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흥호

주기도문

心貧者 2009. 2. 28. 21:38

주기도문

1981년 11월 8일



마태복음 6장 7절~14절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온 세상이 아버지를 하나님으로 받들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듯이 우리의 잘못을 용서하시고,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오늘의 설교 제목은 우리가 잘 아는 <주기도문>입니다.

  신약성경이 생기기 전에도 주기도문만은 있었다고 합니다. 바울이 편지를 쓰고, 마가 ․ 마태 ․ 누가 ․ 요한이 복음서를 기술한 것이 훨씬 나중이고, 그 전에도 주기도문으로 모든 분들이 기도를 올렸다는 교회의 전설이 있습니다. 아마 신약이 있기 전에 맨 처음으로 우리에게 전승된 것이 주기도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요전에 모세의 율법을 비교해서 “살인하지 말라”고 했지만 나는 너희에게 이렇게 말한다. 다른 사람을 미워하면 안 된다. 모세는 “간음하지 말라”고 했지만 나는 너희에게 말하지만 이성을 보고 음욕을 품어도 안 된다. 또 모세는 “도둑질하지 말라”고 했지만 나는 너희에게 말하지만 남의 물건을 탐하면 안 된다. 또 모세는 “사기하지 말라”고 했지만 나는 너희에게 말하지만 거짓말하면 안 된다.

  이렇게 해서 예수님의 말씀이 훨씬 더 깊어지고 높아져서 우리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아졌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힘을 받아서 그것을 실천하면 못할 것이 없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 온전하신 것처럼 너희들도 온전하라” 하셨는데 그 말씀을 우리가 “아멘” 하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요전에 그런 말을 했습니다.

  모세의 십계명 가운데 처음의 세 가지인 “내 앞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우상을 섬기지 말라.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말라.” 그것이 중요한 것이고, 그 다음 나중의 네 가지인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사기하지 말라,” 그것이 다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겠습니까?” 그렇게 물어볼 때, “율법과 십계명이 어떻게 적혀 있느냐?”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함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영생에 이르는 길로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하는가에 대해서 세 가지 계명, 그리고 이웃을 어떻게 사랑하는가에 대해서 네 가지 계명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웃을 사랑하려면 도둑질한다든가, 죽인다든가, 사기를 친다든가, 간음한다든가, 그럴 수는 없는 것이고, 하나님을 사랑한다면서 다른 신을 섬긴다든가, 우상을 섬긴다든가, 하나님을 무시한다든가, 그럴 수는 없겠지요. 그래서 모세는 부정적으로 하지 말라 했고, 예수님은 긍정적으로 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예수님의 생각과 모세의 생각이 근본은 같은 겁니다. 예수님도 모세도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방법으로 모세는 십계명을, 예수님은 주기도문을 가르쳐 준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기도한다면 우리는 뭘 바라는 건가. 우리가 소망하는 것은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겠는가. 그것을 바라는 것입니다. 모세는 십계명을 가지고 영생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고, 예수님께서는 기도로 영생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제자들이 어떻게 기도하면 되느냐고 물어 봤을 때 너희는 기도를 이렇게 하라 하고 가르쳐 주신 것이 주기도문이지요. 결국은 주기도문의 내용이나 십계명의 내용이나 다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말라. 모세는 그렇게 말했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라. 뒤집어서 적극적으로 말하는 거지요. 그리고 내 앞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그렇게 말했지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옵소서처럼 적극적으로 말하고, 우상을 섬기지 말라에 대해서 하늘의 뜻이 땅 위에도 이루어지이다 하고 가르쳐주시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주기도문이나 십계명이 똑같은 말인데 십계명은 부정적으로 표시되어 있고, 주기도문은 긍정적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도적질하지 말라에 대해서 일용할 양식만 달라고 하라. 살인하지 말라에 대해서 악에 빠지지 말라 하라. 간음하지 말라에 대해서 시험에 들지 말라. 사기 치지 말라에 대해서 너희들도 거짓말하지 말라. 그리고 남이 거짓말했다고 해서 야단치지 말라. 너희들도 계속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느냐. 너희는 거짓말한 것을 하나님께 사과하여야 한다. 그런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가만히 생각해보면 모세가 유태민족에게 대해서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는가 하는 방법을 가르쳐 준거나, 예수님께서 온 인류를 향해서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는가 하는 방법을 가르쳐준 것이나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선 십계명부터 생각해보고, 이 십계명을 알면 또 주기도문을 알 수가 있습니다. 십계명에 “내 앞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한 것은 유일신 사상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그것은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사상인 동시에 믿음입니다. 새로운 공동 번역에는 ‘하느님’으로 되어 있지만 어릴 때부터 ‘하나님’으로 불러와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안 계신다는 것이 가장 핵심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내 앞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그러면 다른 신들도 있는 것이 아닌가 라고 말할 사람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이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이라는 분은 그 성격이 독특한데, 우주를 창조했다는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주를 창조한 분은 한 분밖에 없지 않느냐. 그러니 하나님이지, 만일 우주를 창조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이 될 이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란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우주를 창조하신 분이라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ㆍ사람ㆍ만물, 이 세 가지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요새 철학적인 술어로 ‘존재와 현존재와 존재자’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러니까 존재는 있는 자, 하나님, 현존재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사람, 존재자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만물, 기독교에서는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께서 지었다고 생각합니다. 산, 그럴 때 산은 뭔가. 이건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것을 너희가 관리해라. 그래서는 자연을 개발하고, 관리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옛날부터 자연숭배라는 것이 오랫동안 계속되어 왔습니다. 산, 그러면 그냥 산이라고 하지 않고 산신이라고 하고, 물도 그냥 물이 아니라 물신, 태양은 태양신, 달은 월신, 그래서 일본사람들은 언제나 아침에 해 뜰 때에 해를 보고 절합니다. 왜 절하나 하면 태양신이니까. 어떤 사람은 또 달보고 절하고, 산에 가면 산에다가 절하고, 그런데 제일 높은 분은 하나님이고, 그 다음이 하나님보다 낮은 계층의 사람이고, 그리고 만물은 다 사람보다 낮아요. 1등은 하나님이고, 2등은 사람이고, 3등은 만물이에요. 그러니까 사람으로서 자기보다 낮은 만물에게 절하면 안 되겠지요.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는 일체 산신, 물신, 나무신 그런 것을 섬기지 말라. 내 앞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말은 자연숭배에 대한 금지입니다.

  그런데 구약시대에 제일 많이 싸운 것이 자연숭배와의 싸움이었고, 신약시대에 제일 많이 싸운 것은 인간숭배와의 싸움이었습니다. 구약은 자연숭배를 집어 치우고 하나님을 섬기라는 것이고, 신약은 인간숭배를 집어 치우고 하나님을 섬겨야 된다는 거지요. 당연한 것입니다. 사람보다 높은 것은 하나님밖에 없는데, 사람은 인간을 숭배하려고 하고, 또 인간 보다 낮은 자연을 숭배하려고 하니까, 하나님이 보시기에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너희는 2등 짜리인데 왜 자꾸 3등 짜리에게 절하려고 하고, 2등에게 절하려고 하느냐. 너희가 절할 곳은 꼭 1등뿐이지 2등과 3등에게는 절대 절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신약시대에 와서 로마시대의 인간숭배라는 것이 굉장히 강했지요. 예수님 당시의 로마의 왕 옥타비아누스는 8월 달에 태어났는데 8월이란 것을 아우구스투스라고 해서 존엄이라는 거지요. 옥타비아누스가 신이다. 그러니까 누구나 절하는 거지요. 예배를 드려라. 성경에도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쳐라. 왜 바치는가 하면 가이사를 숭배하는 뜻에서 바치라는 것이지요. 왜? 가이사가 신이니까. 성경의 묵시록에도 보면 여러 가지 말이 있지만 우리는 로마 황제에게 절할 수 없다. 우리가 절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뿐이다. 그것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박해를 받았습니까. 로마 황제는 사람이지 신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제정시대 때도 일본천황 그러면 신이다. 그래서 우리더러 얼마나 절하라고 했습니까. 이런 쓰라린 역사를 얼마나 겪어 왔습니까.

  그리고 구약시대에는 달, 해, 산을 보고 절하며 섬기는 자연숭배자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우리 기독교의 전통은 자연과 사람에게 절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전통에 사는 서양 사람들은 자연뿐 아니라 사람보고도 절하지를 않아요. 절하는 것은 배우나 가수나 이런 사람들이나 절하지 보통 사람들은 절 안합니다. 안녕하십니까 하고 손을 흔들든가, 말로 하든가 하고 말지요. 미국에 가 보니까 나는 누가 소개하면 일어서서 절을 했는데 그 사람들은 소개해도 뻣뻣이 서 있지 절하는 법이 없습니다. 우리는 자꾸 존댓말을 쓰는데 그 사람들은 존댓말이 없습니다. 말의 고하도 없고, 절하는 것도 없습니다.

  인간은 인간에게 절대 절할 수 없으며, 인간은 자연보고 절할 수 없고, 인간이 절할 수 있는 것은 꼭 하나님뿐입니다.

  그것이 간단한 것인데 실지로는 잘 안 된다는 것이지요. 산에 가면 또 절하게 되고, 절간에 가면 또 절하게 되고, 가장 간단한 진리이지만 이것이 현실에 있어서는 상당히 어렵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구약시대에 계속해서 박해를 받았고, 신약시대에 얼마나 오랫동안 박해를 받았는지 모릅니다.

  그 다음에 “우상을 섬기면 안 된다.” 우상이란 것이 어떻게 생겼는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대개 우리가 생각해 보면 어느 민족이든지 그 민족을 지켜준다는 수호신이란 것이 있어서, 사자死者가 자기의 부락을 지켜 준다고 해서 사자의 형상을 만들어서 갖다 놓고 절하고, 또 여우가 지켜준다고 생각하면 여우한테 절하지요. 그것을 토템이라고 합니다. 결국 자기를 지켜준다는 수호신 사상 때문에 자꾸 만들어 놓는 것 같아요.

  우리도 해인사에 팔만대장경을 만들어 놓고, 부처님이 우리를 지켜준다는 거였지요. 그러나 그 지켜준다는 수호신 때문에 지켜졌습니까.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지요.

  로마가 망하게 될 때가 어거스틴 시대인데, 기독교가 국교가 되어서 로마가 망하게 되었으니 기독교의 신은 수호신의 노릇을 못하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다시 로마의 신을 섬겨야겠다고 하였을 때 어거스틴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수호신이란 무엇인가. 수호신이 있으면 제대로 수호하는 것인가. 우리 기독교에는 수호신이란 생각이 없다. 신이 우리를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신의 것이 되는 것뿐이다.” 그러니까 수호신 사상이란 마치 수위처럼 생각하는 것이지요. 신들을 집의 경호원처럼 생각하고 지켜 달라. 그래서 지켜주면 밥도 잘 먹여 주고, 월급도 많이 주고, 돈도 많이 바치고, 그래서 우상이란 것이 자꾸 나오는 거지요. 그런데 수호신이란 것이 뭐 합니까. 아무 것도 하는 것이 없지요.

  어거스틴은 우리가 하나님의 것이 되는 거지 하나님이 우리 것이 아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우리가 죽어도 그리스도요, 살아도 그리스도요, 그것이 신앙이지, 복 빌어 주세요, 나 잘 살게 해주세요. 하나님이 나 잘살게 해주는 분인가요? 하나님이 날 위해 있는 분인가요? 그것이 아니지요. 우리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이 되는 그곳에 하나님의 나라는 있습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진 곳, 그곳이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수호신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도록 기도하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것이다,”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할 것이 있다면 다만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뿐입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 사는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땅 위에 이루어가는 것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왕이 한 분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유일신 하나님입니다. 우주를 창조하시고, 인류를 섭리하시는 하나님, 그 한 분밖에 왕은 없습니다. 모세는 자연숭배를 생각하고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했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신 분이니까 자연숭배니 우상숭배니 하는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 나라의 왕은 하나님뿐이고, 우리들은 다 하나님께 속한 백성이며,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것이다”라는 것이 곧 주도기문의 말씀입니다.

  모세의 말이 좀 원시적이고 정치적인데 비하여, 예수님의 말씀은 현대적이고 종교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왕이신 하나님께 대해서 백성인 우리들의 태도는 왕에게 대하여 호산나 만세를 부르고,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해야 하고 또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를 수도 없지요. 망령되이 부를 수 없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높여야지요. 거룩하게 높이려면 어떻게 해야 되나. 내가 거룩하게 되어야지요. 내가 성숙하게 되어야지요. 내가 거룩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이름도 거룩해지지를 않지요. 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이니까. 아들이 잘나면 아버지는 저절로 잘나지고 아들이 못나면 아버지는 저절로 못나지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라는 말은 우리가 거룩하라는 말이지요. 레위기 19장 2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손들에게 “너희들은 거룩하라. 나 여호와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이 창조주시니 너희도 창조적 지성이 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흙으로 지으시고, 그 속에 하나님의 영을 불어 넣어주셨다 하였으니까 우리들은 하나님의 영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되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우리를 만들었다 하였으니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되는데, 그 가운데서 제일 중요한 것이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는 하나님이니까 우리도 기구를 창조하고, 문명을 창조하고, 문화를 창조하는 ‘창조적 지성’이 되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란 ‘창조적 지성’이라야 합니다. 그러니까 문명과 문화를 창조하는 사람들이 진짜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그러니까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무엇을 달라고 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을 받아가지고 창조하는 것, 연구하는 것, 생각하는 것, 작품 하는 것, 창작하는 것, 그것이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항상 기도하라는 말은 항상 창작하라는 말입니다. 문화와 문명의 선구자, 그것이 크리스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돈 버느라고 그럴 시간이 없지요. 밥 먹을 것이나 있으면 열심히 연구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일용할 양식으로 족하지 그 이상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하고 기도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연구하고 창작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과 싸울 시간도 없지요. 다른 사람이 무엇이라고 하든 다 용서해주고 상대할 것 없이 내 길을 가야겠지요. 다만 태만이나 교만에 빠지지 말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그것이 ‘시험에 들지 말라’는 것일 것입니다.

  그렇게 연구하고 창작해서 무엇에 쓰자는 건가. 모두 인류의 복지를 위해서 씌어져야겠지요. 과학적인 발명과 철학적인 예술이 모두 인류의 복지를 위해서 씌어져야지. 그것이 사람을 죽이고, 남의 것을 도적질하고, 남을 괴롭히고, 남을 속이는, 그런 것에 씌어지면 안 되겠지요. 그래서 악에 떨어지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로지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영광만이 찬연히 빛날 수 있어야 될 줄로 압니다. 그것이 진짜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는 것, 그것이 ‘아멘’이라는 말입니다.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아멘 하면 무엇 합니까. 주도기문은 한 마디로 하나님의 아들이 어떤 것인가를 가르쳐 주는 말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소원이 있다면 아들이 되는 것, 하나님의 아들답게 되는 것, 그것이 기도입니다.

  기도는 말로 할 수도 있지만 뜻으로 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기 위해서는 뜻으로 기도를 해야 합니다. 뜻으로 기도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몸으로 기도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내 몸을 바쳐서, 내 몸으로 하나님 뜻을 체득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몸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말씀이 육신이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입으로 하는 기도가 아니라 뜻으로, 뜻으로 하는 기도가 아니라 몸으로 하는 기도, 이것이 로마서 12장 1절에 바울 선생이 “몸으로 산 제사를 드리라”는 것이겠지요. 우리가 세상에 태어난 것은 몸으로 산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니까 거룩한 것이 있다면 몸이 거룩해야 됩니다. 몸이 음란에도 빠지지 말고, 몸이 탐욕에도 빠지지 말고, 몸이 살인에도 빠지지 말고, 몸이 거룩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것입니다.

  동양식으로는 수신위본修身爲本 즉 몸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 크리스천의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행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김흥호 설교집 하루를 사는 사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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