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것, 황제의 것
마22:15-22 2014/1/19(주일)
22:15 이에 바리새인들이 가서 어떻게 하면 예수를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상의하고
22:16 자기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진리로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이다
22:17 그러면 당신의 생각에는 어떠한지 우리에게 이르소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하니
22:18 예수께서 그들의 악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22:19 세금 낼 돈을 내게 보이라 하시니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왔거늘
22:20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
22:21 이르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이르시되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22:22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놀랍게 여겨 예수를 떠나가니라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을 늘 불편하게 여기는 이들이 등장합니다.
누구입니까?
유대교 종교지도자인 바리새인들입니다.
바리새인,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생활에 있어서 다른 이들과 철저하게 구별된 삶을 산다는 자부심 하나로 똘똘 뭉쳐 사는 사람들입니다. 특히 금식과 구제 그리고 기도 생활에 있어서 남다른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이들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거룩함, 그 거룩함 하나 만큼은 자신 있는 사람들입니다. 모세의 율법뿐만 아니라 장로의 유전까지 확실하게 실천하는 의의 사람이라고 스스로 생각할 정도로 대단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신앙적 이야기가 담긴 탈무드가 지금까지 지혜의 교훈으로 읽혀지고 있는 것을 보면 그들의 신앙은 자랑할 만합니다.
그런데 그런 이들이 예수님을 아주 불편하게 여깁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신 안에 숨겨진 위선과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한계를 사정없이 폭로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가리켜 ‘눈먼 인도자들’, ‘눈 먼 바리새인’이라고 질타하십니다.
마 23:16 화 있을진저 눈 먼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마 23:26 눈 먼 바리새인이여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뿐만 아니라 ‘하루살이는 걸러내면서 낙타는 삼키는 자들’이라고 말씀하신가 하면, 그들의 위선을 향하여는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그 안은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 채우는’ 사람들이라고 까지 신랄하게 비판하십니다. 또한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면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와 같은 율법의 더 중요한 요소는 버리는"(마23:23) 정말 어리석은 자라고 꾸짖기도 하셨습니다. 이처럼 바리새인들의 숨겨진 진실을 숨김없이 고발한 분이 예수님입니다.
그러니 바리새인들 입장에서 볼 때 예수님은 눈의 가시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드디어 바리새인들이 기회를 잡습니다.
누구의 아이디어인지는 모르겠지만 예수님을 한 방에 올무에 몰아넣을 수 있는 아주 좋은 꾀 하나를 찾아 낸 것입니다. 생각만 해도 정말 기분 좋은 아이디어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아주 치밀한 계획을 세웁니다.
그런데 이 계획에는 아주 치명적인 약점 하나가 있었습니다.
헤롯 당원의 도움을 받아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헤롯 당원, 민족주의자인 바리새인들이 볼 때 헤롯 당원은 나라를 팔아먹고 민족을 등진 반역자들입니다. 그런데 그 반역자인 헤롯 당원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이 계획을 진행 할 수 없었습니다. 얼마나 다급했던지 평상시라면 경멸해 마지않았을 헤롯 당원들과도 공모를 할 정도로 바리새인들에게 있어서 이 계획은 아주 중요했습니다.
본문 15절과 16절입니다.
22:15 이에 바리새인들이 가서 어떻게 하면 예수를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상의하고
22:16 자기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말하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진리로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이다
‘선생님이여(라오니)’
마치 예수님을 이 전에 없었던 위대한 랍비처럼 여기면서 율법에 대한 자문을 구하는 모양새를 갖추면서 상당히 예의바르게 접근합니다. 이 전에 없었던 바리새인들의 행동입니다. 위선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주 확실하게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을 한껏 추켜세웁니다.
뭐라고 추켜세웁니까?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진리로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심이니이다
선생님은 진실한 분이고, 하나님의 길을 참되게 가르치실 뿐 아니라, 아무에게도 얽매이지 않은 분이기에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겉만 번지르르한 바리새인의 말, 믿음이 가는 지요?
그 어디를 봐도 바리새인들의 말에는 진정성이 담겨져 있지 않습니다.
미끼의 언어일 따름입니다.유대인들에게는 할라카(halakah)라는 전통이 있습니다.
할라카(halakah)란 현실에서 발생한 어떤 사안을 두고 사람들 사이의 의견이 갈라지면, 율법의 최고 권위자들을 찾아가 자문을 구하고, 율법의 최고 권위자가 어떤 판단을 내리면, 그 내린 판단을 모든 공동체가 그대로 따르는 전통이 있습니다. 이것을 할라카라고 합니다.
물론 이슬람에도 이런 전통이 ‘파트와’라는 이름으로 아직 남아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장로의 유전이라는 것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형성된 일종의 규칙입니다.
어찌되었든 바리새인들은 현실에서 발생하고 있는 아주 심각한 문제 하나를 가지고 할라카 전통에 따라 예수님께 접근합니다.
아직 유대인 사회가 합의하지 못한 아주 어려운 문제, 그것이 무엇입니까?
22:17 그러면 당신의 생각에는 어떠한지 우리에게 이르소서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 하니 "가이사(로마의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습니까, 옳지 않습니까?“
라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은 양날의 칼입니다.
어느 쪽으로 답해도 예수님은 위험에 처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지 않다고 하면 지배국 로마의 조세 정책에 저항하도록 민중들을 선동한다는 혐의를 쓰게 될 것이고, 옳다고 한다면 예수님은 졸지에 반민족행위자로 낙인찍히게 될 상황이었습니다.
이 질문을 던지 바리새인들은 아마 쾌재를 불렀겠지요. 그런데 보세요.
진리는 담대한 법입니다.
그 상황에서 우리 주님은 바리새인의 위선을 꾸짖으면서 세금으로 내는 돈을 보여 달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그들은 데나리온 한 닢을 예수님께 가져옵니다.
이번에는 예수님이 그들에게 질문을 합니다.
22:20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이 형상과 이 글이 누구의 것이냐
이 초상은 누구의 것이며, 적힌 글자는 누구를 가리키느냐?는 반격의 질문을 던집니다.
바리새인이 대답합니다.
22:21 이르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로마가 세금 징수를 목적으로 하여 은으로 주조한 공식화폐가 데나리온입니다.
데나리온 한 면에는 월계관을 쓴 황제의 흉상이 양각되어 있고 그리고 거기에는 "거룩한 아우구스투스의 존엄한 아들 디벨리우스 황제"라는 문구가 테두리에 적혀 있습니다.
동전의 다른 면에는 황태후인 리비아가 신들의 보좌에 앉아 있는 모습을 양각되어 있고 그리고 거기에는 "최고의 사제"라고 새겨놓았습니다.
그러니 누가 뭐라고 해도 그 돈은 가이사, 즉 황제에게 속한 것이었습니다.
드디어 주님이 반격합니다. 다시 21절입니다.
22:21 이르되 가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이르시되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시니
얼핏 보면 예수님이 바리새인이 제기한 함정을 교묘하게 빠져나가신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 답변 속에는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을 우리 주님이 일깨워 줍니다.
바리새인의 질문은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냐, 옳지 않으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질문에 대한 답변 보다는 ‘황제의 것’과 ‘하나님의 것’을 구별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매우 중요한 두 가지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첫째, 황제의 것과 하나님의 것을 구별함으로써 예수님이 드러내고 싶었던 것은 ‘황제는 하나님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로마를 통일했던 아우구스투스 황제에게 가장 귀한 호칭을 부여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주’, ‘평화의 왕’, ‘구원자’가 그것입니다.
아우구스투스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이들도 스스로를 신으로 여겼습니다.
이른바 황제숭배가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황제가 신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그 자체로 반역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황제는 신이 아니라 황제일 뿐이다. 곧 그 권력은 사라지고 만다는 것입니다.둘째, 우리가 ‘황제의 것’과 ‘하나님의 것’을 구별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지금 누구에게 충성을 바치며 사는가에 대한 질문입니다.
이 세상의 권력자인가 아니면 하늘에 권세를 지닌 하나님인가? 입니다.
곧 지방선거가 다가옵니다.
교회 안에까지 찾아와 굽실 거리겠지요.
그런데 그들을 향한 우리의 시선이 곱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늘에 권세를 지닌 하나님을 팔아 이 땅의 권세를 사려 들기 때문입니다.
일제시대를 경험하고, 공산주의를 경험하고, 군부 독재를 경험하면서 우리 가슴을 뜨겁게 하던 찬송가가 우리에게는 몇 장 있습니다.
336장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환난과 핍박 중에도 성도는 신앙 지켰네/ 이 신앙 생각할 때에 기쁨이 충만하도다/
성도의 신앙 따라서 죽도록 충성하겠네’.
2절에 나오는 ‘옥중에 매인 성도나 양심은 자유 얻었네’라는 대목을 부를 때는 비장해지기까지 합니다.
찬송가 586장도 잊을 수 없습니다.
‘어느 민족 누구게나 결단할 때 있나니/참과 거짓 싸울 때에 어느 편에 설 건가/
주가 주신 새 목표가 우리 앞에 보이니/빛과 어둠 사이에서 선택하며 살리라’.
가사 하나하나가 가슴을 치지 않는 대목이 없습니다.
‘고상하고 아름답다 진리 편에 서는 일/진리 위해 억압 받고 명예 이익 잃어도/
비겁한 자 물러서나 용감한 자 굳세게/낙심한 자 돌아오는 그 날까지 서리라’.
힘겨운 시절이었지만 우리는 꿈이 있었기에 비참하지 않았습니다.
그 때 적어도 우리는 황제에게 바칠 것과 하나님께 바칠 것은 구별할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말씀을 마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어떠합니까?
여러분은 지금 누구에게 충성을 바치며 살고 있습니까?
물론 이 땅에 살고 있는 한 이 땅의 질서를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부득이 한 경쟁을 할 수도 있습니다.
이 땅에 법과 관습을 따라야 합니다.
하지만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황제에게 바쳐야 할 것과 하나님께 바쳐야 할 것, 그 정도는 구별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 마땅히 바쳐야 할 것 마저 이 땅에 이 세상의 권력자에게 바친다면, 그 보다 더 어리석은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십시오.
엉뚱한 우상들에게 바치면 안 됩니다.
인권 단체인 국제정의선교회(International Justice Mission)의 대표인 게리 하우겐의 말입니다. 하나님의 뜻이지만 아주 위험한 일이 두 가지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는 진실을 말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궁핍한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위험한 일을 감수하더라도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드리시기 바랍니다.
진리로 드리시고 사랑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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