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데반
사도행전 7:54-60절 2016/10/14(금)
7:54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7:55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7: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7:57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7:58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7:59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7: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오순절 성령강림 후 제자들의 삶 속에서 일어난 가장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인해 기꺼이 죽음을 받아들이는 순교자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스데반입니다.
스데반.
스데반은 예루살렘 교회가 선출한 일곱 명의 집사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에 따르면 스데반은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6:8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
6:8 스데반은 은혜와 능력이 충만해서, 백성 가운데서 놀라운 일과 큰 기적을 행하고 있었다.
은혜(카리스)와 권능(뒤나미스)이 충만했던 스데반을 통해 하나님은 두 가지의 역사를 나타나게 하십니다.
첫째, 큰 기사 곧 구원하는 놀라운 일을 행하게 됩니다.
스데반은 말씀의 은사가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스데반이 주님의 말씀을 가르칠 때 놀라운 일을 나타났다고 성경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큰 기적(표적)을 행하는 능력입니다.
치유의 은사지요.
기도할 때 마다 손을 언을 때마다 치유의 역사가 나타난 것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변증하는 말씀의 은사 그리고 치유의 은사까지 받은 분이 바로 스데반 집사입니다.
그런데 이런 스데반 집사가 불필요한 논쟁에 휩싸이게 됩니다.
바로 ‘리버디노 회당’(Libertinus; Synagogue of Freedmen)에 속한 이들과의 ‘그리스도(메시야)’ 논쟁에 휩싸이게 됩니다.
‘리버디노’(개역성경 6:9절), ‘노예였다가 해방된 자유민’을 가리키는 라틴어 단어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나기 전 63년, 유대 땅에 큰 전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로마의 장군 폼페이우스가 군단을 이끌고 들어온 것입니다.
로마의 정복당한 유대 민족은 로마가 정복한 여러 도시에 포로로 잡혀가게 되지요.
그러다가 자유민(리버디노)들의 후손들이 조국 유대 땅 예루살렘에 와서 만든 회당이 ‘리버디노 회당’입니다.
헬라 출신 유대인들로 자존심이 아주 강한 분들이지요.
스데반 역시 헬라 출신 유대인이라 이들과의 교류가 자연스러웠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그리스도의 복음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 자연스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깁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진리의 복음을 그들은 논쟁으로 받아들이고 시비로 발전시킵니다.
‘나사렛 사람 예수가 그리스도(메시야)일리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율법 그 어디에도 그런 말씀이 문자로 기록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실 문자로 된 율법 속에서는 그리스도가 예수라는 것을 찾을 수 없지요.
그래서 스데반은 율법을 일일이 풀어가면서 나사렛 사람 예수가 왜 우리의 그리스도이며 율법이 증거 한 그리스도인지를 조목조목 자세하게 그리고 친절하게 설명해 줍니다.
그러니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지혜와 성령으로 말하는 스데반을 당해 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스데반의 변증에 승복하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하나, 자기 자존심을 건드렸다는 것입니다.
스데반이 전한 진리의 복음이 그들만의 자존심에 큰 상처를 준 것이지요.
그러니 무엇이 참이고 진리인가?
이제 이 문제는 뒷전이 되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히브리파 유대인들을 매수하여 거짓 고발을 하게 됩니다.
“스데반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6장입니다.
6:9 이른 바 자유민들(개역 ‘리버디노’) , 즉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과 더불어 논쟁할새
6:10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여
6:11 사람들을 매수하여 말하게 하되 이 사람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게 하고
참 추잡하지요.
별로 친하지도 않은 히브리파 유대인들까지 매수하며 이렇게 고발합니다.
‘이 사람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노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모함할 때 사용했던 것과 똑같은 논리입니다.
바래새인들, 예수님을 어떻게 모함합니까?
마 12:24 바리새인들은 듣고 이르되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 하거늘
결국 부추김을 받은 백성과 장로들과 율법학자들은 스데반을 붙잡아서 산헤드린 공의회로 끌고 갑니다.
유대인의 최고 의결기구지요.
그리고 거짓 증인들을 세워 거짓말을 하게 합니다.
‘이 사람은 쉴 새 없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슬러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6장 6-13절 말씀이 그 내용입니다.
6:12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시켜 와서 잡아가지고 공회에 이르러
6:13 거짓 증인들을 세우니 이르되 이 사람이 이 거룩한 곳(예루살렘성전)과 율법을 거슬러 말하기를 마지 아니하는도다
6:14 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 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거늘
거짓말도 이런 거짓말이 없지요.
그런데 15절을 보세요.
이런 거짓 고발 앞에서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스데반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6:15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죄가 있다 없다?’
없는 정도가 아니라 천사의 얼굴같이 순결하더라는 것입니다.
아무 흠도 아무 죄도 찾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드디어 산헤드린 공회 절차에 따라 대제사장이 직접 나서 스데반을 심문합니다.
“이것이 사실이냐?”
그러자 스데반이 변증을 합니다.(7장 1절 이후)
변증이라기보다는 한 편의 설교이지요.
아브라함을 부르신 이야기로부터, 모세를 통해 역사하신 출애굽 사건, 그리고 솔로몬의 성전 건축에 이르기까지. 산헤드린 공회 회원들은 조용히 그의 말을 경청합니다.
그런데 스데반의 어조가 갑자기 변합니다.
어디서 변하는가?
7장 51-53절입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이 되는 말씀이지요.
새 번역으로 소개합니다.
7:51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여, 당신들은 언제나 성령을 거역하고 있습니다. 당신네 조상들이 한 그대로 당신들도 하고 있습니다.
7:52 당신들의 조상들이 박해하지 않은 예언자가 한 사람이라도 있었습니까? 그들은 의인이 올 것을 예언한 사람들을 죽였고, 이제 당신들은 그 의인을 배반하고 죽였습니다.
7:53 당신들은 천사들이 전하여 준 율법을 받기만 하고, 지키지는 않았습니다."
지금까지 ‘부형’이라고 다정하게 부르던 호칭을 스데반은 버립니다.
그리고 그들을 향해 이렇게 죽비를 날립니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
하지만 스데반의 독설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당신들은 언제나 성령을 거역하고 있고’, ‘당신들은 의인을 배반하고 죽였으며’
‘당신들은 천사들이 전하여 준 율법을 받기만 하고, 지키지는 않았다.’고 고발합니다.
그러니 그의 말을 들은 이들의 반응이 어떠하겠습니까?
격분 그 자체였습니다.
7:54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하지만 성령의 충만한 스데반은 분노로 이를 가는 이들을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그가 바라 본 것은 바로 하늘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오른쪽에 서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외칩니다.
7: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여러분 누가 이 시대의 진리를 쫒아 살아가는 순교자가 되는 줄 아십니까?
하늘이 열려 있고, 하나님의 오른쪽에 인자가 서 계신 것을 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이 열린 사람입니다.
대제사장이나 공회원들처럼 분노에 사로잡히면 결코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는 분노에 사로잡히면 결단코 순교자가 될 수 없습니다.
결국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았다’는 이 스데반의 말이 빌미가 되어서 산헤드린 공회는 이것을 신성모독으로 몰아갔고 스데반은 결국 신성모독죄로 성 밖으로 끌려가 최후의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누구처럼요?
예수님처럼
그 때 스데반은 드린 마지막 기도가 이것입니다.
7:59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①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7: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②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십자가에서 우리 주님이 드렸던 기도와 동일하지요.
어쩌면 이 기도는 예수님처럼 하나님 우편에 앉아 있다는 반증이 되겠지요.
지요.
말씀을 마칩니다.
스데반의 죽음, 허망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꼭 이런 선택을 해야 했나 싶습니다.
왜냐하면 8장 1절의 말씀처럼 이 일로 인해 교회가 큰 박해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분명한 사실 하나가 있습니다.
순교의 길을 선택한 스데반은 돌무덤에 묻혀 잊혀 진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오른쪽에 서 계신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에 서 있다는 사실입니다.
스데반(Στέφανος), 헬라어로 ‘면류관’을 뜻인데 그 면류관을 쓰고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에 서 있다는 것입니다.
어느 개그맨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조금만 비겁하면 인생이 즐겁다’
여러분 이 말에 속지 마십시오.
스데반처럼 ‘의의 면류관’‘ 진리의 면류관’을 사모하십시오.
그리하여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순교자의 길을 묵묵히 걸어갈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풀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전도서 5:18-20 인생, 헛되지 않습니다 (0) | 2016.10.25 |
---|---|
요한복음 21: 15-17 갈릴리 그리고 베드로 (0) | 2016.10.18 |
야고보서 강해 4:13-17 자랑을 거두고 선을 행하라 (0) | 2016.10.13 |
레위기 11:45 몸의 제물로 사는 삶 (0) | 2016.10.11 |
고린도전서 6:19-20 몸으로 드리는 예배 (0) | 2016.10.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