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교역사

1887년 정동제일교회

心貧者 2010. 7. 28. 14:58

정동제일감리교회는 올해를 125주년으로 기념하고 125주년 역사서를 출판할 준비를 하고 있다. 1984년 한국 기독교 백주년을 전후해 정동제일교회 일부 목회자와 지도자들이 1885년을 설립 연도로 설정하기 위해 일부 사료에 대한 정확한 고증이나 분석을 하지 않고 견강부회했다. 당시 필자는 한국교회사 연구의 첫 프로젝트로 아펜젤러의 일기와 편지를 번역했으므로 정동교회 편찬위원회의 부당한 해석에 대해 항의했으나, 일개 학부생의 의견으로 무시되었다. 1985년 정동교회는 백주년을 기념했고, 이제 25년이 지난 올해에는 그 설립 연도에 대한 숙고나 재해석 없이 그대로 125주년을 기념하고 있다. 비전이 없으면 백성이 제멋대로 행한다. 미래의 비전은 과거의 바른 해석과 숙고에서 나온다. 지난 25년간 역사의식 빈곤이 오늘 한국 감리교회의 분열과 쇠퇴를 가져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 교회 설립 연도가 1887년이든 1885년이든 교회의 사활 문제는 아니지만, 중요한 것은 그 배후에 있는 역사의식이다.

필자는 감리교인이 아니다. 그러나 25년 전 아펜젤러 자료를 읽은 것이 계기가 되어 한국교회사 연구를 시작했고, 그동안 정동교회를 담임한 아펜젤러, 올링거, 존스, 최병헌 등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면서 한국 초기 감리교회 역사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다. 순수한 학자적 양심에서 정동교회 초기 역사를 일차 자료를 근거로 주요 사건의 연보를 작성하고 초대 담임목사(1~8대) 명단을 간단히 정리함으로써, 설립 일자를 원래 지켜 오던 1887년 10월 9일로 되돌아갈 것을 촉구하고, 초대 1~8대 목사에 대해 심도 있는 연구를 제안한다. 참고한 자료는 아펜젤러 페이퍼(유니언신학교 소장), 미국북감리회해외선교부 연례보고서(1885~1915), 한국선교회 회의록(1893~1915), 강매, <정동교회 30년사>(1915), 이만열 편 <아펜젤러>(1985) 등이다. 길게 논문 형식으로 쓸 수 있지만 시간 관계상 에세이 형식으로 썼다. 정동교회가 웹페이지에 있는 연보나 100년사의 내용을 수정하고 설립 일은 전통적으로 기념해 오던 1887년 10월 9일로 다시 돌아가기를 바란다.

1. 주요 사건 연보

1884. 6. 24. 매클레이 서울 방문

1885. 2. 27. 아펜젤러 일본 도착

        3. 5. 동경 매클레이 집에서 매클레이, 아펜젤러, 스크랜턴, 조선 선교 의논

        3. 31. 매클레이 감리사, 아펜젤러 부감리사로 한국선교회 조직 

        4. 5. 아펜젤러 제물포 도착 / 일본으로 돌아감

        5. 3. 스크랜턴 시병원 개원

        6. 20. 아펜젤러 서울 도착

        6. 28. 서울 외국인 첫 예배 (유니언교회의 출발)

        8. 1. 아펜젤러 감리사 겸 서기로 서울에서 첫 선교회 회의 (강매, 6~7면)

      10. 13. 유니언교회에서 개신교 최초의 성찬식

      11. 19. 앨리스 아펜젤러 태어남

1886. 4. 25. 유니언교회에서 첫 세례식 (스크랜턴의 딸 마리온, 아펜젤러의 딸 앨리스, 일본인 하야카와)

        6. 8. 배재학당 개교

        7. 18. 언더우드의 첫 장로교인 노춘경 세례식에 아펜젤러 참석하여 도움

       11. 16. 아펜젤러 유니언교회 첫 목사로 임명

1887. 2. 21. 배재학당 이름 하사

        3. 14. 배재학당 현판식

        7. 24. 첫 한국인 감리교인 박중상 세례식

            9. 벧엘교회 처소를 정동과 상동 중간 지점에 구입 

      10. 2. 두번째 감리교인 한용경 세례식

      10. 9. 벧엘교회 첫 예배 (감리교 첫 공중 예배) : 초대 목사 아펜젤러 (1887~1891.6)

      10. 16. 첫 여자 교인 최 씨 부인 세례식

      10. 23. 벧엘교회 첫 한국인 성찬식 (수세자 4명, 박중상,최성균, 한용경, 최씨 부인) 

      10. 26. 두 명의 권서 북한 지역 파송 (최성균과 장씨)

      12. 7. 학생 기도회 시작

      12. 25. 한국감리교회 첫 성탄절 예배에 아펜젤러 첫 한국어 설교를 읽음. 한국인 6번째 신자 여자 신도 김명옥 세례식

1888. 1. 올링거 한국 도착

        3. 11. 아펜젤러 사택에서 첫 주일 학교 (남자 성경 공부반) 개최

        3. 15 . 최초의 기독교식 결혼식

       12. 7. 미국 감리회 한국 선교회 첫 조직 (강매, 9면) = 한국에 단 하나의 감리교회 (즉 정동교회), 하나의 순회구역circuit으로 하나의 계삭회 Quarterly Conference 조직 (연례보고서, 1890, p. 273) 

1890. 1. 20. 첫 계삭회 회의(강매, 9면). 서울 순회 구역은 아펜젤러 담당

        2. 25. 장유회와 지방회를 처음으로 개최 (강매, 9면)


1891. 6. 10. 계삭회 개최, 아펜젤러 제물포 구역 담당 임명. 올링거 목사 서울 순회 구역과 정동교회 담당 : 제2대 목사 올링거 (1891.6. ~ 1893. 7.)

1892. 6. ~ 1893. 7. 아펜젤러 안식년 휴가

1893. 8. 아펜젤러가 서울 구역회(charge)와 정동교회 담당. 3대 목사 아펜젤러 (1893.7. ~ 1902. 6.)

1893. 9. 올링거 한국 떠남

1895. 9. 9. 정동교회 정초식

1897. 10. 3. 정동교회 입당식

        12. 27. 정동교회 봉헌식

1898 최병헌은 아펜젤러의 조사로 정동교회 시무

1900. 9. 28. 아펜젤러 안식년 출발 / 안식년 기간 중 최병헌 전도사 다수 설교. 이때 별도의 담임목사 임명하지 않음 (회의록, 1901, p. 24)

1901. 10. 아펜젤러 한국에 돌아옴

1902. 5. 16. 평양에서 한국선교회 연례회의 개최

        5. 18. 무어 감독 최병헌 집사목사 안수 - 상동교회 임명 (회의록, 1902, p. 3 & 11)

1902. 6. 11. 아펜젤러 사망

1903. 5. 1. 한국 선교회 연례회의 정동교회에서 개최. 최병헌 정동교회 동사목사(부목사) 임명


이후 연보는 아래에 다시 서술한다.

2. 제안

가. 정동교회 설립일 : 1887년 10월 7일로 되돌린다.


1887년 9월 이전에는 한국인을 위한 개교회(local church)가 서울에 존재하지 않았다. 존재한 개교회는 유니언교회로 이는 초교파적인 외국인 교회이며, 그 예배에 한국인이 참석하고 그 교회의 교인(혹은 장로회나 감리회 한국 선교회 소속) 선교사들에 의해 한국인들이 1886년이나 1887년에 세례를 받았다고 해도(언더우드의 노춘경 세레나 아펜젤러의 박중상 세례), 그것은 한국인 교회의 출발이 아니라 그 준비였으며, 그들은 유니언교회 교인으로 세례를 받았으며, 아직 설립되지 않은 새문안교회나 정동제일교회의 교인은 아직 아니었다. 즉 교회의 두 지표를 말씀 선포와 성례(세례와 성찬)로 할 때, 문제는 그 구성원이 한국인이어야 하며, 한국인이 어떤 외국인 교회에 가서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그것이 한국인 교회의 출발이 되는 것은 아니다.

혹자는 1886년 4월의 세례식(스크랜턴의 딸, 아펜젤러의 딸, 일본인)을 정동교회 설립 일로 보자고 하지만, 이 역시 유니언교회 안에서 이루어진 외국인 교인의 세례식이었다.

또한 1885년 6월 아펜젤러가 서울에 온 후 사택에서 가정 예배를 드리고, 그곳에 한국인 하인이나 어학 교사가 참석했다고 해서, 혹은 한국인 학생들과 성경 공부를 했다고 해도, 이를 교회의 설립 일로 보는 것은 무리이다. 즉 한국 감리교 선교의 시작, 유니언교회의 시작, 정동교회의 시작은 별도의 주제로 분리해서 보아야 한다.

새문안교회는 1887년 9월 27일 조직을 창립 일로, 정동제일교회는 1887년 10월 9일 첫 한국인 세례 교인들이 벧엘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린 날을 창립 일로 하는 것이 정당하다. 굳이 유니언교회 역사와 혼동될 필요 없이 개교회로서 정동교회의 출발은 아펜젤러 일기에서 밝힌 대로 벧엘교회 첫 예배 일로 보는 것이 순리이며, 이는 1985년 이전까지의 인식이었다. 1985년 정동교회 일부 지도자들이 일부 사료를 억지로 해석하여 1885년을 출발점으로 삼은 것을 이제 바로잡아야 한다. 역사 바로잡기는 교회가 앞장서야 한다.

나. 역대 담임목사 : 이 부분은 완전 수정, 재서술이 필요하다.

1대 목사 : 아펜젤러, 1887. 10. ~ 1891. 6. 10. (4년)

2대 목사 : 올링거(F. Ohlinger), 1891. 6. 10. ~ 1893. 7. (만 2년)

3대 목사 : 아펜젤러, 1893. 7. ~ 1902. 6. (9년)

4대 목사 : 벙커 (D. A. Bunker) 1902. 6. ~ 1903. 5. (1년) 동사목사 최병헌 (?~?)

5대 목사 : 샤프 (R. A. Sharp) 1903. 5. ~ 1904. 2. (1년) 동사목사 최병헌 (1903. 5~)

6대 목사 : 베크 (S. A. Beck) 1904. 3. ~ 1905. 6. (1년) 동사목사 최병헌

공석 1905. 6. ~ 1906. 6. 동사목사 최병헌

7대 목사 : 존스 (G H. Jones), 1906. 6. ~ 1908.3. (2년) 동사목사 최병헌

8대 목사 : 최병헌 1908. 3. ~ 1914. 6. (6년) 동사목사 루퍼스 1912. 3. ~ 1913. 6.

위의 표에 대한 보충 설명이다. 최병헌은 1902년 5월 집사목사 안수 후 상동교회 계삭회에 임명되었으나 1902년 6월 아펜젤러 목사의 사망으로 정동교회로 옮겼으며, 1903년 5월 선교회 연례회의에서 공식적으로 정동교회 계삭회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것이 정동교회 담임목사(지금 개념)에 임명된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최병헌이 공식적으로 정동교회 담임이 된 것은 1908년 3월이었다. (회의록, 1908, p. 26 ; 강매. p. 21에는 1909년으로 기록) 1907년 6월 ~ 1907년 2월 기간 보고서에서 최병헌이 담임목사로 일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회의록, 1908, p.31) 한편 1907년 2월의 부흥회는 현순 목사가 인도했다.

1904년 연례보고서, p. 34에 의하면 아펜젤러 사후에 벙커(D. A. Bunker)가 담임했고, 1903년 5월 연례회의에서 샤프(R. A. Sharp)가 정동교회에 임명(회의록 p.20) 되었다.

1904년 2월 임명 (회의록, p. 18) : 베크 (S. A. Beck)가 정동교회 담임, 최병헌은 동사목사

1905년 6월 임명 (회의록, p. 26) : 공석

1906년 6월 임명 (회의록, p. 24) : 존스 (G. H. Jones) 정동교회 담임

1907년 6월 임명 (회의록, p. 27) : 존스 목사 계속 임명

1908년 3월 임명 (회의록, p. 26) : 최병헌 목사가 담임으로 임명


존스 목사는 1903년 5월 ~1906년 7월까지 미국에서 안식년을 보내고, 1906년 7월 한국에 와서 바로 정동교회 담임목사로 임명되었고, 1909년 (?)월 미국에 영구 귀국할 때까지 시무했다. 그는 1906년 일리노이즈 웨슬리안대학교가 그에게 명예 신학 박사를 수여했으므로 존스 박사로 불렸다. 존스가 2년간 정동교회 담임목사였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이때 대부흥 운동, <신학월보>의 재발전 (최병헌의 신학 발전) 등 존스와 최병헌의 팀 사역이 빛을 발했기 때문이다.

1912년 3월 임명을 보면 정동교회에는 W. C. Rufus와 최병헌이 함께 임명되었고, 최병헌은 동시에 강화 구역 담임으로 임명되었다. 따라서 최병헌은 1912년에는 정동과 강화 두 구역을 담당하다가, 다시 1913년 임명에서는 정동교회만 맡았고, 1914년 6월에 제물포 지역 감리사로 임명되었다. (회의록, 1914, p.19) 최병헌 목사의 임명과 실제 시무 기간은 추가 조사가 필요하다. 최병헌 목사는 1903~1914년까지 10년 넘게 실제적인 정동교회의 담임 목사 역할을 했다. 그러나 공식적으로 여러 선교사들이 담당 목사로 임명되었으므로 그들의 역할과 목회와 설교 등을 연구, 분석, 서술해야 할 것이다.

그동안 여러 가지 이유로 정동교회는 1885년을 설립 연도로 지켜 왔다. 내리교회에 이어 최근에는 남대문교회가 무리하여 설립 연도를 앞당긴 부끄러운 사례도 있다. 그러나 이제 정동교회 설립 125주년을 2년 앞두고 1887년 설립 연도로 되돌아가는 것이 역사적으로나 신앙적으로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정동교회가 이렇게 2년 뒤로 설립 연도를 늦추는 결정을 하면 오히려 사회적, 교회적으로 귀감이 되고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확신한다. 바른 역사 인식 없이 미래로 나아갈 수 없다. 처음 되려는 자는 나중 되고, 나중 되려는 자는 처음 된다. 아펜젤러가 표어로 삼은 '섬기는 정신'이 정동교회 125주년에 되살아나기를 바란다. (옥성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