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풀이

마태복음 5:13-16 웨슬리의 산상설교 5

心貧者 2017. 1. 24. 14:02


웨슬리의 산상설교 5

마태복음 5:13-162017/1/18()

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5: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5: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5: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산상설교 서론에 해당하는 팔복을 통하여 예수님이 가르치고자 하신 것이 두 가지가 있다고 웨슬리는 보았습니다.

 

하나는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또 이루어 가는가?’입니다.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가 있는데 그것이

누구를 통해 이루어지는가 하면,

자기 자신, 곧 나사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보았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지요.

 

그리고 그 나라의 참여는 우리 주님을 따르는 이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제자와 그리고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라 여기며 따르는 무리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는 이루어 졌고 그리고 이루어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의 저자 마태는 팔복의 시작과 마지막을 하나님의 나라인 천국으로 끝을 맺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나라라는 표현보다는 하늘나라 곧 천국의 개념이 더 익숙했기 때문입니다.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그들것임이요

5: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그들것임이라

 

이처럼 예수님이 선포한 천국은,

하나님 홀로 계시는 지고지순의 천국이 아니라 피조물이자 극악무도한 죄인도 함께 참여할 수 있는 천국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감리교회의 핵심 신학인 선재적 은총이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선재적(먼저 임한) 은총,

그 은총으로 자연인 곧 피조물이자 죄인인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거룩한 백성으로 초청 받았다는 것입니다.

중세부터 등장한 예지 예정론과는 상당히 배치되는 것이지요.

뿐만 아니라 당시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선민사상하고도 상당히 배치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어는 누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시작된 하나님 나라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팔복을 선포한 첫 번째 이유입니다.

선민, 곧 선택된 혈통이 아니라 예지 예정 곧 부유함의 증거가 아니라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하는 자라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도록 초청받는 천국을 말합니다.

그래서 선민사상에 젖은 바리새파 사람들과 사두개파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경계한 것입니다.

자신들, 곧 유대교 전통의 구원론과 너무도 달랐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이 팔복을 통하여 가르치신 말씀은, 하나님 나라로 가는 길 곧 구원의 여정을 다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한 곧 마음의 겸손으로부터 시작해서

온유함으로 그리고 의에 주리고 목마름으로 그리고 긍휼히 여김으로, 마음이 청결함으로, 화평함으로 그리고 마지막 단계인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것으로 하나님 나라의 여정은 이루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감리교 신학의 핵심인 성화가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베풀어 주시는 선재적 은총으로부터 시작된 구원의 역사는 성화의 과정, 곧 겸손하고 온유하고 의에 주리고 긍휼하고 청결하고 화평하며 그리고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연단을 통하여 완성된다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는 그렇게 완성된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한 개인의 구원 역사, 한 개인의 하나님 나라의 완성은 그 한 사람에게만 머물지 않고 누룩이 번지듯이 또 다른 이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고 또 확장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극히 작은 겨자씨가 발화해서 집 없는 많은 새들의 거처가 되었던 것처럼 우리 한사람 한사람으로 부터 시작된 지극히 작고 보잘 것 없는 하나님의 나라가 방황하고 유리하는 길 잃은 백성들의 보금자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요구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책임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소유한 구원받은 자의 책임 있는 행동이지요.

이것을 다루고 있는 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먼저 맛본 그리스도인의 책임 있는 행동이지요.

 

, 어떤 책임 있는 행동일까요?

다시 본문을 찬찬히 읽도록 하겠습니다.

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5: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5: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5: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이 말씀이 강조하는 그리스도인의 책임 있는 행동 3가지 원칙입니다.

 

첫째, 사회적 구원의 책임입니다.

그리스도교는 기본적으로 사회적 종교라는 것입니다.

불교처럼 하안거’ ‘동안거하는 종교가 아니라 세상과 죄악 속으로 파고 들어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는 사회성을 지닌 종교라는 것입니다.

하늘에 속한 사람이지만 이 땅을 등지고 살아가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신 말씀이,

513절 너희 세상의 소금이다.

514절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사회적 책임이지요.

 

그런데 이 사회적 책임을 강조 하는데 사용된 너희는 무엇이다라는 문학적 양식이 아주 흥미롭습니다.

왜냐하면 너희는 무엇이다이런 문학적 표현양식은 영으로 존재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할 때, 사용된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자면 출애굽기 3장에서 모세가 하나님에게 묻습니다.

3:13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의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그 때 모세에게 주어진 답이 그 유명한 나는 나다입니다.

3: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나는 나다, 여호와)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이처럼 하나님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설명할 때 표현한 양식이 나는 나다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사용할 수 있는 표현양식이지요.

 

이러한 표현 양식은 예수님도 즐겨 사용하셨습니다.

특히 요한복음에 나는 나다라는 양식이 집중적으로 나타납니다.

7가지인데,

6: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8:12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10:7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10: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11: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15:1 나는 참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만이 사용할 수 있는 표현들 즉 나는 나다라는 신적인 표현들이 인간에게 처음 쓰여 진 것이 오늘 말씀입니다.

그만큼 중요한 말씀이지요.

 

513절 너희 세상의 소금이다.

514절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소금이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빛이다.

 

우선 순서를 바꿔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빛이다이 말씀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이 말씀의 뜻을 설명 드리는 것은 의외로 쉽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이미 요한복음 812절에서 자신을 가리켜 하신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8:12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따라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라고 했을 때 두 가지 사실 변화가 전재되어야 합니다.

첫째, 어둠에 다니지 말아야합니다.

다시 말해 눈 뜬 소경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어둠이 우리 삶을 지배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창세기 12절에 나오는 혼돈과 공허 그리고 그로 말미암은 흑암으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어떻게요?

아주 간단합니다.

빛이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면 됩니다.

 

문제는 두 번째입니다.

빛을 영접한 사람은 거기서 그냥 그 자리에 머물려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생명의 빛을 품고 세상의 빛으로 나아가야한다는 것입니다.

빛이신 예수님을 영접한 그리스도인은 책임 있는 행동을 세상에 드러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에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5: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착한 행실입니다.

우리 주님이 주신 생명의 빛을 사람 앞에 비치게 하는 착한 행실입니다.

착한 행실, 여러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에 대한 설명이 519절부터 구체적인 사례를 언급하면서 제시하는데 결국은 황금율이라고 불리는 마태복음 712절을 행동으로 보이는 자를 말합니다.

7: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7:12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여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본뜻이다."

 

이것이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뜻입니다.

 

문제는 513절 너희 세상의 소금이다.’의 뜻을 밝히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 어디에 봐도 소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너희 세상의 소금이다.’

무슨 의도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일까요?

이 뜻을 풀기 위해 앞서 살펴본 빛의 예를 대입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빛의 반대는 어둠입니다.

분명하지요.

그러면 소금의 반대는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513절에서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맛을 잃은 소금입니다.

얼핏 이해되지 않지요.

 

이는 우리의 소금과 이스라엘의 소금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선 우리가 쓰는 소금은 천일염입니다.

짭짭한 바닷물을 말려서 얻은 정제된 소금입니다.

그래서 불순물이 거의 나오지 없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소금은 정제된 천일염이 아니라 암염입니다.

선탄 캐듯이 산이나 들판에서 캐낸 소금입니다.

따라서 상대적으로 불순물이 비교적 많은 편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소금을 사용할 때 물에 놓여 소금물을 사용하지요.

그리고 그 밑에 가라 않은 맛을 읽은 소금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물로 우려내고 우려내다가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되면 알맹이 빼 먹은 조개껍데기 버리듯이 밖에 버려지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시지요.

 

따라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했을 때 그 소금이란 맛을 잃은 소금처럼 쓸모없는 존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세상에 필요한 의미 있는 존재를 의미합니다. 구약에 나오는 소금 언약처럼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언약 곧 율법의 맛을 지닌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온 말씀이 마태복음 517절 이후입니다.

 

 

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5: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5: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5: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핵심은 이것입니다.

율법학자인 서기관 그리고 바리새인 보다 더한 의 곧 율법의 행실, 율법의 실천, 율법의 행함이 없으면 맛을 잃은 소금이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밟혀지는 것처럼 그런 아무 쓸 없는 비참한 존재로 전략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가십거리가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시사하는 바가 크지요.

 

그래서 율법을 지키는 것이 중요한데 그 구체적인 대표 사례가 21-48절까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라고 했을 때 그 행실의 결론이 548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5: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구약의 핵심인 레위기 192절의 완성이지요.

19:2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두 번째로 오늘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주님의 의도는 이런 것입니다.

첫째, 그리스도교는 기본적으로 사회적 종교이다.

두 번째는 신앙 곧 믿음의 행실을 은폐하는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본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 받은 자의 착한행실, 곧 하나님이 거룩하듯 우리도 거룩하게 되는 그 신앙의 행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반드시 드러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5: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5: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여기에 보면 세상의 빛이라고 말하는 그리스도인의 착한 행실에는 두 가지 속성이 있는 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

 

첫째, 은폐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세상의 소금이라는 사실과 그리고 자신이 세상의 빛이라는 사실을 세상에 결코 숨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신앙도 드러나고 그리고 그 신앙에 따른 착한 행실도 자연스럽게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결코 숨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주 쉬운 예를 들지요.

입이 찌어지게 즐거운 일이 있다고 합시다.

숨길 수 있나요?

없지요.

이처럼 그리스도 말미암은 신앙과 그에 따른 착한 행실은 결코 숨길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믿음의 행실 신앙의 행실, 곧 착한 핵실을 은폐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면 적극 행하라는 것입니다.

5: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모든 사람에게 비치게 적극 행하라는 것입니다.

선한 영향력이지요.

 

말씀을 마칩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 오늘 본문에서 우리 주님이 말씀하고자 하는 것은 실천의 강화입니다.

5: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우리의 선한 행실이 구원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말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공덕주의자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요, 절대 은총입니다.

 

하지만 사회적 종교인 그리스도교는 세상의 소금이 되고 세상의 빛이 되는 사회적 책임의 행실을 결코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는 이 말씀을 깊이 묵상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 이 땅에서 자신의 책임을 다한 것처럼 하늘로부터 거듭난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이 세상에서 그 책임 있는 행실을 소금으로 그리고 빛으로 나타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바라기는 우리가 행하는 행실마다 2017년도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역사가 나타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