무릎을 굴하고 앉는 것, 그리고 어디나 걸어 다니는 것으로, 그는 이 네 가지를 십자가의 길이라고 했다. 십자가란 속죄(贖罪)라는 뜻인데, 일식(一食)을 통하여 그는 탐욕(貪慾)에서 벗어나고, 일언(一言)을 통하여 치정(癡情)에서 벗어나고, 일좌(一座)를 통하여 진에(瞋恚) [1]에서 벗어나고, 일인(一仁)을 통하여 허위(虛僞)에서 벗어난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부활의 체험이요 그리스도를 따른 것이 십자가의 경험이다. 그 길은 그로 하여금 탐진(貪瞋) 치사(痴邪)의 죄에서부터 벗어나게 하다. 하나님의 말씀, 새로운 그리스도의 계명이 실천될 때, 그것은 그에게 속죄하는 십자가였다.
유영모는 새 계명을 십자가의 도(道)라고 하고 평생 이 길로 일이관지(一以貫之)하게 된다. 이층에서 떨어져 거의 한 달 동안 병원에서 의식을 잃고 있는 중에도 그가 무의식 속에서 주장하는 것은 일식(一食)이었다. 그는 언제나 한끼를 먹었다. 잡곡밥 한 그릇, 두부를 넣은 김치찌개, 고기는 일 년에 한두 근 정도, 그리고 감자, 고구마, 채소, 과일 등을 좋아했다. 잠은 언제나 나무 판대기 위에 담요 한 장을 깔고 목침을 베고, 겨울에는 담요 두장을 덮고 혼자 잤다. 잠자는 시간은 네 시간, 코를 골면서 깊이 잤다. 꿈꾸는 일은 거의 없고, 잠이 들면 칼로 찔러도 모를 정도로 숙면을 했다. 그리고 한 주일 한두 번 나가는 종로 YMCA까지 그는 20리 길을 언제나 걸어 다녔다. 유영모는 지각이라곤 한 일이 없다. 시계 같은 사람이었다. 15일 금식기도 한 후에 몸이 많이 쇠약해졌어도 걸어 나왔다. 사모님이 염려하여 따라왔지만, 그래도 무사히 걸어서 돌아갔다. 그는 한때 개성을 당일에 걸어갔다 온 일이 있다. 그리고 인천 율목교회에도 설교하러 걸어갔다 걸어왔다. 그 다음날 학생들과 같이 백우대에 올라갔을 때도 언제나 앞장서서 팔팔 날아갔다. 우리는 유영모의 몸을 영체(靈體)라고 하기보다 기체(氣體)라고 했다. 어디서 나오는 힘인지는 모르나 생명력으로 꽉 차 있었다. 예수님께서 부어 주신 힘임에 틀림없다. 유영모는 언제나 무릎 꿇고 앉은 것이다. 그는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열 시간이고, 무릎을 꿇고 앉는다. 일식(一食), 일언(一言), 일좌(一座), 일인(一仁)은 십자가의 고행(苦行)이다. 이 고행을 통해서 죄는 사함 받고 성령이 충만한 영체가 되는 것이다.
유영모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었으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산다’ (갈 2:20)는 것을 위이무(位而無) 탈사아(脫私我) 라고 했다. 탈사아(脫私我)한 죄없는 몸, 즉 생명의 몸이다. 이 생명의 몸은 일식(一食), 일언(一言), 일좌(一座), 일인(一仁)의 십자가가의 고행으로 처음에는 고통이지만 차차 변하여 나의 멍에는 가볍고 쉽다 (마 11:29)는 천국의 삶의 변해 간다. 일식(一食)은 유영모에게 한없이 강한 건강을 허락하여 그로 하여금 아무 병 없이 92세까지를 살게 했다. 30세도 넘길 수 없다는 의사의 진단을 받고 인생의 허무를 비관하고 철학에 몰두했던 유영모가 무병장수한 비결은 그가 받은 새 계명의 실천 때문이다. 그는 그에게 새 계명을 실천할 수 있는 힘을 주시는 그리스도에게 한없는 감사를 드렸다.
유영모는 “예수의 이름은 오늘도 진리의 성신으로 생명력을 풍성하게 내리신다”를 매일같이 경험하고 살아간다. 그는 매일 이 네 가지의 실천을 ‘하루살이’라고 한다. 그는 천문학에서 쓰는 율리안데이에 의거하여 하루하루를 세면서 살아갔다. 그는 달을 살지 않고, 해를 살지 않고, 하루를 살았다. 그에게 새해나 새달은 무의미했다. 그에게는 하루하루의 새날이 있을 뿐이다. 유영모는 오늘을 ‘오-늘’이라고 했다. ‘오’는 감탄사요, ‘늘’은 영원이라는 말이다. 하나님께로부터 시간이 잘려 유한한 시간을 사는 그는 하루 속에서 영원을 사는 것이었다. 영원 속에서 영원을 사는 것이 아니라, 하루 속에서 영원을 카이로스의 삶이 영생이었다. 유영모는 자기가 죽을 날을 미리 정하고 살았다. 그는 흘러가는 시간을 산 것이 아니라 흘러가지 않는 시간을 살았다. 그는 아직 오지 않는 미래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언제나 오고 있고, 하나님의 말씀이 언제나 오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이것을 신이지래(神而知來)라고 한다. “진리의 성신이 퍼붓듯 오실 제 죄와 의의 심판이 바로 �저나네.” 유영모는 인자가 도적같이 옴을 믿었다. 그는 성신이 퍼붓듯이 옴을 경험하게 된다.
유영모는 성신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새롭게 해석하기 시작한다. 그는 우선 주기도문을 자기 마음에도 와닿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도 아무 생각 없이 반복하는 형식적인 주기도문이 아니라, 마음에 걸리고 뜻을 조금이라도 생각하게 하는 주기도문이 되게 하기 위해 새롭게 지었다. 그는 “이것이 주의 기도요, 나의 소원이다”라고 했다.
“한울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우리도 주와 같이 세상을 이김으로 아버지의 영광을 볼 수 있게 하옵시며, 아버지 나라에 살 수 있게 하옵시며, 아버지의 뜻이 깊고 멀게 이루시는 것과 같이 오늘 여기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먹이를 주옵시며, 우리가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먹이도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가 서로 남의 짐만 되는 거짓살림에서 벗어나서, 남의 힘이 될 수 있는 참삶에 들어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가 세상에 끄을림없이 다만 주를 따라 �으로 솟아남을 얻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와 주께서 하나이 되사 영 삶에 계신 것처럼, 우리들도 서로 하나이 될 수 있는 사랑을 가지고 참말 삶에 들어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제소리, 360).
하나님을 만남으로 부활을 경험한 유영모의 영성(靈性)은 십자가를 통한 새 계명의 실천으로 영체(靈體)가 된다. 새 계명을 처음 지키기 시작했을 때 그것의 실천은 고행(苦行)이었으나, 그리스도의 생명력으로 그것은 정행(正行)이 되고 날이 갈수록 그것은 낙행(樂行)이 되어 갔다. 몸은 강건해지고 정신은 중정(中正)을 얻게 되어 유영모의 생각은 더 순순해졌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하나님의 이르시는 말씀을 듣고 그것을 우리말로 옮기는 것이 그의 일이 되었다.
“일러 이에 이르시니 이겨 일즉 이러나서 이은 일을 이르어라.”
그는 주님을 모시고 앉아서 (主忠信), 하나님의 말씀을 고르기 시작한다 (修辭立其誠). 하나님의 오심을 맞이하는 그는 (神而知來),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생명의 말씀을 찾아내고 (知而藏往) 성령의 힘을 통해서 말씀은 깨어져서 기쁨이 된다 (誠而硏幾). 신이지래(神而知來)의 장래(將來)와, 지이장왕(知而藏往)의 기재(旣在)와, 성이연기(誠而硏幾)의 현존(現存)을, 유영모는 하나님의 무르심과, 그리스도의 부르심, 그리고 성령의 푸르심이라고 하여 ‘므름-브름-프름’이라고 했다. ‘므름 브름 프름’이 유영모의 시간성(時間性)이다. 유영모는 성령의 현존을 통하여 말씀이 기쁨으로 바뀌는 성령의 열매를 체험하게 된다.
유영모의 근본 경험은 52세 때 이루어진다. 그리고 내가 그를 만났을 때는 그의 나이 59세 때였다. 유영모가 믿음에 들어간지 7년이 지난 때였다. 이때 유영모는 성경을 읽고,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자신이 직접 만들었다는 말씀을 언제나 백로지에 먹으로 써 가지고 왔다. 칠판에 붙여 놓고 흥이 나서 읊기도 하고 덩실덩실 춤도 추는 것이었다. 우리는 법궤를 메고 가면서 옷이 벗겨지는 줄도 모르고 춤을 추는 다윗 왕을 연상하였다.
유영모의 얼굴에는 화기가 돌고 눈빛은 유난히 강하게 빛났다.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복음이요 기쁜 소식이다. 기쁜 소식일 뿐만 아니라 기쁨 자체다. 영생은 기(氣)가 뿜어나오는 기쁨이 영생이다. 영생(永生)은 영적(靈的) 삶이 영생이다. 성령의 열매는 기쁨 사랑 평화 절제이다 (갈 6:24). 성령의 삶은 기쁨과 기도와 감사이다. 신이지래(神而知來)가 감사요, 지이장왕(知而藏往)이 기도요, 성이연기(誠而硏幾)가 기쁨이다. 기가 뿜어나오는 영생(永生)이 영생(靈生)이다. 시간성을 사는 것이 영생이다.
하나님의 영성(靈性)과 그리스도의 영체(靈體)와 성령의 영생(靈生). 이것이 유영모의 삼위일체이다. 그는 이것을 빛, 힘, 기쁨이라고 했다. 하나님의 빛과 그리스도의 힘, 그리고 성령의 숨이다. 하나님의 빛은 진리요, 그리스도의 힘은 길이요, 성령의 숨은 생명이다. 유영모의 생명은 영적 기쁨이요 말씀에서 깨어나오는 기쁨이다. 그에게 믿음은 및딤(到及)이요, 믿힘(神力)이요, 밑틈(覺性)이다. 유영모에게는 밑틈이 한없이 중요하다. 그것은 기쁨을 주기 때문이다. 유영모는 종교의 본질을 기쁨으로 보았다. 세상에 기쁜 것 가운데 기쁜 것은 말씀을 골라내어 가르치는 것이다.
유영모는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의 말씀으로 바꾸는 것을 성육신이라고 했다. 본래의 주기도문이 유영모의 주기도문으로 바뀌는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된다는 말은 유태사람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 한국 사람에게 먹혀 들어갈 수 있는 김치찌개로 바뀌는 것이다. 유영모의 말씀풀이다. 유영모는 ‘한국말에 하나님의 말씀이 담겨질 수 있을까, 한국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풀 수 있을까, 우리 한글이 복음의 그릇이 될 수 있을까, 그것이 된다면 기독교는 이 땅에 심겨는 푸른 나무로 자랄 것이며,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기독교는 분재(盆栽)에서 키우는 관상용에 불과할 것이다.’ 라고 생각했다.
유영모는 훈민정음의 모음 ‘아야 어여 오요 우유 ㅡ ㅣ ᆞ’에서 ‘ㅡ ㅣ ᆞ’를, 가로 가는 세상 ‘ㅡ’, 그것을 꿰뚫고 위로 올라가는 ‘ㅣ’, 모음의 모음이며 하늘에 올라가서 하나님을 만나는 ‘ᆞ’ 로 생각하여, 십자가 ‘十’로 보았고, ‘아야/어여/오요/우유’를, “아이들아 / 어서 / 올라와요 / 우으로 세상을 꿰뚫고 고디 곧장 올라와서 하나님을 만나자” 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보았다. 그리고 자음, ‘ㄱ ㄴ ㄷ ㄹ ㅁ ㅂ ㅅ ㅇ ㅈ ㅊ ㅋ ㅌ ㅍ ㅎ’를 “기니/드림이/시이지/치키티/피히”로 읽고, “그리스도가 / 십자가 위에 달려서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하나님 앞에 산 제물이 되어 드림(奉獻)이 / 보이지 않느냐 / 치키어 올라가서 살아 터지고 / 피를 흘리면서 흰빛이 온 세상에 차고 하나님의 영광 흰빛이 우주에 차서 구원의 큰일을 완수해 간다.” 로 해석했다. ‘기니’의 ‘기’는 전라도에서, ‘잘나고 아름다운 남자’를 가리킨다고 하다. 여기서 ‘기’는 가장 아름답고 잘난 남자, 즉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유영모는 기독교의 본질을 죄와 인연을 끊고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우리말 가운데 ‘꽁무니’라는 말을 발견하고, 죄의 문을 꼭 닫는 ‘꼭문이’, 단식(斷食) 단색(斷色)으로 항문을 꼭 닫아두는 성도(聖徒)를 ‘꼭문이’라 하였고, 죄를 회개하고 하늘나라로 높이 높이 올라가서 하늘 꼭대기에 올라가서 하나님과 꼭 대어 하나님과 일치한 사람을 ‘꼭대기’라 하였다. 꼭대기는 그리스도 성인이다.
참말 모심으로 얼숨
맨꽁무니 예다 맨꼭대기면 저녁 저물고
맨꽁무니 꼐계 맨꼭대기면 새벽샐녘
예계뵙 언니시들도 참말뫼심 빛월속 (유영모 명상록 3,53)
-. 맨 꽁무니: 모든 사람이 모두 식욕과 색욕의 죄의 유혹을 끊고 마음의 고디(貞操)를 지켜 죄의 세상에 대하여 성문을 꼭 닫고
-. 꼭문이: 꽁무니 성도가 되어 열심히 옛다 달음질치면서 산 거룩한 산의 꼭대기까지 도착하면 인생의 저녁 노년도 어느새 저물어간다. 인생길이란 회개하고 또 회개하면서 오르고 또 오르면 어느새 천성에 도달, 그 때가 생의 끝이다.
-. 맨 꽁무니로: 금욕을 하고,
-. 꼐계: 하나님 계신 게(存在)께 주님께 도달하면,
-. 맨꼭대기: 최고의 경지에서 주님과 하나가 되고 한없는 기쁨에 차는 순간은,
-. 새벽샐녁: 새벽의 동이 트는 새벽기도하는 순간이다.
-. 예계뵙: 예 살아서 여기서도 하나님을 뵐 수 있고 죽어서 계 가서도 하나님을 뵈올 수 있다. 예서도 계서도 하나님을 뵈옵는,
-. 언니시들: 성도성인들,
-. 언지는: 그리스도 언(彦)을 머리 위에 니(頂)고 사는 사람들은,
-. 참말뫼심: 지닐이신 그리스도를 모시고,
-. 빛월속: 빛나는 성령 속에 사는 하늘나라 백성이다.
유영모는 “꼭문이가 없으면 꼭대기가 없다, 꼭대기가 없으면 꼭문이가 없다. 꼭대기는 마음이고 꼭문이는 몸이다, 몸이 없이 마음 없고 마음 없이 몸이 없다. 몸(마음), 맘, 몸은 주리고 마음은 늘인다. 몸 맘, 이것이 종교의 핵심이다”라는 말을 할 때는, 유교의 핵심인 16자, “인심유위(人心惟危) 도심유미(道心惟微) 유정유일(惟精惟一) 윤집궐중(允執厥中) [2]”의 성리학적 해석을 덧붙이고, “산시신수시수(山是山水是水) 산부시산수부시수(山不是山水不是水) 산역산 수역수(山亦山 水亦水)”의 불교의 중도(中道)철학도 빼놓지 않으며, “치허극 수정독(致虛極 守靜篤) [3]”의 노장 무위자연(無爲自然) 철학도 빠뜨리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의 정신이 노장철학 천년, 불교철학 천년, 유교철학 천년으로 길들여 왔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서양문명의 세계로 전도되면서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를 위시한 서양철학을 기독교적 신학으로 만들고 계속 세계적인 종료로 자라서 우리 한국에까지 자라왔다. 그런데 기독교는 이제부터 동양문명의 세계로 올 운명에 처하게 되었다. 앞으로 기독교가 살기 위해서는 공자나 석가, 노자 같은 동양의 철학을 기독교 신학으로 만들어 동양 사람들을 먹이고 살려가야만 한다. 앞으로 기독교가 살아서 무성한 숲을 이루어 온 세상을 덮고, 생명의 샘이 땅 끝까지 임하기 위해서는, 한국의 기독교가 동양을 살려내는 세계적 기독교로 탈바꿈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 유영모의 제소리는 기독교의 동양적 재해석에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유영모의 제소리는 한국사람 마음에 비추어진 그리스도의 모습임에 틀림없다.
유영모의 “이 끗이 올끈이로 온끝에까지 말슴 사르므로 생각이오니 태추부터 함께 계심”에서 ‘이 끗’은 한국의 성도요, ‘올끈이’는 복음이요, ‘온끝’은 땅끝이요, ‘말씀사름’은 진리의 선포요, ‘함께’는 하나님과 함께이다.
보충자료
1. 진에(瞋恚): 노여움 분노. 삼독(三毒)의 하나 자기 의사에 어그러짐에 대하여 성내는 일. 성을 내는 마음의 작용
2. 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
-. 생각하다/오직 유(惟), 위태할 위(危), 작다 미(微), 진실로 윤(允), 잡다 집(執), 그 궐(厥).
-. 집중(執中):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이, 또는 한 쪽으로 치우침이 없이, 마땅하고 떳떳한 도리를 잡음.
인심은 위태한 경향이 있고 도심은 미약한 경향이 일반적이다. 정일하게 대처해야할 것이니 진실로 中을 다스려라.
3. 致虛極 守靜篤 (치허극 수정독)
-. 도타울/두터울 독(篤)
텅 빔에 이르기를 지극히 하고, 고요함을 지키기를 돈독히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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