셈법
요한복음 11:45-53절 까지 2017/03/26 사순절 제4주
11:45 마리아에게 와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이 그를 믿었으나
11:46 그 중에 어떤 자는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알리니라
11:47 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이르되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11:48 만일 그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그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
11:49 그 중의 한 사람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그들에게 말하되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11:50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
11:51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의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11:52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
11:53 이 날부터는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
비교적 긴 본문인데 함께 찬찬히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평안의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늘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어린 아들이 젊은 아빠에게 물었습니다.
‘아빠 왜 봄이야?’
왜 봄일까요?
젊은 아빠가 말합니다.
‘볼 게 많아 봄이지’
그러고 보니 참 볼 게 많은 계절이 봄인 것 같습니다.
봄, 볼게 참 많지요.
볼 것이 그 어느 때 보다 많은 계절인데
지금 여러분은 무엇을 보고 있는지요?
무엇을 보고 있습니까?
하루는 주님께서 예레미야를 찾아와서 이렇게 묻었습니다.
예레미야 1장 11절입니다.
1:11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예레미야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하시매
무엇을 ‘보다’는 말의 히브리어는 ‘쇼케드’입니다.
‘쇼케드’
‘예레미야, 무엇을 (쇼케드)보고 있니?’ 이렇게 하나님이 묻지요.
그러자 예레미야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가 대답하되 내가 살구나무 가지를 보나이다.’
‘살구나무’
봄꽃을 가장 먼저 피우는 나무 중에 하나이지요.
봄소식을 가장 먼저 전하는 몸의 나무입니다.
그런데 그 살구나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11절 '보다‘는 뜻의 '쇼케드'와 발음이 비슷한 '샤케드'입니다.
‘쇼케드’ 무엇을 보느냐?
'샤케드' 살구나무요?
이렇게 해서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선지자로 소명을 받게 됩니다.
부름 받은 하나님의 예언자.
그 예언자의 특징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쇼케드’ ‘보는 사람’입니다.
역사를 살펴보고, 시대를 살펴보고, 사물을 관찰하고, 사람을 볼 수 있는 사람
그가 바로 하나님의 예언자입니다.
그러고 보니 제가 가장 잘하고 즐겨하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쇼케드’ ‘보는 일’입니다.
저는 보는 것이 참 즐겁습니다.
책보는 것 참 좋아합니다.
저에게 있어서 최고의 쇼핑은 책 쇼핑이지요.
사물을 관찰하는 것도 참 좋습니다.
그래서 여행도 좋아하고 비교적 길눈도 밝은 편입니다.
또 사람을 ‘쇼케드’ ‘보는 것’도 참 좋아합니다.
가끔 이상한 사람 취급받기도 하지만 사람의 얼굴을 살피는 것도 참 좋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저만 가지고 있는 재주가 아닙니다.
여러분들도 각자 나름대로 ‘쇼케드’ ‘보는’ 은사가 다 있지요.
문제는 ‘관점의 차이’입니다.
어떤 것에 더 관심을 두고 그리고 어떤 것을 더 유심히 살펴보는가에 따른 관점의 차이만 있을 뿐 ‘쇼케드’ 나름대로 ‘보는 은사’가 다 있지요.
‘쇼케드’ ‘보다’
이 ‘보다’라는 말은 우리말에서 주로 보조동사로 많이 사용됩니다.
특히 어떤 행동을 강조할 때 '보다'라는 보조동사가 주로 사용됩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스쳐 보다. 쳐다 보다, 지켜 보다, 바라 보다, 만나 보다, 만져 보다, 안아 보다, 품어 보다, 웃어 보다, 그려 보다 등...’
한 없이 확장될 수 있습니다.
말장난처럼 여길 수 있지만 이처럼 사람은 눈으로만 보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마음으로도 보고, 손으로도 보고, 가슴으로도 보고 그리고 행동으로도 본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활을 의심하는 도마에게 우리 주님이 ‘부활의 몸’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못 자국이 있는 손바닥 그리고 창 자국이 난 옆구리’로 보여주십니다.
그런데 고집스럽게 자기 눈만 의지해서 세상을 보려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자기 보고 싶은 대로 보는 사람들이지요.
이들의 특징을 우상화입니다.
사람을 좋아하고 사랑하고 높이는 것이야 누가 뭐라 하겠습니까?
하지만 보는 것이 지나쳐 누군가를 우상화하는 것은 그리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상화하는 순간 그 좋아하는 것도 죽고, 나도 죽기 때문입니다.
정현종님이 쓴 시 중에 ‘우상화는 죽음이니’라는 시가 있습니다.
우상화하지 말라
위대하신 누구이든
우상화 법석 속에서는
우상도 시체요
우상화하는 사람들도 시체이니
제발 우상화하지 말라
그저 좋아하고 그저
사랑하고 사뭇
찬탄은 하리로되
섬기지는 말아야지,
우상은 암이요
우상화는 에이즈요
하여간 전면적인 죽음이니,
사람이든 사상이든, 그 무엇이든 (중간 생략)
세상을 ‘자기 보고 싶은 대로’ 바라보면 자신도 모르게 이런 올무에 걸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자기 보고 싶은 대로’가 아니라 좀 다른 방식으로 세상이든 사람이든 신앙의 세계든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이 문제를 다루고 있는 데 오늘 말씀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11:45 마리아에게 와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이 그를 믿었으나
마리아에게 왔다가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 사람들이 드디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게 되었다는 말로 시작합니다.
어떠한 선입견도 없이 ‘그저 보여 진대로 본 것’이지요.
‘예수께서 하신 일’ 그 일을 보여 진대로 보고
비로써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게 되었다는 내용입니다.
.
그러면 11장 45절 ‘예수께서 하신 일’, 그 일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오직 요한복음에만 기록된 사건인데,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 그 나사로가 갑자기 죽습니다.
그런데 죽은 지 사흘이 지난 나사로를 예수님이 말씀하나로 살리십니다.
‘나사로의 부활 사건’이지요.
그 일을 보고, 11장 25절입니다.
‘예수님이 부활이고 생명이다.’
그리고 11장 27절입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고 그리고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다‘라는 사실을 비로써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누가요?
유대인들 특히 예루살렘으로부터 동쪽 3Km 밖에 떨어지지 않은 비교적 가까운 마을 사람인 베다니 사람들이 드디어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정말 대단하고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이지요.
그런데 이 자연스럽고 역사적인 하나님의 일을 곱게 보지 않는 목격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바로 옛 사람이라는 관습, 그 관습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익숙한 종교, 익숙한 신앙, 익숙한 관습을 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관습에서 벗어나지 못한 ‘부활의 목격자들이’ 이 소식을 누구에게 찾아 가서 제일 먼저 알렸는지 아십니까?
46절입니다.
11:46 그 중에 어떤 자는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알리니라
바리새인들이지요.
영도 믿고 부활도 믿는 바리새인들에게 찾아 가서 제일 먼저 알립니다.
엄청난 희소식지요.
사실 나사로의 부활 사건만큼 희소식이 어디이겠습니까?
그동안 자신들이 주장했던 가르침과 믿음이 드디어 옳다고 인정받을 수 있는 아주 좋은 절호의 기회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나사로의 부활 사건’이 아주 희한하게 전개됩니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이 사건으로 인해 한 마음 한 뜻이 됩니다.
희한해도 보통 희한한 일이 아니지요.
왜냐하면 대제사장들은 바리새인들과 달리 천사도 믿지 않고 영도 믿지 않고 부활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하나가 됩니다.
그들이 하나가 되어 산헤드린 공회를 긴급으로 소집합니다.
소집한 이유는 이렇습니다.
11:47 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이르되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분위기가 아주 이상하게 돌아가지요.
분명한 것은 베다니 마을사람들과 분위기가 정반대로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아주 부정적인 분위기이지요.
첫째 ‘죽은 자의 부활을 믿을 수 없다.’
둘째 베다니 사람들의 신앙 고백들
즉 ‘예수님이 부활이고 생명이다’ 그리고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다‘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흔드는 자가 등장한 것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신 예수님입니다.
다시 47절 후반부입니다.
11:47 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이르되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유대사회라는 기존 질서.
유대교라는 기존 질서.
그 기존 신앙과 질서를 흔드는 예수, 이 사람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이것이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하나가 되어 산헤드린 공회를 소집한 이유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로부터 시작되는 새로운 질서, 예수로부터 시작되는 새로운 세상, 예수로부터 시작되는 새로운 나라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관심 오직 자기 안위, 기존질서, 그리고 자기들이 가진 기득권뿐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기존 신앙과 기존 사회의 질서를 흔드는 예수, 달갑지 않지요.
그들의 걱정은 48절에 가서 더욱 극대화 됩니다.
11:48 만일 그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그를 믿을 것이요
예수를 누구로 믿게 될 수도 있다는 말입니까?
25절, ‘부활과 생명으로’
그리고 27절, ‘그리스도와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로 믿게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런 신앙의 관점 보다는 나사로의 부활 사건으로 인해 자신들의 말보다 예수의 말이 더 권위 있고 신뢰 받을 수 있다는 현실이 그들에게는 불안으로 다가왓을 것입니다.
그러자 그들에 염려가 어디에까지 미치게 되는가하면 11장 48후반부입니다.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
예수라는 한 사람 때문에 나라가 폭삭 망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비약도 이런 비약이 없지요.
그때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아주 신묘 방통한 묘수 하나를 짜냅니다.
50절입니다.
11:50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
무슨 말인가? 하면 이런 뜻입니다.
한 사람 곧 논란 가운데 있는 예수, 이 한 사람을 희생시켜서 민족 전체를 망하지 않게 하는 것이 낫다는 셈법입니다.
정말 기발한 셈법이지요.
한 사람의 희생으로 민족 전체가 살릴 수 있다면 당연히 그쪽을 선택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정말 기발한 셈법입니다.
어떻습니까?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셈법.
누군가를 희생해서 우리가 살자는 셈법
그 셈법에 여러분들도 동의 하시는지요?
물론 상황이 위급하면 우리도 누군가를 희생시킴으로 나의 안위를 보장받고 싶은 본능에 끌려 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25절의 말씀처럼 우리가 예수님을 부활의 주로 그리고 생명의 주로 정말 믿는다면 사단이 주는 이 셈법, 누군가를 희생해서 나의 안위를 보장받는 이 셈법을 우리가 동의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 셈법은 결코 부활 역사, 새 생명의 역사로 우리 모두를 이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누군가를 희생해서 나의 안위를 보장받는 사단의 셈법에 동의 해서는 안 됩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참 신기한 것은 오늘 말씀의 결론부분입니다.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셈법
그것은 분명 사단의 셈법이고 성경적인 셈법이 아닙니다.
그런데 ‘독수리’라는 별명을 가진 요한은 자신의 복음서 요한복음에서 대제사장 가야바의 셈법 속에 숨겨진 비밀하나를 가르쳐 줍니다.
하늘의 비밀이자 영적인 비밀인데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예수님의 셈법 바로 십자가의 셈법입니다.
먼저 나를 희생 남을 살리는 셈법입니다.
11:51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의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11:52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
십자가의 셈법을 통하여 우리가 미리 알 수 있는 사실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십자가 곧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는 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이지요.
또 하나는 십자가, 그 죽음을 통해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서 하나가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전 인류의 구원 역사입니다.
이처럼 자기 자신을 먼저 희생하는 우리 주님의 십자가가 사단의 셈법을 하나님의 셈법으로 바꾸어 놓았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죽이는 셈법에서 사람을 살리는 셈법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지요.
그것이 바로 자기 자신을 먼저 희생하는 예수의 셈법이자 십자가의 셈법입니다.
어떻습니까?
어떤 셈법으로 살아가시겠습니까?
누군가를 희생하는 나의 안위를 보장받는 가야바의 셈법입니까?
나를 희생해서 모든 이들을 살리는 예수님의 셈법입니까?
세상은 우리에게 악마의 셈법을 가르치며 편의주의를 권고합니다.
하지만 여러분 속지 마십시오.
나를 위해 누군가의 희생을 강요하는 것은 모두 악마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니 하루하루 생명을 풍성하게 하고, 평화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십시오.
자기를 먼저 희생하는 십자가의 셈법이 무엇인지 잘 묵상하시고 더디더라도 그 길을 선택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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