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풀이

요한복음 5:1-5 베드자다(베데스다)

心貧者 2018. 9. 9. 14:36


베드자다(베데스다)

요한복음 5:1-5 2018/09/09 성령강림 후 16

5:1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5:2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5:3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5:4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5:5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하나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모두에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신다면 어느 계절에 오실까?

예수님이 오신다면 제일 먼저 어디를 찾아 가셨을까?

그리고 거기서 누구를 만나셨을까?

시적인 상상력을 한번 펼쳐보시기 바랍니다.

 

서울의 예수를 노래 한 시인 정호승은 이렇게 상상해 보았습니다.

사족입니다.

이 시에 사용된 표현들이 시인의 상상력인 만큼 여기 사용된 표현들을 교리의 잣대 보다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들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1() 예수가 낚시 대를 드리우고 한강에 앉아있다 강변에 모닥불을

피워 놓고 예수가 젖은 옷을 말리고 있다 들풀들이 날마다

인간의 칼에 찔려 쓰러지고 풀의 꽃과 같은 인간의 꽃 한 송이

피었다 지는데, 인간이 아름다워지는 것을 보기 위하여, 예수가

겨울비에 젖으며 서대문 구치소 담벼락에 기대어 울고 있다

 

2() 술 취한 저녁 지평선 너머로 예수의 긴 그림자가 넘어간다.

인생의 찬밥 한 그릇 얻어먹은 예수의 등 뒤로 재빨리 초승달

하나 떠오른다. 고통 속에 넘치는 평화, 눈물 속에 그리운 자유가 

있었을까 서울의 빵과 사랑과, 서울의 빵과 눈물을 생각하며

예수가 홀로 담배를 피운다. 사랑의 이슬로 사라지는 사람을 보며

사람들이 모래를 씹으며 잠드는 밤 낙엽들을 떠나기 위하여 

서울에 잠시 머물고, 예수는 절망의 끝으로 걸어간다.

 

3() 목이 마르다 서울이 잠들기 전에 인간의 꿈이 먼저 잠들어

목이 마르다 등불을 들고 걷는 자는 어디 있느냐 서울의 등 길은

보이지 않고, 밤마다 잿더미에 주저앉아서 겉옷만 찢으며 우는 자여

총소리가 들리고 눈이 내리더니, 사랑과 믿음의 깊이 사이로 첫눈이 

내리더니, 서울에서 잡힌 돌 하나, 그 어디 던질 데가 없도다  

그리운 사람 다시 그리운 그대들은 나와 함께 술잔을 들라  

눈 내리는 서울의 밤하늘 어디에도 내 잠시 머리 둘 곳이 없나니,

그대들은 나와 함께 술잔을 들고 어둠속으로 이 세상 칼끝을 

피해 가다가, 가슴으로 칼끝에 쓰러진 그대들은 눈 그친 서울 밤의

눈길을 걸어가라  아직 악인의 등불은 꺼지지 않고, 서울의 새벽에 

귀를 기울이는 고요한 인간의 귀는 풀잎에 젖어 목이 마르다 

인간이 잠들기 전에 서울의 꿈이 먼저 잠이 들어 아, 목이 마르다

 

4() 사람의 잔을 마시고 싶다.  추억이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 소주잔을

나누며 눈물의 빈대떡을 나눠 먹고 싶다  꽃잎 하나 칼처럼 떨어지는

봄날에 풀잎을 스치는 사람의 옷자락 소리를 들으며, 마음의 나라보다

사람의 나라에 살고 싶다  새벽마다 사람의 등불이 꺼지지 않도록 

서울의 등잔에 홀로 불을 켜고 가난한 사람의 창에 기대어 서울의

그리움을 그리워하고 싶다

 

5() 나를 섬기는 자는 슬프고, 나를 슬퍼하는 자는 슬프다

나를 위하여 기뻐하는 자는 슬프고, 나를 위하여 슬퍼하는 자는

더욱 슬프다. 나는 내 이웃을 위하여 괴로워하지 않았고,

가난한 자의 별들을 바라보지 않았나니, 내 이름을 간절히 부르는

자들은 불행하고, 내 이름을 간절히 사랑하는 자들은 더욱 불행하다

 

오늘 본문으로 돌아옵니다.

유대인의 명절 때였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자마자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이 있었습니다.

어디입니까?

양문 곁에 있는 베드자다 베데스다 연못을 찾아갑니다.

베데스다, 자비/인애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금으로 치장한 장엄하고 거룩한 성전이 아니라 양문 곁에 있는 작은 연못, 온갖 병자들로 가득한 베데스다를 제일 먼저 찾아 갑니다.

 

요한복음 5장입니다.

5:1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5:2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5:3 그 안에 많은 병자,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이 누워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5:4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베데스다 못, 거기서 누구를 만납니까?

삼십 팔년 된 병자를 만납니다.

많은 병자 중 오직 한 사람 38년 된 병자를 만납니다.

아주 의도적이지요.

5:5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삼십 팔년.

도무지 상상하기 어려운 시간이지요.

 

제가 폐병에 걸려 1년간 골방에서 지난 적이 있었습니다.

공기로도 접촉되는 병이 폐병이라 학교도 다니지 못하고 1년간 격리 아니 격리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지리 한 1년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자리보전하고 삼십 팔년을 보냈다고 하니 감히 상상하기 어렵지요.

우리가 성경을 통해 알 수 있는 정보는 여기까지입니다.

어떤 병에 시달렸는지?

어떤 치료를 받았었는지?

가족은 있었는지?

경제적 여력은 어떠한지?

긴병에 효자 없다는 말처럼 혹 가족들이 버린 것은 아닌지?

그 어떠한 정보도 성경은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요한복음을 기록한 사도 요한은 이 이야기 속에서 두 가지 사실을 강조합니다.

하나는 예수님이 명절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자마자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이 베데스다 연못이다.

둘째, 그리고 그곳에서 예수님의 마음을 제일 먼저 사로잡은 사람이 바로 삼십 팔년 된 병자 한 사람이다.

이 두 가지 정보입니다.

 

도대체 사도 요한 이 사건을 통해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자 한 것일까요?

하나님의 자비는 베데스다를 통해서가 아니라 예수님 자신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입니다.

 

베데스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자비의 집이 됩니다.

하지만 삼십 팔년 된 병자에게 있어서 베데스다는 그 이름의 뜻과 달리 어떠한 자비도 얻을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자비는커녕 기회마저도 주어지지 않는 냉혹한 현실이었습니다.

 

베데스다의 냉혹한 현실.

38년 된 병자는 이렇게 고발합니다.

먼저 예수님이 묻습니다.

5:6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하지만 38년 병자 된 병자는 자신의 처지와 베데스다의 냉혹한 현실을 이렇게 고발합니다.

5:7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무슨 말입니까?

38년 동안 단 한번 도 당신 먼저라고 자신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냉혹한 현실이지만 경쟁에서 살아남는 자, 오직 1등만이 고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름만 베데스다, 자비의 집이지

실상은 경쟁이 지배하고 승자독식만 살아남는 무자비의 현장이 바로 이곳이었다는 것입니다.

1등만 기억하는 사회이지요.

 

하지만 하나님 아들이자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은 이 질서를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인간의 탐욕으로 망가진 베데스다 연못의 무자비한 현실을 바라만 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38년 된 병자에게 주님은 선포하듯이 외칩니다.

5:8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이것이 38년 동안 원망과 절망에 사로잡혔던 병자에게 임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었습니다.

일어나라

그리고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말씀을 마칩니다.

베데스다, 자비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어떻습니까?

그 자비의 주인공은 항상 내가 아니었습니다.

1등만이, 잘난 사람만이, 가진 사람만이, 배운 사람만이, 힘 있는 사람만이 자비의 주인공이었습니다.

그렇게 세월만 흘렀고 세월만큼 세상을 향한 원망과 함께 결국에는 그 원망의 끝이 하나님에게까지 이르렀습니다.

하나님, 언제까지입니까?’

 

그 때입니다.

그 때 우리 주님이 찾아와 말씀하십니다.

낫기를 원하느냐?

그러면 일어나라 그리고 걸어가라

원망의 자리 절망의 자비 38년을 떨쳐 버리고

하나님의 자비 앞에 다시 일어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비 앞으로 다시 걸어가는 것입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