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풀이

이사야 5:1-7 왜 들포도 열매일까?

心貧者 2017. 3. 7. 12:01


왜 들포도 열매일까?

이사야 5:1-72017/03/05 사순절 제1
5:1 나는 내가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내가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내가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5:2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틀을 팠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었도다

5:3 예루살렘 주민과 유다 사람들아 구하노니 이제 나와 내 포도원 사이에서 사리를 판단하라

5:4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으랴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들포도를 맺음은 어찌 됨인고

5:5 이제 내가 내 포도원에 어떻게 행할지를 너희에게 이르리라 내가 그 울타리를 걷어 먹힘을 당하게 하며 그 담을 헐어 짓밟히게 할 것이요

5:6 내가 그것을 황폐하게 하리니 다시는 가지를 자름이나 북을 돋우지 못하여 찔레와 가시가 날 것이며 내가 또 구름에게 명하여 그 위에 비를 내리지 못하게 하리라 하셨으니

5:7 무릇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가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정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공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


하나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늘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어느덧 3월입니다.

오실 때 엉금엉금 기어 다니는 두꺼비이나 숨죽이듯 숨어 있는 개구리를 만나보셨는지요?

오늘이 절기상 경칩인데 만나보셨습니까?

 

그러고 보면 정말 소중한 것을 우리가 잃어버리고 사는 것 같습니까?

엄마의 밥상(집 밥)’ 어디서 말날 수 있습니까?

따스한 엄마의 품이 아니라 편의점 냉장고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그것도 아주 저렴하게 그리고 시간에 구애 받지 않고 언제든지 만나지요.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그 진리의 말씀은 어디서 만날 수 있습니까?

교회의 따스한 품이 아니라 자동차에서 흘러나오는 라디오나 손쉽게 접하는 TV에서 만나지요.

거기에는 몸의 희생도 몸의 헌신도 필요치 않습니다.

심지어 헌금에도 구애 받지 않고 만날 수 있지요.

저는 이런 현실이 아프기도 하고 슬프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목회자로서 반성하게 되고 그리고 무릎 꿇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기도하고 금식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일이 있다면 저는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신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그 뜻대로 살아가는 기쁨이라 여깁니다.

 

문제는 이런 일들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전제 조건이 반드시 충족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리스도의 영을 가지는 것입니다.

좀 더 풀어서 설명하면 그리스도의 영을 모시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적그리스도의 영, 미혹의 영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 진리의 영 바로 성령을 모시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 곧 성령을 모시고 살아가는 이의 특징이 있습니다.

시간과 공간에 매여 있는 육신의 시간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그리스도의 시간을 따라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이처럼 참된 그리스도의 사람은 육신에 속한 시간에 구애 받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사는 것이 육신에 속한 시간에 구애 받지 않는 삶일까요?

바로 그리스도의 시간에 따라 물 흘러가듯 그 품에 안겨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만들어진 교회의 전통이 그리스도의 생애가 중심이 되는 바로 교회의 절기입니다.

 

그리스도의 시간’ ‘교회의 절기이것을 통하여 우리는 두 가지의 은혜를 얻어야 하나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법 그리고 또 하나는 하나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법입니다. ‘하나님의 벗이었던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의 시간, 그 구원의 역사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지난 수요일이 교회력으로 재의 수요일이라고 부르는 사순절의 시작이었습니다.
사순절, 부활절을 기준으로 주일을 뺀 ‘40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한 순이 열이지요.

그래서 ‘40을 우리가 사순절이라고 부릅니다.

 

사순절이 오면 교회는 전통적으로 두 가지를 묵상하게 됩니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수난이지요.

수난과 수치 그리고 십자가의 모욕을 깊이 묵상하게 됩니다.

무엇을 통해서 묵상할까요?

바로 예수님의 수난사화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통해서입니다.

성경 특히 이사야서와 복음서에 기록된 주님의 수난을 깊이 묵상하는 것입니다.

(나누어 드린 사순절 달력에 기록된 성서일과의 본문을 묵상하시면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0

 

두 번째는 동참입니다.

그리스도가 겪은 수난 뿐 만 아니라 부활의 생명까지 동참해 보자는 것이 사순절을 지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전통적으로 사순절을 돌아오면 그 때마다 세상으로부터 오는 육의본능 3가지를 부인하며 덜어내는 삶을 자원하여 살았습니다.

(사순절 달력 빈칸에 여러분들이 채워야할 것들인데)

 

요한일서 215- 16절입니다.

2: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2: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여기에 보면 세상 곧 적그리스도의 영 그리고 미혹의 영으로부터 오는 육의 본능 3가지가 나옵니다.

첫째, 육신의 정욕(, 육체의 욕망/, 육체의 쾌락)
둘째, 안목의 정욕(, 눈의 욕망/, 눈의 쾌락)
셋째, 이생의 자랑(, 세상 살림에 대한 자랑/ 재산() 자랑)

 

그래서 이런 것들을 부인하며 덜어내는 절제의 삶을 사순절 동안 자원하고 그리고 자원한 대로 힘껏 살아 보는 것입니다.

누구를 의지해서요?

나의 의지와 결심과 열심히 아니 파라클레토스보혜사가 되시는 성령을 통해서입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들입니다.

육신의 정욕 중에서 가장 큰 욕망은 먹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금식을 통해서 먹는 욕심을 부인하고 덜어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안목의 정욕, 어떻게 부인하고 덜어낼까요?

기도 생활입니다.

세상을 향한 눈을 감고 하늘을 향한 눈을 여는 것입니다.

 

이생의 자랑, 돈 자랑과 힘자랑 자기 자랑이지요.

이것을 어떻게 부인하고 덜어낼까요?

가장 좋은 방법이 남을 돕는 그리고 선한 일을 하는 구제 생활입니다.

 

이 세 가지 중에서 가장 어렵고 강력한 유혹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역순으로 이생의 자랑(권력), 안목의 정욕(여자) 그리고 육신의 정욕() 순입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이 마태복음 6장에서는 역순으로 가장 어려운 참된 구제의 삶, 참된 기도의 삶 그리고 참된 금식의 삶 순으로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여기에 제가 오늘 본문과 관련해서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어떠한 기대와 변화도 갈망하지 않은 나태함과 게으름이지요.

이것을 좀 부인하고 덜어냈으면 좋겠습니다.

 

혹 눈치 챈 분이 있을 것 같아 미리 말씀 드리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지난해 20163월 둘째 주에 나누었던 본문과 동일한 말씀입니다. 1년 만에 동일한 본문을 가지고 다시 이 자리에 섰습니다.

왜 제가 이 같은 본문을 들고 또 섰을 까요?

다시 복습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현실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선지자 이사야는 하나님의 대언자입니다.

대언자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가감 없이 전달하기 위해 하나님이 직접 세우신 하나님의 사람이지요.

그 대언자 이사야는 풍전등화 앞에 놓인 이스라엘의 위기를 바라보면서 이런 비유를 들어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 전하게 됩니다.

이사야 5장입니다.

5:1 나는 내가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내가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내가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5:2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틀을 팠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었도다

 

여기서 말하는 극상품의 포도나무는 하나님이 직접 선택한 백성 이스라엘을 뜻합니다.

그 이스라엘을 기름진 산에 있는 포도원 곧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에 심게 됩니다.

척박한 이집트로부터 옮겨 심은 것이지요.

 

심기만 했나요?

심기만 하고 하나님이 방치하셨나요?

아닙니다.

하늘의 천군 천사와 하나님의 사람을 통하여 그 땅에 거하는 이방인들을 돌 걸러 내듯이 다 걸러내시고 잘 가꾸셨습니다.

 

가꾸기만 했나요?

아닙니다.

기대하셨습니다.

극상품 포도나무답게 좋은 포도 열매, 최상의 포도 열매 맺기를 기대했지요.

그래서 초막이 아니라 튼튼한 망대를 세워놓고 매일 매일 지켰습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포도 줄기가 얼마나 곧고 굵직굵직 하던지 또 잎사귀가 얼마나 파릇파릇하고 싱싱하던지, 기대가 얼마나 컸으면 포도 열매가 맺기도 전에 포도주를 만드는 술틀 까지 땅을 파서 만들어 놓았겠습니까?

정말 기대가 컸지요.

장자 아닙니까?

실수가 없으신 하나님이 친히 택한 약속의 백성 아닙니까?

 

그런데 보십시오.

어떤 현실을 맞이합니까?

다시 52절 하반부를 주의 깊게 보겠습니다.

5:2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틀을 팠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었도다

 

낭패도 이런 낭패가 없지요.

 

그런데 여러분 문제는 이것이 이사야 시대의 한 단면이 아니라 바로 오늘 우리 시대의 모습일 수도 있다는 무서운 현실입니다.

우리민족, 우리교회 그리고 우리 신앙이 처한 현실의 모습이지요.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이 얼마나 화가 나섰던지 이 일을 묵인하거나 방치하지 않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불러서 따져 묻습니다.

5:3 예루살렘 주민과 유다 사람들아 구하노니 이제 나와 내 포도원 사이에서 사리를 판단하라

5:4 내가 내 포도원을 위하여 행한 것 외에 무엇을 더할 것이 있으랴 내가 좋은 포도 맺기를 기다렸거늘 들포도를 맺음은 어찌 됨인고

 

새 번역 성경으로 다시 읽어 드릴 텐데 이것을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으시기 바랍니다.

5:3 예루살렘 주민아, 유다 사람들아, 이제 너희는 나와 나의 포도원 사이에서 한 번 판단하여 보아라.

5:4 내가 나의 포도원을 가꾸면서 빠뜨린 것이 무엇이냐? 내가 하지 않은 일이라도 있느냐? 나는 좋은 포도가 맺기를 기다렸는데 어찌하여 들포도가 열렸느냐?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향한 하나님의 은혜

우리에게 향한 하나님의 자비

우리에게 향한 하나님의 긍휼

우리에게 향한 하나님의 기대

도대체 하나님이 우리를 가꾸면서 빠뜨린 것이 무엇이냐? 는 것입니다.

빠뜨린 것이 하나도 없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옛 습관에 따라 무지와 무감각과 무자비로 응답했다는 것입니다.

더 심각한 것은 포도원 주인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들 포도 열매를 맺고도 어처구니없게 그것을 최선이라고 여기며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어떻게요?

어떤 들 포도 열매입니까?

오늘 말씀의 핵심이자 결론인 7절처럼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5:7 무릇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가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정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공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


여기에 보면 만군의 주 여호와 하나님이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기대했던 것 두 가지가 나옵니다.

무엇과 무엇입니까?

하나는 정의이고 또 하나는 공의입니다.

 

좀 자세한 설명이 필요한 부분이라 새 번역 성경으로 다시 읽어 드리겠습니다.

5;7 주님께서는 그들이 선한 일하기를 기대하셨는데, 보이는 것은 살육뿐이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옳은 일 하기를 기대하셨는데, 들리는 것은 그들에게 희생된 사람들의 울부짖음뿐이다

 

새 번역 성경은 정의를 선한 일로 그리고 공의를 옳은 일로 번역해 놓았습니다.

정의, 공의그러면 좀 어려지만 선한 일, 옳은 일하면 아무래도 이해가 쉽지요.

그러면 무엇이 정의와 공의이고 선한 일과 옳은 일일까요?

 

지금 우리말 번역 성경에는 반영되어 있지 않지만 이사야는 일종의 말놀이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아주 강력하게 전닿라고 있습니다.

 

우선 정의또는 '선한 일'이라 번역된 히브리어입니다.

우리말 정의, 선한 일로 번역 된 히브리어 단어는 미슈팟(mishpat)’입니다.

그 뜻은 이렇습니다.

법관이 법에 따라 편벽됨 없이 판단하는 사법적 정의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없는 사법적 정의이지요.

그런데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대했던 미슈팟좋은 포도 열매를 이스라엘이 무엇으로 응답한 줄 아십니까?

미슈파흐(mishpah)’ '표악으로, 살육으로, 피흘림으로' 응답했다는 것입니다.

5:7 무릇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가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정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저는 이번 사태를 보면서 무지와 무감각과 무자비라 얼마나 무서운 줄 알게 되었습니다.

미슈파흐(mishpah)’ 포악의 계엄령이라니요?

미슈파흐(mishpah)’ 빨갱이는 죽어야 한다니요?

이처럼 하나님의 정의가 사라진 자리는 적그리스도의 폭력이 채워 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하나님의 정의, 하나님의 정의 외치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하나님의 법, 왜곡된 하나님의 말씀이 제발 성서한국에서 바로 잡았으면 하는 바람 때문입니다.

 

또 하나 공의라는 단어입니다.

히브리어로 쩨다카(tzedakah)’라고 합니다.

쩨다카(tzedakah)’ 뜻은 이렇습니다.

사회적 불평등을 바로잡으시려는 하나님의 마음을 반영하는 말로 반드시 모든 이들에게 회복되어야할 하나님의 정의정도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한 일이라는 정의와 하나님이 보시기에 옳은 일이라는 공의는 서로 불리가 될 수 없는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마음 그 자체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우리를 통해 이루시기 위해 만들어 주신 핵심 율법이 안식일법과 안식년법과 그리고 희년법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쩨다카대신 들어선 것이 있습니다.

쩨아카'(tze'akah)’ 곧 불의에 의해 희생당한 이의 부르짖음, 울부짖는 원망입니다.

5:7 무릇 만군의 여호와의 포도원은 이스라엘 족속이요 그가 기뻐하시는 나무는 유다 사람이라 그들에게 정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포학이요 그들에게 공의를 바라셨더니 도리어 부르짖음이었도다

(그들이 옳은 일 하기를 기대하셨는데, 들리는 것은 그들에게 희생된 사람들의 울부짖음뿐이다)

 

어쩌다 이런 세상이 되고 말았을까요?

 

말씀을 마치면서 3가지를 부탁드리겠습니다.

사순절의 시작을 재의 수요일이라고 하는데

첫째, 들 포도 열매가 열리는 우리의 현실을 아파만 하지 말고 나 먼저입니다.

나 먼저 재의 자리’ ‘회개의 자리로 나아가십시오.

 

둘째, 누구보다도 이런 현실을 안타까워 하시분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그분의 마음 곧 예수 그리스도의 탄식과 마음을 헤아리십시오.

 

마지막 셋째. 다시 시작해 봅시다.

좋은 포도나무답게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 힘쓰고 애써보자는 것입니다.

나태함과 게으름에서 벗어나 더 열심히 예배 참석하고, 더 열심히 기도하고, 더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탐구하고, 더 열심히 봉사하고 헌신하십시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이라면 열일 제쳐놓고 먼저 하십시오.

이웃 사랑하는 일일이라면 형편이나 사정 따지지 말고 그냥 성령이 주는 감동에 따라 행하십시오.

절대로 미루지 마십시오.

그러면 성령님이 함께 하실 것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정말 좋은 열매가 내년 이맘때에는 우리 교회와 우리 민족과 우리나라에 주렁주렁 맺어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