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창고

성서번역가 늦봄 문익환 목사

心貧者 2019. 1. 27. 10:03

성서번역가 늦봄 문익환 목사  

 

이 환 진

히브리성서학/ 뉴욕대학교 박사과정

 

 

0.0 들어가는 말

저는 평소에 늦봄 문익환 목사님을 살아 있는 예언자라는 별명으로 불렀더랬습니다. 이제는 조국통일을 맞으러 다함께 손잡고 나아가자고 큰소리 외치시던 그분은 정말 하느님의 품에서 통일을 맞으시려나 지금은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습니다. 벌써 그분이 하느님의 품으로 떠나신 지도 한 해하고도 반 년이 흘렀습니다. 하느님은 이제 이 예언자가 하늘에서 꼭 필요하셨나봐요. 모세가 비스가 산 꼭대기에서 멀리 가나안 땅을 바라보고는 아쉬워하면서 그곳에서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지 않았습니까? 대신 그의 후계자 여호수아만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지요. 마찬가지로 하느님은 이제는 통일의 길을 우리더러 닦으라고 어느 날 갑자기 문익환 목사님을 데려가셨는지도 모릅니다.

 

0.1 충남 천안에 있는 한국신학연구소는 문 목사님이 돌아가신 해인 1994년 여름에 신학사상85집에서 늦봄 문익환 목사의 삶과 신학을 특집으로 꾸며 그분의 생애와 신학을 조명하였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통일운동가로서의 문 목사님(김거성, 박종화, 이해학, 홍근수, “심포지엄: 통일운동의 현 단계와 늦봄 문익환 목사의 통일론,” 7-42)과 시인으로서의 문 목사님(김기석, “생명의 바다에 통일배 띄우고 - 문익환의 시 세계,” 61-79), 그리고 성서학자로서의 문 목사님(김이곤, “늦봄 문익환 목사의 구약성서신학,” 43-60)을 살펴보았습니다. 하지만 성서번역가로서의 문익환 목사님에 대해서는 별로 이야기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0.2 물론 대한성서공회의 부총무이신 민영진 박사께서 감리교신학대학의 구약학 교수 시절에, 문 목사님께서 구약번역 책임을 맡으셨던 <공동번역>의 번역성격에 대해 두 편의 글을 쓰신 적이 있긴 합니다(“공동번역성서의 번역특징,” 신학사상22[1977년 여름], 477-488쪽과 “<공동번역 구약> 재평가,” 그리스도교와 겨레문화연구회 편, ?한글성서와 겨레문화? [기독교문사, 1985], 67-92). 저는 이 글에서 문 목사님이 성서번역에 관하여 쓰신 두 편의 글을 중심으로 한글성서 번역사에서 그분의 위치가 어디쯤 있을까 한번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물론 한 사람의 인물됨은 그 사람의 여러 측면을 총체적으로 파악해야만 제대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늦봄 문익환 목사님은 하도 큰 어른이시라서 그분의 모든 모습을 다 담을 수 없고 이 글에서는 다만 성서번역사의 관점에서만 그분의 업적을 살펴보려고 하는 것뿐입니다.

 

0.3 지난 19941월말 뉴욕 유니온 신학교 뒤에 있는 INTERCHURCH CENTER 채플에서 문 목사님의 추도예배를 드렸습니다. 이 추도예배는 뉴욕 목요기도회(회장 한성수 목사)의 회원들이 중심이 되어 준비한 예배였어요. 눈이 오는 참 안 좋은 날씨인데도 불구하고 일명 GOD BOX라고 부르는 INTERCHURCH CENTER 채플에 약 200명의 뉴욕 동포들이 문익환 목사님의 동생이신 문동환 목사님과 함께 모여 아쉬움과 충격 속에 그분의 죽음을 애도했습니다. 그리고 지난 19951월 말 뉴욕 유니온 신학교 JAMES 채플에서 문 목사님 추모 2주기 예배를 드렸습니다. 250 여 명의 뉴욕지역 한인동포들이 함께 모여 그분의 높은 뜻을 기렸습니다. ‘하나가 되는 것은 더욱 커지는 일이라고 평소에 외쳤던 그분의 목소리를, 그분의 평소 모습을 화면을 통하여 뵙고 숙연해지기도 하고 힘을 얻기도 하였습니다. 저는 거기에 오신 분들이 모임을 끝내고 마실 커피와 음료수를 준비하느라 허리가 아플 정도였지만 아무튼 그곳에 모인 동포들의 감격과 아쉬움은 내내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0.4 그리고 곧이어 문 목사님이 추진하시던 통일맞이 칠천만 겨레모임의 정신을 이어받아 뉴욕지역에서도 조국통일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으로 몇몇 어른들이 모여 통일맞이 뉴욕모임(회장 손명걸 목사)이 결성되었습니다. 미주 동부지역에서 제일 오래된 75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맨하탄 115가 컬럼비아 대학교 맞은 편에 있는 뉴욕한인교회 교육관에서 모임이 생겨났습니다. 이 모임은 1970년대 중반부터 시작하여 약 20여 년간 지속되었던 뉴욕 목요기도회의 후신이라고도 말할 수 있지요. 우리 조국에서는 벌써부터 이 모임을 친북단체로 규정하였다고 하는데 정말 기가 찰 노릇입니다. 통일 얘기만 하면 무조건 친북이라고 몰아붙이는 것은 통일을 바라지 않는 이들의 억지가 아닌가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

 

0.5 이 모임에서 저는 문 목사님의 일대기를 엮은 비디오 테입 영상기록 문익환: 난 통일을 보았네(기획 제작, 통일맞이 칠천만 겨레모임)를 구입하여 몇 번이나 이 테입을 보았습니다. 정말 감격스럽더군요. 70년대 중반부터 신학교를 다니고 80년대를 거친 저로서는 내 개인사와 문 목사님의 일대기가 영상에 겹쳐 떠오르곤 하였습니다.

 

0.6 제가 처음으로 문익환 목사님을 뵌 것은 1978년 봄, 당시 감리교신학대학 4학년 때였습니다. 몇 월인가는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만 서울 냉천동에 있는 감신대 대학원 세미나실에서 한국구약학회정기모임이 있었던 날이었습니다. 그날 모임에는 당시 유수한 한국의 히브리성서 학자들이 모였습니다. 한 열 분 정도 참석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저는 유일한 학생으로 그 모임에 참석하였습니다. 마침 스위스 바젤 대학교에서 한글 구약성서번역사로 학위논문을 끝내고 막 장로회신학대학 교수로 부임한 김중은 교수가 자신의 학위논문을 발표하던 날이었어요. 문 목사님은 많지 않은 흰 수염을 휘날리면서 허겁지겁 늦게서야 그 모임에 참석하셨습니다. 성서번역에 관한 발표가 있는 모임이니까 특별히 관심이 있으셨던 모양입니다. 발표가 끝나고 토론 시간에 되었습니다. 자연히 이야기는 당시 막 출간된 <공동번역>(1977)에 대한 이야기로 흘러갔습니다. <공동번역> 성서의 번역책임자이셨던 문 목사님이 그곳에 오셨기 때문이기도 했겠지요. 문 목사님이 1976년의 ‘3.1 구국사건으로 감옥에 가셨다가 19771231일 출소하시고 나서 몇 달되지 않은 때였고, <공동번역> 성서가 출판된 지도 얼마 되지 않은 때였습니다. 문 목사님은 <공동번역>의 마무리 작업을 못하시고 감옥에 가셨기 때문이었는지 원래의 원고대로 되어 있지 않은 부분이 눈에 띄더라고 얘기하셨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특히 홍해바다라는 것은 원래 갈대바다’(얌 쑤프)였던 것이 갈대라는 것만 지우고 그냥 두어 홍해가 아닌 홍해바다로 되었다고 불만을 얘기하시더군요. 신명기 11:4과 느헤미야 9:9에서는 그냥 갈대바다라고 두었으니까요.

 

0.7 그리고 <공동번역>이 하느님의 이름을 야훼로 읽은 이유도 설명하시더군요. 성서학계에서는 하느님의 이름, ‘거룩한 네 글자 (TETRAGRAMMATON, הוהי)를 보통 야웨라고 표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공동번역>자에 히읗을 집어넣어 야훼로 읽었습니다. 이유인즉슨 1970년대 초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에서 구약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은 민영진 박사께서 자신의 학위논문을 어머니 전영자 님에게 읽어 드렸더니 하시는 말씀이 왜 자꾸 야외 하느님, 야외 하느님그렇게 말하는 게야? 하느님이 야외에 계시는 분이라도 된다는 게야?”라고 하시더라는 거지요. 평범한 목사님의 사모님이셨던 민 목사님의 어머님의 귀에는 그렇게 들리셨겠지요. 이 얘기를 들은 문 목사님이 참 옳은 말이라고 생각하셨다는 거지요. 그래서 야웨 하느님야훼 하느님으로 고쳤다는 겁니다. <공동번역>의 번역과정에 숨어 있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겠지요. 지금 민영진 목사님은 <표준 새번역>(1993)의 번역책임자로 일하시고 대한성서공회의 부총무 일을 맡고 계시니까 참으로 기막힌 인연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0.8 문익환 목사님은 살아 생전 성서번역에 대하여 두 편의 글을 쓰셨습니다(민영진/정길남/이진호/이덕주, “한글성서번역 및 발행관계 연구문헌 목록,” 그리스도교와 겨레문화연구회 편, ?그리스도교와 겨레문화: 개화기를 중심으로? [그리스도교와 겨레문화연구회 논문 제3: 기독교문사, 1991], 413). “성서번역은 이렇게(성서한국64[19607], 3-5)히브리어에서 한국어로: 성서번역의 문제들(신학사상7[1974], 684-702. 그리스도교와 겨레문화연구회 편, ?한글성서와 겨레문화? [기독교문사, 1985], 49-65쪽에 재수록)라는 글입니다. 특별히 히브리어에서 한국어로라는 글은 우리글로 씌어진 최초의 본격적인 성서번역이론 논문입니다. <공동번역> 번역작업을 한참 하시던 1974년에 나온 글이니까 그분이 구약번역의 책임자로 작업하셨던 <공동번역>의 성격이 어떠한 것인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글이라고 하겠습니다.

 

1.0 성서번역의 두 경향

성서번역에는 일반적으로 두 가지의 경향이 있습니다. 하나는 형식적 일치의 번역이고 또 하나는 내용의 동동성을 따르는 번역입니. 영어를 사용하는 학자들은 이 두 경향을 FORM-ORIENTED TRANSLATIONCONTENT-ORIENTED TRANSLATION이라고 부르기도 하고(EUGENE H. GLASSMAN) FORMAL CORRESPONDENCEFUNCTIONAL EQUIVALANCE라고 부르기도 합니다(EUGENE A. NIDA). 뭐라고 부르든지간에 형식적 일치따르는 번역은 성서원문의 형식, 곧 단어 하나하나의 뜻을 그대로 옮기고자 노력하는 경향을 지니고 있고, ‘내용의 동등성을 따르는 번역은 원문의 형식이나 자구를 그대로 옮기기보다는 원문을 읽는 독자들이 지니는 느낌을 번역문을 읽는 독자들의 느낌에 가깝게 재현하겠다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지요. 어느 것이 더 좋은 번역원칙이냐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번역성서도 엄밀하게 이 두 원칙 중 하나만을 충실하게 지킨 번역본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한글성서 가운데에서는 <구역>(1911)이나 <개역>(1938/1956)형식적 일치를 충실히 따른 역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개역>조차도 단어 하나하나를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1.1 형식적 일치번역 예를 들어 <개역> 창세기 16:12를 보기로 하지요. “그가 사람 중에 들 나귀 같이 되리니 그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형제의 동방에서 살리라고 했습니다. 여주인 사라의 학대에 못 이겨 임신한 몸을 이끌고 광야로 도망치는 하갈에게 하느님의 심부름꾼이 나타나서 뱃속에 든 아기에 관해 한 이야기입니다. 이 말 가운데 제가 필기체로 표시한 치겠고, 칠지며라는 말은 분명 우리말로는 동사에 해당합니다. 하지만 성서 히브리어에서 이 말은 전치사 베트 (ב)입니다. ‘형식적 일치만을 따른다면 당연히 우리말로도 거슬러, 반목하여, 적대하여라는 뜻으로 번역해야 했을 것이지요. 성서 히브리어 전치사 베트는 다양하게 쓰여 반목과 적대의 뜻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명사문장으로 되어 있는 야도 바콜 베야드 콜 보(그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라는 구절에서 전치사 베트를 우리말 어법상 전치사로 그대로 옮기기는 불가능한 일이 아닐까요? 이 전치사는 성서번역학에서 사건어(EVENT)로 분류됩니다. 우리말에서 사건어인 이 전치사 베트는 동사로 옮겨야만 자연스럽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위의 창세기 16:12에서 <개역> 성경이 전치사 베트를 우리말의 전치사로 옮기지 않고 치겠고, 칠지며라는 동사로 옮긴 것은 형식적 일치가 아닌 내용의 동등성의 원칙을 따른 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손이 를 친다고 어색하게 표현되기는 했지만요.

 

1.2 이런 예가 또 하나 있습니다. “하나의 이름은 엘리에셀이라 이는 내 아버지의 하느님이 나를 도우사 바로의 칼에서 구원하셨다 함이더라라는 출애굽기 18:4입니다. 이 말은 모세가 둘째 아들을 보고 엘리에셀이라는 이름을 붙인 이유를 설명하는 구절입니다. 여기서 내 아버지의 하느님이 나를 도우사라는 구절은 성서 히브리어로 엘로헤이 아비 베에즈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엘로헤이 아비내 아버지의 하느님,’ 우리 아버지가 섬기는 하느님이라는 뜻이지요. 그리고 곧이어 나오는 베에즈리에서 는 앞서 말한 전치사 베트이고 에즈리나의 도움,’ 나를 도우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1인칭 소유격 어미가 붙은 이 에제르라는 말은 성서에서 종종 하느님의 호칭으로 사용되기도 합니다(신명기 33:7; 시편 33:20; 115:9-11, 3; 124:8).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전치사 베트를 어떻게 처리하느냐하는 것입니다. 위의 <개역>내 아버지의 하느님이 나를 도우사라고 읽었습니다. 전치사 베트를 아예 빼고 읽었습니다. 성서 히브리어 문법학자들은 이 전치사를 보통 라틴어로 BETH ESSENTIAE라고 이름 붙입니다(GESENIUS, JOUON-MURAOKA). ‘주어의 정체를 분명하게 밝히기 위하여 주어를 강조하는 전치사 베트라는 뜻이지요. 그리므로 위의 구절은 주어인 엘로헤이 아비를 강조하여 우리 아버지가 섬기시는 하느님은 정말 나를 도우시는 분이시다라고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개역>은 전치사 베트의 이러한 뉘앙스는 빼고 그저 평범하게 읽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보면 <개역> 성경도 엄밀하게 말하자면 형식적 일치의 원칙을 충실하게 따랐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2.0

영어성서 가운데 형식적 일치원칙에 따라 번역된 것으로는 1611년에 나온 <흠정역>(KING JAMES VERSION), 그리고 <흠정역>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은 <영어개역>(REVISED VERSION, 1885)<미국표준역>(AMERICAN STANDARD VERSION, 1901), <영어표준개정>(REVISED STANDARD VERSION, 1952)이 있습니다. 이 전통에 서서 요즈음 성서학계에서 유행하고 있는 수사 비평학(RHETORICAL CRITICISM)의 강조점인 본문의 수사 기법을 번역에서 재현하려고 노력한 영어성서로 이베렡 확스(EVERETT FOX)<창세기와 출애굽기>(GENESIS AND EXODUS [NEW YORK: SCHOCKEN BOOKS, 1990])가 있습니다.

 

2.1 이베렡 확스는 이 책의 서문에서 자신의 번역이 19251962년에 나온 독일어 성서 <부버-로젠쯔바이히 번역>(BUBER-ROSENZWEIG TRANSLATION)의 번역정신을 이어받아 히브리 성서가 구전(口傳)으로 전해진 점에서 착안하여 본디대로 낭독용 성서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번역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반복, 암시, 두운(頭韻), 말놀이 같은 성서 히브리어의 수사기법을 될 수 있는 대로 반영하려고 했습니다(위의 책 xiii ). 이 번역은 요즈음 서구에서 유행하고 있는 수사 비평학과 잘 맞아떨어진 번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즘의 수사 비평학은 이베렡 확스의 강조점인 히브리 성서의 수사적 표현과 그 구성에 관심을 많이 기울이는 비평학이기 때문입니다. 한번 창세기 2:23을 보기로 할까요?

 

THIS-TIME, SHE-IS-IT!

BONE FROM MY BONES,

FLESH FROM MY FLESH!

SHE SHALL BE CALLED WOMAN/ISHA,

FOR FROM MAN/ISH SHE WAS TAKEN!

 

확실히 히브리어 문장을 그 순서대로 옮기면서 또한 여자’(이샤)남자’(이쉬)라는 말놀이를 보여주려고 히브리어를 그대로 음역(音譯)하였습니다. 이런 예는 위의 번역본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1:3-5; 32:31; 30:23-24; 14:11-12; 22:23-24 ). 그러니까 이베렡 확스의 <창세기와 출애굽기>는 수사 비평학과 맞물린 형식적 일치번역의 최근 형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영어성서는 내용의 동등성원칙을 따르고 있는 번역과 그 목적이 같습니다. 원문을 읽던 독자들의 느낌과 이해정도를 번역문을 읽는 현대의 독자들에게 옮겨주려고 노력하였기 때문입니다. 수사 비평학을 자신의 방법론으로 채택하고 있는 성서학자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부각시키기 위하여 성서구절을 이러한 경향으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3.0 ‘내용의 동등성번역

이러한 형식적 일치의 번역과는 다르게 내용의 동등성원칙을 따른 번역본들은 1960년대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합니다. 미국에서 나온 <예루살렘성경>(JERUSALEM BIBLE, 1966), <복음성경>(GOOD NEWS BIBLE, 1976), <신국제역>(NEW INTERNATIONAL VERSION, 1978), 그리고 영국에서 나온 <새영어성경>(NEW ENGLISH BIBLE, 1976) 등이 있습니다. 특별히 내용의 동등성이라는 이론은 그전에도 있었겠지만 미국성서공회의 번역실장을 오랫동안 지냈던 유진 나이다(EUGENE A. NIDA) 박사가 마무르고 체계화한 번역이론입니다. 이 번역이론은 뒤에서 다시 말씀드리기로 하지요. 문 목사님의 히브리어에서 한국어로라는 논문이 이 번역이론을 한글로 소개한 글이기 때문입니다. ‘내용의 동등성이라는 말은 본디 <공동번역> 서문에서 처음으로 우리 나라에 소개된 말입니다. 본디 유진 나이다 박사의 성서번역 이론을 가리키는 DYNAMIC EQUIVALENCE내용의 동등성이라고 옮긴 것이지요. 나중에 나이다 박사는 그의 책,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에서 이 용어를 FUNCTIONAL EQUIVALENCE라고 고쳐 불렀습니다. 그러나 그 뜻은 차이가 없다는 겁니다. 단지 DYNAMIC이라는 말이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기 때문에 FUNCTIONAL로 고쳐서 부른다고 했어요(FROM onE LANGUAGE TO ANOTHER, vii-viii).

3.1 성서 원문의 형식보다는 내용을 충실하게 옮긴다는 원칙에서 더 나아가 성서를 읽는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성서의 본문을 그대로 번역하고 거기에 어느 정도 설명을 덧붙인 번역본도 있습니다. 이 전통은 유대교에서 매우 오래된 전통인데요. 쿰란 동굴에서 발견된 <창세기 외경>(기원전 1 세기)이라는 두루마리가 있습니다. 이 두루마리의 성격에 대해서 학자들의 견해가 다양하긴 합니다만 대체적인 의견은 이 두루마리가 미드라쉬와 타르굼의 성격을 다 지니고 있는 두루마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미드라쉬라고 하면 유대인들의 오래된 문학 장르인데 성서 해설서내지는 주석서비슷한 성격을 지닌 문학입니다. 제이콥 뉴스너(JACOB NEUSNER)라는 탈무드학자는 미드라쉬를 아이세게제(EISEGESE)라고 부르기도 하더군요(INTRODUCTION TO RABBINIC LITERATURE [NEW YORK: DOUBLEDAY 1994], 223-5). ‘엑세게제(EXEGESE)의 반대 개념이지요. 또 타르굼 역시 그 역사가 오래된 아람어 번역 해설 성서입니다. 그러니까 <창세기외경>이라는 책은 본문의 내용 이해를 돕기 위해 나름대로 설명을 붙인 두루마리라고 말할 수 있지요. 이것 말고도 <욥 타르굼>이라는 두루마리도 사해 쿰란 지역에서 발견되었는데요. 이 두루마리 역시 욥기를 아람어로 번역한 것이지만 해설을 곁들인 번역입니다. 이렇게 기원 전부터 유대인들은 히브리성서를 당시의 일상어였던 아람어로 번역하면서 해설을 덧붙였습니다. 이것은 내용의 동동성이라는 원칙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형태의 전통이 유대교 내에서 오래 전부터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흔적입니다. 앞서 타르굼이라는 말을 했습니다만 나중 기원 후 4-5세기부터는 성서 전체가 아람어로 번역되어 아예 <타르굼> (TARGUM onKELOS, TARGUM YONATAN)이라는 이름으로 번역본이 나오기도 합니다.

3.2 영어성서의 경우 <리빙 바이블>(LIVING BIBLE, 1971)이 이 경향을 보이고 있는 성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성경은 원어성경이 아닌 <미국표준역>(AMERICAN STANDARD VERSION, 1901)이라는 영어성경을 번역한 중역(重譯) 성경입니다. 곧 중역 성경은 원어성서에서 번역하지 않고 번역본을 다시 다른 언어로 번역한 성경을 말합니다. 가톨릭교회의 경우 <라임스-듀아이 역>(RHEIMS-DOUAI VERSION, 신약 1582/ 구약 1609-10)이 라틴어성서에서 영어로 번역된 것으로 중역 성경입니다. 20세기 중반에 나온 가톨릭교회의 공인본으로 <낙스 번역> (KONX TRANSLATION, 신약 1945/구약 1948)이 있습니다. 이 성경 역시 라틴어성경을 영어로 옮긴 것입니다(SAKAE KUBO & WALTER SPECHT, SO MANY VERSIONS? [GRAND RAPIDS, MICHIGAN: ZONDERVAN, 1975] 54-55).

3.3 이런 경향을 지니고 있는 우리말 성경으로는 <현대인의 성경> (1985, 생명의 말씀사 발행)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성경은 위의 <리빙 바이블>을 다시 옮긴 것이기에 삼중(三重) 번역이라는 문제점을 지니고 있어요. 그래도 글말체[文語體]가 아닌 입말체[口語體]를 채용하여 읽기 쉽게 번역된 장점을 지니고 있기도 합니다. <현대어성경>(1991, 성서교재간행사 발행)이 있습니다. 아람어 성서인 <타르굼>의 전통을 이어받아 성서원문에서 길게 풀어 옮긴 한글성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성서들은 공인번역(TEXTUS RECEPTUS)이 아닌 개인번역성서라는 특징을 지니면서 내용의 동등성원칙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번역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3.4 이렇게 길게 여러 번역본에 대해서 얘기하는 하는 이유는 각 역본들이 형식적 일치내용의 동등성번역원칙을 중심으로 해서 어떠한 위치에 있는가 자리매김을 해본 것입니다. ‘형식적 일치원칙에 맞추려고 애쓴 <구역>이나 <개역>, 그리고 이 원칙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수사 비평학의 강조점을 번역에 재현하려고 애쓴 이베렡 확스의 <창세기와 출애굽기>가 한쪽에 있다고 했지요. ‘내용의 동등성원칙에 충실하려고 노력한 한글성서로는 <예수셩교젼셔>(1887)<신역신구약전서>(1925)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원칙을 따라 번역된 대표적인 한글성서는 역시 <공동번역>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해설 성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이 쿰란 동굴에서 발견된 <창세기 외경><욥 타르굼>이 있고, <타르굼> 아람어 성서가 있다고 했습니다.

3.5 앞서 <예수셩교젼셔><신역신구약전서>는 제대로 된 우리말로 성서가 한국에 뿌리내리게 하는 데 공헌한 한글성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지만 <예수셩교젼셔>는 성서를 우리말로 처음 옮기는 작업이었기 때문에 주로 어휘 선택에서 이러한 경향을 찾아볼 수 있을 뿐이고, <신역신구약전서>는 개인역이라는 이유 때문에 잘 다듬어진 한글성서임에도 불구하고 잘 알려지지 않은 한계를 지니고 있지요. 그렇지만 본격적인 내용의 동등성이라는 번역이론을 적용하여 번역된 공인번역 한글성서는 <공동번역>입니다. ‘내용의 동등성원칙을 따른 문 목사님의 책임번역본 <공동번역> 성서가 여러 번역본 성서사이에서 어디쯤에 있는가 자리매김을 하기 위해 배경으로 말씀드렸습니다. (다음호에 계속)

 

 

4.0 성서번역은 이렇게

 

우선 1960년에 나온 글 성서번역은 이렇게에 대해서 잠깐 언급해야 할 것 같군요. 아마도 이 글은 1967년에 나온 <새번역 신약전서>의 번역작업에 보탬이 될까해서 문 목사님께서 나름대로 3쪽에 걸쳐 짧게 제안한 것으로 짐작됩니다. 복음동지회의 회원으로 <새번역 신약전서> 번역작업에 삼 년 동안 참여하고 나서 쓴 글이라고 말씀하면서 우리의 새 번역은 언제나 현재 국민학교 학생이나 중학생들의 말의 동향에 순응해 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구약문학은 대중의 문학이고 신약도 문학적인 언어로 쓰이지 않고 코이네 (통속어)로 쓰여졌기 때문에 한글성서 역시 대중을 위한 통속적인 옷을 입어야 할 것이라는 거지요. 또한 새 번역은 말을 옮겨 놓은 것에 멎지 않고, 그 사상과 정감(passion)을 옮기도록 해야하므로 자귀(字句)적 번역으로 될 수는 없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4.1 이 말은 지금껏 한국교회에서 신주단지 모시듯 사용하고 있는 <개역> 성경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인 듯 싶습니다. <개역> 성경은 1938년에 나와 1956년에 당시의 한글맞춤법 통일안에 맞추어 지금껏 우리가 예배 때마다 읽는 성경으로서 한국의 <흠정역>이라고까지 불릴 정도로 보편화되어 있는 한글성서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와 매우 친숙한 성경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개역>처럼 당연히 하느니라,’ ‘가라사대등과 같은 우리의 옛 말씨로 되어야만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개역>은 자구적 해석으로 유명한 한글성서입니다. 아마도 당시 선교사들이 즐겨 읽었던 <미국표준역>(American Standard Version, 1901)의 영향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어느 부분은 <미국표준역>과 한글 <개역>이 똑같은 것을 발견할 수 있으니까요.

 

4.2 <개역>은 사실 순수하게 한국인의 손으로 번역된 성서는 아닙니다. 외국인 선교사들과 한국인 번역자들의 합작품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어색한 우리말 표현이 많이 등장하지요. 주기도문 속에 들어 있는 나라이 임하옵시며라는 말은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라이에서 라는 토씨는 이북 사투리라서 당연히 로 고쳐야 한다는 것이 문 목사님의 생각이었습니다. “우리는 토씨 , 를 쓰느냐 , 을 쓰느냐는 데 대해서 예민하게 신경을 써야 했고, 때로는 긴 시간 토론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뒤에서도 보겠습니다만 <공동번역>을 번역하실 때에 문 목사님은 이 토씨 문제로 고민을 많이 하시고 또 많은 시간을 들여 이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노력하신 것을 히브리어에서 한국어로라는 글을 통해서 엿볼 수 있습니다.

 

4.3 사실 히브리어나 희랍어에는 없는 우리말의 토씨는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그 뉘앙스가 달라지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되는 문제입니다. 성서 히브리어에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라는 시제가 없습니다. 문 목사님의 표현으로 말하자면 때매김이 없다는 말이지요. 단지 동작이 완료됐느냐 아직 되지 않았느냐 하는 데에만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을 뿐입니다. 완료태와 미완료태만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성서 히브리어의 완료태가 때로는 과거완료로, 때로는 현재완료로 또 어떤 때는 미래완료로도 읽을 수 있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에 어려운 점이 많다는 것입니다. 또는 미완료태 동사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표현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관적인 판단을 피할 길이 없이 된다고 하면서 그러나 이 때에도 근거 없는 주관에 의한 경솔한 판단이 되지 않도록 어떤 수고든 아끼지 않아야 한다고 문 목사님은 이 글에서 말씀하십니다.

 

4.4 앞서 이베렡 확스의 <창세기와 출애굽기>가 읽기용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나온 최근의 번역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문 목사님은 이미 1960년에 새 번역이 읽기도 좋고 외우기 좋아야 한다고 제안하고 있습니다.

 

새 번역은 읽기 좋고 외우기 좋아야 한다. 근년 양식 비판의 발달과 함께 구전 (口傳)의 중요성이 발견되었다. 특히 구약과 복음서 번역에서는 이 점에 깊은 관심을 기우려야 하리라고 생각한다. 성서가 쓰이기 전에 오랜 세월을 두고 입에서 입으로 전해 질 때, 자연적으로 외우기 좋도록 시적 음률과 형식을 갖추게 되었다. 구약의 대부분이 시의 형식으로 쓰여져 있는 것은 그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현행 번역은 예언서는커녕, 시편까지도 아주 외우기 힘들게 되어 있다. 팔복뿐 아니라, 예수님의 모든 교훈에 나타나 있는 시정을 산문체로 죽여 버려서는 안된다. 구약 번역 문제는 아직 연구해 보지 않았기에 그 문제를 자세히 논할 계제에 있지 않다. 시편의 시의 내용적 깊이와 그 높이, 그리고 그 형식의 아름다움을 히브리어로 충분히 감상하면서 그것을 우리의 시로 옮겨 놓을 일이란 시인이 아닌 성서학자들에게 있어서 커다란 두려움이 아닐 수 없다. (‘성서번역은 이렇게’ 4).

 

이러한 제안은 시대를 앞서는 제안으로 문 목사님 자신이 구약번역 책임자로 작업한 <공동번역>에 반영되어 있고, 또 지난 1993년에 나온 <표준새번역>에서 그 절정을 이루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표준새번역>을 펴보시면 아시겠지만 문장부호 가운데 쉼표가 두드러지게 많이 나오기 때문이지요. “이것은 실제로 강단에서 소리내어 읽을 때에, 끊어서 읽어야 할 곳을 정확하게 끊어서 읽지 못함으로써 정확하게 의미를 전달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 현실을 고려한 것이다라고 <표준새번역>의 문장위원이었던 전무용 시인은 밝히고 있습니다 (“<성경전서 표준 새번역>의 우리말을 다듬으면서,” ?기독교사상? 410[19932], 60).

4.5 성서번역이 자구 (字句)적 번역으로 될 수 없는 일이고 그렇다고 의역 (意譯)을 할 수도 없다고 하면서 할 수 있는 한 자귀적 번역을 하면서 뜻은 그 뜻을 정확히 옮긴다는 어려운 일을 성서번역자는 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계속해서 문 목사님은 그리고 이것은 말이나 텍스트 연구만으로는 되지 않는다. 역사와 그들의 사고 방식과 신학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 없이 되어지지 않는다. 한마디로 번역자는 그 속에 빠져야 하고 취해버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1960년도의 이러한 생각이 계속되어 문 목사님은 1968년부터 한국신학대학의 교수직을 사임하고 본격적으로 <공동번역>의 번역 작업에 참여하게 됩니다.

 

5.0 히브리어에서 한국어로

 

우선 히브리어에서 한국어로라는 이 글은 문 목사님이 책임번역자로 작업한 <공동번역>의 번역 이론 논문이라는 점을 말해야 할 것 같군요. 앞서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우리 나라 최초의 본격적인 성서 번역이론 논문이기도 하구요. 이 논문은 역시 앞서 언급한 미국성서공회의 번역실 총무 유진 나이다 박사의 번역 이론을 우리말에 적용한 논문입니다. 문 목사님은 성서 번역이라는 것이 사실은 기독교 토착화를 실현하는 일이라고 천명하였습니다.

 

…… 성서의 이미지를 가장 가깝게 한국적인 표현으로 옮긴다는 것이다. 그래서 상당히 서구적인 논리의 세례를 받은 일부 학자들의 심상에 비친 기독교가 아니라 한국말 성서밖에 읽을 수 없는 크리스천 대중의 체험 (성서의 리얼리티와의 만남) 속에서 솟아난 것을 보자는 것이다 .

 

이 인용은 문 목사님이 1960년대 한국신학계가 감리교신학대학의 조직신학 교수였던 윤성범 박사의 기독교 토착화 시도를 둘러싼 논쟁에 성서학자로서 <사상계>에 쓴 글이었습니다 (“한국인의 소슬한 종교,” ?思想界? 19647월호 197). 이것을 다시 인용하면서 문 목사님은 성서번역이야말로 기독교가 한국에 뿌리내리는 가장 중요한 작업이라고 강조하십니다. 하지만 그 때는 히브리어와 한국어가 만날 때, 분해되어야 하는 것은 한국어가 아니라 히브리어라는 것을 알 까닭이 없었다고 고백합니다. 성서번역에서 기독교가 한국의 토양에 뿌리내리는 일은 우선 번역의 대상인 히브리어나 희랍어가 한국말 앞에서 부서져야 한다는 점을 문 목사님은 간파하였던 것입니다.

 

5.1.0 <예수셩교젼셔>Korean Speech

사실 성서가 한국이라는 흙에 뿌리내리는 일이 시작된 것은 1887년에 나온 <예수셩교젼셔>라는 신약전서입니다. 이 번역본은 <로스역>이라고도 부르는데요. 존 로스(John Ross)라는 스코틀랜드 연합장로교회 소속 만주 선교사가 이응찬, 백홍준, 김진기, 이성하, 서상륜 등의 평안도 의주 청년들과 함께 번역한 한글 최초의 신약전서이지요. 존 로스는 목사요, 선교사요, 성서번역가요, 학자로서 만주에서 선교 활동을 하던 중 조선에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야겠다는 일념으로 Corean Primer(1877)와 같은 우리말 회화책과 Korean Speech, with Grammar and Vocabu- lary. New Edition (Shanghai & Hongkong: Kelly & Walsh: Yokohama: Kelly & Co., 1882)와 같은 우리말 문법책을 펴내면서 성서번역을 진행하였습니다. 그 밖에도 존 로스 목사는 한국의 역사와 중국의 역사 또 중국문법 등 폭넓은 연구를 하고 책을 펴내면서 성서가 한국에 뿌리내리기 위해 노력하였던 영국 선교사였습니다. 특히 위에서 말한 Korean Speech 라는 한국문법책은 영어와 우리말로 된 문법책을 통틀어 최초의 한국어 문법책이라고 평가 받고 있는 책이지요.

 

5.1.1 제가 존 로스 목사의 저작을 확인해 보려고 뉴욕 유니온 신학교 도서관을 뒤져 보았더니 우리말 관계 문헌으로는 Corean Primer (1877)는 없고 Korean Speech(1882)만 찾아냈어요. 그런데 국내의 한글성서 연구가들에게는 Corean Primer만이 복사판으로 돌아다니며 알려져 있고 Korean Speech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 잠깐 이 책의 내용을 말씀드려야 할 것 같아요. 문 목사님의 토착화 얘기를 하다가 왜 이렇게 곁길로 나가느냐 하면 성서가 우리말로 번역되면서 비로소 기독교가 한국에 뿌리내리는 일이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5.1.2 모두 122쪽으로 되어 있는 Korean Speech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첫째는 한글 문법 부분(i-xx)입니다. 어학 선생이었던 이응찬의 영향으로 주로 의주 지방 사투리를 많이 담고 있긴 하지만 음운학적인 분석과 명사와 동사의 때 쓰임을 자세히 말하고 있습니다. 둘째 부분(1-73)은 한국의 말과 문화 등을 폭넓게 이해할 수 있도록 제 1 Speech로부터 시작하여 제 30 Soul까지 조목조목 나누어 놓았더군요 (1. Speech, 2. Kitchen, 3. Dining-room, 4. Visiting, 5. Bedroom, 6. Building, 7. Compound, 8. Domestic Animals, 9. Wild Animals, 10. Travel, 11. Inn, 12. Direction, 13. Exchange, 14. Merchandise, 15. Number, 16. Length, 17. Grain, 18. Vegetables, 19. Time, 20. Weather, 21. Body, 22. Sight, 23. Hearing, 24. Sickness, 25. Relations, 26. Crime, 27. Soldier, 28. Colour, 29. Moral, 30. Soul). 그리고 셋째 부분 (79-101)a (‘’)로부터 시작하여 your (‘너의’)까지 영어 알파벳순으로 1012개의 낱말과 구()를 우리말로 옮겨 놓았습니다. father아바니, 아부님으로, mother오마니, 어마니, son아달, daughter , 쌀아희, wife, 쳐권으로, husband가쟝, 짓아비, Just를 부사로는 , 이쟈로 동사로는 올타, old man늘근이, one한나, one by one, one day일하루, read일으다, 글본다, redeem, strong굿세다, swim헴한다, want달난다, 고쟈, 즐겨한다, 구한다, young, 쇼년으로 옮겨 놓았습니다. 1900년대 말의 표기법과 의주지방 사투리로 뜻을 옮겨 놓은 것이 아주 재미있지요. 국어학적으로 매우 소중한 자료가 아닐 수 없습니다.

 

5.1.3 좀 길지만 이 책의 둘째 부분 제29Moral (교훈) 항목을 그대로 인용해 보겠습니다.

 

사람이세샹에쳐여맛당이할일이부모를효봉며남사랑기를제몸갓치며가한쟈를구제며얼여온쟈를도와주며기우러진거슬붓들며불샹한쟈를어업비네기며허믈을알면반다시곳치고악한 거슬보면피고션한거슬들으면닛지말고의를사모기를긔갈갓치한즉금세예일이편안고후세여긴복을뉴릴거시 하나님이초에사람을여자긔의셩졍을안찰여지은고로이다하나님의죠화바요부모를불공며남을여제몸을니케며사람의빈궁한거슬죠이네기며슬퍼쟈를만면깁버며사나운마음발기를물마시듯고몹슬일기를밥먹듯며션한거슬미워고악한거슬사랑며불의엣일만고불냥한것만여텬셩을돌아보지안코자자지금세여도앙화를입고후세예무궁한형벌을바들거시이하나님의준바본셩을버리고귀의데자가되니맛츰지옥의고을면치못나니라

 

'Moral'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 과에는 동양의 효 사상과 기독교 신앙이 벌써 섞여 있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아마도 존 로스가 1880년에 번역하였다고 알려지고 있는 <訓兒眞言 (훈아진언)>(Peep of Day) 4종의 전도서와 교리서와 연관이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United Presbyterian Missionary Record, July 1, 1880, 278. 이덕주, “초기 한글성서 번역에 관한 연구,” 그리스도교와 겨레문화연구회 편, ?한글성서와 겨레문화?, 421쪽에서 거듭 인용). <예수셩교젼셔>와 마찬가지로 띄어 쓰기가 되어 있지 않고 19세기 말의 한글표기법에 따라 아래 아() 자가 많이 쓰이고 있으며 대두법 (擡頭法)이라 하여 경의를 나타내기 위하여 하느님 (하나님),’ ‘와 같은 낱말의 앞뒤를 비우는 표기법도 눈에 띕니다.

5.1.4 이렇게 길게 Korean Speech를 인용하는 이유는 존 로스 목사가 만주 선교사였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를 한국에 뿌리내리게 하기 위해 노력하였다는 것을 보여드리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초 작업으로 성서를 우리말로 옮기기 위해 한국 역사뿐만 아니라 한국말 회화책과 문법책을 영어로 저술하였다는 것을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의주 청년들과 함께 <예수셩교젼셔>를 번역해 내면서 본국으로 보낸 보고서에는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그러나 축자적(逐字的) 번역(Literal Rendering)보다는 의미와 조선식 관용어귀를 채택하는 경향이 강했다. 즉 조선어에서는 바늘에 귀()는 있어도 눈()은 없는 것과 같은 것이 예이다……. (United Presbyterian Missionary Record, July 1, 1882. 244. 이덕주, “초기 한글성서 번역에 관한 연구,” ?한글성서와 겨레문화?, 423쪽에서 거듭 인용.)

 

<예수셩교젼셔>의 번역 원칙으로 형식적 일치라는 원칙과 같은 축자적 번역보다는, “의미와 조선식 관용어귀를 채택하는 경향이 강했다는 위의 말처럼 신약성서의 원어인 코이네 희랍어를 부수어 한국말로 번역하려고 노력한 흔적을 우리는 읽을 수 있지요. 정말 <예수셩교젼셔> 누가복음 18:25에는 바늘귀에나가미부쟈하나님의나라에나아가것보담오히려쉽다라고 바늘눈이 아닌 바늘귀로 되어 있군요. 물론 평행본문인 마태 19:24와 마가 10:25에는 바늘구녕이라고 통일되어 있지 않기는 합니다. <예수셩교젼셔>는 이외에도 평안도 의주 지방의 사투리를 많이 사용하고 있긴 하지만 우리 토박이 말을 많이 쓰려고 노력하였다는 점이 높이 평가됩니다. 마가복음의 경우만 보더라도 욜단’(요단강, 1:5), ‘’(서기관, 1:22), ‘’(기도하시더니, 1:35), ‘어엿비네겨’(민망히 여기사, 1:41), ‘긴즉’(번역하면, 5:41), ‘이기여’(자기를 부인하고, 8:34), ‘’(기도하는 집, 11:17), ‘다시니’(부활, 12:18), ‘’(유월절, 14:10), ‘누룩금’(무교절, 12:1) 등이 그렇습니다 (민영진, ?국역성서연구?, 136-140). 이렇게 어휘면 뿐만 아니라 문장 구조 면에서도 <예수셩교젼셔>는 현대어의 문장구조나 문체와 거의 같다는 것이 <표준 새번역>(1993)의 문장위원으로 참여한 국어학자 박창해 교수의 연구결과입니다(“로스 <예수셩교젼셔>에 쓰인 한국어의 문법구조,” 그리스도교와 겨레문화연구회 편, ?한글성서와 겨레문화?, 121).

 

5.2.0 게일(Gale)과 이원모의 <신역신구약전서>

이와 비슷한 전통에 서서 성서를 우리말로 옮기면서 기독교의 토착화에 애쓴 한글성서로는 1925년에 나온 <신역신구약전서>(新譯新舊約全書, 기독교장문사 발행)가 있습니다. 다른 이름으로는 <게일역본>이라고도 합니다. 게일(J. S. Gale)이라는 미국장로교소속 선교사와 이원모가 함께 번역한 이 개인역본의 서문에는 번역 원칙에 대해서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본디는 한자와 당시의 표기법대로 아래 아 자가 많이 사용되고 또 띄어 쓰기도 없으나 읽기 쉽게 표기법을 고쳐보기로 합니다.

 

본 성경은 조선에 처음으로 있는 신역본(新譯本)이라. 대저 번역하는 일에 두 가지 원칙이 있으니 저작자의 본뜻을 분명히 아는 것이 그 하나이오. 그 본뜻을 가지고 각기 지방의 어풍(語風)과 문법을 따라가는 것이 그 둘이라. 본 성경을 번역할 때에 창세기로 묵시록까지 할 수 있는 대로는 조선어풍에 어기지 아니하기로 노력하였노라…….

 

형식적 일치내용의 동등성이라는 말은 사용하지 않았지만 성서번역에 두 원칙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성경 각 책 저자의 본디 뜻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본디 뜻을 잘 알고 난 뒤 각 언어의 어풍과 문법을 따라 옮기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첫째 원칙은 형식적 일치에 해당되는 것이고, 둘째 원칙은 내용의 동등성에 해당되는 것이지요. ‘짧게 줄인 풀이역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이 한글성서는 우리말 어법상 불필요한 요소는 과감하게 생략했다는 점입니다 (민영진, ?국역성서연구?, 150-153).

<개역> 성경과 비교해 보면 사실 <신역신구약전서><개역>의 모체라 해도 틀림이 없는 말입니다. <신역신구약전서>의 역자인 게일이 <개역> 번역위원회의 번역위원이었다가 번역 원칙 상 의견이 맞지 않아 번역위원회를 탈퇴하고 독자적으로 <신역신구약전서><개역>보다 13년 앞서 펴냈기 때문입니다. <개역><신역신구약전서>의 시편 139:1-4을 비교해 보겠습니다.

 

<신역신구약전서> (1925) <개역> (1938/1956)

여호와여 나를 鑑察시도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

하시고 아시나이다

나의 안고 서며 고 누음을 아심이여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思想行爲洞燭시도다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

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내가 하기 에 아심이여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

시니이다

 

<신역신구약전서>를 오늘날의 띄어 쓰기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짧은 것 말고도 말 자체가 <개역>과 비슷한 것 같지만 <개역>과는 달리 훨씬 우리말로 부드럽게 옮겨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국말이 아닌 히브리어 문장을 과감하게 분해하여 간결하고 읽기 쉬운 우리말 문장으로 번역하였다는 것입니다. 우리말에 잘 쓰지 않는 호격이나 주어를 과감히 생략한 것이 눈에 띄지요. 또 우리말 운율에 따라 막힘 없이 잘 읽히지 않습니까?

 

5.3.0 문익환 목사의 성서번역 이론

이렇게 <예수셩교젼셔><신역신구약전서>는 기독교가 한국에 뿌리박는 데 기초를 닦았습니다. 여기에 비해서 문 목사님의 <공동번역>은 기독교 토착화에 활짝 핀 꽃이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부터는 <공동번역> 성서의 번역 이론에 대해 말씀드리려 합니다.

5.3.1 문 목사님은 대한성서공회에서 <공동번역>의 구약번역 책임자로 작업하면서 미국성서공회의 번역실장 유진 나이다 박사의 번역 이론을 배우게 됩니다. ‘내용의 동등성이라는 나이다의 번역 이론은 그의 책 Toward a Science of Translating(1964)The Theory and Practice of Translation(1969), 그리고 From one Language to Another(1986)에 실려 있습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1987년 여름 홍콩 성서번역자 세미나에 참석하여 일주일간 나이다 박사의 번역 이론을 직접 배운 적이 있습니다. 그때에도 벌써 나이다 박사는 일흔이 넘은 나이였습니다. 하지만 어떠한 질문도 마다하지 않고 쉽고도 천천히 답변해 주는 그분의 성실성에 놀랐습니다.

5.3.2 나이다 박사는 희랍어 학자이기에 성서 희랍어가 영어와 만날 때 어떻게 할 것인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비해서 문 목사님은 나이다의 번역 이론으로 성서 히브리어가 한국어와 부딪칠 때 생기는 문제점을 히브리어에서 한국어로라는 글에서 파헤쳐 보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히브리어와 한국어를 맞부딪쳐 보고 싶어도 우리에게는 히브리어도 서구어에 가리워져 있다는 것입니다. ‘히브리 문법이나 사전도 다 서구어의 렌즈로 밖에는 볼 길이 없다는 거지요. 이유는 한국말로 된 히브리 문법책과 사전이 제대로 없기 때문이지요. 요즈음에는 우리말로 된 성서 히브리어 문법책이 몇 권 있긴 합니다. 하지만 외국 책을 번역하여 문법의 내용을 설명하는 정도이지 한국말 구문과 성서 히브리어 구문이 만날 때 생기는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면서 해결해 보려고 노력한 문법책은 한 권도 없는 실정입니다. 히브리어 사전의 경우도 20년이 지난 지금도 그 사정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제대로 된 문법책이나 사전없이 한 분야의 학문이 발전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히브리어의 카보드가 헬라어에서 독싸, 그것이 영어의 Glory를 거쳐 한자어 榮光이 될 때, 히브리어는 몇 번씩이나 빛의 굴절을 하다가 한국어의 대기권 속으로는 들어오지도 못하고 만다고 하신 문 목사님의 탄식을 우리 후학들은 귀담아 새겨 두어야 할 것입니다.

5.3.3 우선 문 목사님은 어떤 번역이기를 바라는가?”라는 소제목에서 한글성서는 한국민 전체가 읽을 수 있는 번역이어야 하고 한국인의 생각을 무리 없이 움직여 생의 궤도를 바꿀 수 있는 번역이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서 원문의 본 뜻에 가장 가까우면서도 극히 자연스런 우리말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문 목사님은 히브리어 구문과 한국어 구문을 서로 맞붙어 있는 두 개의 톱니바퀴에 비유하여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어의 톱니는 굵고 한국어의 톱니는 잘아서, 굵은 히브리어의 톱니를 번역에 그대로 남겨 두면, 그 번역은 한국인의 사고와 들어맞지 않아 겉돌고 만다. 그러므로 한국인의 사고, 한국인의 생과 문화와 역사를 돌리려면, 히브리어의 굵은 톱니를 분해해서 한국말의 톱니처럼 잘게 다시 구성해야 한다. (‘히브리어에서 한국어로’ 54.)

 

그리고 또 히브리성서의 시 부분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구약의 약 40%를 차지하는 시를 번역할 때는 실상 우리말로 시를 새로 쓰는 작업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재생(Re-production)이 아니라 재창조(Re- creation)일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러지 않고는 원문이 일으켰던 것과 가까운 반응을 일으킬 수 없는 데야 별 도리가 없지 않은가? (‘히브리어에서 한국어로’ 55.)

 

5.3.4 이렇게 히브리어를 부수어 한국말로 재구성하고 재창조하기 위해서는 명사, 동사, 형용사, 전치사 등과 같은 문법용어를 사용하기보다는 의미론적인 범주로 각 품사를 분류하여 객체어(object), 사건어(event), 추상어(abstract), 관계어(relation)로 보고 문장을 재구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Eugene A. Nida, The Theory and Practice of Translation 37-38). 나이다 박사는 이러한 생각을 변형문법이론에서 배웠다고 했어요. 이렇게 모든 낱말이 문장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가 하고 나누어 놓으면 자유롭게 문장을 분석을 할 수 있다는 것인데요. 이렇게 분석해서 얻은 가장 작은 문장을 핵문장(Kernel Sentence)이라고 합니다. 핵문장은 여러 가지로 꼴을 바꾸어 표현될 수 있지만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는 거지요. 동등상태형(Equational State Type)과 동작형(Action Type)이 그것입니다. (‘히브리어에서 한국어로’ 59쪽 주 3.)

 

XXXX이다.

XXXX하다.

 

은 동등상태형의 문장이고 는 동작형의 문장입니다. 예를 들어 이것은 나무다이 나무는 크다에 해당하는 문장이고, “나는 산다나는 그를 사랑한다에 해당하는 문장이라는 겁니다. “사람의 언어 활동이란 이 두 핵문장의 끝없는 변형이라고 문 목사님은 설명하고 있습니다.

5.3.5 이러한 문장론에 입각하여 히브리어의 낱말을 한국말에 맞부딪쳐 보는 것입니다. 객체어, 사건어, 추상어, 관계어라는 의미론 범주(Semantic Category)에 따라 핵문장으로 분석해 보는 거지요. 우선 객체어는 하늘, , 나무, , 사람 등 어떤 사건에 개입되는 사물이나 실물과 같이 있는 것을 가리킵니다. 사건어는 어떤 동작이나 과정이나 사건을 나타내는 범주입니다. “가다, 오다, 먹다, 죽다 같은 동사뿐 아니라 사랑, , , 지식, 구원, , 회개, 용서, 세례 같은 명사도 사건어로 본다고 문 목사님은 얘기하십니다. 동사는 사건어라는 것이 이해가 되지만 명사도 사건어가 된다는 것은 의외이지요. 하지만 사랑이라는 말을 예를 들어보더라도 사랑은 혼자 하는 게 아니지요. 품사로 분류하자면 명사이지만 누구를 사모하고 좋아하는 행위를 담고 있기에 사건어라는 겁니다. 추상어는 객체어나 사건어나 다른 추상어의 질, , 정도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크다, 작다, 곱다, 밉다, 빨리, 느리게와 같은 형용사와 부사뿐 아니라 아름다움, 귀여움, 고상, 저속, 정의, 불의 등 명사들도 포함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여기에다 이나 두 번,’ ‘많은, 자주, 여럿과 같은 부사나 양을 가리키는 말도 이 범주에 넣어야 하겠지요. 관계어는 서로 다른 두 개념을 연결하는 말로 와 같은 토씨나 접속사 그리고 우리말에는 없는 전치사가 이 범주에 들어갑니다. 그렇지만 와 같은 토씨나 전치사가 언제나 관계어로 분류되지는 않습니다. 때로는 사건어가 되기도 하지요. 위에서 인용한 창세기 16:12의 전치사 베트가 그 한 예입니다 (1.1 ‘형식적 일치번역을 보세요).

5.3.6 우선 문 목사님이 인용하신 잠언 17절을 가지고 설명해 보기로 합니다. <개역>형식적 일치의 원칙으로 번역된 성경이기에 <개역>의 각 구절이 어떻게 분해될 수 있는가를 살펴보겠습니다. 잠언 1:7<개역>에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성서 히브리어로는 이르아트 아도나이 레쉬트 다아트이지요. 이 문장은 명사문장입니다. 동사가 없기 때문이지요. 이르아트 아도나이는 야훼의 경외라는 뜻이고 다아트 레쉬트는 지식의 시작” (또는 앎의 시초, 처음”)입니다. 따라서 야훼의 경외는 지식의 시작입니다. 여기서 야훼는 객체어이고 경외지식은 사건어이고 시작은 추상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두 번 나오는 는 관계어입니다. <개역>은 앞 부분 여호와의 경외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라고 풀어서 새겼어요. 하지만 지식의 근본은 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번역어 선택에서도 지식근본이라는 말을 사용하여 문 목사님의 표현처럼 하나님을 공경하기만 하면 모든 것을 알게 된다고오해하게 만들었다는 것이지요. 이 구절에서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말은 근본이라는 말입니다. 히브리어 레쉬트를 풀이한 말인데요. 레쉬트란 말은 처음, 시작, 시초라는 뜻으로 어떤 사건이 일어나는 과정의 첫 번째 국면이나 단계 또는 요소’ (BDB 912a)를 가리킵니다. 이사야 46:10과 전도서 7:8에서는 일의 시작 (처음), 미가 1:13는 죄의 시작을, 잠언 17:14는 분쟁의 시작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어요. 시편 111:10은 위의 잠언과 비슷하게 지식이란 말만을 단지 지혜로 바꾸어 ‘(지혜의) 첫걸음으로 표현하고 있어요. 그래서 문 목사님은 이 시작이라는 추상어를 모름지기부터로 분해하여 사람은 모름지기 야훼 두려운 줄부터 알아야 한다고 읽으셨어요. “하늘 두려운 줄 알아야 한다는 우리 옛말과도 잘 어울리는 생각이라는 거지요. 그러니까 이렇게 읽기까지의 순서를 보면 다음과 같이 나누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야훼의 경외, 지식의 근본.

야훼의 경외는 지식의 시초이다.

야훼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첫걸음이다.

사람은 모름지기 야훼 두려운 줄부터 알아야 한다.

 

에서 로 넘어가는 과정에서는 근본이라는 추상어가 시초로 올바로 번역되었고 히브리어 문장에는 없는 동사와 토씨가 붙었습니다. 에서 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는 야훼의 경외에서 관계어인 가 분해되어 야훼를 경외하는 것이라는 문장이 되었지요. 에서 로 넘어가는 과정에서는 시초, 첫걸음이라는 추상어가 모름지기 부터로 분해되고 또 우리 옛말과 맞물린 것을 볼 수 있어요. 그런데 <공동번역>에는 야훼를 두려워하여 섬기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다라고 되어 있군요. ‘야훼의 경외야훼를 두려워하여 섬기는 것이라고 풀어 옮긴 것 말고는 그냥 단계에 머물러 있는 것을 알 수 있어요. 문 목사님이 <공동번역> 구약의 책임 번역자이셨지만 다른 번역자들과 토의하는 과정에서 가 너무 지나치다는 평을 받고 그냥 으로 번역하기로 결정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이렇게 한 개인의 생각이 공인번역’(公認飜譯)에는 모두 반영될 수는 없으니까요 (<공동번역>이나 <개역>같이 연합기관인 성서공회에서 펴낸 성경을 공인번역이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5.3.7 위에서도 보았습니다만 특별히 문 목사님은 라고 하는 우리말 토씨에 관심을 기울이셨습니다. 는 관계어가 되기도 하고 사건어도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시편 4:1에 나오는 나의 의 하느님” (엘로헤이 치드키)를 보기로 하지요. 그대로 읽으면 이 말은 의 하느님인지 나의 하느님인지 불분명하다는 거지요. 그리고 나의 속에 들어 있는 의 하느님속에 들어 있는 는 관계어인가 사건어인가를 위에 있는 대로 읽으면 잘 알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나의 ’(치드키)를 핵문장으로 고쳐서 읽으면 나는 의롭다. 곧 죄 없다가 되고 의 하느님하느님은 의롭다. 곧 공변되시다가 된다는 거지요. 그런데 여기서 는 추상어일 수도 있으나 시편 전체 문맥에서 볼 때 사건어라는 것입니다. 곧 원수들이 주장하듯이 그렇게 죄를 짓지 않았다는 말이고 아무에게도 꿀리지 않게 떳떳이 살았다는 뜻이지요. 이렇게 볼 때 는 나와 관계되는 말이지 하느님과 관계되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나의 의 하느님으로 읽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문 목사님은 사건어 가 들어 있는 이 구절을 이렇게 핵문장으로 나누어 봅니다.

 

나는 떳떳하게 살았다.”

하느님은 그것을 밝혀 주신다.”

 

이 두 핵문장을 자연스런 우리말로 여러 가지로 변형시키면,

 

나는 떳떳하게 살았습니다

하느님, 이것을 밝혀 주십시오.”

나는 죄가 없습니다.

이것을 알아 주실 이 하느님밖에 없습니다.”

나의 무죄를 알아 주시는 (밝혀 주실) 하느님.”

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정말 <공동번역>을 찾아보았더니 내 무죄함을 밝히시는 하느님이라고 되어 있더군요.

 

5.3.8 이러한 예는 또 있습니다. 히브리어로는 이라고 하는 전치사인데요. 의미론 범주에서는 역시 사건어라는 겁니다. 이 글의 앞 부분에서도 인용한 구절입니다만 창세기 2:23에 나오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는 구절도 마찬가지라는 거지요. 뼈 속에 있는 뼈나 살 속에 있는 살이 아니라 내 뼈에서 나온 뼈, 내 살에서 나온 살이라고 에서 나온으로 읽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야훼의 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야훼의 날은 야훼께서 나신 날도 아니오, 또 야훼께서 죽을 날도 아닌 야훼께서 거동하시는 날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만군의 여호와라는 말도 우리가 기도할 때 흔히 쓰는 말이지만 이것 역시 무슨 말인지 잘 알고 사용하는 사람은 드물다는 겁니다. 이 말도 대군을 거느리시는 야훼라고 거느리신다는 사건어로 바꾸어 읽어야 그 뜻이 제대로 전달된다고 했어요. 하늘의 하느님(에스라 1:2)하늘을 내신 하느님으로 땅의 하느님(이사야 54:5)땅을 내신 하느님으로 를 사건어로 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문 목사님은 이렇게 우리말 토씨 가 사건어로 쓰이는 예를 나열하셨습니다.

 

5.3.9 또 문 목사님은 , , 같이 히브리어에는 없는 토씨에도 관심을 기울이셨습니다. 특히 히브리어 문장에 자주 등장하는 명사문장을 우리말로는 어떠한 토씨를 붙여 읽느냐에 따라 뉘앙스가 미묘하게 바뀌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202절에 나오는 나 야훼 네 하느님을 문 목사님은 이렇게 나누어 보았습니다.

 

나는 야훼 너의 하느님이다.

내가 야훼 너의 하느님이다.

나 야훼는 너의 하느님이다.

나 야훼가 너의 하느님이다.

네 하느님은 나 야훼다.

네 하느님이 나 야훼다.

 

<개역>나는 ……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라고 과 같이 읽었어요. 다만 야훼 너의 하느님너의 하나님 여호와로 바꾸어 읽었군요. 그런데 2절에서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한 말로 미루어보아 이스라엘이 섬길 분은 야훼밖에 없다는 뜻으로 읽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로 읽어야 한다고 문 목사님은 제안하셨습니다. <공동번역>은 정말 너희 하느님은 나 야훼다로 되어 있군요. 단수인 를 집단을 가리키는 복수로 읽어 너희로 바꾸긴 했지만요.

5.4.0 이 밖에도 문 목사님은 히브리어의 명사가 한국말로 무조건 하나 하나 대응하여 번역할 수 없는 노릇이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어와 한국어 사이에는 뜻이 빈틈 없이 들어맞는 동의어(Equivalent)가 별로 없고 또 낱말 뜻이 지닌 폭(Semantic Domain)이 완전히 일치하는 낱말은 어떤 언어 사이에나 흔하지 않기 때문에 문맥에 따라 그 뜻을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말은 그저 사랑이라는 말로 여러 가지 종류의 사랑을 나타내지만 성서 히브리어는 아하바란 말로 남녀 간의 사랑’(아가 2:4, 5), 헤쎄드란 말로 계약을 바탕으로 한 미쁜 사랑’(신명기 7:9), 라하밈이란 말로 어미가 자식을 조건없이 주는 사랑’(이사야 63:7, 15), 하난이란 말로 가엾은 것은 그냥 보아 넘기지 못하는 사랑’(시편 37:21, 26; 112:5), 다아트라는 말로 남녀 간의 성애’(창세기 4:1)를 나타내는 점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라는 거죠. <개역>에서 흔히 로 번역된 ㅊㄷㅋ’ (קדצ)라는 말도 형용사로 쓰일 때 법정용어로는 공평무사한재판관이나 무죄선고를 받은 사람을 가리키기도 하고 착한 사람이나 어진 사람을 가리키기도 한다는 거지요.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다말에게 시아버지 유다는 그가 떳떳하게 행동했다는 뜻으로 그 애가 나보다 낫구나!”라고 말하였어요(창세기 38:26). 또 자손이 수도 없이 불어나리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무턱대고 믿는 아브라함을 하느님은 갸륵하게 여기시었다(창세기 15:6)고도 했어요. ‘ㅊㄷㅋ가 문맥에 따라 이렇게 다양하게 번역될 수 있는 가능성을 충분히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외에도 아들이라는 일차적인 뜻을 지니고 있는 벤이라는 말도 손자’(창세기 31:28, 43)도 되고 민족’ (출애굽기 1:7)도 되고 어떤 집단의 일원’ (열왕기상 20:35; 아모스 7:14)도 되고 ’(창세기 5:32)이라는 뜻으로 나이를 나타내는 등 다양한 뜻을 문맥에 따라 번역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십니다. 물론 여기에다 젊은이’(잠언 7:7)이나 짐승의 새끼’(레위기 22:28)죽일 놈’(사무엘상 26:16) 등과 같은 욕도 포함된다는 것을 덧붙여야 하겠지요.

 

5.5.0 마지막으로 <공동번역>의 평가는 이미 민영진 박사가 자세히 하셨기 때문에 여기서는 하지 않겠습니다. 민 박사님의 책인 국역성서연구168-179쪽에 실려 있는 공동번역 구약성서 번역특징과 그리스도교와 겨레문화연구회가 펴낸 한글성서와 겨레문화?(기독교문사, 1985)67-92쪽에 실려 있는 민 박사의 글 “<공동번역 구약> 재평가를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특히 민 박사님은 “<공동번역 구약> 재평가에서 <공동번역><개역>과 다른 점을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88).

 

<개역>에 비해 <공동번역>에서는 관용적 표현, 고유어, 현대어, 표준어, 능동태의 사용 등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독자들로 하여금 본문의 맥락을 능률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짧고 간결한 문장의 사용이라든가, 화법 안에서의 이야기 전환표시 활용 등은 문체상의 특징으로 지적할 수 있다. 이밖에도 자연스런 우리말 대응어 선택, 수식하는 단어와 수식되는 단어 사이의 명확한 관계 묘사, 번역어투를 없애려한 노력 등도 <공동번역>의 문체상의 특징을 이루고 있다.

 

5.5.1 <개역>이 사용한 하나님하느님으로 여호와야훼로 바꾸었다고 해서 <공동번역>은 그 동안 한국 개신교의 일부 교단에서 배척받았습니다. 하지만 한글사전에 나와 있듯이 하나님기독교인들만이 믿는 대상이 아닌 가톨릭 교인과 개신교인을 포함한 우리 한민족 모두의 하느님이라고 표준말을 사용했다는 점에서 <공동번역>을 높이 평가해야 할 것입니다. 사실 가톨릭 교인들은 200여 년 동안 사용하던 천주를 버리고 <공동번역>을 따라 하느님을 사용하고 있지요. <개역> 이전에 나온 한글성서에는 하느님하나님은 서로 혼용되어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에 신앙고백적인 요소가 덧붙여서 <개역>부터는 하나님으로 굳어졌습니다. 하지만 아들이 되고 가득이 되고 마음이 되고 오늘날이 된 것처럼 하느님이 되어야 올바른 우리말 표기법임에도 불구하고 일부 개신교인들은 하느님이란 표준어를 쓰면 과잉반응을 일으킵니다. 신라 향가인 서동요를 보면 선화공주(善化公主) [] []”라고 되어 있는데 이 가운데서 으로 뜻빌림 [訓借]했다는 겁니다. 따라서 가톨릭교회에서 오랫동안 사용해오던 천주’ (天主)() + () > > 하느님으로 재구성할 수 있다고 박찬욱 신부는 말합니다 (“한국어 신명 고 [韓國語 神名 攷]: 정서법에서 본 하느님’” ?한글성서와 겨레문화? 103). 이렇게 가톨릭교회와 개신교회가 서로 하나되기 위해 채택한 표준말 하느님이 한국의 개신교회에서 배척 당하는 것은 슬픈 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5.6.0 사실 성서번역학이라는 분야는 위에서도 보셨습니다만 매우 복잡한 또 하나의 학문 분야입니다. 성서 원어를 포함하여 성서에 대한 전반적이고도 해박한 지식이 있어야만 합니다. 예를 레위기에 나오는 여러 가지의 제사법을 다루고 있는 본문을 번역하려고 할 때는 등심, 안심 등 제물로 바치는 고기의 여러 부위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합니다. 또 우리 나라에는 없는 광물과 동물 그리고 식물의 이름을 어떻게 우리말로 잘 옮길 수 있느냐 하는 것도 큰 문제점이지요. 시편을 번역할 때는 시인이 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합니다. 우리말에 대한 뛰어난 언어감각이 있어야만 할 수 있는 분야입니다. 그뿐 만이 아닙니다. 성서를 예배시 낭독용으로 할 것이냐 그냥 개인의 읽기용으로 할 것이냐 결정하는 것은 정보 이론 (Communication Theory)에 해당하는 문제입니다. 이렇게 성서번역학은 성서학, 신학, 언어학, 정보이론학 등의 여러 학문이 한데 맞물려 있는 복잡한 분야이지요.

 

5.7.0 <공동번역>500여 판본을 자랑하는 우리 한글성서 번역사에 찬란한 금자탑을 쌓았습니다. 우리 나라 학자들만의 손으로 번역된 최초의 성경전서이기에 기독교가 한국에 뿌리내리는 일에 찬란한 꽃을 피웠기 때문입니다. 문 목사님과 함께 <공동번역>의 구약을 번역하셨던 선종완 신부님은 <공동번역>이 발행되기 일년 전에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선 신부님이 신명기 번역 독회를 하던 어느 날, “하느님이 이제야 한국말을 제대로 하시게 됐군. 하느님도 우리말을 제대로 하는데 이 백 년이 걸렸으니 우리말은 어지간히 어려운 말이군요하며 흡족해 하셨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문익환, “성서와 함께 하나 되는 길,” <성서와 함께> 106[19851] 9). <공동번역>은 이렇게 아름다운 우리말로 다듬어진 성경입니다.

 

 

6.0 마무리하는 말

 

문 목사님의 옥중서신인 목매는 강산 가슴에 수놓으며(사계절, 1994)185-189쪽에 실려 있는 동사가 많아야 우리말다워진다” (199257)한글로 쓰는 우리말”(199258)을 읽어보세요. 문 목사님께서 한글교육가 이오덕 선생에게 안동교도소에서 보낸 편지입니다. 교도소에 계시면서도 문 목사님은 <표준새번역> 성서의 각 교단 감수위원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시어 번역 원고를 읽으셨습니다. 저는 3년 전에 뉴욕에서 문 목사님의 부인이신 박용길 장로님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40여 년 만에 처음으로 하는 외국 나들이라고 하시면서 박 장로님은 안동교도소로 문 목사님에게 면회가실 때마다 매번 <표준새번역>의 번역 원고를 가지고 내려가셔서 문 목사님께 전해드리고 다 읽으신 원고를 받아와 다시 성서공회에 전달하신다고 말씀하시더군요. 아마도 이오덕 선생에게 보내는 편지도 이렇게 <표준 새번역>의 번역 원고를 읽으시다가 쓰신 편지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성서번역학에서 배운 다섯 개의 의미론 범주를 근간으로 해서 잘못된 우리말을 고쳐야 된다고 주장하고 계시는군요. ‘인생에의 길사람되는 길감옥으로부터의 사색같은 책 제목은 감옥에서 물결쳐 온 사색이나 감옥에서 들려온 목소리로 고쳐야 우리말다운 우리말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6.1 미리암의 노래라고 해서 성서에서 가장 오래된 시가 있습니다. 출애굽기 15:1-18입니다. 그 중에서 7절까지 문 목사님의히브리민중사(삼민, 1990)에서 인용해 보겠습니다 (38-39).

 

나는 야훼님을 찬양하련다

그지 없이 높으신 분

기마와 병거를 바다에 쳐넣으셨에라

……

야훼님은 용사

그 이름 야훼시어라

파라오의 병거와 군대를 바다에 처넣으시니

빼어난 장교들이 갈대바다에 잠겼구나

……

야훼님이여, 당신의 오른손은 힘차 영광스럽습니다

당신의 오른손이 원수를 짓부수었습니다

무서운 힘으로 당신은 적들을 꺾으셨습니다

불타는 분노로 원수를 검불처럼 살라 버리셨습니다.

 

6.2 <공동번역>을 약간 고친 것입니다. 이처럼 문 목사님은 고대 이스라엘의 언어인 히브리어를 한국 사람이 오늘날 읽을 때 그 내용과 감동이 그대로 전해지도록 하기 위해 애쓰셨습니다. 성서가 아름다운 우리말로 뿌리내리는 일에 <예수셩교젼셔>(1887)가 기초를 놓고 <신역신구약전서>(1925)가 그 전통을 이었다면, <공동번역>(1977)은 그 꽃을 피웠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공동번역>처럼 번역투가 아닌 아름다운 우리말로 번역된 성서는 우리 한글성서 번역사에서 처음 있는 일입니다. 마치 한글이 모국어인 우리 나라 사람이 지은 창작품처럼 이질감없이 읽히는 책이 바로 <공동번역>입니다. 이렇게 문 목사님은 <공동번역>을 통하여 성서의 토착화를 꽃피우게 하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문 목사님 자신이 시편을 번역하다가 시인이 되셨다고 말하실 정도로 그분은 우리말을 너무나도 사랑하신 분입니다. 히브리어가 한국말과 만날 때 부셔져야 하는 건 한국말이 아니라 히브리어라고 말하신 분이 문 목사님이십니다.

 

6.3 통일운동가요, 시인이요, 성서학자요, 교수로 알려져 있는 문 목사님의 성서번역 세계가 어떠했으리라는 것은 위의 글을 통해서 조금이나마 짐작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이렇게 해서 나온 <공동번역>을 북부 조국에서 대본으로 사용하여 조선기독교도연맹 중앙위원회의 이름으로 성경을 펴냈다는 겁니다. 이것을 민영진 박사는 <공동번역성서 평양교정본>이라고 부릅니다(“북한성서: <공동번역성서> 평양교정본,” ?그리스도교와 겨레문화?. 그리스도교와 겨레문화연구회 논문 제3(기독교문사, 1991, 174-199). 1983년에 신약이 그리고 이듬해인 1984년에 구약이 나왔는데요, 그 뒤에 <성경전서>라는 이름으로 구약과 신약을 합쳐서 발행했습니다. 평양 봉수교회의 담임목사이신 이성봉 목사님의 말로는 이 목사님 자신을 포함한 8명의 번역 일꾼들이 이 작업에 참여했다고 합니다. 19915월 말 뉴욕 스토니 포인트(Stony Point) 수양관에서 있었던 북미기독학자대회에서 이 목사님한테 직접 들은 얘기입니다. 민 박사님의 분석에 의하면 이 북한성서는 <공동번역>을 대본으로 하여, 자신들이 고쳐야 한다고 판단되는 곳은 구약은 <개역>, 신약은 <새번역 신약전서>(1967)를 참조하여 고쳤다는 것입니다. “북한의 맞춤법에 맞게 고쳐진 것을 제외하고는 남한의 독자들에게 특별히 거부반응을 일으킬 만한 그런 어휘나 용어가 없다고 민 박사님은 결론을 맺으셨습니다 (‘북한성서’ 198).

 

6.4 이렇게 볼 때 문익환 목사님이 구약번역 책임자로 작업하신 <공동번역> 성서는 통일맞이에 초석을 놓은 작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남부 조국의 성서 토착화만이 아니라 북부 조국의 성서 토착화에도 기여하시고 나아가 통일 이후 합쳐진 기독교인들의 대화 통로도 이미 마련해 놓은 셈입니다. 늦봄 문익환 목사님은 이렇게 성서번역을 통하여 그렇게도 목매어 외치셨던 통일맞이 운동을 오래 전부터 시작하신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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