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지금 하고 있는 그 일들
요한복음 5:31-38절 2017/10/15 성령강림 후 19주
5:31 내가 만일 나를 위하여 증언하면 내 증언은 참되지 아니하되
5:32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이가 따로 있으니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그 증언이 참인 줄 아노라
5:33 너희가 요한에게 사람을 보내매 요한이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였느니라
5:34 그러나 나는 사람에게서 증언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로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5:35 요한은 켜서 비추이는 등불이라 너희가 한때 그 빛에 즐거이 있기를 원하였거니와
5:36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내가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언하는 것이요
5:37 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언하셨느니라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상을 보지 못하였으며
5:38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가 보내신 이를 믿지 아니함이라
하나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모두에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어느 날 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양의 문' 곁에, 아람어로 ‘베드자다’라고 하는 ‘베데스다’ 연못에서 서른여덟 해 동안 중한 병을 앓고 있었던 병자 한 사람을 우리 예수님이 고쳐주십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말씀’으로 이 세상 모든 것을 창조하신 것처럼 ‘말씀’ 하나로 서른여덟 해 동안 중한 병을 앓고 있었던 병자 한 사람을 우리 예수님이 고쳐주십니다.
그렇게 해서 요한복음 1장 2절의 말씀처럼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으면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런데 그 은총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역사)일’을 보고도 삐딱하게 여겼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모세의 율법.
그 문자와 규례, 특히 장로의 유전에 갇혀 살았던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요한복음 5장입니다.
5:9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장로의 유전에 따르면 이 부분이 문제가 되지요)
5:10 (그래서 이런 시비를 겁니다)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하나님이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신 목적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또 하나는 나의 이웃을 나의 몸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 중에 율법이요, 선지자이 외친 가르침 중에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정한 이 율법의 정신, 이 율법의 본질을 제쳐두고 율법을 설명한 규례인 ‘장로의 유전’ 즉 구전율법인 ‘미쉬나’를 가지고 유대인들이 시비를 걸어 온 것입니다.
두 가지입니다.
첫째, 5장 10절입니다.
자신의 이부자리를 들고 걸어가는 것은 ‘일’이니,
거룩하게 지켜야할 안식일에 ‘일’을 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둘째, 5장 16절입니다.
병자를 고치는 것.
이것 역시 ‘일’이요 ‘노동’이니 그 누구를 막론하고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는 일은 옳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결국 38년 된 병자를 고친 하나님의 역사, 선한행실로 인해 오롯이 피해를 당한 것은 예수님 자신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이 증거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분’.
그래서 하나님의 일인 선한행실 밖에 할 수 있는 역사가 없는 분이 예수님이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 돌아온 사람들의 반응은 ‘거절’이였고, ‘박해’였고, ‘핍박’이었습니다.
5:16 그러므로 안식일에 이러한 일을 행하신다 하여 유대인들이 예수를 박해하게 된지라
성경은 박해의 주체가 누구라고 분명하게 밝힙니까?
‘유대인들’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에서 벗어난 이방백성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 속에서 하나님을 을 잘 믿는 다고 자부하는, 그래서 스스로 하나님의 백성이라 여기는 경건한 유대인들이 박해의 주체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 다고 하면서도 그의 아들 되신 예수님은 거부한 것이지요.
아이러니죠.
그러자 ‘안식일 논쟁’에 대한 무지와 불의함을 참을 수 없었던 우리 주님이 이렇게 반박을 합니다.
5:17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좋다.’
‘서른여덟 해 동안 중한 병을 앓고 있었던 병자.’
‘그 한 사람에게 베푸셨던 하나님의 선한행실을 ‘하나님의 일(역사)’가 아니라 ‘사람의 일(역사)’로 왜곡한다면 좋다.’
그렇다면,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반박이 더 큰 화근이 됩니다.
‘하나님과 자신을 동급’으로 여겼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발근한 유대인들이 말합니다.
‘뭐! 네가 감히 거룩하신 하나님의 친 아들이라고?’
18절입니다.
5:18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안식일을 무시하고 범한 것도 모자라, 감히 피조물인 주제에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그러면서 안식일 논쟁, 즉 율법의 논쟁 ‘말씀의 논쟁’은 제쳐두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단자로 아예 낙인을 찍어 버립니다.
그러자 우리 주님이 답답한 마음에 다시 한 번 반론으로 말씀하신 것이 19-30절까지 나오는 두 가지의 변증입니다.
이 두 가지의 변증이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스스로 그리고 적대자들에게까지 공개적으로 밝힌 유일한 본문이자 논증이기 때문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고백했던 수제자 베드로처럼 또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고백했던 백부장처럼 주로 예수님이 어떤 분이지는 그를 만난 사람들의 고백을 통해서 이루어졌지만 오늘 본문은 그 반대입니다.
스스로 자신이 어떤 분인지를 밝히십니다.
그것도 적대자들을 향해 거침없이 밝히십니다.
그래서 복음서 중에서 아주 중요한 본문이 마태복음 5장 19-30절 말씀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스스로 밝힌, 곧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명할 수 있는 증거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부여받은 하늘(아버지)의 전권이 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첫 번째 증거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증거는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나오는 말씀인데 36절입니다.
5:36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내가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언하는 것이요
‘내가 하는 그 역사(일이)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증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 지금 하고 있는 바로 그 일들 즉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배어있는 선한행실들이지요.
예를 들자면 2:11절 물이 포도주가 된 첫 번째 표적.
4:46-54절, 가버나움에 거주하는 왕의 신하를 고쳐주신 두 번째 표적.
5:1-9절, 38년 된 병자를 고쳐주신 일.
6장 굶주린 무리 오천 명을 먹인 오병이어의 표적.
그리고 9장가면 태어날 때부터 맹인 되었던 사람을 고친 표적 등 등 등.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나를 이 땅의 자신의 아들로 그리고 그리스도로 보내셨다는 것들의 증거들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정리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인 이유?’
첫째, 하나님의 아들로서 부여받은 하늘(아버지)의 전권이 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 내가 지금 하고 있는 바로 그 일들 즉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녹아져 있는 하나님의 역사, 선한행실들이 나를 증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해되시지요.
그러면 한 걸음 더 들어가 보겠습니다.
첫 번째 증거
하나님 아버지가 그의 친 아들이 되시는 예수님께 부여 하신 하늘의 전권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두 가지인 데 그 첫 번째 전권이 25-26절에 나옵니다.
5: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5:26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새 번역 성경입니다.
5:25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죽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는데, 지금이 바로 그 때이다. 그리고 그 음성을 듣는 사람들은 살 것이다.
5:26 그것은,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을 가지고 계신 것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셔서, 그 속에 생명을 가지게 하여 주셨기 때문이다.
쉽게 설명 드리면 이런 것입니다.
‘아버지에게 속한 생명’
요한은 이것을 ‘영생’이라고 표현하는 데 그 ‘영생의 전권’을 자신이 부여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는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만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다른 길이 전혀 없지요.
다시 5장 25절입니다.
5: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하나님 나라로 들어갈수 있는 유일한 생명, 영생의 전권을 그의 아들이신 예수님에게만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부여 받은 예수님의 첫 번째 전권 ‘영생의 길’입니다.
이해되십니까?
두 번째로 예수님이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전권은 ‘심판의 전권’입니다.
27-29절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5:27 또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
5:28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5: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생명의 전권과 함께 부여 받은 두 번째 전권은 ‘심판’입니다.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이지요.
예수님 자신이 스스로 밝힌 증거 두 번째입니다.
다시 5장 36절입니다.
5:36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내가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언하는 것이요
번역이 좀 어렵지요.
그래서 새번역 성경으로 다시 읽어드리겠습니다.
자신을 반대하는 이들, 특히 안식일에 행했던 선한 행실(하나님의 일)로 박해했던 유대인들에게 하셨던 말씀입니다.
5:36 그러나 나에게는 요한의 증언보다 더 큰 증언이 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완성하라고 주신 일들, 곧 내가 지금 하고 있는 바로 그 일들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증언하여 준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바로 그 일들’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증거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 하고 있는 바로 그 일들’ 즉 어떤 일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표적들일까요?
바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가 담긴 선한행실들입니다.
여섯 가지인데
첫째 2:11절 결혼잔치의 흥이 깨질 무렵 결례에 사용할 물을 포도주로 만들어 잔치의 흥을 다시 살렸던 첫 번째 표적.
둘째, 4:46-54절, 가버나움에 거주하는 왕의 신하를 고쳐주신 두 번째 표적.
셋째, 5:1-9절, 38년 된 병자를 고쳐주신 일.
넷째, 6장1-15 오병이어로 굶주린 장정 오천 명을 먹인 표적.
다섯째, 6장 16-21 바다를 걸으신 표적
여섯째 9장 태어날 때부터 맹인 되었던 사람을 고친 표적
일곱째 11장 무덤에 묻힌 지 나흘이나 지난 나사로를 살리신 표적
그리고 마지막 여덟 번째이자 가장 결정적인 증거이자 표적인 20장 예수님의 부활
이처럼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그 모든 일들 하나하나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증거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헛소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세상으로부터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입증할 것을 요구받는 이들이 있습니다.
바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리고 진실한 그리스도인일수록 이러한 요구는 세상으로부터 더욱 강력하게 다가옵니다.
세상은 말합니다.
‘당신이 말하고 주장하는 것처럼 정말 당신이 참되고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것을 스스로 증명해 보라.’ 것입니다.
‘전 재산을 팔아 남을 구제하든지, 하나뿐인 목숨을 바쳐 남을 살리든 한 번 해 보 라.’는 극단을 요구합니다.
하지만 이런 극단의 요구 속에는 불의한 자의 못된 마음과 허영이 깔려 있다는 것을 우리는 금방 눈치 챌 수 있습니다.
바로 진리에 대한 진실에 대한 흠집 내기 입니다.
그 흠집을 통해 세상에 속한 자신의 불의함을 가리고자 하는 불순한 의도가 숨어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사도 바울 같은 사람은 이런 못된 세상의 요구를 참다 참다 마지막에 한 마디 합니다. 갈라디아서 6장 17절입니다..
6:17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흔적’이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좀 약하지요.
헬라어 '스티그마'라고 하는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십자가의 상처, 고난의 상처를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박해의 상처들’ ‘멸시의 상처들’이지요.
어떻습니까?
내가 지금 하는 있는 바로 그 일들이 ‘스티그마’ 즉 십자가의 흔적 박해의 상처 멸시의 상처로 새겨져 있습니까?
그렇다면 잘 하셨습니다.
왜냐, 그 너덜너덜한 상처가 부활의 날 심판의 날이 오면 영광의 면류관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입은 박해의 상처, 고난의 흉터를 부끄러워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답답한 노릇이지만 정말 답답하고 미칠 노릇이지만 영생의 전권 심판의 전권을 가진 자신을 스스로 증명해야 했던 예수님처럼 또 하나님의 일과 선한행실을 곱게 보지 못하는 이들에게 자신의 의로움을 스스로 증명해야 했던 예수님처럼 세상이 우리에게 끈임없이 검증을 요구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답을 마종하 시인의 '딸을 위한 시'에서 찾아보겠습니다.
한 시인이 어린 딸에게 말했다
착한 사람도, 공부 잘하는 사람도 다 말고/ 관찰을 잘 하는 사람이 되라고
겨울 창가의 양파는 어떻게 뿌리를 내리며/ 사람은 언제 웃고, 언제 우는지를
오늘은 학교에 가서
도시락을 안 싸온 아이가 누구인가를 살펴서/ 함께 나누어 먹으라고."
그렇습니다.
이웃의 아픔에 반응할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6장 나오는 오병이어의 기적은 바로 그렇게 해서 일어난 것입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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