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6:9절 2017/07/26(수)
6: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주기도문 강해 두 번째 시간입니다.
지난 시간에는
우리가 왜 주기도문을 주목하고 재발견해야 하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특히 ①신앙의 선배들이 이해한 주기도문을 살펴보는 것을 통해서 그리고 ②주기도문을 주제로 강해나 설교를 한 분들을 통해서 주기도문에 담긴 하나님의 뜻과 그리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잠깐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주기도문이 오늘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와야 하는지를 좀 더 설명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가톨릭의 나라인 우루과이에 있는 작은 성당 벽에 주기도문을 이렇게 풀어놓았다고 합니다.
의미하는 바가 있어서 소개합니다.
‘하늘에 계신’이라고 말하지 말라.
늘 세상일에만 빠져 있으면서...
‘우리’라고 말하지 말라.
너 혼자만을 위해 생각하고 살아가면서 ...
‘아버지(여)’ 라고 부르지 말라.
아들, 딸처럼 산 적이 한 번도 없으면서 ...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기도하지 말라.
자기 이름을 빛내기 위해 늘 안간 힘을 쓰면서 ...
‘하나님의 나라가 오시며(나라가 임하시오며)’라고 기도하지 말라.
물질 만능의 나라를 원하면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하지 말라.
항상 내 뜻대로 고집피우면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고 하지 말라.
죽을 때까지 먹을 양식을 쌓아두면서...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오니 우리 죄를 용서하옵시고(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라고 하지 말라.
누군가에게 아직도 앙갚음을 품고 있으면서...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라고 하지 말라.
늘 죄지을 기회를 찾고 다니면서...
‘악에서 구하소서!(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라고 하지 말아라.
악을 보고도 아무런 양심의 소리를 내지 못하면서...
제발, ‘아멘’! 이라고 말하지 말라.
주의 기도를 진정 나의 기도로 바친 적이 한 번도 없으면서...
우리가 이 기도문을 통하여 한 가지 꼭 생각해 볼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기도하는 이 곧 청원을 드리는 이가 마땅히 행하야 할 ‘책임들’이 ‘이 땅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타 종교의 기도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바로 이 부분 때문입니다.
청원자(기도 자)의 뜻(목적)이 아니라 청원을 받는 분 곧 하나님의 뜻(목적)을 구하는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요구되는 것이 ‘이 땅에서’의 ‘책임들’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 이것이 타종교의 기도(呪文)와 다른 그리스도교만이 가지고 있는 기도의 특징입니다.
따라서 기도 자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주님의 기도를 드릴 때 반드시 다음의 세 가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첫째, 우리가 주님의 기도를 제대로 드리기 위해서는 상당히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땅’에 ‘책임’있는 삶을 요구하는 ‘기도들’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12절을 주목하라)
둘째,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우리가 이 전에 누리던 것들을 상단부분 포기해야하며, 편안하게 느끼던 것들을 실제로 떠나야합니다.
(11절 일용할 양식을 주목하라)
셋째, 무엇보다도 주기도를 제대로 드리려면 우리 삶은 더 이상 이 전과 같을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13절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를 주목하라)
그러기 위해서는
주님의 뜻과 반하는 ‘나 자신의 뜻’ 즉 ‘변화를 거부하는 옛 사람’이 반드시 죽어야합니다.
이와 관련된 ‘헨리 나우웬’의 조언입니다.
‘우리가 제대로 기도하려면 용기가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누리던 것을 포기해야 하고 편안하게 느끼던 것들을 떠나야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주기도문에서 꼭 살펴야할 것은 ‘코이노니아(연대, 참여)’의 정신입니다.
사도시대 즉 바울이 목회할 당시 그리스도인의 ‘예배’를 뜻하는 여러 단어 중에 하나가 ‘코이노니아’ 입니다.
그리스어(헬라어) ‘코이노니아(κοινωνία)’는 3가지의 뜻을 모두 포함하고 있습니다.
① 인격체의 결합을 의미하는 친교, 교제의 뜻(하나님과 나, 나와 너 그리고 하나님과 우리)
② 활동 또는 일의 결합(연대)을 뜻하는 참여, 가담, 관여, 동참, 동행의 뜻
③ 활동의 결과나 일의 결과를 뜻하는 ‘몫’이나 ‘책임’을 동일하게 지는 것 을 뜻한다.
예를 들면, 초대교회 예배의 현장을 가장 처음 기록한 고린도전서 10장 16-17절이 그 대표적인 경우이다. (또한, 16장 1-2절을 참고하라)
10:16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κοινωνία)이 아니냐
10:17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여함(κοινωνία)이라
10:16 우리가 축복하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κοινωνία)이 아닙니까? 우리가 떼는 빵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κοινωνία)이 아닙니까?
10:17 빵이 하나이므로, 우리가 여럿일지라도 한 몸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모두 그 한 덩이 빵을 함께 나누어 먹기 때문입니다.
‘기도’ 하면 보편적으로 자신의 소원이나 공동체의 소원을 아뢰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소원의 성취이지요.
물론 그것도 주님이 가르쳐준 기도, 일부분에 속합니다.
하지만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는 그 이상의 가치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라는 일인칭대명사(나, 너, 우리)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6장을 보시면 유독 눈에 들어오는 인칭대명사가 있습니다.
‘우리‘라는 일인칭 대명사입니다.
6:11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6: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6: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여기서 주기도의 독특성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기도의 초점이 ‘하나님과 나’가 아닌 ‘하나님과 우리(공동기도)’라는 사이에 맞추어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우리와 하나님’입니다.
물론 기도는 철저히 개인으로부터 출발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기도자인 나의 사귐(교제)의 통로로 주어진 것이 기도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가르치십니다.
그리고 ‘우리들이 먹을 양식’, ‘우리들이 지은 죄’, ‘우리들이 받는 시험’을 위해 기도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왜 ‘우리’일까요?
그것은 연대와 참여를 뜻하는 ‘코이노니아’ 예배 정신 때문입니다.
그래서 참된 기도 자는 ‘코이노니아’ 예배 정신과 관련해서 두 가지를 기억해야합니다.
하나는 ‘형제애’입니다.
한 분이신 하나님, 한 분이신 그리스도, 한 분이신 성령님 안에서 나와 너의 경계가 없는 ‘형제애’입니다.
인종, 국적, 종교, 성별이 어떻든 그리고 장애아든 정상인이든 누구를 만나든지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하나님의 자녀로 대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 보낸 바울의 편지를 주목해 보시기 바랍니다.
특히 이방인 그리스도를 지칭하는 바울의 호칭은 한결 같습니다.
‘형제들아’로 시작합니다.
롬 1:13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고전 1:10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갈 1:1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이는 바울이 기록하지 않은 ‘다른 서신서’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는 특징입니다.
히 3:1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약 1: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벧후 1:10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
요일 3:13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여도 이상히 여기지 말라
이처럼 무려 90여 번에 걸쳐 등장하는 단어가 ‘형제애’를 강조하는 호칭 ‘형제들아’입니다.
또 하나 ‘코이노니아’ 정신에서 빼 놀 수 없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우리 가운데 거하지 않는 이들, 즉 ‘우리’라는 울타리에서 벗어날 이들을 품는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 좋은 예가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아버지입니다.
흔히 누가복음 15장을 ‘탕자의 비유’라고 합니다.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탕부의 비유’이기도 합니다.
‘탕부(宕父)’ 무슨 뜻입니까?
사랑을 허비하시는, 사랑을 탕진하시는 아버지라는 말입니다.
재산을 탕진한 둘째 아들뿐만 아니라 그 상황을 못 마땅하게 여기는 진짜 탕자인 첫째 아들까지도 품으시는 ‘탕부’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가르쳐 주실 때 ‘나의 아버지’아닌 ‘우리 아버지’라고 일부러 강조하신 것입니다.
바로 ‘우리’라는 울타리에서 벗어난 이들까지도 품으시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석 유영모 선생님은 주기도문을 이렇게 번역해 놓고 기도했습니다.
‘한울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우리도 주와 같이 세상을 이기므로 아버지의 영광을 볼 수 있게 하옵시며
아버지 나라에 살 수 있게 하옵시며
아버지의 뜻이 길고 멀게 이루시는 것과 같이 오늘 여기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먹이를 주옵시며
우리가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먹이도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가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먹이도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 뜻은 풀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사랑)을 이루는 하나님의 먹이’가 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먹이가 되지 않으면 드릴 수 없는 기도가 주기도임을 명심하셔서 ‘주기도’에 최후 승리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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