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 크리스토
에베소서 1:3-10절 2017/08/13 성령강림 후 10주
1: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1: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1:6 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1: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1:8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을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1:9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1: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모두에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요즈음 길거리를 다니다 보면 아주 흔하게 마주치는 풍경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휴대용 선풍기를 들고 다닙니다.
땀이 많이 나는 분들에게는 참 편리한 도구이지요.
언제 어디서나 시원한 바람을 내 마음껏 조정할 수 있다는 것이 이 제품의 아주 큰 장점입니다.
하지만 그 편리함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자연이 주는 낭만, ‘산들바람’이지요.
윤석중 선생님의 노랫말에 박태현 선생님이 곡을 붙인 '산바람 강바람'이라는 동요가 있습니다.
다들 잘 아시지요?
1절 가사입니다.
산 위에서 부는 바람 시원한 바람
그 바람은 좋은 바람 고마운 바람
여름에 나무꾼이 나무를 할 때
이마에 흐른 땀을 씻어준대요.
2절입니다.
2절은 우리를 더욱 깊은 정서로 이끌어 갑니다.
강가에서 부는 바람 시원한 바람
그 바람은 좋은 바람 고마운 바람
사공이 배를 젓다 잠이 들어도
저 혼자 나룻배를 저어간대요
오해하지 마십시오.
기계가 주는 편리함 그 자체를 나무라는 것이 아닙니다.
휴대용 선풍기 바람도 좋지만 우리 몸이 잃어버린 ‘고마운 바람’
그 낭만을 잃어버린 안타까움이 있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보낸 바울의 편지 중에서 앞부분에 해당하는 한 대목입니다.
이 짤막한 서론 가운데서 바울이 사도로서 에베소 교인들에게 유독 강조한 구절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찾아보십시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3절, 4절, 7절, 9절 10절)'라는 짤막한 구절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것을 신약성경을 기록한 언어인 그리스어로 발음하면 오늘 주보에 기록된 제목 ‘엔 크리스토'가 됩니다.
‘엔(~안에서, 전치사), 크리스토(그리스도)'
이 둘을 합하면 '그리스도 안에서'가 되지요.
‘엔 크리스토'
이 구절이 3절, 4절, 7절, 9절 10절에서 반복해서 사용됩니다.
바울이 가진 문체의 특징이자 바울의 강조법이지요.
그런데 바울이 즐겨 사용하는 전치사 ‘엔’을 1절에서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대상에서 한 번 더 사용합니다.
어느 명사 앞에서 사용했는지 1절에서 한 번 찾아봅시다.
바로 편지에 수신자인 ‘에베소’라는 명사 앞에 전치사 ‘엔’을 붙입니다.
'엔 에페소'입니다.
이것을 우리말 성경은 ‘에베소에 있는’으로 번역해 놓았는데 ‘에베소 안에 거하는’ 이라는 뜻입니다.
1: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엔 에페소' 그리고 '엔 크리스토’
이 두 구절이 우리가 에베소서를 읽고 해석하는 키워드가 되겠지요.
'엔 에페소'
‘에베소라는 한정된 장소와 시간 안에’ 있으면서 동시에
'엔 크리스토’
그 모든 것을 초월하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의 정체성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교파주의’가 아닌 ‘교회 일치주의’라는 ‘에큐메니칼(Ecumenical)’ 정신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좀 더 설명을 드리면
우리가 ‘교회’라는 한정된 장소와 시간 안에 있으면서 동시에 그 모든 것을 초월하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
이것이 바로 ‘우리’가 찾아야할 그리스도인의 참모습이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 교인(집사, 권사, 장로)으로만 머물 수 없는 참된 그리스도인이지요.
그리고 바울은 에베소 교회라는 시공간을 넘어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참된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이런 표현을 사용합니다.
‘신실한 자들’
1절입니다.
1: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
그리스도 예수 안에 거하는 ‘신실한 그리스도인’
이것이 제 자신이 추구하는 신앙의 목표이자 저에게 주어진 목회의 방향입니다.
빛이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어둠을 거부하는
그리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불의와 거짓과 죽음을 거부하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신실한 그리스도인’
히브리어로 '티쿤 올람'(tikkun olam)에 사로잡힌 그리스도인을 말합니다.
'티쿤 올람’
간단하게 설명 드리면 ‘세상을 고친다’라는 뜻입니다.
산상설교에서 말씀하신 주님의 말씀대로 우리가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이 될 때,
그 착한 행실로 말미암아 병들어 신음하는 세상이 고쳐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내가 태어나기 전 세상보다 내가 떠날 때의 세상이 더 나은 곳이 되기를 바라는 소망’이 담겨진 유대인 교육철학이 바로 '티쿤 올람’입니다.
'티쿤 올람’
‘이전 보다 더 나은 세상을 고치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입니다.
하지만 이 비전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또 이 비전을 품고 있다고 해서 아무나 그 일을 행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여기에는 반드시 전제 조건이 따릅니다.
그것이 바로 ‘엔 크리스토’ ‘그리스도 안에서’이지요.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이것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세상을 고치는 힘.
그리고 나를 변화시키는 힘.
‘엔 크리스토’
‘그리스도 안에서’입니다.
이것이 바울 신학의 핵심이자 전부입니다.
'엔 크리스토’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표현’은 다양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어떤 표준이나 기준을 정해 놓고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신비 그 자체이자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만이 이해할 수 있는 용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좀 거칠지만 두 가지로 간추려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엔 크리스토’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것은
첫째, 하나님의 은총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뜻입니다.
구원의 은총(십자가) 그리고 새 창조의 삶인 성화의 은총(보혜사)
둘째, '엔 크리스토’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것은 우리의 전인격(말이나 생각이나 행동이)이 그리스도의 마음에 깊이 뿌리를 내리는 것을 말합니다.
십자가에서 보여주셨던 온유와 겸손의 마음이지요.
누가복음 23장 34절을 보십시오.
자기를 모함하고 죽이려는 이들을 향해 우리 주님이 뭐라고 하십니까?
23:34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이처럼 남을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기는 그리스도의 마음에 깊이 뿌리를 내릴 때 비로소 우리가 자기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어 누군가에게 하나님의 선물이 되는 '엔 크리스토’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지난 주 휴가를 보내면서 몇 가지 질문과 씨름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꼭 손해를 감수해야만 하는가?’ 입니다.
'엔 크리스토’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신실한 그리스도인은 현실 속에서 늘 손해를
볼 수밖에 없는 것일까? 라는 질문입니다.
어떻습니까?
제가 내린 결론은 ‘거의 대체로 그런 것’ 같습니다.
오죽했으면 예수님이 누가복음 16잘 8절에서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롭다’하셨겠습니까?
그만큼 불의한 세상 속에서 선과 의와 진실을 추구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미움과 경멸의 대상이 되지 현실에서는 칭찬과 존경의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대다수의 어정쩡한 그리스도인들이 불의함 속에서도 침묵하는 것입니다.
현실이 녹녹치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영적으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는 손해를 보는 것 같지만 영적으로는 그렇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영적으로 누리는 복’, 이것을 바울은 오늘 본문 3절에서 ‘신령한 복’이라고 했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복들이 우리에게 주어질까요?
크게 3가지인데 4절입니다.
1:4 곧 ①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택하심’입니다.
②우리로 사랑 안에서
‘사랑하심’입니다.
그리고 ③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거룩하심’입니다.
비록 현실은 녹녹치 않고 세상은 우리에게 우겨 쌈을 안겨주지만 '엔 크리스토’ ‘그리그도 안에서 거하는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하나님이 친히 택하시고, 하나님이 친히 사랑하시고, 하나님이 친히 거룩하게 하셔서 흠 없게 하시는 신령한 복을 내려 주신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복을 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우리에게 이러한 복이 오늘도 여지없이 임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엔 크리스토’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실신한 여러분’,
세상의 조롱과 세상의 경멸과 세상의 미움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무엇보다도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만이 알 수 있고 누릴 수 있는 '엔 크리스토’라는 하나님의 신비 안에 거하십시오.
그리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숨결, 그 사랑의 온기를 느끼며 힘을 얻으십시오.
그리고 또한 우리의 말이나 생각이나 행동이 남을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기는 그리스도 마음에 뿌리를 내리십시오.
그러면 택하심과 사랑하심과 거룩하심의 신령한 복이 영원히 우리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바라기는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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