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풀이

에베소서 4: 17-24 새 사람을 입으라

心貧者 2016. 6. 21. 15:59


새 사람을 입으라

에베소서 4:17-242016/6/17()

4:17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언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

4:18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4:19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4:20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4:21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 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4: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4:23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4: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바울 사도는 오늘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간곡한 부탁 하나를 합니다.

4:23 오직(바울의 강조 어법)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4: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참된 의로움과 참된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새 옷을 입으려면 어떻게 하십니까?

그렇습니다.

이 전에 입던 헌 옷을 벗어야 그래야 세 옷을 입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참된 의로움과 참된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기 위해서는 먼저 선행되어야할 과제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허망한 욕정을 따라 살다가 썩어 없어질, 그 옛 사람의 모습을 벗어버리는 것입니다.

죄의 습관, 그 습관의 옷을 벗는 것입니다.

17절입니다.

4:17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언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

 

이방사람들, 여기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세상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들의 허망한 생각이 우리를 지배할 수 없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요.

이러한 사도 바울의 권유가 만만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의 자리는 하늘이 아니라 이 땅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중심으로 자기 삶을 재구성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기도 하지만 우리의 삶의 자리는 결국 현실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사람과도 만나야 하고 때로는 원치 않는 상황에 휘말리기도 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 우리가 더욱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마음의 허망함.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마음의 허망함이란 그리스도인임에도 불구하고 영적인 분별력 없이 그저 자기 육체의 욕망을 따라 살아가는 이들을 가리키는 말로 18절이 이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18절을 보시지요.

4:18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여기에 보시면 마음의 허망함을 보충해주는 단어 둘이 등장합니다.

무지함마음이 굳어짐(완고한 마음)’입니다.

 

첫째 무지함인데 무엇에 대한 무지함일까요?

하나님에 대한 그리고 그리스도에 대한 그리고 성령에 대한 무지함입니다.

세상 참 똑똑해졌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를 대변하는 단어로 지식이라는 말을 뽑아도 될 만큼 세상 참 똑똑해졌습니다. 스마트폰이 보급되고 다양한 어플리케이션이 개발되면서 정말 똑똑해졌습니다. 어쩌면 필요 이상의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만큼 지식의 총량 역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이 경험할 숴 없는 무지한 부분이 있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무엇에 대한 무지함입니까?

하나님에 대한 그리고 그리스도에 대한 그리고 성령에 대한 그리고 교회에 대한 무지함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하나님이 아닌 세상 지식의 풍부함에 취한 사람들에게 이런 경고의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로마서 121-23절입니다.

1: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1:22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1: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참 재미있지요.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못하는 무지는 분별력을 상실하게 하고 결국 우상 숭배를 양산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 다니는 동물 모양까지 그들은 마치 하나님처럼 여기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정말 그러한 세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지식은 넘쳐나는데 지식인 역시 넘쳐나는데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문화라는 이름으로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 다니는 동물 모양을 하나님으로 여기고 살아가는 시대가 되고 말았습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18절에 말씀처럼 총명을 어둡게 하는 무지함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만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는 우리의 그릇된 삶의 태도들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32장을 보면 모세가 40일이 지나도 산에서 내려오지 않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동요하게 됩니다.

모세가 죽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동요하게 되었고 하지 말아야 할 일 하나를 아론이 하게 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송아지 모양을 본 딴 형상 하나를 만들어 세우게 됩니다.

다시 구습의 삶, 이집트의 생활로 돌아간 것입니다.

 

그 때 첫 제사장의 직무를 맞은 아론이 뭐라고 한 줄 아십니까?

32:4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금 고리를 받아 부어서 조각칼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 하는지라

32:5 아론이 보고 그 앞에 제단을 쌓고 이에 아론이 공포하여 이르되 내일은 여호와의 절일이니라 하니

32:6 이튿날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 번제를 드리며 화목제를 드리고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더라

 

무엇이 문제입니까?

그렇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무지입니다.

제사법이 세워지고 이스라엘의 공식 제사장으로 처음 세움을 받은 아론이었지만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무지는 결국 그로 하여금 총명 곧 분별력을 상실하게 했고 이집트의 종살이 때처럼 다시 옛 습관으로 돌아가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어떤 일이 벌어지는 줄 아십니까?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 땅과 그리고 그 백성의 성결을 위해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약 3000명 정도가 레위 자손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그것이 3225-29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마음의 허망함을 보충해주는 단어는 18절 후반부에 나오는 마음이 굳어짐입니다.

마음이 굳어짐, 마음의 완고함이란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일까요?

교만함입니다.

하나님과 영적 교제가 단절 되어서 자기만 알고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심의 상태를 우리가 교만이라고 부릅니다.

라틴어로는수페르비아superbia’라고 합니다.

쉽게 풀이하면 자신을 실제보다 더 크게 여기는 마음이지요.

 

그러니 그 사람 주변에 누가 있겠습니까?

아무도 없지요.

사람만 없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도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모든 관계로부터 단절.

이것이 우리가 벗어 버려야할 옛사람의 모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왜 무지의 옷과 마음이 굳어짐 곧 교만함의 옷을 벗어야하는 것일까요?

19절의 말씀을 방지하게 위해서입니다.

4:19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첫째, 수치의 감각을 잃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둘째, 내 몸을 방탕에 내맡기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셋째, 탐욕 곧 모든 더러운 일을 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무지의 옷 교만의 옷을 벗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이 경고들을 무시하고 하나님에 대한 무지 속에서 그리고 하나님이 없는 마음의 완고함 속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리고 우리 교회 는 더 이상 희망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참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방탕과 탐욕이 지배하는 시대정신에 저항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언자처럼 프로테스탄트처럼 거짓 된 말씀에 저항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삶의 방식을 이 전과 완전히 다르게 바꾸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받았던 세례가 십자가 곧 죽으심에 연합한 사람이 되겠다는 의지의 표현인 것처럼 내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세상에 대해 죽은 사람이 된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사실 현실이라는 공간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쉽지 않은 요구입니다.

왜냐하면 현실은 끊임없이 우리를 방탕과 탐욕으로 끌어당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항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라도 자기 자신의 비겁과 무능과 탐욕과 이기심에 대해 좀 민감했으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이전과 다른 새로운 삶은 그러한 자기 모습에 대해 아파할 때 비로써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우리 양심을 마비시켜 죄에 대해 무감각하게 만들지만, 성령은 우리 양심을 깨워 죄에 대해 아파하게 만듭니다.

따라서 자신의 죄와 허물에 대해 진심으로 아파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새로운 존재로 빚으시고, 좋은 열매를 맺는 나무로 키울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 안에서 새 사람이 될 때만이 우리의 낡은 가치관, 그리고 옛 습관들이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와 만난 이후에 이전에 소중했던 모든 것들을 배설물처럼 여겼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그의 삶이 이제는 그리스도를 닮고 그분의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을 깨닫는 것만이 가장 소중한 인생의 목표가 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에서 주님 안에서 거듭난 사람의 삶을 몇 가지 인상적인 말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 그는 죄에 대해서는 죽은 사람이요, 하나님을 위해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살고 있는 사람(6:11)이라고 말합니다.

둘째, 자기 지체를 의의 연장(도구)으로 하나님께 바친 사람(6:13)이라고 말합니다. 셋째, 거룩함에 이르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는(6:19)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는 이렇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4: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4:23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4:24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말씀을 마칩니다. 조율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현악기를 다루는 이들이 연주하기 전에 기준 음에 맞춰 자신이 가지고 있는 악기의 줄을 맞추는 것을 조율이라고 합니다.

조율. 왜 해야 합니까?

그래야 제대로 된 소리, 하모니를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조율할 때는 줄이 너무 팽팽해도 안 되고, 너무 느슨해도 안 됩니다.

 

이는 교회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누군가를 모방하며 살아갑니다.

문제는 기준입니다.

누구를 기준 삼아 우리의 삶을 조율할까? 입니다.

지금 여러분 누구를 기준삼아 삶을 조율하고 살아가는가?

 

부탁 하나를 드리겠습니다.

제발, 자기 자신을 기준으로 삼지 마십시오.

자기 자신의 생각, 자기 자신의 경험, 자기 자신이 체험한 옛 습관들.

그것들을 기준 음으로 삼지 마십시오.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을 기준음 삼아 새롭게 그리고 날마다 조율하십시오.

그러면 무지함으로부터 그리고 마음의 굳어짐으로부터 그리고 그 지긋지긋한 옛 습관으로부터 진정으로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