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풀이

요한복음 21: 15-17 갈릴리 그리고 베드로

心貧者 2016. 10. 18. 16:16


갈릴리 그리고 베드로

요한복음 21:15-17 2016/10/16()

21:15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21:16 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21:17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하나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위에 그리고 우리 가정과 일터 위에 함께 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일생에 있어서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중요한 지명이 몇 군데 있습니다.

 

우선 베들레헴이지요.

예수님이 태어나신 곳으로 유대인의 왕으로 경배를 받은 곳입니다.

 

그 다음은 나사렛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시작해서 공생애 사역 전 까지 주로 머문 곳이 나사렛입니다.

오늘날로 말한다면 나사렛유치원 나사렛초등학교 나사렛중학교 나사렛고등학교를 다니신 것이지요.

그래서 훗날 얻어진 별명이 나사렛 사람입니다.

 

그 다음으로 살펴 볼 곳은 요단강입니다.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곳이지요.

좀 더 정확한 표현을 사용한다면 침례지요.

요단강물에 자신의 몸을 완전히 담겼다가 일어나는 침례를 받게 됩니다.

 

 

요단강 다음으로 살펴볼 곳은 유대 광야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에 펼쳐진 광야를 우리가 유대 광야라고 부릅니다. 마른 하천과 계곡이 꾀 발단한 지형으로 자연 동굴이 많은 곳입니다.

그 유대 광야에 있는 동굴을 거처삼아 금식하시면서 기도를 하시게 되는데 그 유명한 40일 금식기도의 장소로 등장하는 곳입니다.

 

또 하나 주목할 곳은 역시 예루살렘입니다.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만찬, 애찬을 나누었던 장소이지만 동시에 제자들로부터 배신을 당한 장소이지요.

수치와 능욕을 받은 곳이기도 하고 십자가 형벌로 죽임을 당하기도 하신 곳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일생 속에서 기억될 만한 장소들을 하나씩 아주 간략하게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난 베들레헴, 예수님이 자라신 나사렛, 그리고 세례를 받은 요단강, 금식을 하시고 기도를 하셨던 유대광야 그리고 수치와 고난과 죽음을 당하신 곳 예루살렘입니다.

한 곳이 빠졌지요?

그곳이 어디입니까?

갈릴리입니다.

 

오늘은 공생애 사역의 중심지로 등장하는 갈릴리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갈릴리는 베들레헴이나 나사렛 같은 동네 이름이 아닙니다.(지도참고)

우리로 따진다면 시나 도에 해당하는 곳이지요.

아마 그보다 더 큰 행정 구역일 것입니다.

수백 개의 동네로 이루어진 곳이 갈릴리입니다.

 

(지도참고) 예수님 당시 갈릴리 지역과 요단강 건너 베레아 지역을 다스렸던 왕이 있었습니다.

그 왕을 우리가 분봉 왕(tetrarch)이라고 부르는데 누구입니까?

헤롯 안티파스입니다.

헤롯 대왕이 다스렸던 영토의 1/4을 다스리는 영주를 분봉 왕이라고 부르는데 헤롯 안티파스가 갈릴리와 베레아 지역의 분봉 왕이었습니다.

 

헤롯 안티파스, 정말 대단한 사람입니다.

그 누구보다도 야심만만했던 헤롯 안티파스는 아버지 헤롯대왕을 가장 많이 닮은 아들이었습니다.

다른 형제들처럼 분봉왕의 지위에 만족할 수 없었던 그는 아버지 헤롯대왕의 영토를 전부 다스리고 싶은 야망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사렛에서 멀지 않은 곳에 로마 도시를 본 딴 신도시 세포리스를 어마어마하게 건설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곳을 갈릴리의 중심도시 수도로 삼지요.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이 목수였다는 것은 그저 우연의 일이 아닙니다.

컨셉도 아니구요.

신도시 세포리스 건설을 위해 일했던 목수들이 주로 모여 살던 동네가 바로 나사렛입니다.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도 등장하지 않고 심지어 구약 성경에도 등장하지 않는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날품팔이 노동자들의 동네이지요.

 

헤롯 안티파스의 야망은 이 뿐만이 아닙니다.

헤롯 안티파스는 갈릴리에 또 하나의 로마식 도시를 새롭게 건설하게 됩니다.

불과 20년도 지나지 않아 갈릴리 호숫가를 끼고 새로운 수도를 다시 건설하게 되는데 그곳이 바로 당시 황제의 이름을 딴 도시, ‘디베랴입니다.

당시 로마 황제의 이름이 티베리우스인데 그 이름을 따서 디베랴를 건설합니다.

갈릴리 호수를 디베랴 호수라고 부른 것은 바로 이 시점부터 사람들이 그렇게 부르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처럼 두 번에 걸친 대 토목공사에 막대한 예산이 들었음은 불문가지일 것이고 그 건설 사업에 필요한 재원과 노동력을 마련하기 위해 갈릴리와 베레아의 농민들이 당한 수탈은 말로 다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당시 갈릴리의 전체 인구가 15만 명이 채 안 되었다고 하니 갈릴리 백성들이 겪은 억압과 수탈의 현실이 어떠했을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현장에서 예수님의 공생애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게 됩니다.

마태복음 4장입니다.

4:12 예수께서 요한이 잡혔음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4:13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지파)과 납달리(지파) 지경 해변(갈릴리)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4:14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4:15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4:16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

4:17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갈릴리.

갈릴리는 예수님뿐만 아니라 그를 따랐던 제자들에게도 아주 중요한 장소입니다.

사람 낚는 어부 곧 제자로 부르심과 그리고 네 양을 먹이라는 소명을 받은 곳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베드로의 경우만을 살펴보겠습니다.

누가복음 5장입니다.

밤새도록 허탕만 친 베드로는 동료들과 함께 그물을 손질하고 있었습니다.

다음 날 조업을 위해서지요.

빨리 정리하고 집에 가서 쉬려고 하는데, 낯선 분이 다가옵니다.

"잠시 배를 사용해도 되겠느냐?"고 물어 그렇게 하라고 했습니다.

 

배에 오른 분은 갈릴리 해변에서 조금 배를 떼더니 모인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풀어가며 설교를 하기 시작합니다.

전형적인 떠돌이 랍비의 풍경이지요.

종종 있었던 일이라 그러려니 했습니다.

 

그런데 떠돌이 랍비의 가르침이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마치 그물코처럼 그 분의 가르침이 귀에 걸려들었습니다.

'도대체 이 분이 누군데 저런 깊이 있는 말씀들을 하실까?'

어쩌다 저런 권위 있는 분이 떠돌이 랍비가 되었을까? 도대체 저분은 누굴까?’

그 어디에서도 들어보지 못한 권위 있는 말씀들로 인해 베드로는 순식간에 마음이 빼앗기게 됩니다.

 

설교를 마치자마자 배의 주인인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말을 겁니다.

아주 유명한 말씀이지요.

누가복음 54절입니다.

5:4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깊은 데로 가라

그물을 내려라

그리고 고기를 잡아라.’

평상시 같으면 그 어느 것 하나 따를 수 없는 아주 무례한 부탁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거부할 수 없는 권위를 그분에게서 느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말을 이어갑니다.

5:5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이런 경우는 평생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손끝에서 느껴지는 묵직한 무게 속에서 베드로는 다시 한 번 놀라게 됩니다.

그리고 묵직한 무게는 현실이 되어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게 되지요. 평생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기적 같은 일이 현실로 나타난 것입니다.

바로 그 때, 베드로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깨달게 되었고 그 날 그 즉시 예수님의 제자가 됩니다.

베드로와 예수님 사랑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베드로.

베드로는 예수님의 첫 제자답게 늘 주님과 함께 했습니다.

제자들 중에서도 야고보, 요한과 함께 예수님을 아주 가까이 따르는 특별한 지위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베드로에게 위기가 찾아옵니다.

바로 예수님의 수난(예수님의 고난) 예고 앞에서입니다.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마지막 수난예고입니다.

마태복음 26장입니다.

26:1 예수께서 이 말씀을 다 마치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26:2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리라 하시더라

 

그 때 베드로는 어떠한 망설임도 없이 예수님을 향한 자신의 사랑과 충성을 당당하게 밝힙니다.

26:33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결심과 약속, 베드로의 진심이지요.

그런데 그 뜨거운 사랑의 고백에 예수님이 찬 물을 끼얹으십니다.

계속해서 마태복음 2634절을 보겠습니다.

26:34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지만 베드로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자신의 뜻과 마음을 몰라주는 예수님이 조금은 야속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다시 한 번 주님을 향한 자신의 사랑과 마음을 밝힙니다.

이번에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 약속합니다.

26:35 베드로가 이르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그와 같이 말하니라

 

결국 어떻게 됩니까?

예수님의 말씀대로 됩니다.

죽음의 공포, 세상의 권력() 앞에서 베드로를 비롯한 모든 제자들이 결국 무릎을 꿇습니다.

 

여기서 오늘 우리는 베드로의 모습 속에서 를 발견해야합니다.

나의 연약함이지요.

죽음 앞에 무력한 나.

세상의 힘, 세상의 권력 앞에서 무력한 나입니다.

 

진심, 믿음의 진정성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우리에게도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확실한 고백이 있지요. 이런 믿음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또 예수님을 향한 열정, 사랑이 없어서도 아닙니다.

그 열정과 사랑이 없다면 이 시간에 이렇게 있을 필요가 없지요.

왜 헌신합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베드로처럼 무너지는 이유는?

세상의 힘을 너무 쉽게 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죽음의 공포를 너무 쉽게 보기 때문입니다.

세상 앞에 서 있는 나의 연약함

늘 죽음 앞에 서 있는 나의 연약함을 망각하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처럼 너무 쉬운 사랑의 고백을 남발하고 그리고 조장하는 것입니다.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습니다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교회의 역사를 보십시오.

이런 고백을 자신한 분들 이런 고백을 조장한 분들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주님의 우편에 있습니까?

아닙니다.

죽음이 아닌 세상과 타협하고 세상의 영광 속에서 살아가지 않습니까?

 

그러면 이 어려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할까요?

방법은 하나입니다.

다시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의 옷을 입는 것입니다.

우리의 허물과 연약함을 덮어주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옷을 입는 것입니다.

바로 주님이 베푸시는 은혜 아래 다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장 잘 설명해 주는 말씀이 바로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너무 유명하고 익숙한 말씀입니다.

하지만 그 유명세나 익숙함에 비해 깊이 있는 묵상이 아쉬운 말씀이기도합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세상의 권력 앞에 세상의 힘 앞에 그리고 죽음의 공포 앞에서 아주 처절한 실패를 경험한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주님이 다시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아주 난감한 질문을 던집니다.

21:15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아가페이스 메) 하시니

 

그러자 시몬이었던 베드로가 곧 바로 아멘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전과 다르게 아주 신중한 태도를 보이면 자신의 대답을 밝힙니다.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여기서 오늘 우리는 한국어 번역본이 아닌 원어를 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원어를 보면, "아가페이스 메?"(agapeis me)라고 우리 주님이 질문하십니다.

헬라어 '아가페'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무조건적인 사랑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질문은 이렇게 풀어 쓸 수 있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내가 너를 사랑한 것처럼 너는 나를 사랑(아가페)하느냐?’

 

그 때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우리말 번역으로만 보면, 베드로가 ""라고 대답한 것 같아 보입니다.

하지만 원문을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아가페이스 메?"라고 물으셨는데,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필로 세’(philo se)라고 대답합니다.

헬라어 '필리아'는 형제간의 우정 혹은 친구간의 우정과 같이 인간적인 사랑을 의미합니다. 깨어지기 쉬운 인간적인 사랑이지요.

그러니까 베드로는 이렇게 답한 셈입니다.

제가 주님께서 저를 사랑하신 것처럼 주님을 사랑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주님께서도 아십니다.’

 

이렇게 몇 번 묻고 몇 번 답합니까?

세 번입니다.

왜 이리 못 났냐?" 꾸중도 없이 이렇게 세 번 묻고 세 번 답합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저는 이 대화 속에서 우리의 연약함을 채울 그 어떤 것과 만나게 됩니다.

주님의 끝없는 사랑 바로 '아가페입니다.

못난 죄인까지도 용서하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배신자 곧 원수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바로 아가페의 은총이지요.

 

저는 소망합니다.

우리가 이 아가페의 은총아래 우리가 거함으로 우리의 허물이 덮어지고 우리의 연약함이 채워지는 구원의 역사가 날마다 증거 되었으면 참 좋겠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소망하는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 그 은총의 그 무게를 우리의 손끝으로 꼭 느꼈으면 좋겠습니다.

바라기는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아가페의 은총이 항상 여러분 삶 속에 비추어 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