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의 서신
빌립보서 1장1-2절 2019/03/24(주일오후)
1:1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한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
1: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인사드립니다.
하나님의 은총과 평화가 교회 위에 그리고 우리 삶과 일터 위에 늘 충만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 드립니다.
빌립보서.
그리스 북부 마케도니아의 수도인 빌립보
그 빌립보에 거주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사도 바울의 편지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총 4장으로 구성된 아주 짧은 편지이지만 지금도 많은 그리스도인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날마다 읽혀지는 대표적인 바울의 편지이기도 합니다.
빌립보.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가 필립포스입니다.
핍립포스, 그 이름 따서 지은 도시가 빌립보입니다.
로마 제국은 당시 퇴역한 장군들이 모여서 살만한 신도시의 필요성을 느끼게 됩니다.
그래서 요즈음으로 말하면 세종시와 같은 전략적인 신도시를 건설하게 됩니다.
그렇게 건설된 신도시가 빌립보입니다.
빌립보는 사도 바울과도 인연이 깊은 도시입니다.
2차 전도여행을 떠날 때 바울의 목적지는 아시아였습니다.
소아시아라고 부르는 여러 도시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영이 그 길을 막습니다.
행16:6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16:7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16:8 무시아를 지나 드로아로 내려갔는데
16:9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16:10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그렇게 해서 만난 사람이 루아디라(소아시아지역) 출신의 자주색(고급) 옷감 장사 루디아였습니다.
그 한 여인 루디아를 통해 세워진 교회가 바로 빌립보교회입니다.
유럽에 세워진 최초의 교회이지요.
오늘 본문으로 돌아옵니다.
빌립보 교인들을 향한 바울의 편지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1절입니다.
1:1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한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
이것만을 읽어보면, 복음 전도자인 바울과 디모데가 빌립보교회에 보낸 목회서신 정도로 볼 수 있습니다.
안부를 묻는 목회 서신이지요.
하지만 그 내막을 자세하게 살펴보면, 그냥 교회의 안부를 묻는 일반적인 편지가 아니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이 편지를 쓰고 있는 바울의 형편과 처지 때문입니다.
1장 14절입니다.
빌1:17 그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수하지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여기에 보면 주목할 만한 단어 하나가 뚝 튀어나옵니다.
바울의 형편과 처지를 엿볼 수 있는 단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매임’입니다.
감옥살이하면서 지금 편지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빌립보서를 옥중서신이라고 부릅니다.
옥중에서 보낸 목회서신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빌립보서가 가지고 있는 첫 번째 별명입니다.
빌립보서.
빌립보서는 또 하나의 별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혹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기쁨의 서신입니다.
왜냐하면 사도 사울이 쓴 편지 중에서 ‘기쁨’이라고 하는 단어를 가장 많이, 가장 자주 반복해서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4장밖에 되지 않는 짧은 편지이지만 ‘기쁨’이라는 말이 무려 열 번 이상 반복해서 나옵니다.
그래서 훗날 사람들은 빌립보서를 옥중서신이라고 부르면서 동시에 기쁨의 서신이라고도 부릅니다.
‘옥중 서신’ ‘기쁨의 서신’
어떻습니까?
어울립니까?
서로 어울리지 않습니다.
현실에서는 두 이미지가 전혀 어울려 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신앙의 눈으로 보면, 하나님의 역사 하나님의 경륜으로 보면 어떻습니까?
‘십자가와 부활’처럼 역설적이게도 두 이미지가 묘하게 서로 어울립니다.
이는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인들에게 자신을 소개할 때 사용했던 단어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 ‘왕’이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와 ‘종(둘로스)’
사실 이 두 단어는 한 자리에 두거나 한 자리에 설 수 있는 단어가 아닙니다.
왕과 종이 어떻게 한 반열에 설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전혀 어색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와 종, 역설적이지만 놀랍게도 서로 어울림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신앙은 역설입니다.
빌립보서의 두 별명인 ‘옥중서신’과 ‘기쁨의 서신’.
좀 어딘가 서로 어울리지 않는 어색한 사이인 것 같지만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보여준 신실한 삶이였고, 이것이 바로 바울이 오늘 우리에게 보여준 진정한 신앙의 모습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빌립보서를 참 좋아합니다.
빌립보서 하면 떠오르는 한 분이 계십니다.
제 모교회의 원로 장로님이신 이ㅇㅇ 장로님입니다.
이 분이 죽음을 앞에 두고 늘 듣기 원했던 말씀이 빌립보서 4장 4-7절입니다.
4: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4: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4: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4: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비록 육신(육체)은 죽음이라는 감옥에 갇히게 되겠지만, 내 영혼의 기쁨만큼은 절대로 빼앗기지 않겠다는 그분의 결연의 의지를 보면서 얼마나 은혜가 된 줄 모릅니다.
죽음이라는 감옥, 그것은 분명 냉정한 현실이지만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기쁨.
그 하늘의 기쁨만큼은 절대로 빼앗기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절대기쁨이지요.
이것이 우리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6장을 보면 바울과 실라가 복음을 전하다가 오늘 본문의 배경이 되는 빌립보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그런데 그 감옥 안에서 바울과 실라가 무엇합니까?
두 가지를 합니다.
하나는 기도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사도행전 16장 24-25절입니다.
16:24 그가 이러한 명령을 받아 그들을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차꼬에 든든히 채웠더니
16:25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아무 이유 없이 감옥에 갇힌 그 암담한 현실 속에서도 바울과 실라가 놓지 않은 것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기도하고, 둘째는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는 타령이 아니라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송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그 찬송소리를 누가 듣는가하면 옥 안에 있던 죄인들이 듣게 됩니다.
다시 16장 25절입니다.
16:25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하나님을 정말 기쁨으로 찬송하는 바울과 실라의 찬양을 절망 가운데 놓인 죄인들이 듣게 됩니다.
그 때 함께 갇혀있는 죄수들이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까?
아마 아주 의아하게 여겼을 것입니다.
‘뭐지? 도대체 뭐지? 어떻게 옥에 갇힌 처지에서도 저렇게 기뻐할 수 있지?’
결국 이러한 궁금증이 하늘나라라는 복음 전도의 계기가 되었고, 빌립보에 교회가 세워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기쁨의 근원은 어디서부터 오는 것일까?
감옥과 죽음의 공포로도 가둘 수 없는 기쁨. 그 기쁨의 근원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에 기록된 바울의 인사말 속에서 그 해답이 나옵니다.
2절입니다.
1: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입니다)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하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대속의 은혜, 십자가의 은혜이고,
또 하나는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가 누리게 될 평강입니다.
한 걸음 더 들어가 보겠습니다.
우선 첫 번째, 기쁨의 뿌리가 되는 십자가의 은혜입니다.
어떻습니까?
십자가의 은혜, 그 은혜가 주는 기쁨이 있습니까?
찬송가 438장 1절입니다.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 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다도’
이 찬양의 고백처럼 십자가의 은혜로 말미암아 중한 죄의 짐이 벗겨지고, 슬픈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변화하는 그런 기쁨을 가졌는가? 입니다.
두 번째, 기쁨의 뿌리(근원)는 아버지의 평강입니다.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의 평강입니다.
요한복음 14장 27절입니다.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어떻습니까?
지금 여러분의 마음은 세상으로부터 오는 근심과 두려움으로 사로잡혀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 우리 아버지로 오는 평안입니까?
우리 주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지요.
‘눈을 들어 하늘을 보라’
여러분의 눈을 하늘로 두십시오.
그러면 하늘 아버지가 주시는 평안이 찾아올 것입니다.
그런데요. 참 이상하지요.
아무리 믿음이 좋은 사람도, 기도 많이 하는 사람도, 우리의 눈을 세상에 두는 순간, 그 때부터 찾아오는 것이 있습니다.
근심과 두려움입니다.
그러니 우리 주님의 말씀처럼 눈을 들어 하늘을 보십시오.
어려울수록, 고통스러울수록, 괴로울수록, 절망이 가득할수록, 앞이 캄캄할수록 하늘을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하늘로부터 우리 아버지의 평안이 임할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가 대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사임 후 어느 날이었습니다.
마태복음 6장 31-32절을 읽는데, 도대체 마음이 평안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아무리 읽고 또 읽어도 마음이 평안하지 않았습니다.
평안은커녕 앞으로 살아가야할 걱정이 태산이었습니다.
아무리 이 말씀 붙들고 묵상해도 태산 같은 근심과 걱정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 때 들려주신 천둥 같은 하나님이 말씀...
'야 이놈아, 내가 니 애비다.
그것을 장만하는 건 내 일이지 네 놈이 걱정할 일이 아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바울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기쁨을 잃지 않은 믿음의 대가였습니다.
그 비결이 어디에 있었을까요?
저는 기도와 찬송에 있다고 봅니다.
그의 몸이 기도를 기억하고 있었고, 그의 몸이 찬송을 기억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기도의 근육과 찬송의 근육이 붙은 사람이 바로 바울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의 몸이 기도를 기억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몸이 찬송을 기억하고 있습니까?
우리에게 기도의 근육, 찬송의 근육이 있습니까?
지금 우리는 사순절 순례의 여정 중에 있습니다.
이 때 기도의 근육과 찬송의 근육을 붙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이 이런 축복을 우리에게 더하여 주실 것입니다.
다시 빌립보서 4장으로 돌아옵니다.
4: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4: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4: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4: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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