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예배자
사무엘하6:20-23절 2016/11/9(금)
6:20 다윗이 자기의 가족에게 축복하러 돌아오매 사울의 딸 미갈이 나와서 다윗을 맞으며 이르되 이스라엘 왕이 오늘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 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 그의 신복의 계집종의 눈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 하니
6:21 다윗이 미갈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그가 네 아버지와 그의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를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6:22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네가 말한 바 계집종에게는 내가 높임을 받으리라 한지라
6:23 그러므로 사울의 딸 미갈이 죽는 날까지 그에게 자식이 없으니라
옛날 어른 들이 하신 말씀 중에 이런 말씀이 생각납니다.
‘남의 죽을 사정이 내 배고픈 사정만 못하다.’
어떻습니까?
맞는 말이지요.
아무리 나라가 죽을 만큼 아프고 어렵다 할지라도 내 배고픔 내 외로움 내 아픔이 더 고통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그래서 간혹 이런 생각과 말을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너희들이 배고파 봐라. 한가하게 촛불이나 들고 있겠나?’
이것이 어쩔 수 없는 사람살이이겠지요.
지금 당장 내가 배고픈데 무슨 망할 놈의 나라 걱정이겠습니까?
그런데요.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남의 죽을 사정이 내 배고픈 사정만 못하다.’는 이 가르침이 이 교훈이 정말 성경적인 것일까?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진실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세상으로부터 거룩하게 구별 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 반대로 배고픈 내 사정보다는 죽을 수도 있는 남의 사정에 우리의 관심을 조금 더 두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기도할 때마다 배고픈 내 사정만을 하나님 앞에 간구하기 보다는 남의 죽을 사정을 하나님 앞에 먼저 간구해 보는 것은 어떨까?
이것이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의 정신이 아닐까?
이것을 묵상했던 오늘 하루였습니다.
오늘 본문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사울 왕이 죽고 사울 왕가가 급격하게 몰락하자 12지파로 구성된 이스라엘은 유대 지파 출신 다윗을 이스라엘의 새로운 왕으로 등극시킵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남아 있었습니다.
다윗의 정치적 지지기반이 아주 미약했다는 것입니다.
특히 북쪽에 있는 10지파가 다윗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표면적으로만 지지했지 그들의 마음까지 준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윗은 이것이 상당히 부담스러웠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어떻게 하면 북쪽에 있는 10지파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12지파로 나누어져 있는 이스라엘을 하나로 묶을 수 있을까?
그렇게 해서 다윗이 찾아 낸 것이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신앙, 바로 종교입니다.
모세와 여호수아시대로부터 내려왔던 여호와의 신앙이라면 정치적으로 묶을 수 없었던 북부 이스라엘과 남부 유다를 하나로 묶을 수 있다고 다윗은 판단한 것입니다.
특히 여호와 하나님이 다윗, 곧 자신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이 백성들에게 확인만 된다면 북과 남으로 나뉘었던 백성의 마음을 하나로 묶는 일은 일도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확신이 서자 다윗은 바로 행동으로 옮깁니다.
그동안 방치해 두었던 하나님의 언약궤를 다윗이 새롭게 건설한 요새 예루살렘, 그 안에 자리 잡은 자신의 성으로 모셔 오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묘수지요.
수 십 년 동안 방치해 두었던 하나님의 언약궤를 자신의 궁궐에 들임으로 하나님이 다윗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다윗은 만방에 알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우선 다윗은 자신의 수하에 속한 정병 삼만 명을 징집합니다.
전시상황도 아닌데 정병 삼만 명을 이끌고 갑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언약궤를 모셔오는 문제는 다윗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시상황도 아닌데도 정병 삼만 명을 이끌고 언약궤를 찾아 나섭니다.
드디어 언약궤가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아비나답 집에 모셔져 있던 하나님의 언약궤를 조심스럽게 꺼내서 자신이 준비한 수레에 싣습니다.
그리고 아비나답의 두 아들인 웃사와 아히요로 하여금 하나님의 언약궤를 실은 수레를 이끌 수 있는 특권을 부여해 줍니다.
상상해 봅시다.
웃사와 아히요가 하나님의 언약궤를 실은 수레를 이끌고 개선장군처럼 나갈 때 궁중의 악사들은 각종 악기를 연주하면서 길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의 정예군 삼만 명이 그 행렬을 호위했습니다.
그러니 그 화려하고 장대한 행렬에 백성들은 놀랐고 이 광경을 지켜보는 다윗의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도 흐뭇했습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는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언약궤를 실은 수레가 나곤의 타작마당에 이르렀을 때 수레를 끌던 소들이 갑자기 날뛰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궤가 떨어지려 하자 수레를 이끌던 웃사가 깜짝 놀란 나머지 하나님의 언약궤를 본능적으로 붙들었습니다.
바로 그 때 다윗의 눈앞에서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이 발생합니다.
웃사가 그 자리에서 죽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 것이지요.
정말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다윗 왕이 얼마나 놀랐던지 하나님의 언약궤을 모셔오는 일을 바로 포기하고 가드 사람 오벳에돔의 집으로 옮겨가서 보관하게 했습니다.
도대체 무슨 문제가 있었던 것일까요?
개념 없는 웃사가 감히 하나님의 거룩한 법궤를 함부로 만졌기 때문일까요?
물론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보다 더 큰 문제는 하나님이 정한 율법의 뜻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언약궤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고자 하는 다윗의 순수하지 못한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율법에 따르면 하나님의 법궤는 레위지파 출신 고핫자손만이 네 명이 한 조가 되어서 옮길 수 있었습니다.
아무리 폼 나지 않아도 반드시 그렇게 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언약궤 이송을 신앙적인 관점이 아닌 정치적인 관점에서 접근한 것입니다.
한 마디로 백성들에게 정치적인 쇼를 보여주려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정병 삼만 명을 대동한 채 그는 하나님을 납치하듯이 율법을 무시하고 왕의 수레에 실어 옮기려고 했던 것입니다.
저는 성경의 이 대목을 ‘하나님 납치 미수사건’이라고 적어놓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선한 목적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을 수단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참된 믿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찌되었든 다윗은 웃사의 죽음으로 적잖이 당황하게 됩니다.
언제나 내 편이라 생각했던 하나님이 갑자기 낯설고 두려운 존재로 다가 온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법궤의 이송을 포기한 다윗은 자신의 궁궐에서 석 달을 보내게 됩니다. 석 달 쯤 지나자 다윗은 뜻 밖에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오벳에돔의 집에 복을 내려 주셨다는 소식을 듣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이 되는 6장 11절입니다.
6:11 여호와의 궤가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석 달을 있었는데 여호와께서 오벧에돔과 그의 온 집에 복을 주시니라
이 소식을 접하자 다윗은 큰 깨달음 얻게 됩니다.
이 모든 문제가 여호와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있었다는 것을 깨달게 됩니다.
첫째, 하나님의 법궤를 모시려는 자신의 동기가 순수하지 못했다는 것
둘째,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경외감입니다.
이 두 가지 사실을 깨달은 다윗은 아주 ‘기쁜 마음’으로 오벳에돔의 집을 향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법궤를 다윗 성으로 다시 이송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법궤를 호송하는 행위에는 이 전과 변함이 없었지만 다윗이 가지고 있었던 마음의 동기는 이 전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그래서 왕의 수레나 호위 군사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6:12 어떤 사람이 다윗 왕에게 아뢰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하나님의 궤로 말미암아 오벧에돔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에 복을 주셨다 한지라 다윗이 가서 하나님의 궤를 기쁨으로 메고 오벧에돔의 집에서 다윗 성으로 올라갈새
6:13 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가매 다윗이 소와 살진 송아지로 제사를 드리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여섯 걸음을 가다 멈추고 안식의 제사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왜 하필이면 여섯 걸음일까요?
그 이유는 ‘7’이라는 숫자가 완전수 곧 하나님의 수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나타내는 숫자 ‘6’에서 걸음을 멈추고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다윗은 이것을 통해서 자신이 내딛는 걸음걸음이 하나님을 향한 발걸음이 되기를 소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드디어 하나님의 법궤가 정치의 도구가 아닌 진정한 신앙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경외하겠다는 언약의 다짐으로 소와 살진 송아지로 제사를 드리는 것을 통해 진정한 예배자로 다윗이 거듭나게 됩니다.
정치가 다윗이 아닌 진정한 예배자 다윗으로 거듭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다윗을 사랑할 수밖에 없지요.
6:14 다윗이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그 때에 다윗이 베 에봇을 입었더라
베로 만든 에봇만을 걸치고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었다는 것입니다.
화려하고 권위가 있는 왕의 옷이 아닌 회개의 상징인 베로 만든 에봇만을 입고 어린아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다윗을 보고 하나님이 얼마나 흐뭇하셨겠습니까?
말씀을 마칩니다.
하나님은 흐뭇했지만 그 광경을 보고 못 마땅하게 여긴 사람이 있었습니다.
다윗의 아내이자 사울의 딸이었던 미갈입니다.
예배의 방관자였던 그녀는 진정으로 거듭난 예배자 다윗을 행해 이렇게 비난합니다.
6:20 다윗이 자기의 가족에게 축복하러 돌아오매 사울의 딸 미갈이 나와서 다윗을 맞으며 이르되 이스라엘 왕이 오늘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 그의 신복의 계집종의 눈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 하니
‘채신머리없이 이게 무슨 짓이냐?’ 는 것입니다.
그때 다윗이 뭐라고 하신 줄 아십니까?
6:21 다윗이 미갈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그가 네 아버지와 그의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를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6:21 다윗이 미갈에게 대답하였다. "그렇소. 내가 주님 앞에서 그렇게 춤을 추었소. 주님께서는, 그대의 아버지와 그의 온 집안이 있는데도, 그들을 마다하시고, 나를 뽑으셔서, 주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다스리도록, 통치자로 세워 주셨소. 그러니 나는 주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소. 나는 언제나 주님 앞에서 기뻐하며 뛸 것이오.
주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는 나
그리고 언제나 주님 앞에서 기뻐하며 뛸 놀 수밖에 없는 나
그 나를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예배자로 거듭난 나 다윗을 발견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다윗처럼 진정한 예배자로 거듭난 나를 가지고 있는지요?
아니면 아직도 하나님이 내 욕망이나 들어주는 도구로 보이시는지요?
주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는 나
그리고 언제나 주님 앞에서 기뻐하며 뛸 놀 수밖에 없는 나
그러한 예배자로 거듭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풀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창세기 4:8-16 사랑에 맥 못 추시는 하나님 (0) | 2016.11.22 |
---|---|
로마서 14:17 우리 안에 우리를 통해 (0) | 2016.11.15 |
산성설교 강해 서론 하나님의 나라(롬14:17) (0) | 2016.11.10 |
마태복음 12:33-37 열매로 나무를 안다 (0) | 2016.11.08 |
에베소서 5:8-10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0) | 2016.11.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