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을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야고보서 1:1-8절 2016/6/15(수)
1:1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1: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1:3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1: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1:6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1:7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1:8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자신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인생의 어려움과 실패를 경험하면 사람은 누구나 두 가지의 반응을 순차적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첫째는 자존감이 상실되면서 자기 비하에 빠진다고 합니다.
고난에 대한 실패에 대한 모든 책임을 자기 자신에게 돌리면서 말 수가 적어지고 의기소침해 지면서 자기 비하에 빠진다고 합니다.
그리고 초기 우울증처럼 의욕도 없고 목적도 없이 그렇고 그런 날들을 세상과 단절 된 상태로 보낸다고 합니다.
주로 이런 분들은 술이나 이상행동의 집착으로 세월을 보내지요.
문제는 두 번째 단계입니다.
원망과 분노입니다.
모든 책임을 뒤집어썼던 그 착한 사람이 그 분노의 무게를 조금씩 남에게 돌리기 시작하다가 결국 원망과 분노를 타인에게 표출한다는 것입니다.
그 착한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폭력적으로 돌변한다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나만 당할 수 없다는, 나만 죽을 수 없다는 보복심리 때문입니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는 가장 원초적인 법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실패에 대한 충격의 정도에 따라 폭력의 수준 역시 더 무자비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시기 바랍니다.
고난 속에서 말로 다할 수 없는 시련을 겪고 있는 사람들 특히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가 이런 말씀으로 권면을 합니다.
1:1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1: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한두 가지 시험이 아닙니다.
여러 가지 시험입니다.
그런데 그 여러 가지 시험을 당했을 때 세상 사람들처럼 외면하거나 회피하거나, 그 반대로 남의 탓으로 돌리지 말고 전적으로 수용하라는 것입니다.
어떻게요?
‘온전히’ 그리고 ‘기쁘게’ 여기라고 권면을 합니다.
이 부분을 새 번역 성경은 더욱 적극적으로 번역해 놓았습니다.
1:2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 가지 시험에 빠질 때에, 그것을 더할 나위 없는 기쁨으로 생각하십시오.
절대 기쁨입니다.
어떻습니까?
야고보 사도의 가르침 이해가 되시는지요?
사람은 어느 누구나 감당할 수 없는 고난이나 시련이 오면 그 원인과 책임을 자기 자신에게 돌리거나 아니면 남 탓을 하게 마련입니다.
그렇게 해서 문제를 외면하거나 회피하려고 하지요.
그런데 사도 야고보는 그리스도인인 우리를 향해 그런 자세로 고난이나 시련에 임하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새 번역 성경 말씀처럼 여러 시험에 빠질 때에, 그것을 더할 나위 없는 기쁨으로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고난에 대한, 환란에 대한, 시련에 대한 적극적인 수용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 당하는 환란과 시련은 세상 사람이 당하는 환란과 시련과는 질적으로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은 믿음의 시련이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자기 욕심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 때문에 겪게 되는 시련이고 아픔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리스도가 아니면 받지 않아도 되는 시련이지요.
그래서 사도 야고보는 말합니다.
당신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여러 시험에 빠질 때에, 오히려 그것을 더할 나위 없는 기쁨으로 여기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역설적이지만 그것이 그리스도인이라는 반증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야고보는 편지의 수신자를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1:1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입니다.
여기서는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겪을 수밖에 없는 고난과 핍박과 조롱을 피해서 이방의 땅으로 흩어진 유대 그리스도인들을 말합니다.
특히 안디옥, 다메섹, 그리고 로마,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로 흩어진 유대 그리스도인들을 말합니다.
그들은 여러 가지 환란을 당하게 됩니다.
첫째, 유대인 곧 동족으로 부터 당하는 핍박입니다.
자칭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나사렛 출신의 예수를 십자가로 심판을 했다고 여기는 정통 유대인과 달리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그분이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을 같은 피를 나눈 유대인이라고 해서 가만둘 리가 없었습니다.
그들을 방치하다가는 예수님이 살아 있을 때 보다 더 큰 소통이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같은 피를 나눈 유대인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유대 그리스도인들을 아주 조직적으로 핍박을 하게 됩니다. 유대인들, 곧 자신들이 가진 신앙과 전통을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이 유대인의 정체성 곧 시오니즘이라고 그들은 굳게 믿었기 때문입니다.
둘째, 흩어진 유다 그리스도인들은 재정적인 특히 물질에 대한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유대 땅에서 그리고 유다 사회 속에서 누가 이들과 경제적인 활동을 하겠습니까? 그래서 신앙도 지키고 먹고 살기 위해 경제 활동이 용이한 곳으로 흩어지게 됩니다. 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곳이 안디옥 다메섹 그리고 로마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입니다.
하지만 그 곳에 삶도 만만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경제적으로 많은 고난을 당하게 됩니다.
이렇게 그들은 유대인으로부터 그리고 이방인으로부터 이중적인 어려움을 당하게 됩니다. 유대인으로부터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배척을 받고 이방인으로부터는 유대인이라고 배척을 받았으니 그 삶이 녹녹치 않았습니다.
그런 상황 속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사도 야고보가 말합니다.
다시 2절입니다.
1: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그러면 우리가 왜 시험을 당해도 온전히 기뻐해야하는가?
왜 그리스도인은 고난을 고난으로 여기지 않고 더할 나위 없는 기쁨으로 여겨야 하는가?
사도 야고보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1:3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1: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첫째, 시험을 통해 나의 믿음을 달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된다는 것입니다.
장성한 어른처럼 성숙한 믿음인지 아니면 어린 아이처럼 연약하여 여물지 못한 믿음인지를 알 수 있는 계기가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용된 중요한 표현은 ‘믿음의 시련’입니다.
세상의 시련처럼 제 욕심으로 인한 고난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그 믿음으로 말미암은 시련입니다. 그래서 사도 야고보는 그러한 고난을 3절에서 믿음의 시련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 시련이라는 저울추에 내 믿음을 달아보는 것입니다.
일종의 테스트이지요.
누가 믿음의 합격자인지, 누가 믿음의 불합격자인지를 판결할 수 있는 일종의 테스트가 믿음의 시련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시련이 오면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 믿음의 현주소를 파악할 수 있는 좋은 기준점이 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그리스도인들이 시련을 적극적으로 수용해야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의 시련을 통하여 인내를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인내입니까?
살전 1:3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인내, 단순히 참는 것을 말하는 소극적인 인내가 아닙니다.
할 수 없이 선택하는 인내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입니다.
적극적인 인내입니다.
왜 교회 일에 열심이었던 사람들이 하루아침에 쓰러지고 넘어집니까?
체면상, 소극적인 인내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입니다.
혹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판단할까하는 소극적인 인내의 한계점에 부딪혔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시련이 오면 오래 견지지 못하고 결국 쓰러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사도 야고보가 말하는 믿음의 시련으로 인해 얻게 되는 인내는 그런 한계점이 있는 인간적인 인내가 아닙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강림이 이루어질 때까지 소망하는 인내입니다.
그래서 사도 야고보는 4절에서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1: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이 부분을 새 번역으로 다시 읽어드립니다.
1:4 여러분은 인내력을 충분히 발휘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완전하고 성숙한 사람이 되십시오.
이처럼 그리스도인의 시련은 결국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완전하고 성숙한 사람이 되는 계기가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정리합니다.
왜 우리가 믿음의 시련을 온전히 기쁘게 받아들여야하는가?
두 가지입니다.
첫째, 그리스도인의 시련은 우리에게 믿음의 성숙도를 점검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것입니다.
어린아이의 믿음인지 성숙한 어른의 믿음인지를 믿음의 시련이라는 저울로 달아 볼 수 잇다는 것입니다.
둘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갖게 해서 결국에는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완전하고 성숙한 사람이 되는 길로 인도한다는 것입니다.
성숙함입니다.
그러니 여러 가지 시험이 오거든 두려워하지 말고 힘들어 하지도 말고 그것을 더할 나위 없는 기쁨으로 여기라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해 볼 수 있겠습니까?
또 하나 사도 야고보가 오늘 본문을 통하여 권면하는 것이 있습니다.
믿음의 시련이 오면 낙심하거나 피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1:6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1:7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1:8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아무리 믿음이 강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시련이 오면 두 마음을 품게 됩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방법이고 하나는 인간적인 방법입니다.
경험상 주로 어느 방법을 택합니까?
인간적인 방법입니다.
늘 이런 이들이 반복되지요.
그래서 사도 야고보가 말합니다.
8절 새 번역입니다.
1:8 그는 두 마음을 품은 사람이요, 그의 모든 행동에는 안정이 없습니다.
1:8 의심을 품은 사람은 마음이 헷갈려 행동이 불안정합니다.(공동번역)
이처럼 두 마음을 품어 인간적인 방법을 택하는 사람은 그 행동 자체가 불안정할 수밖에 없어서 6절과 7절의 말씀처럼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처럼 이리 왔다 저리 왔다하다가는 결국 하나님의 응답을 이끌어 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너희가 그 부족한 지혜로 판단하고 결정짓지 말고 어떻게 하라고 합니까?
그렇습니다.
5절에 말씀처럼 하나님께 구하라는 것입니다.
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세상 풍조 따르지 말고 지혜가 부족하거든 하나님께 구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 인간적인 방법이 아닌 하나님의 방법을 찾아보라는 것입니다.
시련을 벗어날 수 있는 하나님의 방법, 그 지혜를 하나님께 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주신다는 것입니다.
피할 길도 주시고 살길도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특권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아주 가끔이지만 깊고 풍성한 은혜 속에서 살아가는 분들을 종종 만나게 됩니다.
그분들의 넉넉함과 여유는 늘 모든 이들에게 미소를 짓게 합니다.
그런데 그분들에게는 하나 같이 공통점이 있습니다.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깊은 시련을 겪은 분들이라는 사실입니다.
그것도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누가 봐도 평탄한 삶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영성이 깊고 풍성할 수 있었던 것은 믿음의 시련을 주님이 주시는 지혜로 통과한 분들이라는 사실입니다.
늘 기도가 몸에 베인 분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시련이 오면 늘 두 가지를 점검하시기 바랍니다.
첫째, 지금 당하는 시련이 믿음의 시련인가 제 욕심으로 말미암은 시련인가? 를
분별하십시오.
제 욕심의 시련이라면 정신을 차리고 욕심을 버리십시오.
회개하고 돌이켜 살면 됩니다.
하지만 믿음의 시련이라면 오히려 기뻐하십시오.
왜 그렇습니까?
첫째는 그리스도인 되었다는 믿음의 증거가 되고 둘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품고 살아가는 소망의 인내로 성숙할 수 있는 길이 마련되기 때문입니다.
둘째, 믿음의 시련을 하나님의 방법으로 풀려고 하는지 아니면 인간적인 방법으로 풀려고 하는지를 늘 점검하십시오.
혹 믿음의 시련을 이에는 이 눈에는 눈처럼 인간적인 방법으로 풀려한다면 거두십시오. 그리고 믿음의 시련을 이길 지혜를 하나님께 구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반드시 이길 지혜와 힘을 주실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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