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 있는 사람
시편1:1-6절 2016/6/19(주일오후)
1: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1: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1: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1:4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1:5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1:6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하나님의 은총과 평화 그리고 위로하심이 우리 모두에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옛날이야기 하나 드리고 말씀을 시작할까 합니다.
어느 날 한 선생님이 사람 ‘人’자 다섯을 써놓고는 제자들에게 해석해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도 한 번 해 보시지요.
제자들이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그 뜻을 스승이 친절하게 새겨주었습니다.
‘사람이면 다 사람인가 사람이 사람다워야 사람이지.’
어떻습니까?
옳은 말이지요?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사람답다’
이 말뜻을 제대로 이해하고 그리고 그 말 뜻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만일입니다.
만일 ‘사람답다’라는 말뜻을 제대로 이해하고 그리고 이해한대로만 살아간다면 거짓과 불법이 세상의 둥지를 틀 수 없겠지요.
이처럼 ‘사람답다’라는 말은 이해는 쉽지만 그 말이 주는 무게감이 만만치 않습니다.
여러분 생각은 어떻습니까?
누가 사람다운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 해답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서 찾아보면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진실함(integrity )과 그 책임(accountability)을 다하는 사람입니다.
구약에서는 그런 사람을 가리켜 ‘의인’이라고 부르고 있고 신약에서는 그런 사람을 그리스도의 사람, 그리스도인 그리고 거듭난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자답게 거룩함을 품고 그 거룩함에 대한 책임을 다하는 사람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사람다운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답게 그 마음의 진정성과 그리고 그 행실의 책임을 다하는 것.
이것이 사람다운 사람의 참 모습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레위기 19장 2절입니다.
19:2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이처럼 사람다운 사람이란 개, 돼지처럼 제 밥그릇만 보고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심령의 가난한자가 되어서, 애통하는 자가 되어서, 온유한 자가 되어서, 의에 주리고 목마를 자가 되어서 우리 안에 보화처럼 숨겨진 하나님의 거룩성(holiness)을 회복하고 그리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전심을 다해 책임 있는 발걸음을 내 딛는 사람만이 사람다운 사람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두 번째로 성경이 말하는 ‘사람답다’의 의미는 함께 살아가는 형제나 이웃에게 진실함(integrity )과 그 책임(accountability)을 다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에게 하는 것 것처럼 우리의 형제 그리고 우리의 이웃에게도 진실함과 그 책임을 다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2장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거기에 보면 한 율법사에 예수님에게 찾아와서 율법에 있어서 가장 본질적인 질문 하나를 드립니다.
22:35 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22:36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22: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22: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22: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22: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이처럼 사람다운 사람이란 하나님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이웃에 대해서도 그 진실함과 책임감을 잘 감당하는 사람만이 사람다운 사람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의 주제는 이런 것입니다.
‘사람답다’라고 했을 때 그 사람다움을 넘어 누가 복이 있는 사람인가? 입니다.
누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복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인가? 입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본문 시편 1편은 좋은 가이드라인이 됩니다.
우리가 읽은 시편 1편은 시편 전체의 서론이면서 동시에 주제이기도 합니다.
시인은 오늘 우리에게 의미 있는 질문 하나를 던지십니다.
‘사람다움을 넘어 누가 복 있는 사람인가?’입니다.
누가 복이 있는 사람인가요?
오래 사는 사람인가요?
자식이 많은 사람인가요?
재물이 많은 사람인가요?
아니면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는 명예를 가진 사람인가?
물론 이것도 복이지요.
하지만 시인이 말하는 복 있는 사람이란 바로 의인을 말합니다.
악인과 대조되는 의인이 복 있는 사람이라고 시인은 강조하고 또 강조합니다.
이것이 시편 전체의 주제입니다.
의인.
의인이란 의로운 행실이 있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의로운 행실.
구약성경에서 의로운 행실, 의라는 것은 어떠한 순간에도 하나님만을 굳게 붙들려는 태도 곧 하나님과의 의리로 친교(사귐)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깊은 친교(사귐)를 원하는 의인은 오직 두 가지 일에만 관심을 보이고 살아갑니다.
그것이 2절에 나옵니다.
1:2 ①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②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이것이 구약성경이 말하는 의인의 길, 의인의 삶입니다.
그렇게 해서 의인이라고 칭함을 받은 구약의 인물들이 에녹, 노아, 아브라함, 롯입니다. 우리가 믿음장이라고 말하는 히브리서 11장에 등장하는 사람들입니다.
문제는 악인과 죄인과 오만 자의 형통을 보면서 의인의 길을 걷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길이 복이요 생명인줄 잘 알고 있지만 그 길이 만만치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악인, 죄인 그리고 오만한 자의 유혹 3가지를 날마다 극복해야하기 때문입니다.
첫째는 악인의 꾀입니다.
다시 1절입니다.
1: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꾀’란 ‘일을 그럴 듯하게 꾸미는 교묘한 생각이나 수단’을 뜻합니다.
우리말은 대체로 ‘꾀보’, ‘꾀병’, ‘꾀돌이’처럼 부정적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악인들의 꾀가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그 꾀가 상당히 달콤하기 때문입니다.
달콤하기 때문에 또한 현혹되기도 쉽습니다.
악인들의 꾀는 항상 부유함으로 그리고 높은 자리로 우리를 유혹하기 때문에 현혹되기가 아주 쉽습니다.
반대로 악인이 판치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붙들고 묵묵히 정도를 걷는 사람들은 어리석거나 융통성 없는 사람이라는 평을 듣게 마련입니다.
정말 그들이 어리석은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에서는 꾀보들은 부자가 될 수 있고, 높은 자리에 앉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기껏해야 바람에 나는 겨입니다.
4-5절입니다.
1:4 (성공한)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1:5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그리고 6절 후반부처럼 결국 악인들의 길은 망하는 것입니다.
‘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아짜트’입니다.
영어로는 counsel, advice 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악인으로부터 카운셜(조언)를 받고 악인으로부터 어드바이스(충고)를 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이 정한 기준 곧 정직한 하나님의 말씀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악인으로부터 카운셜(상담)를 받고 어드바이스(조언)를 받는다면 자기 자신도 모르게 악인의 길 곧 멸망의 길을 걷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악인의 꾀를 쫒아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신명기 17장 18-20절을 보면 우리나라의 국민교육헌장과 같이 이스라엘 왕들의 교육헌장이 나옵니다.
그 내용은 이런 것입니다.
17:18 그가 왕위에 오르거든 이 율법서의 등사본을 레위 사람 제사장 앞에서 책에 기록하여
17:19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 그의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의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
17:20 그리하면 그의 마음이 그의 형제 위에 교만하지 아니하고 이 명령에서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리니 이스라엘 중에서 그와 그의 자손이 왕위에 있는 날이 장구하리라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고 백성으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는 참된 왕이 되려고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 합니까?
하나님의 말씀 곧 율법의 등사본을 자기 옆에 두고 날마다 읽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명령에 따랄 순종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악인의 꾀, 곧 시류에 흔들리지 않는 길입니다.
성경을 우리가 정경 ‘캐논’이라고 부릅니다.
‘캐논’ 이란 원래 대나무로 만든 자를 가리키는 말합니다.
기준이지요.
아모스 7장 7-8절에 나오는 용어를 빌려서 표현하자면 다림줄입니다.
다림줄이란 건축현장에서 사용되는 도구로 역시 기준 역할을 합니다.
이처럼 우리가 악인의 꾀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바로 이 기준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성경이라는 기준입니다.
그래야 악인의 꾀로부터 벗어나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의인의 삶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복 있는 자 곧 의인이 되기 위해서는 죄인의 길에 서지 않는 것입니다.
죄, 히브리어로는 ‘카타하’라고 하고 헬라어로는 ‘하마르티아’라고 합니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화살이 과녁을 빗나갔다’가 됩니다.
이처럼 죄인이란 ‘목표가 빗나간 사람’으로 곧 ‘하나님으로부터 빗나간 사람’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기준을 상실한 사람이 악인이라면 하나님의 뜻을 상실하고 빗나가게 사는 사람이 죄인인데 그런 자들이 걷는 죄의 길에 서지 않도록 조심하고 또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7장에 보면 예수님이 뼈 있는 말씀 하나를 남기십니다.
7: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7: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왜 우리가 세상이 외면하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합니까?
비록 좁은 문이지만 그 문은 생명의 문, 예수 그리스도의 문이기 때문입니다.
그 문은 좁지만 하나님의 나라라는 푯대, 목표가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 문에 들어서면 영생으로 우리를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죄인을 길동무로 삼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5절의 말씀처럼 죄인은 의인들의 모임 곧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 것입니다.
‘오만하다’
말 그대로 하나님이 정한 기준과 목표를 거스르는 사람을 말합니다.
교만이지요.
‘하나님을 반역하는 사람’입니다.
천사가 하나님을 반역해서 사탄이 된 것처럼 사람이 하나님을 반역하면 오만하고 교만한 사탄의 종이 됩니다.
이런 사람은 한 가지 주장만을 내세웁니다.
‘하나님이 없다.’
이것이 오만한 자의 특징입니다.
시편 14편과 53편에 보면 ‘하나님이 없다’라고 주장하는 오만한 자의 특징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14:1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그들은 부패하고 그 행실이 가증하니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53:1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그들은 부패하며 가증한 악을 행함이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이것을 새 번역으로 다시 읽어 드리겠습니다.
14:1 어리석은 사람은 마음속으로 "하나님이 없다" 하는구나. 그들은 한결 같이 썩어서 더러우니, 바른 일을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구나.
그래서 오만한 자의 자리는 뒤가 구리다는 말처럼 항상 악취가 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누가 사람다운 사람인가?
누가 주어진 인생을 복되게 살아가는 복 있는 사람인가?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절입니다.
1: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오직입니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밤낮으로 그의 율법을 묵상하는 사람입니다.
여호와의 율법 ‘하나님의 말씀’이지요.
그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입니다.
‘묵상 한다’
히브리어 ‘하가’(hagah)를 번역한 말입니다.
‘작은 목소리로 읊조린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그래서 그런지 ‘묵상 한다’ 그러면 보통 이런 이미지가 떠오릅니다.
바닥이나 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 고요히 앉아 있는 광경입니다.
하지만 히브리어 ‘하가’라는 말 속에는 좀 더 적극적인 속내가 담겨져 있습니다.
마치 사자가 자기 먹이를 움켜잡고 기쁨에 겨워 음미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 그 말씀의 향기를 맡고, 씹고, 맛을 음미하고 그리고 받아먹는 과정 전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혹시 깨끗이 핥아놓은 개밥 그릇을 본 적 있으십니까?
불경스럽게 들릴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한다는 것은 그런 적극적인 행동을 말합니다.
그 밑바닥까지 핥고 또 핥는 것입니다.
그냥 읽는 것을 넘어 철저히 읽고 몸으로 해석하며 살아가는 것이 바로 묵상입니다.
묵상한다.
이것을 가장 잘 표현하고 설명한 것이 요한계시록에 나옵니다.
요한계시록 10장을 보시면 요한계시록에는 사도 요한이 바다와 땅을 밟고 서 있는 천사에게서 작은 두루마리를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가 천사에게 손을 내밀자 천사가 말합니다.
10:9 내가 천사에게 나아가 작은 두루마리를 달라 한즉 천사가 이르되 갖다 먹어 버리라 네 배에는 쓰나 네 입에는 꿀 같이 달리라 하거늘
여기서 묵상을 뜻하는 말을 찾아보십시오.
그렇습니다.
‘갖다 먹어 버리라’
어떻게요?
기쁨으로 음미하고 씻고 맛보고 즐겁게 먹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온 존재로 받아먹은 말씀을 우리의 몸으로 해석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우리 모두가 이런 복을 누렸으면 좋겠습니다.
1: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말씀풀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야고보서 강해 1:9-15절 욕심은 죄를 낳는다 (0) | 2016.07.01 |
---|---|
열왕기상 2:1-4 다윗의 길 (0) | 2016.06.29 |
에베소서 4: 17-24 새 사람을 입으라 (0) | 2016.06.21 |
야고보서 강해 1:1-8 시험을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0) | 2016.06.16 |
베드로후서3:11-18 그리스도의 은혜와 아는 지식 (0) | 2016.06.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