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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월 29일 오전 9시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고 허병섭 목사의 영결식이 열렸다. 영결식장에는 150여명의 조문객들이 모였다.ⓒ에큐메니안 |
3월 29일 오전 9시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사노라면’이 울려퍼졌다. 발인을 앞둔 故허병섭 목사의 영결식은 그렇게 시작됐다. 노래가 울려퍼지자 식장 안에 있던 사람들은 눈시울을 붉혔고 오열하는 사람이 하나둘 늘어갔다. 과거 청계천 빈민선교시절 함께했던 조화순 목사, 진보신당 김혜경 고문, 이해학 목사, 손학규 의원부터 동월교회 시절 함께했던 동역자들과 교우들 그리고 두레공동체에서 함께 동고동락했던 이름 모를 노동자들, 녹색대학(온배움터) 물(학생)들까지 식장은 허병섭 목사의 죽음을 슬퍼하는 이들로 가득찼다. 영결식 순서를 맡은 이들은 하나같이 오열하며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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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결사를 하는 조화순 목사ⓒ에큐메니안 |
조화순, "이 양반이 정말로 가난을 사랑하나..."
조화순 목사는 영결사를 통해 “왜 하나님은 진실하고 당신의 뜻을 따라 살려는 좋은 사람들을 귀한 사람들을 왜 자꾸 데려가는 걸까, 요즘처럼 그런 사람이 많이 필요할 때 왜 그러시는지 생각할 때마다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길 없다.” 슬픈 심경을 토로했다. 조 목사는 “사람들이 저에게 허병섭 목사를 가리켜 오늘을 살아가는 예수님 같다고 한다.”며 허병섭 목사의 삶을 예수에 비유했다. “돈이 없으면 나에게 와서 ‘용돈 좀 달라’고 부탁했다며 ‘저이는 정말로 가난을 사랑하나’할 정도로 가진 것 없이 민중의 삶을 살았다.”며 고인의 가난했던 삶을 회고했고 “1970년대 초 하루는 나에게 찾아와 ‘내가 정말 놀라운 걸 발견했는데 하나님은 한분이 아니래, 하나님은 공동체적인 습성을 갖고 있어서 한분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며 당시로선 생각하기 힘들었던 신학적 통찰을 삶을 통해 습득한 것을 어린아이와 같이 고백했다.”며 고인과의 일화를 소개하기도 했다.
유미란, "주님은 아시지요. 왜 고인이 끝내 눈을 감지 못했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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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도를 하는 유미란 목사ⓒ에큐메니안 | 동월교회시절 고인과 함께 공부방을 열어 활동했던 유미란 목사가 기도를 했다. 그는 아주 가까이에서 고인을 지켜보았기 때문에 고인의 아픔 또한 깊이 알았다.
“인간은 갈등하고 번민하며 방황하는 존재입니다. 고인 또한 그 존재기반 위에서 예외일수 없었습니다. 가난하고 고통당하는 이들과 동고동락하면서 그들의 친근한 이웃이 되었으나 가장 사랑했어야할 가족들에게는 많은 상처와 아픔을 남기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딸들과 관계회복이 되지 않아 가슴아파하시는 모습이 생각납니다. 주님은 아시지요. 왜 고인이 끝내 눈을 감지 못했는지를. 주님이 그 마음을 위로해 주시고 딸들에 대한 안타까움 내려놓고 안식하시기를 원합니다. 장벽과 장애 없게 하시고 고인의 죽음을 계기로 고인의 삶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놀라운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라며 고인의 유일한 고통을 거둬 주시기를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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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모사를 하는 이철용 전 국회의원(꼬방동네사람들 저자)ⓒ에큐메니안 |
이철용, " 중랑천 철거된 뚝방 위에서 병섭형이 제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전 국회의원이자 동월교회 장로였고 소설 꼬방동네사람들의 저자인 이철용 선생은 추모사에서 목 놓아 허병섭 목사를 불렀다. “병섭형, 참으로 오랜만에 불러봅니다. 74년 병섭형과 신설동 판자촌에서 인연을 맺고 형님아우 하며 해방세상을 만들어보자는 꿈을 꿔왔던 게 벌서 40년 전이네요. 목사신분을 숨기고 평범한 이웃 형처럼 다가온 당신은 단 한 번도 교회 나와라 예수 믿어라 얘기하지 않았습니다. 75년 유신투표찬반을 묻는 선거 때로 기억합니다. 제가 부정선거고발을 했고 괘씸죄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을 때 병섭형은 제게 면회를 와서 성경책한권을 넣어주셨습니다. 그 성경책은 저에게 처음으로 책 한권을 읽어보는 기회를 만들어주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애환을 그린 어둠의 자식들과 꼬방동네사람들을 발표하는 발판을 만들어주었습니다. 성경을 읽고 예수라는 사내에게 매료되었고 예수님을 만나게 됐습니다. 그 이후 중랑천 철거된 뚝방 위에서 병섭형이 제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 때 메모해 놓은 글을 소개합니다. ‘오 하나님 제가 무엇이관데 이 죄인을 사람으로 인정해주시고 이 죄는 씻어도 씻을 수 없는 죄인데 맘 조리면서 살아왔던 음침한 뒷골목을 배회하면서 어둠과 죽음을 친구로 삼아왔던 삶을 산 내가 이 시간 당신께 머리 조아려 피눈물로 흘리는 참회의 기도를 드리게 하옵소서. 사랑의 주님 이죄인 무엇이관데 병섭형을 통하여 사랑으로 맞아주시나이까.’ 병섭형이 쓰러지기 전 사무실로 찾아와 했던 말씀이 기억납니다. ‘이 장로를 찾아오는 사람 중에 절망에 방황하는 단 한 명에게 만이라도 희망을 찾게 해주면 그게 좋은 일이다.’라는 마지막 말씀 붙들고 살겠습니다. 병섭형, 당신이 걸어가신 발자취를 따라 갈릴리 해변을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 곳에 병섭형이 영원히 계실 테니까요.”
이무성, "저때문에 목사님이 맘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온배움터(녹색대학) 이무성 대표는 자신의 추모사 대신 녹색대학에서 허병섭 목사와 함께 배우고 생활했던 녹색대학 1기 물(학생)의 추도사를 대독했다. 녹색대학에서 고인과 함께 일했던 그는 2005년 즈음 허목사님께 힘들어서 그만 하겠다고 말했던 그 일로 허목사님이 이렇게 일찍 돌아가신게 아닌지 무거운 마음과 죄책감을 고백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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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모사를 하는 이무성 대표(온배움터)ⓒ에큐메니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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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모사를 하는 김혜경 진보신당 고문ⓒ에큐메니안 |
김혜경, "허목사님은 저를 청계천에서 만난 애인이라고 소개하곤 했습니다."
김혜경 진보신당 고문은 “저는 이 자리에 진보신당 고문으로 서지 않았습니다.”라며 고인과의 첫 번째 인연을 맺었던 일화를 소개했다. “1972년 유신이전 수도권도시빈민선교 판자집 센터에 어느 날 갑자기 오셔서 처음 하신 말씀이 ‘밥 좀 있습니까?’였다며 민중의 배고픔조차 자기 삶으로 살았던 그를 잊을 수 없다.”고 말했다. “항상 가난한 사람들과 힘없는 사람들의 삶의 현장에서 살아온 목사님은 목사직책도 내려놓으시고 민중들과 함께 하시고자 평신도의 삶을 택했습니다. 항상 낮은 자리에서 큰소리치지 않고 가르치려 들지 않고 가장 민주적인 삶을 실천하셨던 분, 말로써가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신 목사님은 언제어디서나 저에게는 항상 벗이었고 청계천에서 만난 애인이었습니다. 진정한 동지였고 벗이었고 진보적인 삶과 사상을 실천해 오신 스승입니다.”라고 고인의 삶을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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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모시를 낭독하는 김창규 목사(시인, 나눔교회)ⓒ에큐메니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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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모의 노래 - 사공합창단/관악을여는사람들ⓒ에큐메니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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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모의 노래 - 동월교회 교우들ⓒ에큐메니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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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큐메니안 |
이해학, "허 목사님은 사람을 눈뜨게 하는 사람입니다."
이해학 목사는 호상인사를 통해 “가난한 마음으로 따뜻한 마음으로 허병섭형 가시는 길 맞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들의 정성과 사랑이 봄을 여는 것 같습니다. 어느 장례식보다도 진정한 추모를 하는 정성들이 모아져 장례 잘 치렀습니다. 허병섭의 모습이 잘 보였습니다. 허병섭, 포장하지 않은 인간입니다. 있는 그대로를 보이는 그래서 누구보다 순수하고 정직하고 뜨거운 열정의 울림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별 볼일 없는 천대받는 미련한 것들이 택함을 받은 이유는 잘나고 똑똑한 것들이 망쳐놓은 세상을 고치고 개혁해서 하나님의 나라로 만들기 위함입니다. 그 흐름이 허 목사님의 생애에서만이 아니라 우리의 생애에서 계속 이어져 나가기를 바랍니다. 평화와 생명이 열매 맺는 세상이 오기를 바랍니다.”라며 인사말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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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상인사 이해학 목사(주민교회 원로목사) 이 목사는"원래는 권호경 목사님이 호상을 해야하나 해외에 계셔서 못했고 그 다음은 김동완 목사인데 먼저 돌아가셔서 내가 호상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에큐메니안 |
이해학 목사는 “허 목사님은 사람을 눈뜨게 하는 사람입니다. 처음 만났을 때 페다고지를 선물하여 나에게 민중교육을 알게 해준 분입니다. 내가 군제대후 한신대로 편입할 당시 학생처 조교로 있던 허 목사님이 나를 많이 도와줬습니다. 내게 자기스스로 생각하고 결단하고 말하고 삶을 개선하는 주체가 되는 민중교육의 눈을 띄워 준 스승입니다. 내 단점과 장점을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좋은 친구요 선배입니다.”라며 고인을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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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헌화의 시간ⓒ에큐메니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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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 허병섭목사의 유해는 고양시에 있는 서울시립승화원에서 화장을 했다. 그 운구행렬ⓒ에큐메니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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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장 직전의 모습ⓒ에큐메니안 |
모든 순서가 끝이나고 고인은 벽제화장장을 거쳐 남양주시 화도읍 마석에 있는 모란공원에 안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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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장을 마치고 남양주시 마석에 위치한 모란공원묘지에 도착한 고인의 영정과 유골함ⓒ에큐메니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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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관예배를 드리고 있는 참배객들ⓒ에큐메니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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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도를 하는 서정호 선생ⓒ에큐메니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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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씀을 전하는 김홍술 목사ⓒ에큐메니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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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배를 마치고 헌가를 하는 국악인 임진택 선생 그는 동월교회시절 고인으로부터 부탁을 받아 처음으로 판소리설교를 하게됐다고 한다.ⓒ에큐메니안 |
2010년 허병섭 목사가 쓰러진 후 간병을 하면서 아버지와 유일하게 오랜 시간을 같이 보냈다는 고인의 딸 허미라씨는 “아버지의 대외적인 삶에 대해서는 직접 경험을 하거나 목격한 적이 없었다. 다른 사람들을 통해 아버지의 활동에 대해 알았고 나에게 아버지는 다정하고 착하고 순수한 분이었다. 지난 3년간은 병상에서 그간 단절됐던 관계를 회복하는 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병상에서 아버지는 나에게 눈으로 뭔가 말하려 노력했고 그 과정을 통해 충분하지는 않지만 아버지와의 교감이 있어서 좋은 시간이었다.”라고 고백했다.
허병섭 목사의 임종때부터 장례기간 동안 빈소를 떠나지 않고 장례를 주관한 이들 중 오용식 목사와 김성훈 목사의 고인에 대한 회고를 들어보았다. 1976년 하월곡동 달동네에 동월교회가 세워진 뒤 고인을 따라 함께 빈민선교에 몸을 던진 오용식 목사는 영은교회에서 시무하다가 재개발로 인해 포천으로 이전된 후 지금은 전북 무주에 있는 푸른꿈자활지원센터에서 일하고 있고 김성훈 목사는 미아리 돌산교회에서 빈민선교와 주민조직운동을 계속 하고 있다.
오용식 목사의 회고 ‘모든 복지의 효시 허병섭’
목사님은 어떤 분이셨나?
허병섭 목사님을 한마디로 표현하기는 쉽지 않다. 예수님의 사랑을 현실에서 실현하려고 구체적으로 애를 쓰신 분이 아닌가 생각한다. 특히 그 사랑을 6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한국역사현실 속에서 가난한 사람들과 더불어 사랑을 실천하려고 노력하셨고 남이 안하는 일, 돈 안 되는 일만을 하셨다. ‘맨땅에 헤딩’하는 격이었다. 그러나 뿌려놓은 씨앗들이 지금 결실을 거두고 있다. 똘배의 집은 탁아소(어린이집)로 동월교회 공부방은 지역아동센터로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한국사회를 실제로 변화시킨 놀라운 결과라고 생각한다.
허 목사님은 두레공동체를 하면서 목사직을 버리면서까지 일용노동자들에 대한 착취를 없애고 더불어 건강한 삶을 지향하고자 한 바를 몸으로 실천하셨다. 그 씨앗이 지역자활공동체, 사회적기업의 씨앗이 됐다. 아무도 환경에 대해 신경 쓰지 않았을 때 그는 생태적인 삶과 환경에 주목했고 대안교육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당시 실패할 수밖에 없을 거라 생각했던 푸른꿈 고등학교를 위한 목사님의 노력이 오늘날 가장 건강하고 바람직한 발전된 학교의 모습을 보면서 어떻게 이게 가능했을까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 그는 역사의 주춧돌을 놓아왔다. 그 삶이 놀랍다. 녹색대학도 결국 이루지는 못했지만 대안 대학교육으로 부단한 노력을 해오셨다.
평생 많이 가지지도 않았지만 무주에 있는 집과 땅을 기부했다. 이처럼 허 목사님은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에 대한 꿈을 실현해 가는 삶을 살았다. 평생을 열정적으로 뒤를 돌아보지 않고 그렇게 살아오셨다. 때론 가족들에게도 많은 아픔을 주기도 했고 후배들에게도 원망의 소리를 듣기도 했지만 결국 허 목사님이 했던 행동의 모든 목적과 그 과정을 봤을 때 그는 예수의 삶을 살려고 끊임없이 몸부림치며 노력했다. 돌아가시기 전까지도 그 노력은 계속 됐다.
고인의 2000년초 귀농의 배경에는 어떤 의미가 있나.
동월교회를 세울 때 산동네 중에서도 가장 후미진 곳에 교회를 지었다. 그 맥락과 비슷하다. 교회선교에서 생명선교롤 넘어가는 과정은 선교는 교회 안에서만 갇혀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세상 안에서 세상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뜻이 교회만을 통해 이 생명과 자연까지 구원해방하시는 하나님을 먼저보시고 실천한 것이다.
우리사회가 자본주의에 깊이 젖어들면서 가족적이고 공동체적인 정신과 삶과 문화가 폄하되고 빈부격차는 급속하게 벌어지고 사회적문제가 첨단화되는 세상 속에서 다시 한 번 허목사님 처럼 자기 자신을 버리고 가난한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선교는 넘치게 해도 부족함이 없는 선교의 과제이자 교회의 과제라고 생각한다. 예수의 사랑을 실천하고 서로 돕는 공동체 그리고 그 선교의 영역이 사람을 넘어서 자연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을 포괄할 수 있는 넉넉한 교회들이 세상에 많이 세워져야한다. 그럴 때 이 모순들이 사라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김성훈 목사의 회고 ‘끊임없이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선 이’
허병섭 목사님은 1982년 하월곡동 동월교회에서 처음 뵈었다. 동네 아저씨 같은 모습이었다. 평온한 사람이었고 후배들에게 인격적으로 대하는 모습이 선하고 소탈하고 서민적인 분이었다. 가난한 주민들과 잘 어울리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래서 나도 빈민선교에 헌신하는 계기를 준분이었다. 그 이후 허 목사님은 나에게는 스승이었다. 제자인 나를 거둬주셔서 허목사님과 함께 살았고 허목사님이 소개한 빈민운동의 조직과 훈련을 받았다. 그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지금까지 이 길을 가게 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해주셨다. 목사님은 말씀하시지 않지만 몸으로 보이면서 나를 안내했다고 본다. 목사님은 언제나 후배들에게 ‘선배나 스승을 넘어서야한다.’ ‘모든 것은 통하니까 한 가지를 깊이 있게 헌신해야한다. 따라서 빈민운동 중에서도 한 분야의 운동을 해야 한다.’고 하시면서 저를 지금까지 그 가르침대로 이끌어주셨다.
모든 훈련과정이 끝나고 다른 곳을 가서 활동을 하라고 하셨는데 그런 일환으로 노점을 시작했었다. 리어카로 하월곡동에서 쥐포나 오징어, 땅콩장사를 하려했지만 나는 헌책을 팔았다. 그 모습을 본 허목사님은 나에게 ‘지식인의 발상을 벗어나지 못했다.’면서 야단치던 기억이 난다. 허 목사님은 가난한 이들을 섬기기 위해서는 그들과 똑같이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셨다.
그 이후로 많은 시간이 지난 20년 후에 허 목사님은 나를 보면서 ‘지금 보니까 네가 제대로 하는 놈 같다.’라는 말을 하셨는데 20년 만에 나의 스승이 나에게 인정받았다는 기억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무주로 내려가신 뒤에도 자주 뵈었고 주민운동과 조직운동에 대해 함께 고민하기도 했다. 목사님이 온배움터(녹색대학) 학생들에게 주민조직운동을 가르쳐달라고 하셔서 내려가 강의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에도 목사님은 학생들과 함께 경청하면서 지지와 격려를 주셨던 분이셨다. 목사님은 주민운동의 대부이다. 현장을 떠나지 않는 유일한 희망이 되신 분이다. 허목사님은 한 분야에 깊이 빠지기도 하지만 늘 창조적으로 고심하고 새로운 것을 위해 행동하는 분이었다. 사람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것을 끊임없이 고민하고 준비해왔다. 결국 운동의 중요한 가치는 생명이라고 생각하셔서 농촌으로 내려가게 된 것이다. 생태와 생명운동이 살아야 인간이 산다는 관점을 갖고 그 생각을 직접 몸으로 시도하셨다.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몸으로 하신 분이고 많은 공부를 하신 분이다. 끝없이 연구하고 학습하고 새로운 가치를 제시하는 분이었다. 후배들 앞에서 그간 고민의 결과를 새롭게 제시할 때만다 깜짝 놀랄 때가 많았다. 그만큼 세상에 도전적인 일갈을 날리기도 하신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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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치된 허병섭 목사의 유골함ⓒ에큐메니안 | epilogue - 예수를 따르는 삶의 무거움
예수에 대한 안 좋은 후문이 돌았다. ‘예수가 바알세불에 씌었다.’ ‘예수가 귀신들렸다.’ 이런 소식을 들은 예수의 어미는 자식 걱정하는 마음에 예수의 동생들과 예수를 찾아 나선다. 예수가 말씀을 전하는 집 문전에서 예수를 불렀지만 예수는 ‘누가 내 어미냐’라며 외려 호통을 친다. 그러면서 예수는 더 큰 가족을 제시한다. 제자들에게는 집과 재산 가족을 포기하라고 강요하셨다. 예수는 절대로 가정적이지 않았다. 예수는 그 어떤 것도 사유화하지 않았다. 이게 역사적 예수다.
이러한 예수를 목사 허병섭은 따라 갔을 뿐이다. 다른 예수의 제자들과 같이. 그의 삶의 궤적을 돌아보면 단 하나의 오점 아픈 가족사가 있다. 더 큰 대의 하나님나라를 위한 그의 삶이 가져다준 예수의 흔적, 예수의 상흔처럼 그의 삶에도 상처가 남아있다. 한 목사의 기도처럼 그가 끝내 눈 감지 못했던 인간적 정리는 예수를 닮으려 했던 그를 끝까지 괴롭혔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떠나면서 우리에게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라는 의문과 과제를 남겨놓았다. 장례식 내동 했던 말이 ‘우리 모두 허병섭 목사님처럼 살자.’였지만 과연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도 의문이고 절대적 빈곤에서 벗어난 지금 자발적 가난과 ‘민중 되기’가 얼마나 운동에 유효할지는 모를 일이다. 장례식을 모두 마치고 돌아가는 발걸음이 가볍지 않았다. ‘모든 재산을 팔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말했던 예수의 요청에 대답하지 못한 채 무거운 마음으로 등 돌렸던 부자청년의 마음과 같은 느낌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예수되기’는 영원히 유효할 것이고 허병섭의 피땀 어린 손길과 눈물로 씨 뿌리는 사람들, 괴로움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따라 나서는 이들에 의해 하나님 나라는 확장될 것이다. 가벼운 마음으로 홀가분히 예수를 따를 수 있는 사람은 다시 한 번 확인해보라 그가 예수인지 아니면 온화한 미소를 짓는 맘몬인지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