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말

한국에 기독교가 들어온 지 130년이 되는 시점이다. 짧은 시간에 양적, 질적 성장을 이룬 한국교회에 대한 주목을 입증하듯 WCC 총회가 부산에서 개최된다. 안팎으로 중요한 시점에 있는 우리는 한국교회의 미래를 위한 새로운 방향을 모색해야 한다. 이러한 때에 종교개혁의 주요 정신이었던 'Sola'에 대한 조명은 의미 있는 일이다. 지역 교회 어디서나 ‘Sola(오직)’, 즉 개혁자들의 모표가 쉽게 발견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개혁 정신인 'Sola'가 개혁 당시의 본래적 의미와 방향을 잃고 '-ism'처럼 자리 잡았다는 염려도 동시에 들려온다.

종교개혁 때부터 개혁 교회가 표방해 온 5개의 명제는 종교개혁 직후, 마치 성벽을 이루는 벽돌처럼 강력한 명제로 자리 잡으며 정통주의를 만들어 냈다. 이후 여러 사조를 겪으며 문제점들은 정리되고 계승되어야 할 것은 적극적으로 취해졌다. 물론 미국을 중심으로 한 근본주의가 나타나기도 했지만 대체로 서구의 기독교는 5개의 모표가 '-ism'으로 진전되지 않은 모습이다. 그러나 한국교회 안에서는 미국에서 이식된 근본주의적 풍토와 교묘한 역학 관계를 이룬 Sola가 '-ism'이 되었다는 염려와 함께 이러한 경향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가진 사람들은 급기야 '솔라주의'라는 단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솔라주의'라는 단어를 채택하고 솔라 정신의 왜곡을 비판하는 이들은 현재 한국교회가 표방하는 'Sola(오직)'는 개혁자들의 그것과는 차이가 있음을 지적한다.

'솔라 정신'은 종교개혁 때부터 개혁 교회가 표방해 온 5개의 솔라, 즉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은혜'(Sola Gratia),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을 모든 사고와 판단과 행동의 원리로 삼음을 말한다. 이것으로 개혁자들은 당시 부패한 교회를 개혁하고자 하였다.

개혁 교회의 전통을 통해 이어온 5개의 모표는 교회를 건강하게 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럼에도 이 명제가 또 다른 '율법'으로 교회에 상처를 주기도 했음은 교회사의 이곳저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세계교회협의회(WCC)는 다양한 기독교 전통과 교류하면서 종교개혁자들의 절대적 기준이었던 성서와 교회의 오랜 전통들에 대하여 대화하였고, 개혁자들이 지키고자 했던 성서의 절대 권위는 책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그 제자들에 의해 계승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자체에 있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정교회나 성공회의 경우, 로마 가톨릭교회와 마찬가지로 전통과 말씀을 존중하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기 때문에 Sola scriptura의 단어적 의미에 선뜻 동의하지 못할 것이다. 종교개혁의 역사적 경험을 갖지 않았던 아프리카의 콥트교회나 에티오피아 교회에게도 솔라는 매우 낯선 표현일 것이다. 한국의 개혁 교회 특히 장로교가 오직/솔라를 강하게 표방하지만 다른 전통의 형제자매들에게는 낯선 풍경이 될 수도 있다.

5개의 솔라 모표는 개혁 교회를 계속 개혁하려는 의지와 실천에 잇닿아 있어야 한다. 그러나 한국의 개혁 교회는 5개의 모표를 '오직 교회만으로'(Sola Ecclesia)라는 표어로 바꾸어 놓았다는 느낌마저 준다. 5개의 솔라 표어를 근거로 교회 안에만(sola) 구원이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온 창조계 안에서 자유롭게 활동하시는 성령의 복음 사역을 개혁 교회의 좁은 울타리 안에 제한하는 교회주의자들에 의해 개혁 교회의 자랑스러운 5개의 모표는 솔라주의'로 자리 잡게 되었고, 이를 토대로 교회주의자들은 교회 안에서 자신의 교권을 확립하고 행사하려고 한다. 더구나 아시아가 놓여 있는 종교 다원의 문화적 상황에서 어떻게 복음을 효과 있게 전할 것인지를 연구하기 보다는 선교를 위한 수많은 대화와 모색들을 '솔라주의’에 위배된다는 명분으로 차단하고 정죄하려고 한다. 종교다원의 사회에서 타종교와의 대화를 시도하기 위해서는 보다 열린 신학이 필요함에도, ‘솔라주의자’들은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신학적 연구마저도 종교혼합주의 내지는 종교다원주의로 정죄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이들은 WCC가 마치 종교다원주의를 결의한 단체인 양 매도하면서 '솔라주의'에 더욱 강하게 매달리고 있다.

종교개혁 5개 모표의 원래적 의미는 로마교황의 교권주의와 로마교회밖에 구원이 없다는 교회주의를 개혁하는 데 있었다. 그런데 종교개혁 이후 500년을 조금 앞둔 요즘 그 의미가 굴절되어 개혁 교회 안의 교회주의자들과 교권주의자들이 자신의 기득권을 강화하기 위해 '솔라주의'를 표방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지점에서 종교개혁 정신의 본질을 되짚어 보는 것은 교회의 본래의 의미와 방향을 확인하여 오늘도 끊임없이 개혁하는 길에 서게 하는 성찰의 과정이 될 것이다.

여기서는 5개 솔라 중에 특별히 '솔라 피데'란 주제에 집중하면서 이 주제를 구약성서 특히 오경에 비추어 검토하려고 한다. '솔라 피데'의 기초는 무엇보다도 의인론(義認論, 또는 칭의론稱義論, justification)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의인론은 성화론(聖化論, sanctification)의 출발점이 되기도 한다. 본인은 오경에 나타난 의인론부터 짚어 본 다음에 성화론을 더듬어 볼 것이다. 오경은 '솔라 피데'를 어떻게 보고 있는가?

1. 신명기의 솔라 정신 : 의인론

신명기는 '솔라 그라치아'를 역설한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된 데에는 이스라엘의 공로가 없다. '네가 가서 그 땅을 차지함은 네 공의로 말미암음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으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이 민족들이 악함으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려 하심이라'(신 9:5).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된 것은 첫째 가나안에 사는 민족들이 악하였기 때문이며, 둘째 조상들에게 하신 하나님의 맹세 때문이었다. 가나안 점령은 이스라엘의 공로로 된 것이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써만 이루어진 일이었다(sola gratia).

이스라엘은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목이 곧은 백성’이다(신9:13).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이 아름다운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이 네 공의로 말미암음이 아니니라 너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신 9:6).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하나님을 늘 거역하다가 여호와의 진노를 샀다(신 9:7).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줄곧 여호와를 거역하였다(신 1:26, 43; 9:23, 24; 31:27, '마라').

세상에서 고생하면서 살다 보니 이스라엘의 심령이 강퍅해지고 목이 곧은 백성으로 둔갑하였다(출 6:9). 세상의 권력을 잡은 지배자들은 우상을 섬기며 완악한 마음으로 폭력을 휘둘렀다. 그들에게 억압을 당하는 피억압민들의 마음조차도 마침내 완악해져서 목이 곧은 백성이 되었다(출 7:3; 13:15; 신 2:30). 가나안의 족속들이 모두 악해졌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을 그 땅에서 진멸하시려고 한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억압당하던 히브리 노예들을 택하신 까닭이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살다 보니 악한 히브리인으로 전락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바가 있어서 그들을 잊지 않고 기억하셨다(출 2:24; 신 10:15). 문제는 히브리인들이 세상의 여느 민족들과 마찬가지로 목이 곧고 성품이 악하여져서 서로 싸우고 갈라져 분쟁하였다는 데 있었다(출 2:13~14; 18:13). 악하게 변질된 히브리인의 성품을 하나님께서 치료하고 교정하고 회복하시기 위해서 그들을 애굽에서 탈출시키셨다. 그들을 광야로 이끌어 내신 것은 광야에서 훈련하여 비뚤어진 성품을 바로잡아 주시려는 의도에서였다. 이스라엘 백성의 성품을 선하게 바로잡아야 악한 가나안 족속을 몰아내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룩할 수가 있을 것이었다. 이처럼 이스라엘이 구원받은 것은 그들의 공로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일이었다(sola gratia).

그러나 광야 40년 동안 이스라엘은 내내 하나님을 거역하기만 하였다. '내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내 이적을 보고서도 이같이 열 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하지 아니한 그 사람들'이 이스라엘이었다(민 14:22). 요단강을 건너기 위해 모압 평야에 다다른 때에도 그들의 거역하는 성품은 고쳐지지 않았다(민 20:2). 심지어 지도자 모세마저도 가데스 므리바에서 자기 지팡이로 두 번이나 바위를 내려쳐서 물을 내어 하나님을 거역했다(민 20:8).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포기하지 않으신 까닭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 때문이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의롭게 여기셨다(창 15:6). 믿음과 칭의의 상관관계가 이 대목에서 드러난다.

'그가 야훼를 믿었다'('워헤에민 바야훼')
'그러자 그것이 그(야훼)에게 의롭게 여겨졌다'('와약흐쉬베하 로 처다카')

놀랍게도 창세기에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표현은 오직 이곳에만 언급될 뿐이다. 히브리어 '아만'이란 동사의 히필형이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동사로 사용된 곳은 창세기에서는 이곳에만 나온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은 유일한 조상이다. 이삭도 야곱도 아브라함의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를 물려받았으며 후대에 이스라엘이 조상들의 칭의를 물려받았다. 바울 사도는 이 점을 의식하여 로마서에서 창 15:6을 인용하고 있다.

출애굽기에서도 하나님을 믿는다는 표현을 '아만' 동사 히필형을 사용한 곳은 오로지 출 14:31 한 곳뿐이다. '백성이 여호와를 경외하며 여호와와 그의 종 모세를 믿었더라'('와야아미누 바야훼'). 이 믿음은 야훼께서 열 가지 재앙을 일으켜서 파라오를 꺾으신 기적을 목격한 후에야 비로소 이끌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백성이 슈르 광야에 들어서서 물 없이 사흘 길을 걸었을 때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출 15:22). 모세를 향한 원망이 백성의 입에서 터져 나왔을 때 야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아무런 작용도 하지 못하였다. 이후로 줄곧 야훼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거역하는 사태가 민수기 20장까지 이어지며 광야 유랑기를 장식한다. 민수기에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불평하는 백성과 모세를 질책하여 '아만' 동사 히필형을 두 차례 사용한다(민 14:11; 20:12). 모세의 회고록을 담은 신명기도 가데스의 거역 사건을 두 차례 인용한다(신 1:32; 9:23). 이처럼 야훼 하나님을 '믿는다'는 표현이 오경에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믿음만을 성경이 강조하는 줄 알았는데 오경에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표현이 희귀하다니?

창세기 15장은 하나님의 언약기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의롭다고 여기신 칭의의 진술(6절)이 있은 직후에 아브라함은 언약의 예배를 드린다. 이 예배에서 하나님께서 후손들이 4대 동안 애굽에서 노예로 고통을 당할 것이라고 말씀하였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주의 언약에 동의하지 못하고 주저주저한다. 이에 야훼 하나님께서 친히 쪼갠 제물 사이로 횃불이 되어 지나가심으로써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신다(창 15:17). 최초의 언약에서 야훼 자신이 언약의 당사자 갑과 을이 되셨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고 인정은 받았지만, 그 믿음이 막상 하나님과 언약을 맺을 때에 아무 소용이 없었다. 하나님의 언약조차도 순전히 하나님이 베푸신 순수한 은총으로만 성립되었다(sola gratia).

오경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하다. 아브라함의 칭의가 구원을 위한 선택의 조건이 된 것은 아니었다. 의롭다고 인정하기 이전에 이미 야훼께서는 아브라함을 불러 택하셨고 하란을 떠나라고 명하셨다(창 12:1). 칭의의 사건이 있기 전에 소명의 사건이 먼저 있었다. 칭의가 있기 전에 이미 땅과 자손의 약속이 아브라함에게 주어졌다(창 13:14~18). 인간의 어떠한 행위나 공로도 심지어는 믿음을 고백하는 행위조차도 구원의 전제조건이 되지 못하였다(sola fide). 온 세상을 죄로부터 구원하시려고 작정하신 하나님의 결단에 따라 예정하신 뜻대로 택함받은 자가 구원을 받는다. 그 예정 속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들어 있었고 그 예정하신 계획에 따라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노예의 고난을 당했다. 이스라엘의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조상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맺으신 하나님의 일방적 언약에 따라 이스라엘은 마침내 구원을 받았다.

'솔라 피데'는 성경의 의인론을 표명한 표어다. 그러나 믿음의 고백이 생명을 살리는 구원의 전제 조건이 되지 못한다는 진실을 토라는 보여 준다. 인간의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총만이 생명을 살린다. 은총론이 오경에서 드높이 빛나며 의인론보다 더 높은 자리에서 펄럭이고 있다(sola gratia). 하나님의 은총으로 믿음이 주어진다. 믿음으로 구원받은 백성이 성화의 길로 나아간다.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신 10:16). 마음의 할례는 성화론의 전제다. 아무 공로도 없음을 자각한 백성은 모름지기 몸을 낮추고 겸손하게 살아야 한다(신 8:2, 3, 16).

겸손을 가리키는 히브리어는 '아나브/아나'이며 교만을 가리키는 히브리어는 '룸'이다. '룸'은 높다는 뜻이고 '아나브'는 낮다는 뜻이다. 마음을 드높이면 교만해지고 마음을 낮추면 겸손해진다. 모세는 이스라엘의 지도자였지만 세상의 어느 누구보다도 더 자기를 낮추는 겸손한 사람이었다(민 12:3, '아나브').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애굽에서 압제를 당하며 낮은 신분으로 살 것이다(창 15:13, '아나').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살 때에는 언제나 애굽에서 노예였음을 잊지 말고 자세를 낮추어 겸손하게 살아야 한다(신 8:14).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받은 데에는 이스라엘의 공로는 조금도 없었으며 오로지 야훼 하나님의 거저 베풀어 주시는 은총이 있었기 때문이다.

토라가 펼치는 ‘솔라 피데’는 의인론을 바탕으로 은총론을 통하여 겸손과 청빈의 삶에로 귀결된다. 교회의 성직이 권력과 부과 명예를 안겨 주는 자리로 귀결되는 것은 개혁의 대상이다. '솔라 피데'를 모토로 내세우면서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교단을 정죄하는 배타주의는 종교개혁의 솔라가 아니다. '솔라 피데'를 외치는 사람이라면 더욱 겸손해져야 마땅하다. 사회의 낮은 자리에 처하라는 부름을 받고 인간의 죄성을 더욱 깊이 각성하는 영성에로 나아가야 한다.

2. 토라의 솔라 정신 : 나 외에 다른 신들은 없다

고대 근동의 모든 종교는 다신교(polytheism)였다. 가나안의 신은 엘(El)이었는데 수많은 '엘'들이 만신전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정은 메소포타미아나 이집트나 그리스나 로마나 모두 마찬가지였다. 만신전에는 위계가 있었으며 최고신 '엘 엘룐'이 권력의 정점에서 지배하고 있었다. 최고신은 그 도시국가의 왕을 점지하고 주변의 다른 신들과 주종의 관계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므로 신들의 관계에서 전쟁은 필연이었으며 최고신이 다른 최고신을 복속해 나가는 치열한 전쟁은 도시의 전쟁을 대표하는 신화로 표현되었다.

창세기는 살렘 왕 멜기세덱이 '엘 엘룐'을 섬기는 제사장이었다고 보도한다(창 14:18). 여기에도 다신론이 전제되어 있다. 메소포다미아와 가나안의 도시국가들은 저마다 하나씩 수호신 우상을 섬기고 있었다. 도시국가의 왕들은 해마다 신들의 이름으로 전쟁을 벌이며 세력 다툼을 벌였다(창 14:1). 그들이 벌이는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신들의 전쟁이 신화로 발달하였다. 만신전은 도시국가의 왕들이 신봉하는 신들의 위계질서를 보여 주며 신화를 창출하였다. 성경은 다신론의 종교 문화를 부정하고 신화를 역사화하며 강하게 유일신론을 펼쳤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다신론이라는 시대의 한계를 넘지 못하였다. 야훼 하나님과 독보적인 관계를 맺은 아브라함의 신앙은 이삭에게로 전수되었지만 야곱에 이르러서 일대 위기를 겪는다. 야곱은 만신전의 다신들을 섬기다가 나중에 야훼를 자신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을 거친다(창 35:4). 애굽에 내려간 야곱의 후손들은 야훼를 섬기는 일에 태만하다가 마침내 그 이름을 망각해 버리고 만다(출 6:3). 그러나 모세를 통하여 히브리인들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신 하나님께서는 히브리인들을 자신의 백성으로 삼으시려는 계획을 실행하신다. 그들을 광야로 이끌어 내시고 이어서 시내 광야로 인도하신다. 야훼께서 호렙 산 꼭대기에 내려오신다(출 19:1). 산 위에서 십계명을 베푸시며 자신이 야훼이심을 이스라엘에게 밝히 알려 주신다(출 20:2).

그리고 야훼 하나님은 만신전의 다른 신들을 일체 비존재라고 선포한다. 만신전은 없는 것으로 여기라고 명령하신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출 20:3). 히브리어 원문은 '로 이흐예-러카 엘로힘 악헤림 알-파나이'이다. 밑줄 친 '이흐예'는 존재를 나타내는 동사 '하야'의 현재형이고 '로'는 부정어이므로 '있지 않다'는 말이다. '악헤림'은 '다른/other'이란 뜻이다. 다른 신들의 존재를 인정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지시이다. 십계명은 신명기 5장에도 다시 나온다(신 5:7). 거기서도 이 선포는 그대로 되풀이된다.

'다른'이란 형용사 '악헤림'의 반대말은 '엑하드'인데 '하나의/유일한'이란 뜻이다. 우리말로는 '한/'에 해당한다. 이 단어는 신명기 6장 4절에서 하나님을 수식하는 형용사로 사용된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엑하드') 여호와이시니'(신 6:4). 십계명은 유일신을 선언하며 설교자 모세는 신명기 6:4에서 그 선언을 더욱 간명하고 분명하게 정리해 준다.

유일신 선언을 문명사의 눈으로 비평해 보자. 도시국가의 왕과 사제가 신전에 봉안한 만신전의 체제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없는 것이라고 선언하면 어떻게 될까? 이스라엘은 그것을 선언하는 주체다. 만신전의 체제를 부정한다는 것은 고대 근동의 도시국가들이 이룩하고 있는 정치체제와 문명을 부정한다는 뜻이다. 더 광범하게는 제국의 하부를 구성하는 노동과 생산의 연결 고리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결단이다. 만신전은 국가 체제를 옹호하는 이데올로기였기 때문이다.

십계명의 유일신 선언은 고대 근동의 국가들이 강고하게 구축하고 있는 번영의 시스템을 부정한다. 국가의 지배자들이 누리는 권력의 네트워크를 송두리째 부정하는 선언이다. 도시국가가 저마다 하나의 최고신으로 숭배하고 있었다. 다신교의 문명 속에서는 도시가 도시를 겨루어 배척하는 배타주의의 문화가 성행하였다. 신들이 위계질서 속에서 서로 경쟁하고 있는 동안 영웅들이 지배하는 도시들은 군사력을 다투어 서로 싸웠다. 한 도시의 신은 다른 도시의 신들과 경쟁 관계에 있지 않으면 종속 관계에 있어야 했다. 봉신 조약을 맺는 바탕에는 신들의 종속 관계가 깔려 있었다. 다신론은 배타주의의 경향성을 품고 자라난 우상 종교로서 개혁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또한 고대국가의 만신전 체제는 노예노동의 토대 위에 구축된 도시 문명을 합리화한다. 노예들은 인간이 아니며 신들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는 교리를 도시의 신전에서 가르친다(참조; 아리스토텔레스). 노예는 전쟁에서 포로로 획득한다. 가난하여 빚진 자들이 종국에 받아들여야 할 숙명이 노예였다. 사회적 약자는 마땅히 노예가 된다. 그러나 야훼는 노예들을 해방시키시는 하나님이시다. 야훼를 믿는 히브리인들은 도시국가의 만신전에 봉안된 신들을 모조리 비존재(無)라고 선언하면서 노예 해방운동에 나섰다(출 21:1~6). 야훼께서는 노예들을 육체뿐만 아니라 영혼까지도 온전히 해방하시고 그들에게 휴식을 안겨 주신다. 이것이 바로 안식일의 의미다(출 23:12). 히브리 노예의 하나님은 안식일을 제정하신 창조주 야훼이시다(창 2:1~3). 노예들이 해방되면 그 노예를 부리던 도시국가의 체제는 무너지기 마련이다(출 1:10). 야훼는 국가 체제를 무너뜨리는 하나님이시다. 야훼의 해방운동을 본 애굽의 '모든 신', 곧 애굽의 만신전이 야훼 하나님에게 심판을 당하였다. '애굽의 모든 신('콜-엘로헤이 미츠라임')을 내가 심판하리라 나는 여호와라'(출 12:12). 여호수아는 가나안의 서른 한 개의 도성들을 무너뜨리고 그 왕들을 처단하였다(수 12:24).

유일신 신앙은 토라의 솔라 정신이다. 토라의 솔라 정신은 만신전을 부정한다. 다신론의 배타주의를 부정하고 만민이 한 분 하나님 앞에 평등하다는 보편주의를 표방한다. 보편주의가 유일신 사상의 본질이다. 유일신 신앙은 역사 속에서 처음으로 전쟁을 부정하였다. 여러 도시국가들이 벌이는 전쟁을 부정하며 평화의 길을 제시하였다. 재물과 노동력을 취득하려고 휘두르는 폭력은 중단되어야 한다. 모든 영웅들을 합리화하는 신화는 모조리 부정되어야 한다(창 6:1~4; 10:8~10). 뿐만 아니라 노예노동력 위에 세워진 모든 도시국가의 문명을 송두리째 부정해야 한다(창 4:17). 도시 문명을 대신할 대안을 제시하려는 운동을 펼쳐야 한다. 이것이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을 바라보는 희망의 내용이었다.

토라의 솔라 정신은 이처럼 배타주의를 버리고 보편의 바다에로 노 저어 가며,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평화의 희망을 목청껏 노래하면서,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시며 만신전의 다른 신들을 생명이 없는 우상이라고 가르쳤던 히브리인들의 사상이었다. 이것이 소위 헤브라이즘의 사상적 요체인 것이다. 이것은 곧 바로 우상 제작 및 숭배 금지의 선포로 이어진다.

3. 새긴 우상과 부어 만든 우상을 혁파하라

십계명의 다음 조항은 우상 제작 및 숭배 금지의 조항이다. 원문을 자세히 보면 남다른 뜻이 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새긴 우상'은 원어로 '페셀'이다. '페셀'은 '조삭(彫削)하다'란 동사 '파살'에서 파생한 명사형이다. 나무나 돌을 쪼아서 조삭한 모형을 페셀이라고 부른다. 페셀이란 단어를 '새긴 우상'이라고 번역했는데 어떤 물체의 형상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조삭하는 노동 행위의 결과물을 가리킨다. 목재를 공급하는 장소는 산판이었고 산판의 힘겨운 노예노동에서 페셀이 생산되었다. 또 석재를 생산하는 채석장에서 강제 노동이 자행되었고 채석장의 힘겨운 노예노동에서 페셀이 생산되었다. 이것이 페셀이란 단어가 지닌 사회경제적 배경이다. 페셀에는 노예노동력이 투여되어 있다. 노예를 해방시키신 하나님은 노예노동으로 만든 모든 물건의 제작을 금하신다. '페셀을 만들지 말라'(출 20:4; 신 5:8, 로 타아세-러카 페셀).

계약법은 서두에서 페셀을 해설하고 있다. '너희는 나를 비겨서 은으로나 금으로나 너희를 위하여 신상을 만들지 말고'(출 20:23). 원어를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나를 만들지 말라. 은신('엘로헤이 케세프')으로나 금신('엘로헤이 자하브')으로 만들지 말라.' 금이나 은은 조삭 행위로 제작할 수 없다. 불에 녹여서 거푸집에 부어서 작품을 뽑아야 한다. 계약법의 금신과 은신은 십계명의 페셀을 좀 더 상론하고 있다. 계약법은 주물 신상의 제작을 금지한다. 주물 신상의 제작이 중단되면 광산업자가 망한다(행 19:24~27).

모세가 시내산 위에서 말씀의 두 돌판을 받는 동안 산 밑에서는 백성이 아론을 압박하여 금송아지를 제작하였다. 이스라엘 백성은 금송아지 앞에서 제사를 지냈다(출 31:18~32:6). 이로써 처음 맺은 언약은 무위로 돌아갔다. 모세의 중보 기도로 하나님이 진노를 풀으신 후 하나님의 지시로 모세는 다시 언약을 맺는다. 새 언약을 맺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다시 우상 제작의 금령을 선포하시는데 이때 페셀이 아니라 '마세카'라는 용어를 사용하셨다. '너는 신상들을 부어 만들지 말지니라'(출 34:17). '신상들'의 원어는 '엘로헤이 마세카'인데 '마세카'를 직역하면 '주물상'이 된다. '마세카'는 철이나 구리 따위를 녹여서 부어 만든 주물상(鑄物像)을 가리킨다.

주물상의 제작을 위해서는 구리나 철을 캐는 광산의 노동이 전제되어 있다. 도시 문명은 청동기시대에 발호하여 오랜 세월을 거쳐 철기시대를 낳았다. 도시 문명을 지탱하기 위해서 청동제 무기와 철제 무기들이 대량으로 생산되었다. 이 수요를 채우기 위해서 광산업이 성하였다. 광산에서 금속을 채굴하려면 노예노동력을 대량으로 투입해야 했다. 대량의 노예노동력은 임노동으로 공급할 수 없었기에 포로들을 양산하는 전쟁이 문명 생활의 필연이 되었다.

새 언약법이 규정하는 것은 광산에서 자행되는 노예노동의 금지였다. 십계명과 처음의 언약법은 채석장과 산판의 노예노동을 금지했다. 유일신 신앙은 전쟁을 불법화하고 노예를 해방하라고 선언한다. 더 나아가 노예들의 노동 현장에서 생산하는 모든 문명의 이기들에 대하여 생산금지 처분을 내린다. 곧 "만들지 말라"는 금령을 선포하였다. 노예노동의 생산물을 금지하게 되면 도시국가의 체제는 무너지고 만다. 이것이 야훼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역이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은 유일무이하다. 여느 도시국가의 만신전에 부속된 신도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독특한 작업이 야훼 하나님의 사역이다.

이와 같이 토라의 솔라 정신은 고대 노예제를 딛고 번성하던 모든 도시국가 문명의 존재 방식을 송두리째 부정하며 무너뜨린다.

4. 야훼 제단의 솔라 정신

언약법의 서장에는 제단법이 나온다. '내게 토단을 쌓고'란 규정이 이채롭다(출 20:24). 원어를 음역하면 '미즈박흐 아다마 타아세-리'이다. '미즈박흐'는 '제단/altar'이고 '아다마'는 '흙'이다. 개정역은 이 둘을 합쳐 '토단(土壇)'이라고 하나의 용어로 번역했으나 새번역과 공동역은 '흙으로 제단을 쌓으라'고 옮겼다. 흙으로 만든 제단은 돌로 만든 제단을 부정한다. 야훼 하나님은 자신의 제단이 돌이 아니라 흙으로 만들어지기를 원하신다. 출 20:4에서도 명하셨듯이 야훼 하나님은 채석장에서 만든 석제품 '페셀'을 싫어하신다. 간혹 흙이 없는 자갈밭이나 돌밭에서 예배를 드릴 때에는 부득이 돌로 제단을 쌓을 수도 있다. 이런 경우에는 자연석으로 제단을 쌓도록 명령하신다. '네가 내게 돌로 제단을 쌓거든 다듬은 돌로 쌓지 말라'(출 20:25). '다듬은 돌'은 원어로 '가지트'인데 정으로 쪼아서 만든 석제품을 가리킨다.

고대의 지구랏과 피라미드 같은 제국의 제단이 하나같이 정으로 쪼아서 만든 '가지트’로 건설되었다. 이것들이 모두 노예노동의 산물이란 점에서 '페셀', 곧 '새긴 우상'과 본질상 동일하다. 페셀이나 가지트가 모두 노예노동의 산물이기에 노예들이 찍어낸 벽돌로 비돔과 라암셋 같은 국고성을 건설하는 일도 야훼 하나님 앞에서는 역겨운 일이었다(출 1:11). 노예노동력을 상징하는 작업은 창세기 서론의 말미를 장식하는 바벨 도성의 건축 현장에도 묘사된다.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창 11:3). 바벨 도성민들이 지구랏과 같이 층계를 놓아 하늘까지 닿게 높은 '탑('믹돌')’을 건설하였지만 야훼 하나님께서는 제단에 층계를 놓지 말라고 엄금하신다(출 20:26). 유일하신 창조주 하나님은 인권을 유린하고 피를 흘려서 만들어진 모든 제품을 금지하신다.

시내산에서 야훼께서 명령하신 제단법을 후세의 사람들은 지키지 않았다. 후일 통일 왕국을 경영한 솔로몬 왕은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면서 이 법을 무시했다. 흙으로 쌓는 제단은 위용도 없고 외모도 초라하니 일국의 왕실 채플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흙 제단은 이곳저곳 유랑하는 나그네들에게 걸맞는 제단이었다. 솔로몬이 다윗의 통일 왕국을 물려받아 국가의 위용을 뽐내기 위해서는 웅장한 건물을 지어야 했다. 그래서 솔로몬은 과감하게 페셀과 가지트로 건축할 것을 지시했다. 레바논 산판에 대규모 노동력을 투여하였다. '이에 왕이 명령을 내려 크고 귀한 돌을 떠다가 다듬어서 성전의 기초석으로 놓게 하매 / 솔로몬의 건축자와 히람의 건축자와 그발 사람이 그 돌을 다듬고 성전을 건축하기 위하여 재목과 돌들을 갖추니라'(왕상 5:17~18). 히브리어 성경은 왕상 5:31에 '가지트'란 단어를 명기하여 출 20:25을 위반하였음을 적시하고 있다. 이 재목과 석재들을 갖추기 위해서 솔로몬은 십만여 명의 백성들을 노예노동력으로 동원하였다(왕상 5:13~16).

그러나 솔로몬은 시내산의 언약법을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묘안을 궁리해 냈다. 석자재를 채석장에서 다 쪼아서 만들은 다음에 현장에서 조용하게 조립하는 방식이었다. 석재나 목재를 멀리 떨어진 공방에서 다 깎아 만든 다음에 성전 마당으로 가만히 운반해 와서 그것들을 조립하여 맞추는 건축 방식을 고안했다. 이로써 방망이로 쪼는 소리가 성전 뜰에서는 야훼께 들리지 않게 하였다(왕상 6:7). 왕국의 위용을 갖추면서도 야훼 하나님의 비위도 상하지 않게 하려는 솔로몬의 고육지책이었다. 하지만 싫어하는 재료로 만들어진 집에 야훼 하나님께서 입주하실 리는 만무하였다. 그 결과 예루살렘 성전에는 야훼께서 임재하여 거주하지 않으셨음이 드러났는데 느부갓네살이 침공하여 성전을 다 허물어 뜨려도 야훼는 묵묵부답 아무런 응답이 없었던 것이다. 예루살렘의 국가 성전에는 야훼께서 계시지 않았음이 입증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가나안을 점령하던 초기에 여호수아는 자연석으로 제단을 쌓았다. 여리고 성과 아이 성을 무너뜨리고 난 다음에 자연석 제단에서 제사를 지냈다. '이는 여호와의 종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한 것과 모세의 율법책에 기록된 대로 쇠 연장으로 다듬지 아니한 새 돌로 만든 제단이라 무리가 여호와께 번제물과 화목제물을 그 위에 드렸으며'(수 8:31). 이처럼 처음에는 제단법을 잘 지키던 이스라엘이었다. 그러나 세상 속에서 살다 보니 이방 국가들의 풍물에 영향을 받아 솔로몬 시대에 이르러서는 야훼 제단의 솔라 정신이 무너지고 말았다. 국가의 위용을 자랑하려면 거대한 신전이 필요했다. 야훼 신앙을 국가의 이데올로기로 전용했기 때문에 이러한 변질은 불가피했다.

북왕국 시대에 시리아의 나아만 장군이 엘리사에게 와서 나병을 고쳤다. 치유를 받은 나아만은 오로지 야훼에게만 흙 제단을 쌓겠다고 결심한다. '나아만이 이르되 그러면 청하건대 노새 두 마리에 실을 흙을 당신의 종에게 주소서 이제부터는 종이 번제물과 다른 희생 제사를 여호와 외 다른 신에게는 드리지 아니하고 다만 여호와께 드리겠나이다'(왕하 5:17). 이스라엘이 세상의 다른 나라들과 같이 왕의 제도를 도입한 까닭에(삼상 8:5, 20, '다른 나라들 같이 되어') 야훼를 섬기는 제단을 이방인들의 제단처럼 다듬은 돌로 만들어 개악하고 말았다. 이것이 왕국과 성전 멸망의 원인이 되었다.

가나안의 세속 도시를 하나님의 나라로 개혁하는 데 있어서 야훼의 제단은 유일한 제단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요단 동쪽 지파들이 실로의 제단과는 다른 큰 제단을 따로 쌓았다(수 22:10). 이에 온 이스라엘이 그들과 싸우려고 실로에 모였다. 비느하스와 천부장들이 요단 동편으로 가서 '너희가 어찌하여 너희를 위하여 제단을 쌓아 여호와께 거약하고자 하느냐? ... 오늘 너희가 돌이켜 여호와를 따르지 아니하려고 하느냐? ... 오직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제단 외에 다른 제단을 쌓음으로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며 우리에게도 거역하지 말라'라고 따졌다(수 22:16~20). 이스라엘에는 오직 여호와의 제단만 허용될 뿐 저마다 자기를 위하여 제단을 쌓으면 안 된다. 요단 동편 지파들은 비느하스의 추궁에 답변하기를 그들이 만든 제단은 제사용이 아니라 후세를 위한 기념물로서 여호와의 제단 모형에 불과할 뿐 야훼 외에 다른 신을 섬기려고 만든 것이 아니라고 응답하였다(수 22:28). 이로써 갈등은 해소되었다.

야훼 예배의 솔라 정신은 기독교가 세상의 모든 종교들과는 구별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가나안의 종교는 저마다 도시국가의 체제를 떠받치고 있었다. 그들이 국가의 종교가 되기를 원하였다면 야훼 종교는 국가의 종교를 거부한다. 이 점에서 야훼 종교는 세상 종교들과 완전히 구별된다. 종교인이 국가의 권력과 짝하여 사회의 상층부에서 중요한 인물로 등용되기를 바란다면 그는 야훼 종교와는 무관한 바알의 종교인이다. 그는 세상의 권력과 물질을 탐하는 우상숭배자에 불과하다. 야훼 종교의 예배자들은 국가의 권력 구조로부터 완전한 일탈을 시도한다. 이것이 야훼 예배의 솔라 정신이다.

이들이 성경을 작성하였다. 토라를 작성한 공동체는 바빌로니아 시대에 도시 인근의 촌락에서 집단으로 거주하면서 그 도성을 위한 노예노동에 종사했다. 이들 디아스포라가 페르시아 제국의 치하에서 자치 공동체를 형성했다. 디아스포라 자치 공동체에서 말씀 예배가 발달하였으며 성경이 저술되었고 이들은 국가를 대신할 새로운 사랑의 공동체를 꿈꾸었다. 그런데 한국교회의 '솔라주의자'들은 유일신 하나님을 믿고 오직 예수를 내세우면서 엉뚱하게도 교권주의와 교회주의를 표방한다. 기독교의 교권을 거머쥐고 지도자로 자처하는 자들은 스스로 사회의 유력자가 된 것을 기뻐하면서 더 나아가 국가권력자들과 노닐기를 탐한다.


5. 토라의 하나님나라 : 말씀 공동체

유일신 사상 운동은 우상숭배를 강요하는 도시국가들의 사회 체제를 부정하며 새로운 사회의 건설을 추동하였다. 다신교의 우상숭배는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가 갈라져서 싸우는 것을 합리화하였다. 서로 경쟁하고 전쟁을 벌이는 갈등의 사회 상황을 전제로 다신론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상숭배의 사회사적 본질이다.

전쟁과 투쟁의 악순환에 빠진 사회는 선악과를 먹은 인간의 죄에서 비롯되었다. 인종차별과 계급 대립과 국가 경쟁의 우상숭배는 모든 시대의 바탕을 이루어 왔다. 이것을 가리켜 성경은 죄라고 부른다. 죄악의 시대에 종언을 선고하고 그 대신에 만민 평등과 계급 화해와 인류 우애를 펼치는 새로운 사회를 디아스포라 공동체는 추동하였다. 이것이 곧 말씀 예배의 기원이었다. 오로지 야훼만을 하나님으로 섬기는 유일신 신앙을 나누는 소통과 조화의 에큐메니즘 공동체가 말씀 공동체로서 성립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에큐메니즘을 유일신 신앙의 언어로 펼치고 있는 것이다. 모든 인종과 민족의 다종 다기한 전통과 문화가 온누리에 퍼져 있다가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유일신 신앙 안으로 나아와서 믿음이라는 넓은 마당에서 서로 소통하고 조화를 이루며 춤을 춘다. 이것이 토라가 꾸는 희망의 꿈이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한 분 하나님 안에서 사랑으로 일치를 이룩하려는 개혁 운동이 곧 유일신 신앙이었다. 토라의 '솔라 피데'는 오직 로마 가톨릭의 미사만이 참 성례전이라고 주장하는 근거를 박탈하며, 거꾸로 오직 개신교의 교조만이 참되고 나머지 신조들은 이단이라고 규정하는 만용도 배제한다.

따라서 유일신 신앙은 권력을 쥔 지배자들에게서 나오지 않는다. 연약하여 억압당하는 사회적 약자들의 공동체에서 유일신 신앙이 태동하였다. 도시국가가 추동하는 모든 물질주의 문명과 권력지상주의, 그리고 엘리트 지배 체제를 우상숭배로 규정하는 힘은 노예살이로 고난을 당하는 하위 천민 집단에서 솟구쳐 올랐다. 우상숭배가 권력을 지향하기 때문에 우상숭배와의 투쟁을 선언하는 것이 유일신 신앙이다. 다시 말하자면 유일신 신앙은 세속주의와의 결별이며 세속 국가 체제를 부정하는 대안 사회 운동이었다. 그러므로 유일신 신앙 운동은 처음부터 평화주의를 표방하였으며 만민 평등 사상을 제시하였다. 그 태동기에 벌써 제국의 억압을 받았으며 고난을 당하였다. 그들은 모든 억압을 물리치고 모든 피억압 민족이 해방되어야 한다는 당위를 구원의 현실적 내용으로 선포하였다.

유일신 신앙이 가장 중요하게 가르치는 사항은 창조주 하나님의 신앙이다. 창조 신앙을 바탕으로 구원 사상도 제자리를 잡았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청사진도 구체화되었던 것이다. 지구상에 있는 모든 생명이 복되게 살아야 하며 서로가 서로를 섬기는 생명의 연결망에 사람이 있어 그 중심 되는 역할을 해야 한다. 생명 살림의 사명을 띠고 태어난 자가 바로 인간인 것이다. 유일신 신앙의 이러한 에큐메니즘이 바로 기독교의 본질적 내용이다.

나가는 말

유일신 신앙의 본질은 에큐메니즘에 있다. 그러나 에큐메니즘은 유대교의 당국자들에 의해 왜곡되고 말았다. 유일신 사상 운동에 민족주의와 국가주의의 요구가 개입하면서 다윗 왕국의 재건을 노리는 메시아주의가 득세하였다. 국가의 건설을 부정하는 토라의 말씀을 저버리고 국가를 건설하려고 노력하였다. 하스모네 왕국을 통하여 성립한 바리새주의는 마침내 유일신 사상을 변질시켰다. 그들의 손에서 토라는 배타주의를 내뿜는 다신교의 아류로 퇴영하고 말았다. 유대주의라는 새로운 해석의 기관이 유일신의 보편주의를 왜곡하고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로써 토라를 압도하고 말았다. 이러한 왜곡을 바로 잡으신 분이 예수였다.

예수는 토라가 가르치는 솔라 정신의 내용을 정확하게 해석하고 삶에 적용하였다. 로마제국을 타파하고 민족의 독립을 쟁취하여 참된 다윗 왕국을 재건하려는 노력은 예수로 인해서 오류임이 드러났다. 유대민족주의의 선민사상을 고취하는 일체의 유대교는 예수에 의해서 비판을 받았다. 예루살렘 성전 중심의 교권주의는 예수에게 책망의 대상이 되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새로운 공동체가 바리새적 유대교를 부정하였다. 이로써 기독교가 교회의 형태로 역사에 새롭게 등장하였다.

교회는 유대교가 왜곡한 유일신 신앙을 바로잡았다. 토라를 왜곡하는 오류를 피하기 위해서 삼위일체의 교설을 제시하였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하나의 우시아(ousia)이며 세 가지 휘포스타시스(hypostasis)로 일치되어 있음을 가르쳤다. 삼위일체는 헬레니즘의 세계 속에서 유일신 신앙을 가리치는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이로써 교회는 토라가 가르치는 하나님을 유대교의 민족주의와 혼동함이 없이 올바로 펼쳐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초대교회가 제시한 삼위일체의 교설이 불행히도 칼을 거머쥐고 휘두르는 로마제국의 손에 넘어가고 말았다. 국가의 권력과 결탁한 로마교회의 손에 의해서 모든 다양한 신앙 사상들은 배척당하고 제거당하는 수난을 겪었다. 박해를 견뎌온 교회가 콘스탄틴 시대에 거꾸로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이단으로 몰아 처형하고 박해하게 되었다. 권력을 쥔 교회는 세상의 국가 질서를 유지할 필연성 때문에 반드시 폭력을 휘두르는 법이다. 자기와는 다르게 생각하고 믿는 기독인들은 이단자로 낙인이 찍혀서 박해를 당하여 죽어 갔다.

개혁 교회는 다섯 가지 '솔라'의 원리를 표방하면서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배척하고 박해해서는 안 된다. 개혁 교회는 다른 신앙을 박해하는 오류에 빠진 로마교회에 저항하였다. 다섯 가지 솔라의 원리는 교권주의나 교회주의를 표방하는 원리가 아니었다. 오직 교회 안에만 구원이 있다고 강변하면서 하나님의 무한한 자유를 제한하려는 교회주의자들을 향해서 개혁 교회의 솔라 원리는 스스로 개혁하라고 요구한다. 성경은 교회의 교권주의와 교회주의에 저항한다. 개혁자들이 성서로 돌아가자고 외친 것은 참된 유일신 사상으로 회귀하려는 운동이었다. 그러나 개혁 교회는 교황청과 전쟁 상황에 돌입하면서 세속 국가의 군사력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개혁 교회는 자본가들과 결탁하여 근대국가의 건설에 앞장섰다. 바로 이 점이 국가를 경계하라는 토라의 가르침에 위배되었다. 이로써 서구의 국가들이 식민지 시대에 아시아, 아프리카에 폭력을 휘둘렀을 때 개혁 교회는 그들의 악행을 저지하지 못하였다. 근대국가가 자본가 사회를 이루고 노동자들에게 노예노동을 강요했을 때 교회는 침묵하고 말았다. 그래서 개혁 교회는 부단히 개혁해야 한다(칼빈). 로마교황청이 국가권력과 결탁하여 저질렀던 수많은 폭력 사태를 개혁 교회도 그대로 저지르게 되었던 것이다.

이제 새로운 개혁의 솔라 원칙들이 아시아 아프리카의 교회에서 터져 나와야 한다. 서구교회의 교권주의와 교회주의를 조금이라도 내재하고 있는 신학 사상과 교회 공동체는 아시아, 아프리카의 새로운 교회 안에서 철저히 녹아져 없어져야 한다. 창조주이신 하나님 안에 만물이 숨을 쉬고 생명을 꽃피우고 있느니 유일신 하나님을 믿는 교회는 그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고 오늘도 변화된 상황에서 구원의 사역을 펼쳐 생명을 꽃피워야 할 것이다.

이영재 목사 / 전주화평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