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종에서 성숙한 믿음으로
히브리서 6:1-8절 2017/01/22(주일오후)
6:1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6:2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
6:3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우리가 이것을 하리라
6:4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6: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6: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6:7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 가는 자들이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6:8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하나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모두에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프리드리히 니체라는 독일 사람이 있습니다.
인문학자이자 철학자이지요.
‘신은 죽었다’는 말로 정말 많은 논란을 일으켰던 아주 유명한 분입니다.
그가 말한 '신은 죽었다.‘ 곧 ’신의 죽음'을 문자 그대로 해석해서 무신론자 그리고 불신론자로 치부해 버리면 곤란합니다.
왜냐하면 니체가 말한 ‘신은 죽었다’라는 말의 의미는,
그리스도인만이 가지고 있는 신앙의 가치, 그 신앙의 핵심 가치를 잃어버린 상실감을 표현한 말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행실 없는 믿음이 그리고 우리의 희생이 없는 따름이 신을 죽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신은 죽었다’가 아니라 ‘신을 죽었다’이지요.
니체의 말입니다.
‘신은 어디에 있지?’ 그는 부르짖었다.
나(는) 너희에게 말하고 싶다!
‘우리가 신을 죽여버렸다’ (고)
‘너희와 내가! 우리 모두는 신을 죽인 자들이다!’(고)
그러나 우리는 어떻게 이러한 일을 해내었단 말인가?
어떻게 우리가 바닷물을 다 마셔버릴 수 있었단 말인가?
누가 우리에게 지평선 전체를 닦아버릴 수 있는 스펀지를 주었단 말인가?
지구가 해의 궤도에서 풀려났을 때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었나?
지구는 어디로 움직이고 있나?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나? 모든 항성으로부터 멀어져 가고 있나? 우리는 계속해서 추락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후진하고 있나? 측면으로 가고 있나? 직진하고 있나? 아니면 모든 방향으로 가고 있는 건가? 아직도 위쪽이 있고 아래쪽이 있나?
(왜) 우리는 끝없는 허공을 방황하는 건가? 허공의 흐름을 느끼지는 못하면서?
더 추워지는 거 아닐까? 계속해서 저녁만 반복되는 거 아닌가?
신은 죽었다. 신은 죽어있다! 그리고 우리가 그를 죽여 버렸다!
어떻게 우리는 스스로를 위로할 것인가? 살인자 중의 살인자인 우리는....
이처럼 니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하나님이 역사하지 못하도록 우리의 불신앙이 신을 죽였다는 것입니다.
다소 과격한 표현이지만 불신앙의 행위가 곧 살인의 행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둘째, 그렇다면 어떻게 사는 것이 신을 죽이지 않는 그리고 우리 삶의 최고 가치인 신앙의 본질을 상실하지 않는 우리의 삶이 될 수 있을까?’라는 신앙의 본질적인 물음을 던진 것이 니체가 말한 ’신은 죽었다‘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말의 맥락과 뜻의 맥락을 무시하고 신앙의 허무주의로 매도되는 것을 보면 그리고 제 귀에 맞지 않는다고 제 멋대로 판단하고 제 맘대로 비난하는 것을 보면 참 마음이 아프지요.
니체, 이 분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책을 하나 섰습니다.
그 책에서 니체는 인간의 정신 발달 과정을 세 단계로 나누어 설명했습니다.
첫째, 낙타의 단계입니다.
마치 낙타가 무거운 짐을 지고 사막을 건너는 것처럼 자기에게 주어진 역할에 순응하는 단계입니다.
‘아빠의 청춘’을 꿈꾸는 한국 아버지들의 뒷모습을 연상하시면 됩니다.
아주 짠하지요.
둘째는 사자의 단계입니다.
기존의 질서, 기존의 관습, 기존의 규범, 기존의 권위에 의문을 품고 대항하는 단계를 말합니다.
마지막 셋째는 어린이의 단계입니다.
낙타의 순응과 사자의 비판을 넘어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단계를 말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니체가 추구하는 인간 정신 발달 과정의 최종 목적지는 낙타도 아니고 사자도 아닌 어린이라는 사실입니다.
아주 흥미롭지요.
낙타의 순응도 그리고 사자의 저항도 아닌, 그저 잘 잊고 낯선 것을 잘 수용할 수 있는 어린이의 창조적 마음입니다.
그러고 보면 마태복음 18장 3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권면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마 18:3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돌이켜, 다른 말로 하면 회개이지요.
회개하고 그리고 어린 아이 같이 그저 잘 잊고 낯선 것을 잘 수용할 수 있는 창조적 마음이 없으면 결단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 우리 주님의 말씀입니다.
어떻습니까?
낙타처럼 살아가십니까?
아니면 사자처럼 저항하며 살아가십니까?
물론 둘 다 무가치한 삶이라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이 요구하는 것은 어린 아이들과 같이 잘 잊고, 낯선 것을 잘 수용할 수 있는 창조적인 삶이겠지요?
그래야 하나님의 은혜가 날마다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묵은 은혜가 아니라 새 은혜입니다.
바라기는 2017년도 새해에는 묵은 은혜가 아닌 새 은혜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신앙의 핵심은 창조적 변화인데, 그 변화를 기대하지 않고 묵은 은혜만을 붙들고 살아가는 분들이 교회 안에 꽤 있다는 것입니다.
아주 영악한 ‘애 어른’이지요.
그래서 잘 잊지도 못하고 새로운 것을 잘 수용하려하지도 않습니다.
묵은 은혜만을 붙들고 살아가지요.
여러분, 아무리 좋고 값진 것이라도 묵히면 썩는 법입니다.
하나님이 정한 이치이지요.
달란트 비유처럼 하나님이 우리에게 아무리 좋은 재능을 주셨다 할지라도 땅에 묵히면 아무 소용이 없는 법입니다.
그래서 수십 년 동안 교회에 출입하고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향내가 나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묵은 쩐 내가 나지요.
왜 그럴까?
한 마디로 잘못 알고 그리고 잘못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어린 아이처럼 잘 인정하고 창조적으로 수용하려 하지 않습니다.
‘애 어른’처럼 받아들이는 척만 하지요.
제가 설교를 준비하면서 늘 기대하는 것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사람을 하나님의 생명으로 대했으면 참 좋겠다.
둘째는 그리스도의 눈입니다.
그리스도의 눈으로 세상을 창조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되었으면 참 좋겠다.
그러면 적어도 니체가 염려한 것처럼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죽이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변화된 창조적 삶을 늘 기대했던 사도 바울의 진솔한 고백이 늘 마음속에 울림으로 남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의 말씀입니다.
2017년도 저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인데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문제는 익숙함입니다.
더 이상 긴장도 변화도 일어나기 어려운 익숙함이 문제입니다.
다른 말로하면 타성에 젖는 것이지요.
이것이 제가 싸워야할 현재의 숙제입니다.
찬송가 302장을 보시기 바랍니다.
큰 바다보다 깊은 하나님 은혜의 세계로 나아가자고 초대하는 찬양인데, 가사를 찬찬히 살펴보면 가사가 참 절묘합니다.
3절입니다.
많은 사람이 얕은 물가에서 저 큰 바다 가려다가
찰싹거리는 작은 파도보고 마음 약하여 못가네
무슨 말입니까?
지금 우리의 신앙 수준이 마치 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저 안전하게 주변만 맴도는 신앙이지요.
그러니 작은 파도만 처도 그 앞에서 주춤거리는 것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시인은 말합니다.
후렴입니다.
언덕을 떠나서 창파에 배 띄워
내주 예수 은혜로 바다로 네 맘껏 저어가라
땅 짚고 헤엄치는 흉내 그만내고,
언덕을 떠나서 창파에 배를 띄우고,
주님의 은혜의 바다로 나아갈 용기를 내라는 것입니다.
신앙의 변화, 신앙의 성숙입니다.
제발 묵은 신앙, 묵은 은혜는 그만 우려먹으라는 것입니다.
설교를 준비하면서 마르틴 루터가 쓴 ‘대교리문답’을 번역한 원고를 읽었습니다.
아직 출판은 되지 않았고, 루터교회 최주훈 목사님의 번역으로 올 초에 출판 될 예정입니다.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이 한창이던 1529년 ‘대교리문답’서를 쓴 이유가 있습니다.
당시 교황 중심의 가톨릭교회를 갱신하고 개혁하는 종교 개혁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습니다.
많은 이들의 가슴을 뜨거웠지요.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아주 심각한 문제가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개혁 신앙의 핵심인 복음의 자유, 신앙의 자유를 빌미로 방종과 게으름, 그리고 영적 무지를 부끄러워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종교 개혁 중심 속에 있는 루터가 침묵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복음의 자유, 신앙의 자유를 빌미로 방종과 게으름, 그리고 영적 무지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게으른 목사들과 거만한 성도들을 위해 쓴 책이 ‘대교리문답’입니다. 이 책 서문에서 루터는 게으른 목사들과 거만한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스스로를 돌이켜 보십시오.
당신들이 믿고 생각하는 것과 달리, 당신들의 지식수준은 바닥입니다.
수준 높은 박사인 줄 착각하지 마십시오.
혹여 이전에 잘 알고 있었을지라도, '이건 내가 이미 통달한 거야', '이거 다 아는 거야'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당신 생각에 교리문답서를 다 알고 있고, 식은 죽 먹기처럼 쉽게 보여도(사실 평생 배워도 그렇게 될 수 없지만) 매일 읽고 숙고하고 함께 말할 때마다 거기서 새롭게 배울 것과 열매들을 계속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읽고 대화하고 생각할 때 성령이 함께하실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 ‘대교리문답’, 최주훈 옮김, 복있는사람, 2017년 상반기 출간 예정)
사실 우리가 '안다' 하지만 실은 ‘알지 못하는 것’이 참 많습니다.
특히 성경의 세계가 그렇고 신앙의 세계가 그렇습니다.
그래서 늘 열린 마음으로 배우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 안타까운 현실은 우리 교회가 여기에 약점이 있습니다.
열린 마음으로 늘 배우려 하는 열심이 딱히 보이지 않습니다.
정말 귀하고 좋은 것을 가르쳐 줘도 그것이 귀한 줄 모르지요.
그래서 오늘 본문 히브리서 6장 말씀에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의 권면입니다.
6:1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6:2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
6:1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교의 초보적 교리(말씀을)를 제쳐놓고서, 성숙한(완전한) 경지로 나아갑시다. 죽은 행실에서 벗어나는 회개와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6:2 세례에 관한 가르침과 안수와 죽은 사람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과 관련해서, 또 다시 기초를 놓는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히브리서 저자의 권면은 이런 것입니다.
‘그리스도교의 초보적 교리를 제쳐놓고 그리고 성숙한 믿음의 경지로 나아가자’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먼저 살펴야할 것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말한 그리스도교의 초보적인 교리(말씀)가 무엇인가?
6가지인데 6장 1절과 2절에서 찾아보겠습니다.
첫째, 죽은 행실에서 벗어나는 회개
둘째, 하나님에 대한 믿음
셋째, 세례에 관한 가르침
넷째, 안수, 여기서는 병자를 위한 안수를 말합니다.
다섯째, 죽은 사람의 부활
그리고 마지 막 여섯째, 영원한 심판입니다.
어떻습니까?
사실 우리에게는 이런 초보적인 교리조차도 없지요.
그러니 성숙한 믿음의 경지로 나아가는 것이 버거운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린 아이와 같이 행할 것은 첫째,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 즉 ‘그리스도교의 초보적 교리들(말씀들)’을 아는 데 열심을 내야합니다.
죽은 행실에서 벗어나는 회개가 무엇인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무엇인지?
세례에 관한 가르침이 무엇인지?
병자를 위한 안수가 무엇인지?
죽은 사람의 부활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영원한 심판이 무엇을 말하는지는 명확하게 아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풍성함에 거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우리 교회가 약속하고 정한 매 시간 시간마다 참석해서 듣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둘째, 그리스도교의 초보적 교리들(말씀을)을 잘 아는 분들이라면 거만 떨지 말고 하나님의 완전 곧 성숙한 믿음의 세계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 두 곳을 찾아보겠습니다.
구약성경 레위기 19장 2절입니다.
19:2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신약성경 마태복음 5장 48절입니다.
5: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첫째, 그리스도교의 초보적 교리를 배우는 일에 게으름을 내고 그리고 둘째, 성숙한 신앙의 자리, 성숙한 믿음의 자리로 나아가지 못하고 겉에서만 빙빙 맴도는 이들의 위험성을 이렇게 경고합니다.
히브리서 6장 4절입니다.
6:4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6: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6: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6:4 한번 빛을 받아서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을 나누어 받고, 또
6: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장차 올 세상의 권능을 맛본 사람들이
6:6 타락하면, 그들을 새롭게 해서 회개에 이르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금 십자가에 못 박고 욕되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니체가 말한 것처럼 신을 죽이는 일이지요.
이런 저주와 무서운 심판이 어디 있겠습니까?
두 가지만 부탁드리겠습니다.
첫째, 말씀 듣고 그리고 말씀을 탐구하는 일에 열심을 내십시오.
어린아이처럼 낯선 하나님의 말씀을 창조적으로 잘 수용하시고 배우십시오.
둘째,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힐 자리가 어디인지 잘 살피시고, 그 성숙의 자리로 나아가십시오.
그러면 거룩한 성전인 곧 우리 몸을 통하여 미처 우리가 이 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창조의 역사, 새로운 구원의 역사가 날마다 펼쳐질 것입니다.
'말씀풀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사기 3:7-11 사사 옷니엘 (0) | 2017.02.08 |
---|---|
사도행전 6:8-15 스데반 (0) | 2017.02.08 |
출애굽기 33:18-23 은혜의 흔적, 스티그마타 (0) | 2017.01.24 |
마태복음 5:13-16 웨슬리의 산상설교 5 (0) | 2017.01.24 |
출애굽기 17:1-7 여호와를 시험하지 말라 (0) | 2017.01.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