족쇄와 사슬
시편 2:1-12 2018/06/17 성령강림 후 4주2:1 어찌하여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
2:2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며
2:3 우리가 그들의 맨 것을 끊고 그의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는도다
2:4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
2:5 그 때에 분을 발하며 진노하사 그들을 놀라게 하여 이르시기를
2:6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2:7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2:8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2:9 네가 철장으로 그들을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2:10 그런즉 군왕들아 너희는 지혜를 얻으며 세상의 재판관들아 너희는 교훈을 받을지어다
2:11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
2:12 그의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의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
하나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모두에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 여러분과 나눌 말씀은 시편 2편입니다.
시편 2편, 거의 주목하지 않은 시입니다.
하지만 시편 1편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시편 2편입니다.
왜 그럴까?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시편 전체의 주제이자 그에 따른 서론이 시편 1편과 시편 2편에 오롯이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편 1편이 ‘복 있는 사람은’이라는 구절로 시작해서, 시편 2편은 ‘다 복이 있도다.’라는 구절로 끝을 맺고 있는 것입니다.
시편 1편의 문학적이고 구조적인 특징이 있다면, 대조법입니다.
의인과 악인의 대조입니다.
의인의 길과 악인의 길을 대조함으로 누가 진짜 복 있는 사람인가를 시편의 청자나 독자에게 묻고 있는 것입니다.
우선 의인의 길입니다.
시인은 세 가지로 정리합니다.
첫째,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는 사람
둘째,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않은 사람
셋째,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주어지는 축복의 열매가 있습니다.
바로 안 되는 일이 없는 형통의 축복입니다.
시1: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하는 일마다 잘되는 형통의 축복입니다.
그래서 새 번역 성경은 이 부분을 이렇게 번역해 놓았습니다.
‘하는 일마다 잘 될 것이다.’
형통함의 축복이지요.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의인의 길을 걷는, 복 있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반면 악인은 누구입니까?
악인의 길, 역시 세 사지로 설명합니다.
첫째, 악인들의 꾀를 따르는 사람
둘째, 죄인들의 길에 서는 사람
셋째,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는 사람입니다.
문제는 이런 이들을 하나님이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옳고 그름을 따지는 심판의 날이 그들에게 준비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심판이 준비되었을까요?
시인은 역시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 쭉정이로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애쓰고 수고는 하겠지만 결국 거둘 것이 없는 인생으로 만드시겠다는 것입니다.
아주 무서운 심판이지요.
1:4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쭉정이)와 같도다
둘째, 의인들의 모임 즉 천국에 들어갈 수 없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 역시 아주 무서운 심판입니다.
1:5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셋째 심판은 멸망입니다.
1:6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멸망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의인에게 주어지는 행복을 멀리서 찾지 마십시오.
특히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특권, 형통의 축복을 멀리서 찾지 마십시오.
주님의 말씀,
먼저 그 말씀을 올바르고 곧게 경청하십시오.
그리고 그렇게 해서 주어진 은총의 믿음을 가지고 믿음 그대로 행하십시오.
믿음만 보관하고 간직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은총의 선물인 믿음, 그 믿음을 행함으로 살아있고 운동력 있는 그리스도인의 권능으로 만드십시오.
깨달은 것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옳다’라는 믿음을 가지고 반드시 행하십시오.
그러면 의인에게 주어지는 축복 곧 형통함이 가득한 행복이 우리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행복한 그리스도인
이것이 우리 주님이 이 땅에 육신의 몸을 입고, 마지막 날에 십자가를 지시며, 삼일 만에 죄와 사망을 이기고 부활하신 이유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시편 2편은 시편 1편의 내용을 좀 더 깊이 들어갑니다.
누가 행복한 그리스도인인가?
누가 복 있는 사람인가?
누가 마지 막 날에 ‘다 복이 있도다.’라고 선포할 수 있는가?
2장 12절입니다.
그의 아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이겠지요.
그리스도에게 입 맞추는 사람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께 피하는 모든 사람입니다.
2:12 그의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의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
그래서 하나님이 다윗을 축복하시고 이 땅에서 전무후무하게 가장 복 있는 사람으로 우뚝 세우신 것입니다.
바로 이 고백 때문입니다.
시편 3편입니다.
3:1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으니이다
3:2 많은 사람이 나를 대적하여 말하기를 그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 하나이다 (셀라)
3:3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
3:4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의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 (셀라)
3:5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3:6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
3:7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
3:8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그러니 하나님의 구원하심, 곧 하나님의 개입과 역사하심을 족쇄와 사슬로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자처럼 하나님의 개입을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족쇄와 사슬로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앞부분을 보면 눈에 띄는 단어 하나가 나옵니다.
바로 ‘어찌하여’라는 부정을 뜻하는 의문 부사입니다.
우리 성경에는 ‘어찌하여’가 한번만 나오지만 헬라어 원문과 새 번역을 보면 ‘어찌하여’가 반복해서 나옵니다.
2:1 어찌하여 뭇 나라가 술렁거리며, 어찌하여 뭇 민족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
2:2 어찌하여 세상의 임금들이 전선을 펼치고, 어찌하여 통치자들이 음모를 함께 꾸며 주님을 거역하고, 주님과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이를 거역하면서 이르기를
2:3 "이 족쇄를 벗어 던지자. 이 사슬을 끊어 버리자" 하는가?
이 짧은 구절 속에서 ‘어찌하여’라는 부사가 무려 네 번이나 반복해서 나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그렇게 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것을 시인은 강조하고 싶은 것입니다.
시편 2편의 상황은 이런 것입니다.
한 나라의 백성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나라가 연약해서 이웃 강대국에게 침략과 지배를 받게 되지요.
정말 말로 다할 수 없는 비참한 세월을 보내게 됩니다.
그러다가 드디어 이웃 강대국보다 더 강한 임금(메시야)이 나타나서 그의 자비로 해방과 자유를 맞게 됩니다.
그때, 자비를 베푼 더 강한 임금에게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시인은 묻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세상의 군왕으로부터 구원한 임금은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 하나님이지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
그 말씀과 계명을 족쇄와 사슬로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찌하여’라는 부사가 무려 네 번이나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원의 은총, 자유의 은총, 자비의 은총을 입었다면, ‘그렇게 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 참 독하고 어리석지요.
그래서 생긴 말이 있습니다.
여측이심(如廁二心) 즉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 마음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의 은총, 자유의 은총, 자비의 은총을 입고도 어리석은 짓과 어리석은 선택을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를 구원하고 생명으로 이끌 하나님의 계명을 족쇄와 사슬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일종의 고발입니다.
요즈음 하나님의 말씀, 특히 십계명을 족쇄와 사슬로 여기는 이들이 부쩍 늘었습니다.
아마도 지나친 율법주의, 문자주의에 빠진 그릇된 해석에서 나온 반감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원칙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특히 십계명을 족쇄와 사슬로 여겨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마르틴 루터가 쓴 교리 문답서가 있습니다.
‘대교리문답’인데 거기에 보면, 그리스도교 교리의 필수 항목을 세 가지로 정리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십계명
둘째, 우리 신앙의 주요항목인 사도신경
그리고 셋째, 그리스도께서 가르쳐주신 기도, 주기도입니다.
이것을 설명하면서 마르틴 루터가 한 말입니다.(p44)
이상 세 항목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러니 조건 달지 말고 단어 하나하나를 공을 들여 베워야합니다.
어른들은 아이들이 매일 아침 일어나서 식사 때 자리에 누울 때마다 암송하는 습관을 들 일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합니다. 암송할 때까지 밥도 주지 말고 마실 것도 주지 마십시오.(중간 생략)
어떤 교인이 아주 무식하고 야만적인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배우려 하지 않는다면 절대로 참지 마십시오. 이 세 항목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 전체를 아주 짧고 이해하기 쉬운 방법으로 요약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십계명에 매인 삶, 사도 신경에 매인 삶 그리고 주기도의 매인 삶을 불편해 하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이자 하늘의 은총을 입는 축복의 길임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둘째, 예배 시간을 족쇄와 사슬로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어떻습니까?
예배드리는 것을 족쇄와 사슬로 여기는 이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금요기도회, 수요기도회, 새벽기도회, 속회 그리고 오후예배까지 점점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그 이유 중에 하나가 ‘모이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현대인의 타임 스케줄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물론 그럴 수 있습니다.
또 너무 많은 예배로 인한 피로감을 느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 형식적이고 무미건조한 예배에 대한 거부감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정한 분명한 원칙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느 시대든지 예배 자를 찾으신다는 것입니다.
예배 자입니다.
어떤 예배 자인가?
바울의 설명입니다.
롬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셋째, 목사의 설교와 권면을 족쇄와 사슬로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제 아파도 목사를 찾지 않습니다.
문제가 생겨도 목사에게 가르침을 받으려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생활 개입을 염려하고, 목회자의 관심을 귀찮게 여깁니다.
하지만 꼭 명심하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목사의 설교와 권면을 족쇄와 사슬로 여기지 마십시오.
특히 그 말씀과 권면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말씀과 진리의 권면이면 더욱 그러십시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 20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새)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시켜서 여러분에게 권고하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리하여 간청합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의 사절(사신 대사)이 되어 전하는 설교와 권면을 족쇄와 사슬로 여기지 마십시오. 그래야 복을 받습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 시인은 하늘의 뜻을 거역하고, 자기들 좋은 대로 처신하는 이들을 보며 하나님은 비웃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2:4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
뿐만 아니라 5절에서 그들에게 분을 발하며 진노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하나님으로부터 비웃음을 사는, 분노와 진노를 사는 인생이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첫째, 하나님의 개입과 역사하심을 족쇄와 사슬로 여기지 마십시오 그리고 둘째, 12절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에게 입 맞추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리고 셋째, 언제든지 하나님께 피하는 인생이 되십시오. 이것이 바로 복 있는 사람으로 나아가는 의인 길임을 잊지 마십시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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