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없는 주의 사랑
누가복음 22:31-34 2018/03/25 사순절 6주 종려주일22:31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22:32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22:33 그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
22:34 이르시되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은총과 평화가 사순절 순례의 길을 걷은 우리 모두에게 늘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꽃샘추위로 잠시 움츠렸던 지난 한 주였습니다.
하지만 어느덧 바람은 봄바람으로 바뀌었고, 생강나무의 노란 꽃망울이 제법 선명해 졌으며, 새싹들은 고개를 삐죽 들면서 봄이 왔다고 연일 외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도둑처럼 찾아온 손님이 있습니다.
점심 식사가 마치면 찾아오는 손님, 무엇일까요?
춘곤증입니다.
춘곤증 예방법, 전문가들의 조언입니다.
첫째, 제철 나물을 먹어라.
특히 뿌리 나물인 달래, 냉이, 그리고 씀바귀 섭취를 권유합니다.
둘째, 산책을 하되 가볍게 걸으라.
봄 햇살을 받으면서 약 20-30 분 정도 걸을 것을 권유합니다.
셋째, 춘곤증이 나타나면 가벼운 스트레칭을 하라.
➀앉은 상태에서 팔과 다리를 짝 펴라.
➁어깨와 목을 움직여 긴장된 근육을 풀어주고, 목덜미를 가볍게 주무르라.
오늘은 사순절 여섯 번째 주일이자, 종려주일입니다.
또 고난주간이 시작되는 날이기도 합니다.
사순절 마지막 주, 종려주일, 고난주간...
그만큼 예수님의 생애 속에서 가장 긴박했던 한 주를 보낸 시간이 바로 이번 주입니다.
종려주일.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한 날을 기리는 주일이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이 이야기는 사복음서가 모두 다루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그리고 요한복음에 모두 기록된, 아주 중요한 사건이자 이야기입니다.
차이가 있다면, 공관복음서 즉 마태와 마가와 요한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이야기를 예수님 생애의 막바지에 배치시키고 있다면, 요한복음은 좀 다릅니다. 예수님의 사역 한 가운데서 벌어진 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의 절정은 11장입니다.
요한복음 11장, 어떤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까?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나 지난 나사로를 살리신 이야기가 중심축에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사건이 일어난 장소이지요?
그곳을 요한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11:18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 리쯤’ 되매
예루살렘이 아니라 베다니를 강조합니다.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 중심으로 기록하면, 이렇게 기록해야 마땅합니다.
‘예루살렘은 베다니에서 가깝기가 ‘한 오 리쯤’ 되매‘
하지만 요한의 중심은 예루살렘이 아니라 ‘베다니’였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베다니’를 강조합니다.
예루살렘에서 ‘한 오 리쯤’ 떨어진 베다니, 헬라어 성경은 이 부분을 '십오 스타디아'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킬로미터로 환산하면, 약 3 킬로미터로 걸어서 약30-40분 거리입니다.
거기서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나 지난 청년이 다시 살아나는 하나님의 역사, 생명의 역사가 일어났다고 요한은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부활의 역사는 예루살렘 성전 중심이 아닙니다.
그 주변, 변두리입니다.
고난 가운데, 절망 가운데, 슬픔 가운데 처한 아주 평범한 가정집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가난한 백성, 민중 속이지요.
문제는 우리가 이런 요한의 ‘시사’ 곧 강조점을 일어내지 못하니까, 아직도 건물을 성전으로 여기고 그 안에 갇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왜곡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직도 교회 건물이 그리스도의 피로 산 교회로 보입니까?
아닙니다.
그냥 건물입니다.
바울 사도의 피 끓는 절규처럼, 성전이 우리 자신이듯 교회 또한 우리 자신임을 잊지 마십시오.
‘내가 곧 그리스도의 몸이 된 교회이다.’
‘내가 곧 그리스도의 피로 산 교회이다’
이것이 종교개혁의 핵심 신앙인 만인제사장의 뿌리입니다.
이는 바울 사도만 그렇게 주장한 것이 아닙니다.
사도 베드로도 같은 주장을 펼칩니다.
베드로전서입니다. (새번역)
2:9 그러나 여러분은 택하심을 받은 족속이요, 왕과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민족이요,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을 어둠에서 불러내어 자기의 놀라운 빛(부활의 영광) 가운데로 인도하신 분의 업적을, 여러분이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의 신앙이 예루살렘 성전 건물 안에, 그리고 제사장 직분 안에 갇혀 있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헛되게 하는 불신앙임을 꼭 기억했으면 좋겠습니다.
유월절 명절이 되자,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과 함께 성전구역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향하게 됩니다.
죽음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시지요.
어떤 마음이셨을까요?
분명한 것은 유월절 순례자들과 같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이것을 눈치 챈 제자가 단 한 사람도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제자들 역시 다른 유월절 순례자들처럼 각자의 소원을 앉고 흥분된 마음으로 예수님의 뒤를 따르지요.
그러니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외로웠겠습니까?
이처럼 남의 아픈 사정을 헤아리지 못한 채 자기 욕망 주위만 맴돌던 사람들을 이끌어 하나님 나라를 맛보게 한다는 것은 아주 외로운 일입니다.
예루살렘.
하나님의 성전, 하나님의 거룩한 집이 있는 곳입니다.
사람들은 그곳을 이렇게 불렀습니다.
예루/살렘, ‘평화의 언덕‘ ’평화의 도성‘이라고 불렀습니다.
하지만 사실 그곳에는 평화가 없었습니다.
헤롯대왕이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려고 리모델링한 성전은 매우 화려하고 아름다웠지만, 사실 그 속에서 벌어지는 일은 결코 아름답지 않았습니다. 도살되는 짐승들의 피가 흐르고, 경건을 가장한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의 욕망이 지배하는 곳이었습니다.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성전을 보며 감탄을 합니다.
마가복음 13장입니다.
13:1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가실 때에 제자 중 하나가 이르되 선생님이여 보소서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하니이까
‘얼마나 굉장한 돌입니까! 얼마나 굉장한 건물들입니까!’
하지만 우리 주님은 그것을 동의하지 않으셨습니다.
계속해서 마가복음 12장 2절입니다.
13: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하시니라
‘너는 이 큰 건물들을 보고 있느냐?
여기에 서 있는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다.‘
결국 예수님의 이 말씀은 훗날 참담한 현실이 됩니다.
주후 70년, 로마의 장군인 Titus에 의해 현실이 되고 말았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성전을 성전답게 하는 것은 건물이 아닙니다.
그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평화의 일들입니다.
이런저런 일들로 인해 병들고 찢긴 상한 심령을 치유하는 평화의 일입니다.
절망과 어둠 속에 있던 이들에게 소망의 빛을 비추는 평화의 일입니다.
뭔가에 짓눌린 채 살아가던 사람들에게 해방과 자유의 길을 열어주는 평화의 일입니다.
그렇게 해서 마침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지존하신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을 경외하며 평화롭게 살도록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성전의 존재 이유이고 오늘날 교회의 존재이유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 했다는 소식이 파다하게 퍼지자, 예루살렘에 힘을 의지하는 이들이 예수님을 죽일 음모를 진행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비극 속에 가룟 즉 이스가리옷 출신의 유다가 함께 합니다.
가룟 즉 이스가리옷 출신의 유다는 대제사장들과 성전 경비대장들과 더불어 어떻게 예수를 그들에게 넘겨줄지를 의논하지요.
그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예수님은 마지막 만찬 자리에서 빵을 들어 감사 기도를 드린 후 제자들에게 떼어 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2장입니다.
22:19 또 떡을 가져 감사 기도 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2:20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억하여라.’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다.’
‘내 피를 너희를 위하여 붓겠다.’
말 한 마디 한마디가 비장하기 이를 데 없는 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어느 누구도 그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제자는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저 특이한 유월절 식사 정도로 여긴 것입니다.
이미 세 번이나 당신의 고난과 죽음을 예고했지만 그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제자는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우리 중에 누가 가장 큰 사람으로 칠 것이냐’를 놓고 서로 말다툼이나 하고 있으니, 답답한 노릇이지요.
눅22장 24절을 보십시오.
또 그들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
이렇게 예수님은 철저히 외로우셨습니다.
지금 우리 찬송가에서는 사라졌지만, 주님의 외로움을 노래한 찬양이 옛날 찬송가에 남아 있어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통일찬송가 134장입니다.
가사를 먼저 읽은 후에 한 번 불러보도록 하겠습니다.
1. 감람산 깊은 밤중에 별빛은 희미하여라
주 예수 고민하시며 외로이 기도하시네2. 주 홀로 깊은 밤중에 고민에 싸여 계시나
그 사랑 받던 제자들 스승의 괴롬 모르네3. 한 밤중 피 땀 흘리며 인간의 죄를 지신 주
무릎을 꿇고 애쓸 때 성부는 힘을 주시네4. 한 밤중 하늘로부터 천사의 노래 들리네
인간은 듣지 못하나 주 예수 위로 받도다
이 아름다운 가사가 있는 찬송가가 왜 지금 찬송가에 빠졌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찬양이 주는 메시지는 이런 것입니다.
마음이 흔들린 만큼, 마음이 무너질 만큼,
힘들고 괴롭고 쓸쓸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섭섭함과 분노에 사로잡힐 만큼 예수님의 마음이 황폐해 지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는 3절 가사입니다.
3. 한 밤중 피 땀 흘리며 인간의 죄를 지신 주
무릎을 꿇고 애쓸 때 (누가 힘을 주십니까?) 성부는 힘을 주시네
또 하나는 4절 가사에 나옵니다.
4. 한 밤중 하늘로부터 천사의 노래 들리네
인간은 듣지 못하나 주 예수 위로 받도다
인간이 듣지 못하는 하늘의 위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쓸쓸함이나 아쉬움이나 안타까움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눅22:31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이 말씀을 새 번역 성경으로 다시 읽어드리겠습니다.
22:31 "시몬아, 시몬아, 보아라. 사탄이 밀처럼 너희를 체질하려고 너희를 손아귀에 넣기를 요구하였다.
사탄이 너희를 체질할 허락을 이미 받았다, 는 것입니다.
그래서 연약한 인간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배신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베드로는 눅22:34절 말씀처럼, 닭 울기 전에 세 번씩이나 우리 주님을 부인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향한 기대, 우리를 향한 희망, 우리를 향한 믿음을 거두지 않겠다고 예수님은 약속해 주십니다.
그것이 32절에 나옵니다. (새번역)
22:32 그러나 나는 네 믿음이 꺾이지 않도록,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네가 다시 돌아올 때에는, 네 형제를 굳세게 하여라."
두 가지입니다.
첫째, ‘나는 네 믿음이 꺾이지 않도록, 너를 위하여 기도하겠다.’
둘째, ‘너처럼 연약한 자, 그 형제를 굳세게 하는 자로 다시 세우겠다.’는 약속입니다.
우리 주님, 참 멋있지 않습니까?
말씀을 마칩니다.
세 번씩이나 반복되는 베드로의 부인을 통해 우리 주님이 말씀하고자 하는 것이 있습니다. 넘어짐도 한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가나안성도, 한 과정이지요.
문제는 교회 안에 남아 있는 우리들입니다.
우리 주님처럼 경계선 속에 있는 형제의 믿음이 꺾이지 않도록 눈물을 흘리며 날마다 기도하고 있는가? 또 우리의 행실이 지금 옆에 있는 네 형제의 믿음을 굳세게 하고 있는가? 입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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