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지원 님께서 주신 기본 내용을 토대로 자료를 보충해 나가겠습니다.
수정할 내용을 아시는 분은 꼬리말에 보충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1961년 3월 23일 서울 생.
아버지 김영윤과 어머니 탁순애의 아들로 북아현동에서 태어남.
아버지는 이후 충북대 불문과 교수로 은퇴하고, 어머니는 교사로 근무함.
1968년(7세) 경희대 부속 사립 초등학교 입학.
야구부 입단, 강도 놓은 훈련과 또래 집단 활동을 통해 조직과 단결,
협력, 공동체 의식을 배움.
1974년(13세) 대광중학교 입학. 김형배, 이승엽 등의 친구를 만남.
청량리 588 골목에서 창녀들의 거주 형태와 삶의 양식을 훔쳐보면서,
'전과자의 형','창녀들의 아버지'로 살아가겠다는 낭만적인 생각을 함,
1977년(16세) 경신고등학교 입학.
획일적인 고등학교 교육을 암흑기로 표현함.
1980년(19세) 재수, 서대문 재수 학원가에서 1980년대 서울의 봄을 목도함.
1980년 5월 광주 민중 항쟁을 간접 경험하면서 실존적인 질문을 시작함.
이때부터 1985년까지 '김형'(金螢)이라는 가명을 쓰면서,
그렇게 불러 주기를 친구들에게 당부하곤 함.
반딧불[螢]처럼 세상을 밝히는 사람이 되고 싶어함.
1981년(20세) 연세대학교 신학과 입학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자기소개 시간에 "교도관이 되고 싶다"고 말하다.
1학기 교양국어 시간에 시인 김수영의 [풀]을 발표하고, 존재론적 항거에
대해 친구들에게 자주 말하곤 함.
당시 집에 놀러 가면 글을 써서 철사에 끼워 놓곤 함.
1982년(22세) 4월경~1983년 3월경 파주 백석교회 교육전도사.
박문수, 김응교와 백석교회 전도사로 일함.
박문수와 함께 파주지역 농민 실태를 조사하러 다님.
말씀 인도와 수양회 인도. 그리고 문학회 밤 때 전체 레크레이션 등을 담당.
1983년 초겨울인지... 폭설이 내리는 교회 옆 공터에서 눈 맞으며 밤새
울부짖으며 기도함.
1982년(22세) 가을 축제 때 '예똘' 그룹(김흥겸, 박문수, 권봉성, 김응교)을 결성하여,
제1회 전국대학생 복음성가 경연대회(기독교방송국 주최)에서 대상 받음.
1983년 5월 축제 노래 경연대회 때 연세대 대극장에서 [민중의 아버지]를 부르지만,
심사위원의 주목받지 못함.
1983년 5월(23세) 축제 기간에 종교극회의 거리극 [누가 예수를]에서 예수 역할을 맡음.
이 극을 계기로 [민중의 아버지]가 알려지기 시작함.
'누가 예수를' 공연은 지금 생각해도 놀라운 시도였다. 그리고 겸이는 예수로 그 자리에 있었다. 얼마나 많은 친구들이 그 작품에 동원되었던가? 나는 로마군의 인솔장교로 독수리 상 앞(겟세마네)에서 연행된 예수를 끌고 다니며, 군중들을 통제하는 역할을 맡았다. 정문 앞에서 그를 채찍질 할 때부터 분위기가 심각해지기 시작했다.(왜 나는 하필 그를 채찍질하는 일을 맡았을까?) 몇몇 여학생들이 흐느끼기 시작했고, 십자가를 지고 예수의 골고다를 향한 행진이 시작되었을 때 얼마나 많은 군중들이 구레네 사람 시몬이 되고자 자원했는지, 그들을 밀쳐내느라 힘이 들었던 기억이 있다. 자연스레 무리들은 시위대열로 변하고 있었고, 그대로 가면 우리는 시위의 주모자가 될 판이었다. 예수를 십자가에서 내리자 마자, 우리는 예수를 버리고 도망치는 제자들처럼, 겸이를 강제하여 그곳을 빠져나왔다. - 전진택 목사의 글에서
1983년 6월 낙골교회 담임 교육 전도사
1985년 8월(24세) 연세대학교 신학과 졸업.
졸업 전에 최형묵, 김은규, 정혁현, 박병철,김경희 등과 민중신학을 공부하다.
1986년 3월(25세) 낙골교회 담임 교육 전도사 사임.
1986년 4월 ~8월 독산동 프레스공으로 일하다 해고됨.
1986~1991년 서울시 철거민 협의회(서철협) 연대사업부 차장,
서철협 사무국장 역임, 전빈련 연대사업국 차장
노점상연합회 활동
1989년(28세) 가을 남대문경찰서에서 최광식(서철협) 등과 함께 취조 받음.
서철협의 회장단은 물론 상근자(해파리 포함) 활동비는 엄두도 못냈었다.....
나는 해파리가 양말 신은 걸 본적이 없다. 때로는 서철협 사무실에서 때로는 지역 현장에서, 예수가 말밥통에서 잠자듯이 난장꿀림하느라 빨아신을 시간도 없었겠지만 무슨 수로 양말을 사 신을 수 있었겠으랴? 운이 좋은 날은 지역 자매 형제들이 밥을 챙겨 주었겠지만 ㅡ 해팔아! 미안허다. 그렇게 갈 줄 알았으면 따뜻한 밥 한끼라도 먹여 보내는 건데...ㅡ 그렇지 못할때는 낙골시절부터 굶고 개기었으니 그 몸이 성할 수 있었겠는가? 해파리는 그렇게 가난한 이웃을 대신하여, 싸우고, 굶주리고, 병을얻어, 죽었다.
얼마전에 세운상가 아래서 노점상하시다가 시방은 전국연합을 이끌고 계시는
노수희 형님과 소줏잔을 기울이다가 해파리 그녀석은 먹지 못해서 병이 생겨
죽었을거라 이바구 나누면서 꺼이 꺼이 울었다.
- 선배 최광식(서철협) 선생의 회상
1991년 1월(30세) 12일 명동 YWCA에서 한지원과 결혼식을 거행하다.
뒷풀이는 김응교 노래 진행, 민주대머리 박철민 사회로 진행.
1991년 한달간 돼지고기 공장에서 1일 4시간 월 40만원 받고 일 함.
1991년 10월~1993년 7월 영등포에서 테이프 노점상을 하다.
1991년 6월 26일 연행됨, 신대방동 철거 저지 중 투옥 3개월간 옥살이
1992년 2월 27일(31세) 딸 김 봄 출생
1992년 6월호부터 12월호까지 월간[살림]에 6개월간 산문 연재.
1991~1994년 전농과 연대 농산물 직거래 사업단 추진
1993년(32세) 농산물 직거래를 위한 청년공동체 '한겨레 농산'에서 일하다.
1993년경부터 한살림교회(친구 정혁현 목사)에 1994년까지 다님.
1994~1995년 극단 현장 배우로 공연
1995년(33세) 민중가수 류금신 1집 음반 [희망] 앨범을 준비하는 중 위암 말기 진단 받다.
서철협 정리하고 같이 배추장사 하다가 문득 발견한 암병이었다. 사당의원(아직 서철협 이름으로 외상값이 천만원은 넘게 있을거다) 김종구 박사의 노말한 암선고를 듣고 우리는 같이 병원을 나와 서로 다른 곳을 물끄러미 보면서 담배를 한개씩 피워 물었다. 5월의 아지랭이와 함께 허공으로 흩날리는 담배연기만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해철이가 말했다. "에이 씨팔! 내 인생이 이렇게 좇같이 끝날 줄 알았어" - 친구 박정섭의 회상 |
1995년 발병-위암으로 수술.
1995년 5월 19일 [병상일지.2] 집필 시작
1996년(35세) 재발
1996년 7월 4일 [병상 일지.1] 집필 시작.
1996년 11월 오충일 목사님 인도로 세브란스 병원 채플실에서 자신의 장례식을 미리 드림.
1996년 11월, 오랫동안 인연을 맺어왔던 오충일 목사님이 ‘흥겸이 죽은 다음에 장례식에 모여서 아쉬워 말고, 흥겸이가 아직 살아있을 때 벗들이 함께 모여 미리 장례식을 하자’는 이야기를 하셨다.
“살아온 시간을 돌아보면서 자신의 장례식을 미리 하는 것은 퍽 뜻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미 죽었다고 생각하고 삶의 의미를 되새겼으면 좋겠다.”
휠체어에 몸을 담고 엷은 미소를 머금고 흥겸이는 벗들의 얼굴을 힘겹게 바라보았다.
“제 장례식에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열심히 살겠습니다.”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힘내라, 좋아질 거야, 언제 함께 놀러가야지~’ 덕담을 나누며 짧은 모임은 끝났다. 3개월 뒤, 바튼 기침 같은 모진 바람이 불던 겨울, 고단한 육신을 누이고 벗은 영영 우리 곁을 서둘러 떠났다.
-김기돈 목사,[특별한 배웅],월간 <작은 것이 아름답다> (2005년 11월호)에서
1996년 12월 친구들을 중심으로 [김흥겸을 위한 일일찻집] 등 모금운동 시작.
1997년(36세) 1월 21일 2년 여의 투병 생활 끝에 숨을 거두다. 서른 여섯살.
여러 편의 산문과 시. 그리고[민중의 아버지],[노란 싹],[빈민의 함성],
[전빈협 찬가],[노점 해방가],[아직은 아냐] 등 여덟 편의 노래를 남김.
다시 살아나는 김흥겸
1997년 6월 10일 유고산문집 [낙골연가](바다출판사) 출판.
새민족교회 제1청년회에서 <화장터 길의 예수>라는 제목으로
김흥겸을 주인공으로 연극공연
1998~2006년 1월 낙골교회 모임(김기돈 목사) 한해도 빠짐없이 추모예배 진행.
2006년 2월 11일 DAUM에 [김흥겸과 벗들] 개설
2006년 3월 16일 연세대 신학과 졸업생을 중심으로 9주기 추모예배.
2006년 3월 18일 파주 백석교회 신앙회 9주기 추모예배.
2006년 3월 안치환 자신의 8집 앨범에 김흥겸의 [민중의 아버지] 녹음 수록.
2006년 5월 8일 김흥겸 10주기를 위한 준비회의(한살림교회에서)
현재 10주기 기념 모임 준비 중.
- 김응교 작성
[낙골연가] 게시판을 만듭니다.
2003년 따스한 봄날입니다.
최광식 형의 제안에 따라, 4명의 심부름꾼 전원 찬성으로
김흥겸이 남긴 책 [낙골연가](바다출판사, 1997) 쓰기를 하기로 했습니다.
헌책방을 뒤지지 않으면 현재 이 책을 시중에서 구할 수 없기에,
흥겸이가 어떤 사람인지 엿볼 수 있도록 자유롭게 옮겨 주셨으면 합니다. 또한
그의 생각을 토론하고 반박하면서 공유하기 위해서 이 게시판에 남겼으면 합니다.
1) 되도록 책 앞에서부터 써주시고요.
2) 책의 페이지를 꼭 써주시기 바랍니다.
책은 현재 네이버에 들어가 [책]에서 '낙골연가'를 검색하시면,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php?bid=88673&menu=compare#middle_tab
인터넷 책방 여러 군데에서 판매하고 있습니다.
10주기를 기해 증보판이 출판되리라 기대하겠으나
없으신 분은 그 전에 꼭 구해보시기 바랍니다.
자, 이제부터 이 란도 시작도 해보겠습니다. 많이 참여해주세요.
2006년 3월 23일 심부름꾼 일동 꾸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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