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슬리의 산상설교 4
마태복음 5:9-12절 2016/1/4(수)
5: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5: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5:11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5: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오늘은 산상설교 네 번째 시간으로 지난 시간에 설명 드리지 못했던 일곱 번째 복과 여덟 번째 복에 대해서 살펴보고 그 안에 담긴 주님의 뜻을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지난 시간까지 살핀 말씀을 잠시 요약하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마태복음 5장 6장 7장을 우리는 예수님의 ‘산상설교’라고 부른다.
마태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설교가 다섯 편 나옵니다.
①마태복음 5-7장 산상설교
②마태복음 10장 파송설교, 12제자를 파송할 때 한 설교.
③마태복음 13장 비유설교, ‘천국은 마치’로 시작하는 천국에 관한 비유설교.
④마태복음 18장 제자 공동체에 관한 설교
⑤마태복음 24-25장 종말설교, 종말에 관한 설교
그래서 마태복음에 나오는 다른 네 개의 설교와 구별하기 위해 ‘산상설교’라고 우리가 부르는 것입니다.
둘째, 산상설교가 말하고자 하는 가장 큰 주제는 하나님의 나라, 곧 천국이다.
이미 우리 가운데 임한 그리고 앞으로 우리에게 임할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영어표현을 빌린다면 ‘already but not yet’입니다.
이미 ‘already’와 아직 ‘not yet’입니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우리 가운데 그리고 우리 안에 임하는가? 에 대해서 설명 할 때, 성부하나님 성자하나님 성령하나님의 역할을 이렇게 나누어 설명했습니다.
성부하나님, 하나님의 나라를 계획하시고 섭리하시는 분이지요.
반면 성자 하나님, 예수님이지요.
이 땅에 친히 오셔서 그 나라를 완성하신 분으로 봅니다.
이미 ‘already’입니다.
문제는 각 사람에게 임할 성령하나님입니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실제로 누릴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분으로 성령하나님을 이해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나라를 귀히 여기고 사모하며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모든 이들에게 실제로 누릴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분으로 이했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자면, 어떤 이는 하나님의 나라를 already 이미 임한 하나님의 나라에 초점을 두고 살아갑니다.
이미 임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래서 어둠에 해당하는 개인의 거룩하지 못함이나 사회의 불의와 부정을 용납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주로 이런 분들은 사회적 영성이 강한 진보적인 신앙의 색채를 띠지요.
반면 not yet 아직 이루어지지 않는 하나님 나라에 초점을 두고 살아가는 신앙인들이 있습니다.
현실 보다는 내세에 임할 천국에 더 관심이 있지요.
그래서 내세에 임할 천국에 더 관심을 두고 살아가다보니까 현실 도피적이고 보수적이지만 개인의 영성이 강한 신앙의 색채를 띠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서로 다른 두 종류의 신앙이 서로 갈등하고 긴장하고 협력하면서 교회는 발전하고 성장했다는 것입니다.
셋째, 요약입니다.
산상설교 서론에 해당하는 ‘팔복’은 하나님의 나라로 나아가는 구원의 여정을 다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팔복을 원어 그대로 직역해 보면 이렇습니다.
①3절 복이 있다. 심령이 가난한자는 왜냐하면 천국이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②4절 복이 있다. 애통하는 자는 왜냐하면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두 가지가 의미하는 구원의 덕목이자 하나님 나라로 나아가는 신앙 여정의 시작인 겸손입니다.
겸손한 자가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나라를 찾기 때문입니다.
결코 교만한 자는 찾지 않습니다.
③5절 복이 있다. 온유한 자는 왜냐하면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④6절 복이 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왜냐하면 그들이 배부를 것이기 때문이다.
⑤7절 복이 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왜냐하면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세 가지가 의미하는 구원의 덕목은 ‘자비와 긍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 그 나라는 자비와 긍휼이라는 두 기둥으로 세워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자비와 긍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신 것처럼 제자 된 우리 역시 자비와 긍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야 한다는 것이 웨슬리 목사님이 이해한 팔복입니다.
팔복에서 마지막으로 살펴볼 구원의 여정은 여섯 일곱 여덟 번째 복으로
⑥ 8절입니다.
복이 있다. 마음이 청결한 자 왜냐하면 마음이 청결한 자 곧 겉 사람과 속 사람이 같은 사람은 하나님을 볼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 할 때 항상 세 가지를 꼭 살펴야합니다.
첫째, 예수님 사랑에 뿌리를 두고 있는지?
둘째, 그 사랑의 힘을 빌려 사랑하는가?
셋째, 그 일을 행하는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순수하고 깨끗한가? 입니다.
예배 생활을 예를 들어 설명하겠습니다.
첫째, 지금 드리는 이 예배가 예수님 사랑에 뿌리를 두고 있는지?
둘째, 하나님의 힘을 빌려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는지?
마지막 세 번째, 지금 드리는 우리의 예배가 순수하고 깨끗한지?
이 세 가지를 항상 살펴가 야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예배가 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배가 힘이 없고, 예배드리는 시간이 아깝고, 예배 시간에 드리는 물질이 아깝다고 여겨지는 이유는 이런 것들을 우리가 무시하고 예배드리기 때문입니다.
바라기는 2017년 예배의 성공자가 되십시오.
예수님 사랑에 뿌리는 두고, 하나님의 힘을 빌려, 순수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예배하십시오.
그러면 예배가 주는 치유의 능력, 예배가 주는 기쁨 그리고 예배가 주는 평안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5: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화평’ 다른 말로 ‘평강’이라고도 하고 ‘평화’라고도 합니다.
우리 인사말로는 ‘안녕’이지요
편안할 ‘안’ 편안할 ‘녕’입니다.
어느 말을 사용해도 다 좋습니다.
히브리어로는 ‘샬롬’이고 그리스어로는 ‘에이레네’라고 합니다.
‘에이레네’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창1)는 말처럼 하나님 보시기에 참 좋은 상태를 의미하는데, 언제든지 누릴 수 있는 영원한 기쁨과 행복이 충만한 상태를 말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언제든지’라는 말과 영원한 이라는 말인데 ‘한 결 같이 늘 평안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절대 평안이지요.
찬송가 445장의 상태입니다.
1. 태산을 넘어 험곡에 가도 빛 가운데로 걸어 가면 주께서 항상 지키시기로 약속한 말씀 변치 않네
2. 캄캄한 밤에 다닐지라도 주께서 나의 길 되시고 나에게 밝은 빛이 되시니 길 잃어 버릴 염려 없네
3. 광명한 그 빛 마음에 받아 찬란한 천국 바라 보고 할렐루야를 힘차게 불러 날마다 빛에 걸어 가리
그러면 이러한 ‘화평’은 어디서부터 오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마음이 청결한 자 곧 겉 사람 뿐 만 아니라 속 사람인 마음의 할례까지 받은 자로부터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이 청결한 자는 모세처럼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복을 누리게 될 뿐만 아니라 화평의 왕이신 예수님처럼 화평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늘로부터 오는 화평을 누리는 자가 책임져야할 사명의 몫을 알아 차리는 것입니다.
화평을 누리는 자의 사명, 무엇입니까?
하늘로부터 오는 화평을 누리는 자답게 하늘로부터 오는 화평을 위해 일 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평화의 일꾼이 되는 것입니다.
어디서요?
평화를 잃은 이 세상에서입니다.
태산과 험 곡과 같은 그리고 캄캄한 밤과 같은 이 세상에서입니다.
절망의 땅이지요.
거기서 평화를 일구는 일꾼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5:9이 말하는 화평하게 하는 자의 몫이자 사명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평화를 잃은 이 세상, 이 절망의 땅에서 평화를 일구는 일꾼이 될 수 있을까?
아주 간단하게 설명하면,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사람에게 선을 행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우리의 착한 행실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세상의 소금, 세상의 빛이 되는 것입니다.
성 프란체스코 ‘평화의 기도’
주님, 저를 당신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주소서.
‘화평하게 하는 자’ 어떤 복을 받습니까?
5: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천국 시민권을 얻게 됩니다.
마음의 할례를 넘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구원의 증표를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마하지요.
마지막 여덟 번째 복입니다.
5: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여기서 먼저 생각할 것은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가 누구인가? 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의인이란 율법의 의인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의롭게 된 자를 의미합니다.
다른 말로는 성령으로 거듭난 자이지요.
앞의 7단계를 모두 거치고 오직 성령으로 만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문제는 이들이 이 땅에서 박해를 받는 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
왜 성령 안에서 의롭게 된 자들이 박해를 받을까?
한 마디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육신의 속한 사람과 모든 것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말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고 행동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선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성령의 욕심에 따라 살아갑니다.
‘의와 화평과 희락’이지요.
이것을 확대하면 성령의 9가지 열매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재(갈5:22-23)
그래서 항상 삶의 방향이 하나님의 나라가 먼저이고 하나님의 의가 먼저입니다.
하지만 육신의 사람은요?
정반대입니다.
자신의 정욕, 자기 목숨에 따라 살아갑니다.
갈라디아서 5장 19-21절
5:19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5:20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5: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그러니 서로 충돌할 수밖에 없지요.
그래서 요한복음 17장을 보면 대제사장으로 오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이런 중보의 기도를 드린 것입니다.
17:14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그들을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으로 인함이니이다
17:15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17:16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17:17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17:14 나는 그들에게 아버지의 말씀을 주었는데, 세상은 그들을 미워하였습니다. 그것은, 내가 세상에 속하여 있지 않은 것과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여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17:15 내가 아버지께 비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 가시는 것이 아니라, 3)악한 자에게서 그들을 지켜 주시는 것입니다. 또는 '악에서'
17:16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과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았습니다.
17:17 진리로 그들을 거룩하게 하여 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거짓(불의)과 싸우는 자, 그래서 박해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어떤 복을 누리게 될까요?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천국, 곧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라 된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박해, 우리가 어떻게 대처해야할까요?
첫째, 무엇보다도 박해를 스스로 자초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마10:23 이 동네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의 모든 동네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
자기 육체의 연약함을 알고, 피할 수 있으면 박해를 피하라는 것입니다.
박해에 있어서 우리가 꼭 주의해야할 것은 박해 받는 것 자체가 ‘의를 위하는 사람’의 증거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의를 위하는 사람에게 박해는 필연적이지만 박해 받는 모든 사람이 의인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뻔히 알면서도 스스로 자신의 몸을 상하게 하거나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둘째, 박해를 피할 수 없으면 잠잠히 수용하라는 것입니다.
피하는 것이 상책이지만 그럴 수 없다면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처럼 도수장에 끌려가는 어린 양과 같이 그리고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사53:7) 담담하게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 프란체스코처럼 이런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주님이시여, 제가 바꿀 수 없는 일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힘을 제게 주소서’
세 번째입니다.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마5: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마지막 네 번째입니다.
믿음, 곧 의에 이르는 믿음으로 박해를 이기라는 것입니다.
박해를 이길 수 있는 유일한 힘은 오직 믿음뿐이라는 것입니다.
요한 일서 5장 4절입니다.
5:4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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