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풀이

요한일서 4:19-21 그 형제를 사랑하라

心貧者 2018. 9. 4. 15:22


그 형제를 사랑하라

요한일서 4:19-21 2018/09/02 성령강림 후 15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21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하나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모두에게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여러분과 함께 나눌 찬양이 있어, 함께 부르고 말씀을 시작할까 합니다.

 

수도자 공동체인 프랑스 떼제(Taizé)가 지난 8 8일부터 12일까지 1888년완공 된 홍콩 대성당에서 떼제 젊은이 국제모임을 가졌습니다.

홍콩 대성당(동남아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 명동성당보다 10년 앞섬)

홍콩에 가면 반드시 들리는 명소 중에 한곳입니다.

그곳에서 떼제 국제 모임을 가졌습니다.

46개 나라 2500 명의 청년이 참석한 대규모 기도회였습니다.

 

그 때 46개 나라 2500 명의 청년들이 불렀던 한국어 찬양이 오늘 우리가 부를 찬양 주님을 찬양하라입니다.

어떤 찬양인지 피아노 음으로 먼저 들어보고, 함께 불러보도록 하겠습니다.

 

 

 

 

종교마다 그 종교의 핵심을 나타내는 상징이 있습니다.

불교는 만()자 형태를 상징으로 사용합니다.

시작도 끝도 없이, 온 누리에 비치는 부처님의 신령한 빛을 상징합니다.

한 마디로 대자대비이지요.

 

좀 생소하게 들리겠지만 십자가 모양만자도 있습니다.

산스크리스트어로 스바스티카라고 하는데, 경주 불국사에서 발견된 돌 십자가가 그 대표적인 예로 추정됩니다.

 

반면 원불교동그라미 형태를 상징으로 사용합니다.

일원상’(image of one origin)이라고 불리는데, 모든 진리가 하나의 원리에서 시작되었고, 하나의 진리로 귀결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반면 유대교여섯 뿔이 달린 별을 상징으로 사용합니다.

우리가 보통 사용하고 있는 별은 다섯 뿔의 형태입니다.

하지만 유대교는 여섯 뿔이 달린 별의 형태를 상징으로 사용합니다.

전승(tradition)에 따르면, 다윗이 이 별의 모양을 자신이 세운 왕국의 문장으로 처음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별의 모양을 다윗의 별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실은 세모 모양 형태로 된 다윗의 방패를 서로 엇갈리게 한 모습입니다.

다윗의 별이 아니라 다윗의 방패이지요.

다윗의 방패가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의미하지요.

이것이 현재 이스라엘의 국기가 됩니다.

 

반면 이슬람교초승달을 상징으로 사용합니다.

전승에 따르면, 이슬람을 창시한 모하메드가 알라(야훼)로부터 계시를 받을 때가 초승달 뜨는 밤이었다고 합니다.

처음 뜨는 달이 초승달인데 진리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모든 종교 중에 이슬람교가 참된 진리의 시작이라는 뜻입니다.

 

이제 남은 것은 그리스도교입니다.

그리스도교의 상징 무엇입니까?

십자가입니다.

 

십자가.

상징 치고는 좀 자극적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당시 십자가는 가장 포악하고 가장 잔인한 사형 형틀이었기 때문입니다.

로마가 택한 공포정치의 산물이 바로 십자가 처형입니다.

그런데 그 흉측 한 물건이 훗날 그리스도교의 상징이 됩니다.

그리고 훗날 그리스도인들은 그 상징에 새로운 해석을 부여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기초로 해서 새롭게 해석을 부여합니다.

 

첫째, 하늘과 땅을 잇는 세로대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둘째 막대기인 옆으로 뻗어 있는 가로대에서는 교회()와 이웃()의 관계를 보았습니다.

 

이처럼 세로로 세워진 막대기에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그리고 옆으로 뻗어 있는 가로대의 막대기에서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훗날 그리스도인들은 그 의미를 새롭게 부여한 것입니다.

십계명의 완성이자 모든 계명의 완성을 십자가 형태에 새롭게 부여한 것입니다.

바로 완전한 사랑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으로 돌아옵니다.

 

왜 그리스도교의 상징이 십자가일 수밖에 없는가?

십계명의 완성이자 모든 계명의 완성이 왜 십자가 속에 녹아져 있는가?

십자가는 왜 하나님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이루어 졌는가?

그 이유를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419절에서 이렇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19 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새 번역 성경으로 다시 읽어드립니다.

4:19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다.’

여기서 십자가의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요?

요일4: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그가 우리 죄를 속하는 화목제물이 되심으로 십자가의 역사 구원의 역사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이웃을 향한 사랑의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화목제물이 되신 그리스도입니다.

 

찬송가 902절입니다.

(2) 내 친구 되신 예수님 날 구원하시려고

그 귀한 몸을 버리사 내 죄를 대속했네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다.’라는 증거가 바로 여기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친히 희생제물이 되셨던 바로 십자가의 역사입니다.

그 귀하신 몸으로 친히 감당하셨던 십자가이지요.

그래서 주님을 따르는 교회는 십자가의 길을 회피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살펴봅니다.

 

나 주님을 늘 믿으며 그 손을 의지하고

내 몸과 맘을 바쳐서 끝까지 충성하리

 

물론 여기서 말하는 충성은 교회와 교회 지도자의 권위에 복종하는 것을 일부 담고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충성에 원 뜻은 이런 것입니다.

 

첫째, 하늘과 땅을 잇는 세로대의 막힌 담, 그 담은 헐어버린 이에 대한 충성입니다.

바로 화목제물이 되셨던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에 대한 충성입니다.

 

둘째, 나와 너를 잇는 세로대의 막힌 담, 그 담을 허는 일에 대한 충성을 의미합니다.

평화의 사도, 평화의 도구가 되는 것이지요.

 

문제는 어떻게 해야 하늘과 땅을 잇는 세로대의 막힌 담과 나와 너를 잇는 세로대의 막힌 담을 헐 수 있는가?’ 입니다.

사도 요한은 그 모든 것의 시작점은 형제 사랑에 두고 있습니다.

항상 남을 먼저 배려하고, 남을 먼저 섬기며, 남과 함께 나누는 형제 사랑입니다.

 

마치 이런 것과 같습니다.

밥을 짓고 밥을 풀 때 제 밥그릇 먼저 챙기는 부모, 그런 사람 보셨습니까?

아무리 악해도 그런 부모 그런 사람은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밥그릇을 푸는 것처럼 언제나 형제 사랑, 남이 먼저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이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제가 오늘 여러분과 나누고자 하는 모든 말씀의 핵심이 바로 여기에 담겨져 있습니다.

적어도 이 말씀이 우리 안에 울림, 깨달음으로 다가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 적어도 이 말씀이 우리의 부끄러움을 일깨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끄러움입니다.

 

20-21절을 새 번역으로 다시 읽어드립니다.

4:20 누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 형제자매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보이는 자기 형제자매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4:21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자매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계명을 주님에게서 받았습니다.

 

이 말씀 앞에서 부끄러워 어쩔 줄 모르는 우리의 모습이 발견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신앙의 현주소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간다고’...

하지만 정작 그 증거를 우리가 보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처럼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처럼 그의 아들을 드림으로 증거를 보여야하는데 우리가 보이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항상 자기 먼저, 제 자식, 제 식구 먼저이지요.

 

설교를 준비하면서 이런 상상을 해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처럼 당신의 아들을 아주 끔찍하게 여겼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대속의 은총, 대속의 사랑은 없었을 것입니다.

아주 끔직한 일이지요.

 

예수님이 누구십니까?

하나님을 다정하게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신 유일한 분입니다.

뿐만 아니라 죽음을 앞두고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절규하셨던 분입니다.

 

그런데 그런 아들을 그의 아버지인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습니까?

다시 요한일서 410절입니다.

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그만큼 우리를 끔찍하게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의 말씀인 완전한 계명 즉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지킬 수 없다면 충성할 수 없다면 우리의 믿음 우리의 고백 우리의 삶은 거짓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 요한이 오늘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입니다.

다시 요한일서 420절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이 말씀이 적어도 우리 안에 울림으로 다가와서 잠든 양심을 깨울 수 있는 부끄러움으로 다가왔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몸의 중심은 어디일까?

머리 가슴 배

아닙니다.

아픈 곳이 몸의 중심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교회의 중심은?

목회자 평시도 지도자

아닙니다.

아픈 성도입니다.

지금 심음하고 있는 자가 우리 교회의 중심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다

그것도 아무 대가 없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다

인정이 되십니까?

좋습니다.

그렇다면, 인정이 된다면, 정말 그것이 우리 안에 진정한 믿음으로 자리 잡고 있다면, 과연 우리의 삶은 어떠한 변화를 기대할 수 있을까요?

과연 우리 교회는 어떠한 모습을 하고 있을까요?

 

세 가지 권면을 드리겠습니다.

첫째, 남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담이 없는 사람이 되십시오.

둘째,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공감의 사람이 되십시오.

셋째, 기도할 때 마다 어려움을 당한 이의 얼굴과 형편이 먼저 떠오르는 은혜의 사람이 되십시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십자가에서 참된 사랑을 드러내신 하나님 주님,형제를 향한 걸어 잠근 마음의 문을 열게 하시고,

팔짱 낀 팔을 펴게 하시며,움켜 쥔 손을 펴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