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슬리의 산상설교 1
마태복음 5:1-4절 2016/11/23(수)
5: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5:2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5: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핵심은 3절과 4절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가난한 자’ 그리고 ‘애통하는 자’
사실 우리가 원하고 바라는 것들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가난이나 애통은 그 어느 누구도 원하고 바라는 상황이나 감정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든지 피하고 싶은 것들이지요.
그런데 우리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가난한 자가 천국의 주인이다, 애통하는 자가 위로를 받는다. 그래서 그들은 복이 있다’ 이렇게 설득이 아니라 선포를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설득도 어려운 일인데 일방적으로 선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우리 주님은 ‘가난한 자가 천국의 주인이고 그리고 애통하는 자가 하늘의 위로를 받을 수 있으며 그들이야 말로 복되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일까요?
미리 그 답을 말씀드린다면, 그런 자만이 하나님을 간절히 찾을 수 있는 겸손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죄인임을 깨닫는 겸손한 사람만이 영과 진리 곧 전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분의 인도하심에 따라 천국에 들어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례요한이 옥에 갇혔을 무렵입니다.
그 때 예수님은 이스라엘 북쪽에 있는 고향 갈릴리를 두루 다니시면서 본격적으로 그리스도의 사역을 펼치시기 됩니다.
마4: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그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예수님의 사역 3가지입니다.
첫째,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들의 예언을 풀어 가르쳤다는 말입니다.
둘째,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천국, 그 분의 나라인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십니다.
셋째,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치유 사역입니다.
이 3가지 사역 중에서 백성들에게 큰 호감을 얻은 사역이 있습니다.
무엇이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동일하게 세 번째 사역입니다.
‘백성 중의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치유 사역입니다.
그러니 소문이 날 수 밖에 없지요.
문둥병이 고쳐지고 절름발이가 일어나며 소경이 눈을 뜨고 귀 먹거리가 듣게 되고 온갖 귀신이 물러나니 소문이 날 수 밖에 없이요.
그래서 소문을 들은 갈릴리 사람뿐만 아니라 데가볼리 사람 예루살렘 사람 유대 사람 심지어 요단강 건너편에 있는 이방인들까지 무리를 지어 예수님을 따르게 됩니다. 마태복음 4장 24-25절입니다.
4:24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 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그들을 고치시더라
4:25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 강 건너편에서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
문제는 지금도 그렇지만 이 수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의 첫 번째 사역인 성경을 풀어 가르치는 일이나 그리고 두 번째 사역인 천국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특단의 조치를 내립니다.
유대인의 풍습에 따라 큰 무리를 앉혀놓고 산 위에 올라가 가르치신 것입니다.
5: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5:2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이렇게 해서 가르친 말씀이 마태복음 5장 6장 7장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우리가 ‘산상설교’ 또는 ‘산상수훈’ 또는 ‘산상복음’이라고 불렀습니다.
예수님이 산위에 올라가 마치 창세기 1장에 등장하는 창조주 하나님처럼 입을 열어 가르친 목적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말씀의 회복입니다.
그 동안 백성들이 듣지 못했던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들의 예언을 자세히 풀어서 가르치는데 특히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그릇되게 가르친 율법, 곧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잡는 일을 하십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들입니다.
5:21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5:27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5:31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려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5:33 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이처럼 예수님은 당시 가르치는 자들 곧 바리새인이나 서기관이나 장로나 그들의 의해 왜곡된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잡기 위해 무리들에게 다시 가르쳐 주신 것이 산상설교입니다.
5: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5: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이처럼 예수님이 산상설교를 통하여 가르치고자 했던 것은 말씀의 회복 곧 왜곡된 하나님의 말씀들을 하나하나 바로 잡는 일이었습니다.
첫째, 율법과 예언서의 완전함입니다.
율법과 예언서가 완전히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누구를 통해서요?
요한복음 1장이 말하는 것처럼 말씀이 육신이 되신 그리스도 바로 예수님 자신을 통해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가르침이 바리새인이나 서기관과 다르게 권위가 있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이 말씀 때문에 예수님이 바리새인들로부터 아주 큰 곤욕을 치루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네게 뭔데 건방지게 율법과 예언서를 완전하게 할 수 있는가?’ 입니다.
왜냐하면, 율법과 예언서를 완전하게 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 말씀 때문에 훗날 고소를 당하기도 합니다.
‘인간인 주제에 감히 하나님을 참담하게 했다’는 죄목입니다.
두 번째 행위에 따른 심판을 경고하십니다.
5:19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반드시 말씀(계명)에 따른 그 행위의 심판이 있다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혈통의 구원을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씨, 아브라함의 자손만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다르게 설명하십니다.
아무리 아브라함의 씨, 아브라함의 자손, 아브라함의 혈통이라 할지라도 계명을 주신이의 뜻을 행하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역시 바리새인들에게 분노를 살 수박에 없었습니다.
이처럼 산상설교를 통하여 자신을 따르는 무리들과 그리고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가르치고자 했던 첫 번째 주제는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예언을 풀어 바르게 가르친 것입니다.
특히,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그릇되게 가르친 율법, 곧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잡는 일이었습니다.
두 번째로 산상설교를 하신 목적은 앞서 언급했던 두 번째 사역인 천국복음을 전파하는 일이었습니다.
쉽게 말해 천국 가는 길을 가르쳐 주는 것이지요.
그래서 산 위에 올라가 가르치신 것입니다.
전통적으로 산은 하나님과 만나는 장소이기 때문입니다.
그곳에서 가르친 천국은 다시 세 가지 주제로 나뉩니다.
①어떤 이들이 천국, 곧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지, 주로 5장에 나옵니다.
②천국을 바라고 소망하는 이들의 마음은 어떠해야 하는지, 주로 6장에 나옵니다.
그리고 ③셋째, 하나님 나라에 가는 길의 장애물이 있다면 그것들이 무엇인지를 주로 다루는 것이 7장입니다.
이처럼 산상설교라고 부르는 마태복음 5장 6장 7장에서 공통적으로 흐르는 큰 주제가 바로 천국, 하나님 나라입니다.
자 이제 산상설교 중에서 서론에 해당하는 팔복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마태복음 5장 3-12절에 나오는 말씀을 우리가 특별히 ‘팔복’이라고 부릅니다.
팔복, 8가지 복이지요.
그런데 팔복의 내용을 보면 우리가 알고 있는 복과는 그 개념이 완전히 다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팔복은 이 땅의 복이 아닌 하늘의 복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천국을 소망하는 이들이 천국에서 누리게 될 복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자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복’이라고 말할 때, 그 복은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육신의 복을 말합니다.
주로 오복이지요.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첫째 壽(수), 長壽(장수)의 복입니다.
오래 사는 것이 복이지요.
둘째는 富(부)의 복입니다.
부유한 삶을 영위하는 것입니다. 부자가 되는 것이지요.
셋째가 康寧(강녕)의 복입니다.
우환 없이, 어려움 없이 편안하게 사는 복을 말합니다.
넷째, 攸好德(유호덕)의 복입니다.
덕을 좋아해서 덕으로 늘 사람을 대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다섯째는 考終命(고종명)의 복입니다.
天命(천명), 곧 하늘이 준 하늘의 명을 다하는 것이 복이라는 말입니다.
참 좋은 복이지요.
하지만 마태복음 5장 3-12절에 등장하는 팔복은 이런 것들과는 거리가 멉니다.
멀어도 아주 멉니다.
왜냐하면, 이 복의 뿌리는 이 땅이 아닌 하늘로부터 오는 복이기 때문입니다.
감히 세상이 상상할 수 없는 하늘의 복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팔복 후반부에 언급된 복의 내용을 보면 하늘로 시작해서 하늘로 끝나게 되는 것입니다.
①‘하늘나라를 얻을 것이다’ ‘
②‘위로를 받을 것이다’
③‘땅을 차지할 것이다’
④‘배부를 것이다’
⑤‘자비롭게 대함을 받을 것이다’
⑥‘하나님을 볼 것이다’
⑦‘하나님의 자녀라 부르심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⑧‘하늘나라가 너희의 것이다.’
이처럼 팔복은 하늘로 시작해서 하늘로 끝나게 됩니다.
그래서 웨슬리는 산상설교에 등장하는 팔복을 천국으로 가는 여정의 순서로 보았던 것입니다.
팔복의 기록 순서가 곧 천국으로 가는 여정의 순서가 되는 것입니다.
첫째, 심령 곧 마음이 가난한 자입니다.
하늘의 복을 누리고자 하는 이의 첫 번째 마음자세이자 삶의 자세이지요.
둘째, 애통하는 마음입니다.
셋째, 온유한 마음이고
넷째, 의에 주리고 목마른 마음입니다.
다섯째,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고
여섯째, 불순물이 없는 청결한 마음
일곱 번째는 평화를 이루는 마음
그리고 마지막 여덟 번째,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을 수 있는 강하고 담대한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순교자의 마음이지요.
이것이 천국으로 가는 그리스도인의 여정을 다루고 있는 순서입니다.
이 중에서 첫 번째 여정인 3절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는 것과 그리고 두 번째 여정인 4절 ‘애통하는 자’가 되는 것에 대해서 간략하게 설명하고 마치겠습니다.
첫째 여정 3절입니다.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여기서 말하는 ‘가난’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우선 가난에 대한 바른 이해가 중요한데, 어떤 가난을 말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사전적 의미의 ‘가난’과 ‘다른 가난’을 말하고 있다는 점에 우리가 주목해야합니다.
좀 쉽게 풀어 말씀드리면, 물질의 부요함이 없는 가난,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사전적 의미의 가난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한 물질의 자발적 포기를 뜻하는 청빈의 가난도 아닙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가난’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하나님이 없는 가난함이지요.
영의 빈곤함을 뜻하는 가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 그리고 생명으로 가득 채우고 싶은 강력한 욕망이 살아 있는 가난함을 말합니다.
마치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아 헤매 이듯이 하나님을 찾아 헤매는 마음입니다.
이것을 웨슬리는 ‘겸손’이라고 했습니다.
3가지입니다.
첫째, 영적으로 가난한 자임을 시인하는 겸손입니다.
보고도 보지 못하는 영적 소경이며 들어도 듣지 못하는 영적 귀 먹거리임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자력 구원이 불가능한 자신의 연약함과 자신의 죄를 깨닫는 것입니다.
이것이 웨슬리가 말한 첫 번째 겸손입니다.
둘째, 자기 속에 선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시인하는 겸손입니다.
그래야 비참하고 불쌍한 자아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문둥병자처럼 몸과 마음과 생각이 부패해서 악하고 가증한 것 밖에 없다는 것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셋째, 그래서 구세주가 되시는 예수님께 온전히 매달리는 자가 겸손한 자입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기도 밖에 할 수 없는 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호산나). 내가 죽게 되었나이다.’
마치 누구처럼 말입니까?
숨어서 기도할 수밖에 없는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세리처럼 입니다.
눅18:13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이것이 바로 웨슬리가 설명한 심령이 가난한 자입니다.
그래서 웨슬리는 자신의 설교문에서 이런 기도를 남긴 것입니다.
나는 항복합니다.
당신의 피의 외침을 듣고
내 모든 죄와 함께 나 자신을 던집니다.
나의 속죄 주이신 하나님, 당신에게
두 번째 여정은 4절입니다.
5: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여기서 말하는 ‘애통’이란 슬퍼하는 마음으로 죄의 절망 속에서 그리고 어둠의 시련 속에서 오직 구세주가 되시는 하나님만을 갈망하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이 애통은 우리 삶속에서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첫째, 하나님의 부재, 하나님의 침묵에 대한 애통입니다.
진짜 슬픈 마음이지요.
다윗의 시편을 보면 이러한 마음이 잘 녹아져 있습니다.
특히, 윤동주의 시 ‘팔복’을 보면 하나님을 간절히 갈망하지만 현실에서는 침묵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에 대한 애통, 슬픈 마음이 아주 잘 그려져 잇습니다.
슬퍼 하는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 하는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 하는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 하는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 하는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 하는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 하는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 하는자는 복이 있나니
저히가 永遠히 슬플것이오。
이 시가 오늘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그 애통함 속에 그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마음이 역설적으로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부재, 하나님의 침묵에 대한 애통은 그 애통함 속에서 그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마음이 역설적으로 숨어 있기 때문에 복이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애통입니다.
고난 받는 이들과 함께 하는 애통이지요.
인류의 죄와 불행으로 인해 고통 받는 이들과 함께 하는 애통입니다.
이것을 웨슬리는 복된 애통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애통함으로 첫째, 죄인이 용서함을 받고 둘째, 고통 받는 이들이 구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첫째, 산상설교를 기록한 마태복음 5장 6장 7장은 하나님 나라로 가는 길을 소개하고 있다.
둘째, 산상설교 서론에 해당하는 팔복은 하나님 나라에 가는 여정의 순서를 다르고 있다.
셋째. 하나님 나라로 가는 여정에 있어 첫 번째는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는 것이다.
넷째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된다는 것은 자력 구원이 불가능한 곧 자신의 연약함과 자신의 죄를 깨닫는 겸손한 자가 되는 것을 말한다.
천국은 이런 자의 것이다.
결코 교만한자는 천국의 주인이 될 수 없다.
다섯째 애통하는 자란 죄의 절망 속에서 그리고 어둠의 시련 속에서 오직 구세주가 되시는 하나님만을 간절히 바라고 갈망하는 마음을 갖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비록 이 땅에서는 애통하는 자이지만 그런 자만이 하늘의 위로를 얻게 된다.
이 다섯 가지를 기억하시고 천국의 여정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다는 것은 두 가지를 의미합니다.
첫째, 영 곧 생명의 연합과 일치를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과 내 영의 연합과 일치이지요.
요한복음 15장의 상태이지요.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입니다.
둘째, 진리 안에 거하는 것을 말합니다.
죄를 미워하고 옛사람을 미워하는 것이지요.
그래야 진짜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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