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네 블리야알
사무엘상2:22-25 2018/06/10 (성령강림 후 3주)
2:22 엘리가 매우 늙었더니 그의 아들들이 온 이스라엘에게 행한 모든 일과 회막 문에서 수종 드는 여인들과 동침하였음을 듣고
2:23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런 일을 하느냐 내가 너희의 악행을 이 모든 백성에게서 듣노라
2:24 내 아들들아 그리하지 말라 내게 들리는 소문이 좋지 아니하니라 너희가 여호와의 백성으로 범죄하게 하는도다
2:25 사람이 사람에게 범죄하면 하나님이 심판하시려니와 만일 사람이 여호와께 범죄하면 누가 그를 위하여 간구하겠느냐 하되 그들이 자기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죽이기로 뜻하셨음이더라
하나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모두에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시편 1편을 보시기 바랍니다.
1: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시편 1편, 어떤 구절로 시작합니까?
‘복 있는 사람은’
반면 시편 2편은 이렇게 끝을 맺습니다.
2:12 그의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의 진노가 급하심이라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도다.
이처럼 시편 1편과 2편이 각각 ‘복 있는 사람은’으로 시작해서 ‘다 복이 있도다.’로 끝나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시편1편과 시편 2편을 한편의 시로 볼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시편 150편 전체의 서론으로 여깁니다.
그렇다면 누가 복 있는 사람일까?
시인은 이렇게 정리합니까?
첫째,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는 사람
둘째,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않은 사람
셋째,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것을 공동번역 성경은 다시 이렇게 풀어 설명합니다.
첫째, 악을 꾸미는 자리에 가지 아니하는 사람
둘째, 죄인들의 길을 거닐지 아니하는 사람
셋째, 조소(다시 말해, 남을 업신여기거나 낮잡아 보는) 자들과 어울리지 아니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렇게 복 있는 사람으로 진실하고, 정의로우며, 정직하게 살아간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래서 시인은 이어서 말합니다.
1: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첫째,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둘째,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야 악인들의 꾀, 죄인들의 길 그리고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서 벗어날 수 있는 복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시인은 말합니다.
어떻습니까?
‘여호와의 율법 곧 말씀에 대한 즐거움이 있는지요?’
있다면, 그 즐거움이 얼마나 깊고, 얼마나 넓으며, 얼마나 높으신지요?
또 하나, ‘밤낮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되새기시는지요?’
‘얼마나 꼼꼼하게 얼마나 치열하게 되새기는지요?’
시인 윤동주가 일본 유학을 위해 어쩔 수없이 창씨개명을 한 날 밤이었습니다. 1942년 1월 24일 밤, 그는 시 한편을 남깁니다.
바로 '참회록'이라는 시입니다.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어 보자.
살다보면, 왜 부끄럽지 않은 일이 없겠습니까?
‘내가 목사 맞을까?’
말씀에 비추어보면, 정말 한 없이 부끄럽고 화끈거리지요.
문제는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려’는 거룩한 몸짓이 얼마나 있었는가? 입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마태복음 5-8장 산상설교의 핵심은 복 있는 사람입니다. 누가 복 있는 사람인가?
그 출발점에 있는 것이 바로 가난한 심령입니다.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그렇다면, 왜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일까?
그 이유를 엔도 슈사꾸의 소설 ‘예수의 생애’에서 찾아보고자 합니다.
‘그는 나사렛의 조그만 거리의 가난함과 비참함 속에서 살아가는 서민의 삶을 알고 있었다.
매일 매일의 양식을 얻기 위한 땀 냄새도 알고 있었다.
생활 때문에 어찌할 수 없는 인간들의 약함도 터득하고 있었다.
병자나 불구자들의 탄식도 보고 있었다.
사제들이나 율법학자가 아닌 이들 서민들이 구하는 신은 노여움, 탄식, 벌하는 신만이 아니라고 그는 예감하고 있었다.’
복 있는 사람 특히 목회자는 왜 ‘마음이 가난해야’ 하는가?
그래야 하나님의 눈길이 향하고 있는 서민들의 고단함과 연약한 이들의 깊은 탄식을 그나마 알아차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현실 속에서 이런 이들, 특히 이런 영적 지도자를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오늘 말씀의 주인공은 제사장 ‘엘리’입니다.
‘엘리’, 그 이름의 뜻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나의 하나님’
마 27:46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하지만 사무엘상 3장을 보시면, 그 이름의 뜻과는 달리 아주 민망한 상황이 벌어집니다.
3:1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3:2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 가서 잘 보지 못하는 그 때에 그가 자기 처소에 누웠고
제사장, 그가 있어야할 처소는 하나님의 궤 즉 속죄소가 있는 여호와의 전이어야 합니다.
성도들의 기도 소리로 채워진 하나님의 집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다시 3장 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처소가 아니라 자기 처소에 누웠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홉니와 비느하스.
정말 애지중지하는 두 아들이 있는 곳을 자기의 처소로 삼습니다.
반면, 제사장의 빈자리를 누가 채웁니까?
사무엘상 3장 3절
3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더니
여기서 실로 성소의 제사장, 엘리 가문의 비극이 시작되지요.
제사장 ‘엘리’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홉니’와 ‘비느하스’ 입니다.
그 이름의 뜻을 풀면 이렇습니다.
‘홉니’, ‘손바닥’이라는 뜻입니다.
‘비느하스’는 ‘신탁’이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두 아들의 이름 속에서 그들 역시 아버지 엘리처럼 제사장의 직무를 가진 이스라엘의 제사장임을 알 수 있습니다.
홉니 제사장, 비느하스 제사장이지요.
그런데 2장 1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삼상2:12 엘리의 아들들은 행실이 나빠 여호와를 알지 못하더라
‘행실이 나빠’
히브리어로 '브네 블리야알‘이라고 발음하는데, 우리말로 다시 번역하면 ’나쁜 남자‘가 됩니다.
반면 '나쁜 여자'는 '밧 블리야알'이라고 발음합니다.
이 두 아들의 행실이 얼마나 악했는지, 히브리어 성경은 '브네 블리야알‘ ’나쁜 남자‘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하나님을 무시하고 '브네 블리야알‘ ’나쁜 남자‘로 등극하게 된 데에는 두 가지 사건 때문입니다.
첫째, 2장 13절부터 읽겠습니다..
2:13 그 제사장들이 백성에게 행하는 관습은 이러하니 곧 어떤 사람이 제사를 드리고 그 고기를 삶을 때에 제사장의 사환이 손에 세 살 갈고리를 가지고 와서
2:14 그것으로 냄비에나 솥에나 큰 솥에나 가마에 찔러 넣어 갈고리에 걸려 나오는 것은 제사장이 자기 것으로 가지되 실로에서 그 곳에 온 모든 이스라엘 사람에게 이같이 할 뿐 아니라
2:15 기름을 태우기 전에도 제사장의 사환이 와서 제사 드리는 사람에게 이르기를 제사장에게 구워 드릴 고기를 내라 그가 네게 삶은 고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날 것을 원하신다 하다가
2:16 그 사람이 이르기를 반드시 먼저 기름을 태운 후에 네 마음에 원하는 대로 가지라 하면 그가 말하기를 아니라 지금 내게 내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억지로 빼앗으리라 하였으니
2:17 이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큼은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이었더라
여호와께 드리는 제사를 멸시합니다.
하나님의 제물을 빼앗는 나쁜 짓, 못된 짓을 서슴없이 행합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헌금을 사적으로 유용하지요.
왜요?
특권 의식 때문입니다.
내가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기름부음 받은 제사장이라는 그릇된 특권의식 때문입니다.
그러니 내 일이 곧 하나님 일이고, 내 맘이 곧 하나님의 맘이라는 그릇된 특권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홉니와 비느하스
이 둘은 엘리의 후광 덕분에 자질과는 상관없이 제사장이 됩니다.
경제적인 어려움 없이 살았을 것이고, 젊은 때부터 사람들의 공대를 받으며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 생활에 익숙해지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특권 의식에 조금씩 물들었을 겁니다.
문제는 이런 특권 의식이 자기반성, 자기 성찰의 기회를 가로막는 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행동을 돌이켜 보지 못하고 ‘나는 그렇게 해도 괜찮다’는 특권 의식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러니 행동이 방자해 질 수 밖에 없고, 타자들 특히 옆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며, 결국에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일을 서슴없이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홉니와 비스하스의 죄악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브네 블리야알‘ ’나쁜 남자‘로 등극하는 또 하나의 사건이 나오는데, 그것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입니다.
2:22 엘리가 매우 늙었더니 그의 아들들이 온 이스라엘에게 행한 모든 일(앞서 설명한 것)과 회막 문에서 수종 드는 여인들과 동침하였음을 듣고
하나님의 계명 특히 십계명을 저버립니다.
물론 이 소식을 접한 늙은 엘리가 아들들을 불러 준엄하게 꾸짖기는 합니다.
2:23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런 일을 하느냐 내가 너희의 악행을 이 모든 백성에게서 듣노라
2:24 내 아들들아 그리하지 말라 내게 들리는 소문이 좋지 아니하니라 너희가 여호와의 백성으로 범죄하게 하는도다 2:25 사람이 사람에게 범죄하면 하나님이 심판하시려니와 만일 사람이 여호와께 범죄하면 누가 그를 위하여 간구하겠느냐 하되 하지만 아버지의 꾸지람도 그들의 악행을 되돌려 놓지는 못하게 됩니다.
이미 돈 맛과 여자 맛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침묵하고 있던 하나님이 드디어 나섭니다.
디시 25절입니다
2:25 사람이 사람에게 범죄하면 하나님이 심판하시려니와 만일 사람이 여호와께 범죄하면 누가 그를 위하여 간구하겠느냐 하되 그들이 자기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죽이기로 뜻하셨음이더라
공동번역으로 다시 읽어드립니다.
25 사람이 사람에게 죄를 지으면 하느님께서 그 사이에 서주시겠지만, 사람이 야훼께 죄를 얻는다면 누가 그 사이에서 빌어주겠느냐?" 그런데도 그들은 아버지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야훼께서 이미 그들을 죽이시기로 작정하셨던 것이다.
결국 이 예언대로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 제사장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법궤를 적군에게 빼앗길 뿐만 아니라 그 전투에서 아주 비참한 죽음을 당하게 됩니다.
4장 11절입니다
11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임을 당하였더라
말씀을 마칩니다.
엘리의 두 아들인 홉니와 비스하스가 행한 두 가지 악행 속에서 눈여겨볼 말씀이 하나 있습니다.
2장 18절과 2장 26절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엘리의 두 아들들의 악행을 전하고 있는 본문 앞뒤에 마치 괄호처럼 사무엘 이야기가 등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선 2장 17-18절입니다.
17 이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큼은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이었더라
(하지만)18 사무엘은 어렸을 때에 세마포 에봇을 입고 여호와 앞에서 섬겼더라)
그 다음은 25-26절입니다.
25 사람이 사람에게 범죄하면 2)하나님이 심판하시려니와 만일 사람이 여호와께 범죄하면 누가 그를 위하여 간구하겠느냐 하되 그들이 자기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죽이기로 뜻하셨음이더라 (하지만)26 아이 사무엘이 점점 자라매 여호와와 사람들에게 은총을 더욱 받더라
그렇게 해서 사무엘이 제사장이자 이스라엘의 초대 사사가 됩니다.
그런데요.
역사는 반복이라지요.
사무엘의 두 아들 역시 아버지의 뜻을 따르지 못합니다.
맏아들 ‘요엘’이고 둘째 아들이 ‘아비야’인데 아버지 사무엘을 따르지 않습니다. 이들 역시 하나님을 무시하는 ‘나쁜 남자’ ‘브네 블리야알‘이 됩니다.
사무엘상 8장 1-3절입니다.
1 사무엘이 늙으매 그의 아들들을 이스라엘 사사로 삼으니
2 장자의 이름은 요엘이요 차자의 이름은 아비야라 그들이 브엘세바에서 사사가 되니라
3 그의 아들들이 자기 아버지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고 이익을 따라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하니라
부탁드립니다.
돈 앞에서 무너지는 ‘브네 블리야알‘ ’나쁜 남자‘가 되지 마십시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복된 자, 곧 하늘의 福者가 되십시오. 그래야 악인들의 꾀, 죄인들의 길, 오만한 자들의 자리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또 하나 명심하십시오.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처럼, 사무엘의 두 아들 요엘과 아비야처럼
대접받는 일에 익숙해질 때, 사람은 반드시 타락하게 됩니다.
그러니 낮은 데, 가난한 데 처하는 연습을 자꾸만 의도적으로 행하십시오.
그래야 성도가 성도다워지고 교회가 교회다워지는 것입니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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