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 아브라함의 의
로마서 4장 1-25절 2015/5/6(수)
로마서 1-3장까지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모든 인간은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바울의 주장에 따르면 심지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유대인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는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유대인의 자랑인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그것이 자랑할 만 것이 못 된다는 것입니다.
할례의 증거, 이것 역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구원의 증표로 삼을 만한 것이 못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로마에 있는 디아스포라 출신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 3장 10절,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바울의 이 주장.
당시 편지의 독자는 엄청난 충격과 혼돈에 빠졌을 것입니다.
네로 황제로 인해 더 이상 유대인들이 로마의 발붙일 수 없는 상황에서 위로의 말씀 그리고 희망의 말씀을 기대했던 로마에 있는 유대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정말 청천벽력과 같은 말씀이었습니다.
결코 쉽게 동의할 만한 내용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한 때 바울 자신도 그랬던 것처럼 디아스포라 출신 유대인 그리스도인들 역시 받아들일 수 없는 주장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혈통 곧 유대인의 피 속에는 다른 민족과 구별되는 특별한 지위가 부여되어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복음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인이라는 하나의 신앙공동체를 이방인과 함께 형성하고 있었으면서도 유대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우월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첫째, 우리 유대인은 모세가 전해 준 하나님의 말씀, 곧 율법(토라)이 유일하게 계시된 민족이라는 자부심입니다.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유일한 백성.
이것이 유대인이 가지고 있는 자랑이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우리 유대인들에게는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이 유일하게 계시 된 민족이라는 우월감입니다.
하나님의 이름 곧 ‘여호와’를 유일하게 계시 받은 민족.
그러니 그 자부심이 얼마나 대단하겠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3장 10절, 율법 안에서 그리고 야훼 신앙 안에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라는 바울의 이 주장을 로마에 있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쉽게 동의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바울의 논증이 점점 더 격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선 바울은 자신의 주장을 반박하는 유대인들을 향해 이렇게 공포합니다.
즉 그리스도 예수뿐만 아니라 모세가 우리에게 남긴 하나님의 말씀 곧 율법 안에서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의를 얻을 수 있고, 구원함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사고에 사로잡힌 유대인들을 향해 아주 단호한 어조로 이렇게 말합니다.
3: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안식일 정결법)
3:21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바울은 말합니다.
고집스럽게 율법의 의를 놓지 못하는 유대인을 향해 율법의 의가 아니라 믿음의 의 만에 진정한 하나님의 의라고 항변합니다.
율법과 선지자가 증거 한 하나님의 복음 즉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얻게 되는 믿음의 의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게 되는 ‘믿음의 의’ 이것만이 모든 죄인(이방인 유대인)을 속량하는 의며,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하심을 인정받는 참된 의라는 것입니다.
3: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3: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3:26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그래서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서 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바울의 주장을 의심하는 유대인처럼 꼭 던져야할 질문이 하나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나는 것이 맞는 것인가? 아니면 율법의 실천 곧 자선과 금식과 기도를 통해서 얻는 것이 아닌가?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이 질문에 대해서 답을 찾을 수 있는 말씀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23장입니다.
23:2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하나님을 제대로 믿는 믿음의 의와 하나님의 백성답게 제대로 살아갈 수 있는 율법의 의.
이 모두 행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몸 안에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은 믿음이 있다면, 우리 몸 밖에는 율법의 실천 곧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착한 행실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세이비어 처지(The Church of the Savior)’를 세운 고든 코스비(Gordon Cosby, 2013) 목사님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내적인 여정(Inward Journey)과 외적인 여정(Outward Journey)로 설명합니다.
내적인 여정이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부분으로 우리 안에 ‘영성’을 키우는 일입니다. 주로 기도생활 말씀생활 금식생활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반면, 외적인 여정이란 믿음의 ‘실천’ 부분으로 우리가 해야 할 ‘사역’의 힘과 지평을 넓히는 일을 말합니다.
자선과 구제 그리고 사회사업과 봉사가 여기에 해당할 것입니다.
( Jubilee Housing (1973): 낮은 수입의 사람들을 위한 더 낳은 주거와 청소년과 가족 서비스, Samaritan Inns (1985): 8개의 주택에서 머물면서 알콜 중독 등에서 회복되도록 돕는 사역, 홈리스들을 위한 Christ House, 토기장이의 집(Potter's House)등 )
이러한 영성의 균형이 작지만 가장 큰 교회라는 별명을 얻게 한 힘입니다.
다시 오늘 본문으로 돌아와서 바울은 4장에서 한 사람을 아주 자세하게 소개합니다. 누구입니까?
아브라함입니다.
율법 이전의 사람 아브라함을 등장시키면서 자신의 주장인 믿음의 의가 참된 하나님의 의임을 펼쳐나갑니다.
아브라함, 원래는 갈대아 우르 사람 아브람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형성되기 이 전의 사람입니다.
우리 조상들이 물 한 그릇 놓고 빌듯이 나무로 깎은 우상을 집안에 놓고 섬기던 지극히 평범한 인간이 아브람입니다.
그런데 그런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나중에 어떻게 평가합니까?
의로운 자로 여기십니다.
창세기 15장 6절입니다.
15: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율법도 모르는 아브라함을 하나님이 의인으로 여겼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의 무엇을 보고 하나님이 의로 여깁니까?
하나님을 향한 믿음.
오직 믿음 하나입니다.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라는 이 믿은 한 가지뿐입니다.
할례의 행했다든가 율법대로 살았다든가 제사를 드렸다든가 하는 행위가 전혀 없습니다.
의인으로 여길 만한 그 어떤 행위도 아브라함이 한 것이 없습니다.
자신의 전 재산을 팔아 남을 구제한 적도 없고 자기목숨을 내어주고 남의 생명을 살린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의인으로 여겼다는 사실입니다.
자기 한 목숨 구제하기 위해 두 번 씩이나 아내를 남에 남자에게 넘길 정도로 비열한 인간이 아브라함입니다.
그런데도 그런 인간도 아닌 아브라함을 하나님은 의인이라고 인정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기준이 무엇입니까?
바로 믿음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라는 이 믿은 한 가지뿐입니다.
이 점이 아주 중요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사도 바울이 말하는 것입니다.
4:1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4:2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4: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행위로 따진다면 자랑할 것이 전혀 없는 사람이 아브라함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을 믿는 그 믿음 한 가지로 아브라함이 의인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의는 아브라함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공평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는 차별이 없기 때문입니다.
바라기는 이런 차별이 없는 하나님의 의가 우린 안에 공평하게 임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무엇을 믿었는지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소명에 대한 믿음입니다.
히브리서 11장입니다.
11: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불렀다는 소명에 대한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이 갈 바를 알지 못할 때 진리의 길로 생명의 길로 인도하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이러한 소명의식을 하나님은 의로 여겼다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인생 역시 갈 바를 알지 못하는 나그네입니다.
광야와 같이 막막한 인생길이 우리 인생입니다.
그래서 인생에는 정답이 없습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지?
그것에 대한 해답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인생길에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다가 오신 분이 계십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분이 우리를 진리의 길로 생명의 길로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소명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있을 때,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의로 여긴 것처럼 우리 역시 의로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약속에 대한 믿음입니다.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런 약속을 합니다.
12: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12: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이 때 아브라함의 나이가 75세입니다.
75세라면 자기가 정한 약속도 접을 나이입니다.
그런데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과의 약속을 아브라함은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75세가 되도록 자식하나 없어서 조카하나 의지하는 노인네가 아브라함입니다.
그런데도 큰 민족을 이룬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정말 믿었다는 것입니다.
사는 날 보다는 죽는 날이 가까운 노인네가 아브라함입니다.
그런데도 정말 복의 근원이 될 거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은 의로 여겼다는 것입니다.
4:18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4:19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4:20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4:21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4:22 그러므로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졌느니라
말씀을 마칩니다.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는 차별이 없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가 기도해야 할 것은 단 하나입니다.
‘하나님 우리에게도 믿음을 주시옵소서.’
소명에 대한 확실한 믿음, 약속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달라고 이 시간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이삭이라는 아들을 통해서 약속을 이루시고 아브라함을 위로하신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에게도 정한 약속을 이루시고 위로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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