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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호목사의 『위기 속에서 대안을 찾찾다』

心貧者 2010. 8. 21. 22:43

김경호목사의 '생명과 평화의 눈으로 읽는 성서' 시리즈의 네 번째 책이 나왔다. 포로기와 그 이후 예언자를 다룬『위기 속에서 대안을 .
'생명평화성서시리즈'는 그동안 오경을 다룬 『야훼신앙의 맥』과 역사서를 다룬 『새 역사를 향한 순례』, 왕국시대 예언자를 다룬 『시대의 아픔을 넘어서』를 출간했고 이번에 제4 권이 나온 것이다. 금년 안에 제5권, 지혜문학을 다룬 『신앙의 새로운 패러다임』도 나올 예정이다.

   
▲ 김경호 목사 ⓒ 이필완

'생명평화성서 시리즈'는 평신도를 위한 대안적인 성경공부교재이다. 한국교회를 지배하는 허다한 성경공부 교재들이 문자주의, 근본주의에 매인 저열한 신학의 산물임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의식을 개선하고 대안을 찾기보다는 교회운영자들은 교재선택을 함에 있어서 교회부흥에 도움이 되느냐에 초점을 맞춰왔다. 이런 풍토는 진리추구보다는 현실의 안녕만을 선호하는 교회소비자들과도 죽이 맞았다. 그래서 몇 가지 성서공부 프로그램들은 큰 재미를 보고 계속 진화를 거듭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한국교회는 진리와는 거리가 멀어지는 모순의 상황이 계속되고 만다.

이 책은 모두 7장으로 구성됐다. 1장은 식민지시대 위기와 신학적 대안을 조명했고, 2-7장은 구약의 포로기와 그 이후 시대 예언자를 다루었다. 이 대목에서 독자들은 '식민지시대'라는 표현이 낯설 것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언어는 '포로기시대'이다. 포로기시대라는 명명은 잡혀간 사람들을 중심으로 서술하는 역사이다. 반면에 식민지시대는 유대와 이스라엘에 남아 있는 평범한 민중을 중심으로 보는 역사이다. 어디에 방점을 두느냐에 따라 관점이 달라지기 때문에 둘의 개념차이를 인식하는 것은 중요하다. 무엇보다도 식민지 시대 이후 이스라엘 본토에서 토착 귀족과 귀환 귀족 사이에 벌어지는 권력투쟁의 여파로 사회모순과 갈등이 더욱 깊어지고 그 여파는 등골휘는 민중들에게 고스란히 전가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대신앙의 근간인 안식일, 할례뿐만 아니라 우리가 지금 읽고 있는 구약성서가 포로기 시대, 잡혀간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포로기시대가 우리에게 강렬하게 자리했음은 분명하다.

   
▲ 시대의 아픔을 넘어서 제3권 왕국시대의 예언자
예루살렘 백성들은 바벨론으로 끌려가서 야훼신앙에 큰 소용돌이를 겪었다. 바벨론신 마르둑과 비교할 때, 자신들의 신은 너무 왜소했다.
이것은 일찍이 경험하지 못했던 신앙의 위기였다. 그들은 새로운 신학체계를 세워야 했고 새로운 답변을 얻어야 했다. 이런 신학적 위기에 답하는 문서들이 식민지시대 성서들이다. 이를테면 신명기역사가, P문서, 예레미야, 에스겔, 제2이사야, 학개, 스가랴가 이때 등장하였다. 이 성서기자들은 당면한 위기를 뛰어넘기 위해 위대한 통찰력으로 신앙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갔다. 그래서 식민지시대는 위기였지만 창조적인 신학이 탄생하는 기회이기도 했다.(26쪽)
그들이 거대한 마르둑 신전 앞에서 흔들리는 신앙의 위기 속에서 재발견한 야훼신앙은 무엇인가?
야훼 하나님은 자기 민족이라고 무조건적으로 감싸는 신이 아니다. 모든 민족은 무너진 성전을 보고 법의 하나님, 정의의 하나님이신 야훼의 우수성을 알게 된다.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은 처참한 모습은 오히려 수호신을 뛰어넘는 야훼 하나님의 높은 섭리를 드러낸다. 그러므로 비극으로 끝나는 역사, 무너진 성전과 포로로 잡혀간 백성, 폐허가 된 예루살렘이야말로 더없이 야훼의 참 하나님다움을 증거하는 표징이다.(30쪽)
언제부터인지, 신자유주의로 가장한 맘몬의 세례를 받은 한국교회는, 마르둑의 위용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제국의 성질을 신앙의 덕목과 표상으로 삼기 시작했다. 신앙위기는 포로기시대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어떤 창조적인 재발견을 해야 하는가?

2장에서 예레미야를 변호하는 저자의 성찰은 통렬하다.
예레미야의 관심사는 유다와 바벨론간의 모순이 아니라 예루살렘에 있는 지배계급으로부터 민중의 이익, 생존, 생명을 지키는 일이다. 유다와 바벨론 간의 모순은 유대의 지배층이 꾸며대는 선전에 불과하다.(50쪽)
(예레미야)에게 있어서 포로사건은 하나님이 착취자로 있던 지도자들을 강제로 격리시킴으로써 이스라엘 민족의 고질병을 치료하는 행위였다. 예루살렘 주민들은 고통을 겪었지만 부재지주들은 바벨론으로 끌려갔고 오히려 민중은 숨통이 트였다.(53쪽)
그 어떤 가치라도 민중의 희생을 토대로 이루겠다는 것은 거짓이다.(54쪽)
예레미야 시대를 말하는 저자의 서술에 나는 아프다. 왜?
권력자는 물론이고, 친척들한테서도 죽임의 위협을 당했던 예레미야처럼, 우리 시대 예레미야들도 역시 불의한 공권력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영문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196쪽) 주일설교는 서울시청 앞에서 촛불교회를 지킨 저자와 동료목사들이 공권력에게 밉보여서 당하는 곤고함이 생생하다. 이토록 착하고 여리고 순수한 목사들을 거리로 내모는 현실이 이 시대 비극이다. 그러나 덕분에 촛불현장을 지키는 민중과 한몸이 될 수 있었느니, 감사한 일이기도 하다.
오늘날도 여전히 지배층들은 '뉴타운'이니, '경제살리기'니, '4대강 개발' 등, 기만이데올로기들을 선전하면서 민중을 벼랑으로 내모는 일을 스스럼없이 획책하고 있다. 이들은 약자들의 주체성을 존중하지 않는다. 약자들의 아우성을 온갖 교묘한 구호와 도구로 덮어버리는 악행을 일삼고 있다. 비극의 역사는 어찌 이리 한 치의 오차도 없는지.

   
▲ 새 역사를 향한 순례 제2권 구약성서 역사서

3장에서 에스겔의 차별성은 무엇인가? 지도자도 백성도 모두 함께 야훼의 법을 버린 마당에서, "야훼의 거룩한 이름을 지키는 일"이 에스겔 신학의 요체이다. 그래서 에스겔은 예언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회개촉구의 메시지를 개인에게 적용한다.(85쪽)
또한 에스겔만큼 적극적으로 대안을 제시하는 예언자도 드물다. 그는 40-48장에서 재건될 새로운 이스라엘의 모습을 말한다.(93쪽)
에스겔의 이런 이상은 후기 유대교에 통일 이스라엘에 대한 강한 이미지를 심게 하며, 통일왕국의 왕이었던 다윗 왕이 다시 오리라는 메시아적 희망을 낳는다.(96쪽)

4장에서 이사야의 이름을 빌린 제2이사야의 고민은 새로운 세대들이 당하는 고난은 도대체 무슨 이유이며 어떤 의미가 있는가? 였다. 포로생활이 2,3대로 이어지면서 절망만 남은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 생각했다.(114쪽)
제2이사야는 절망에 몸부림치는 동족을 보면서 생명과 희망의 기운을 불어넣어야 했다.
2009년을 사는 우리도 같은 질문을 한다. 일제식민지, 전쟁, 분단, 권위주의 정권을 거쳐서 겨우 민주화여정 10년을 보낸 이 나라가 다시 패악의 정치를 경험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1년 전의 촛불은 정녕 아무 영향도 없었단 말인가? 라고.
제2이사야가 소중한 이유는 식민지시대 유다백성의 고난에서 희망을 노래하는데 그치지 않고, 2009년 대한민국이 처한 고난의 현실에 그대로 대입해도 무방하기 때문이다.
비록 지금은 암울한 역사의 절망이 우리를 사로잡을지 모른다. 그러나 오늘의 어둠은 그 속에 빛을 숨기고 있다. 하나님은 그 어둠 속에서 당신의 새로운 미래를 펼치신다. 인간의 눈에는 지금 닥치는 고통과 장차 닥쳐올 희망이 시대적으로 동떨어져 있는 것으로 보이겠지만, 하나님의 눈에는 그 둘이 하나이다. 우리가 이 어두움에 타협하지 않는다면, 이미 우리가 꿈꾸는 새 하늘 새 땅은 암울한 현실 속에 둥지를 틀고 그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115쪽)
이렇게 제2이사야는 탁월한 상상력으로 고난의 새로운 의미를 밝힌다.
예언자적 상상력은 고난과 무의미 속에 발버둥치는 민족을 새로운 기대와 희망으로 들뜨게 한다. 포로지에서 절망하는 백성들을 대반전시키는 뒤집기 한판이 이루어진다. 이것이 예언의 힘이다.(134쪽)

5장에서 하박국은 어째서 역사가 거꾸로 가느냐고 한탄한다.
하나님은 답한다. 전적으로 새로운 미래를 가져오도록 하기 위함이라고.(151쪽)
하박국의 유명한 예언,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말씀은 무슨 뜻인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처럼 살아가고, 불가능한 것을 현실처럼 사는 것이기에,(153쪽) 하박국은 기다릴 것을 말한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기다릴 줄 안다.(156쪽)

   
▲ 야훼신앙의 맥 제1권 구약성서 오경

6장은 포로민의 귀환이후를 서술한다. 폐허의 시대. 어려움이 가중된 현실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어떻게 야훼신앙을 유지했고 그들의 삶을 개척해 나갔는가가 요지이다. 그리고 그 현 실에서 야훼 말씀은 어떤 역할을 감당하는가?에 대한 서술이다. 이 마당에서 학개와 스가랴는 그들의 예언이 정치현실에서 일반대중에게 폭넓은 지지를 받은 덕에 영향력 면에서 큰 성공을 거둔다. 학개는 현대인들처럼 먹고살기에 바빠서 공적인 영역에 무심한 백성들에게 '거룩'의 영역을 각인시키는 역할을 했다. 아무리 삶이 어려워도 거룩의 영역은 실재해야 한다. 그것이 비생산적으로 보일지라도, 역으로 거룩의 영역이 있었기에, 그들 삶을 일으키는 원천이 되었다. 성전건축은 그들을 한데 묶는 구심점이 됐다. 그러나 에스라와 느헤미야가 개혁의 구호로 내세운 '순수성'은 지배층들만의 특권의식과 이기심을 유지하고자 하는 차별을 합리화하는 논리가 돼 버렸다.(185쪽)
평등사회 원리가 지켜지지 않는 중에, 지배층이 주장하는 선전은 모순과 양극화만 조장할 뿐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법이 가진 혁명적 내용을 교묘하게 비껴가고 그 내용을 생소한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187쪽)
그래서 말씀의 과잉은 말씀이 가진 힘을 되레 약화시켜 버렸다. 자고로 개혁은 지배층이 자기 권리를 약화, 축소시킬 때에 실현가능하다는 것을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역설적으로 보여줬다.
느헤미야 시대, 개혁의 꿈이 부풀었던 시대 다음에 찾아온 민중의 실망감은 아예 이 역사에 대한 기대 자체를 허물어 버렸다. 그들의 말은 뒤틀리고 예언시대는 마감하고, 침묵의 역사가 지난 후 역사는 새로운 묵시의 시대로 이어진다.(194쪽)

   


7장은 예언시대가 끝나고 묵시문학과 묵시운동이 태동한 배경을 서술한다. 저자는 현 시대도 마찬가지로 묵시운동이 절실한 시점이라고 역설한다. 그 말에는 역사를 거꾸로 되돌리는 현 정권, 게다가 기독교 장로라는 대통령에게 최종적인 책임이 있는 가운데 벌어지는 일들,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고 사회약자를 살벌한 공권력으로 억누르는 불의한 시국에서 접하는 울분과 정의감이 켜켜이 쌓여 있다. 현재 상황은 저자로 하여금 기존에 가지고 있었던 묵시문학에 대한 정의까지 새롭게 바꿔 놓을 정도로 심각했다.
현시대가 파국이라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운명이니 하늘만 바라보고 기다리자는 말이 아니다. 현재를 지배하는 권력에 대한 기대를 접자는 것이다. 미래에 대한 가능성이 없는 체제에 대해서 더 이상 기대를 걸고 바꾸어 보려는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없다.(220쪽)
묵시론자는 현 체제에 대해 비관적이다. 거기에는 선한 것이 없고 가능성이 없는 닫힌 역사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현재 권력은 철저히 망하도록 도울 때라야 새로운 세상이 올 수 있다는 것이다.(221쪽)

교정을 본 덕분에 누구보다도 이 책들을 꼼꼼히 접하면서 성서에 대해 여러 가지 근본적인 인식을 하게 된다. 성서의 존재이유는 무엇일까? 고전중의 고전이랄 수 있는, 몇 천 년 전에 쓰인 성서가 오늘날에도 영향력을 주는 힘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가 배울 것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성서가 기록됐을 당시, 당대 사람들도 지금 우리처럼, 자신들이 처한 현실에 대해 실존의 위기를 겪으며 깊은 고뇌에 빠졌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이 위기를 극복할 대안을 찾아야 했다. 지금은 고통과 절망일지라도 내일은 희망을 노래해야 했다. 이런 위로와 희망을 담은 미래는 어디에서 얻을 수 있을까? 하늘이다. 야훼신앙을 간직하고 있는 선조들은 그래서 야훼께 묻고 또 물었다. 그러는 가운데 몇몇 특별히 선택받은 사람들이 하늘의 감동과 통찰로 야훼의 뜻을 기록할 수 있었다.
그렇더라도 성서는 철저히 시대상황의 산물이다. 놀라운 것은 그렇지만 그 산물이 인간의 얄팍한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깊은 고뇌를 담은 인간이 하늘의 통찰을 힘입어 기록하였기에 생명력을 가져서 오늘날도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주는 것이다.

그렇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한국교회에서 성서는 대증요법적인 책이 돼버렸다.
교회마케팅에 탁월한 기술자들과 교회소비자들에 의해. 게다가 이들이 한국교회 주류를 형성했다. 거듭 말하지만, 지금 기독교 주류는 복음과 한참 멀리 있다. 굳이 복음이 있다면, 예수의 복음이 아니라 황제의 복음이다. 황제의 복음은 제국신민의 안전을 보장해 주는 전제에서 제국신민에게 기쁜 소식이었다. 황제는 세상없어도 신민의 안녕을 지켜야 한다. 오늘날 교회소비자들도 제국신민이 보장받은 '안녕의 지킴이'로 기독교의 복음을 접한다. 그들은 예수의 복음을 듣지만 실상 내막은 황제의 복음을 소비한다. 교회기술자들도 그렇게 말하고 교회소비자들도 그것이 맞는 줄 안다. 문제는 그 안녕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제국의 안녕처럼, 불의한 현실에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지배논리를 묵인하는 안녕인데 있다. 이것이 한국교회 현실이다.

교회를 이렇게 절망의 구렁텅이로 만든 원죄는 역설적으로 성서이다.
기독교 정체성의 기반은 무엇보다도 성서에 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성서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자기신앙이 결정난다. 독자가 어떤 관점으로 성서를 읽느냐에 따라 성서는 절딴나고, 해석은 춤을 춘다.
이런 성서과잉의 시절에 김경호목사의 생명평화성서시리즈는 그래서 더 소중하다.
이 책은 성서의 원래 바탕에 대해 고민하도록 하는 관점을 제공해 준다.
현실의 기독교 모습에 절망하며 대안을 추구하려는 독자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서평자 : 백창욱목사(대구새민족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