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이 보이는 영성세미나

1장 복음의 원리

心貧者 2019. 5. 29. 11:46

1장 복음의 원리

 

1-1. 영성(靈性, spirituality)

최근 신학계에서 주요 관심으로 떠오르고 있는 가장 중요한 주제는 바로 영성이다. 이는 신학계뿐만 아니라 실천 목회의 현장인 교회에서도 영성에 대한 관심은 아주 뜨겁다. ‘부흥회라는 말보다 영성세미나’, ‘영성집회’, ‘영성훈련등이 대체되고 있고, 영성을 주제로 한 서적들이 홍수처럼 밀려들고 있다. 바야흐로 21세기는 영성의 시대이다. 그러나 이 영성(영적)이라는 말처럼 한국교회 현장에서 왜곡된 말도 없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우리 교회 안에서 통용되고 이해되는 영성은 크게 두 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말씀 묵상, 깊은 기도 그리고 뜨거운 찬양을 통한 개인의 내적 신비체험(엑스타시)을 영성으로 이해한다.

(고린도전서 12: 오순절운동, QT, 빈야드운동, 찬양과 경배 등)

 

그리고 이러한 체험이 바탕이 되어 나타나는 공동체의 외적 삶의 변화(이타적인 행위)영성으로 이해한다.

(섬김과 나눔: 동광원, 예수원, 가나안농군학교, 두레공동체, 다일공동체 등)

 

이처럼 개인이나 공동체가 경험한 주관적(내적/외적) 체험이 영성을 정의하는 기초가 되어 왔다. 하지만 나타나는 현상을 바탕으로 한 영성의 정의는 온전하다고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영성의 본질이자 본체이신 영이신 하나님이 스스로 계시한 성경이 그것을 온전히 입증해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이 증언하고 있는 객관적이고 보편타당한 그리스도교의 영성을 올바르게 정의할 필요가 있다.

 

 

, 그러면 성경이 말하는 영성의 뿌리(기초)가 어디에 있는지부터 생각해 보자.

이를 위해서 먼저 집고 넘어가야할 두 가지의 물음이 있다.

첫째, 영은 존재하는 실체인가?

둘째, 영이 존재한다면 영이 가지고 있는 본질 즉 영의 속성은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은 우리가 왜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해야하는 지를 가르쳐 준다.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가?

주님의 가르침 때문이다.

요한복음14: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사도행전 3장을 보면, 오순절 성령 강림이후 베드로가 주님의 가르침에 따라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장면이 나온다.

사도행전3:6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는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나사렛 예수(존재의 실체) + 그리스도의 이름(본질, 본체, 본성)

나사렛 예수(존재의 실체) : 육의 사람 곧 역사적 실존 인물(참된 사람)

그리스도(존재의 본질) : 영의 사람 곧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신 성자하나님(참된 하나님)

 

따라서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내 안에 본질()실체(육체 안에)하시는 그분의 영 곧 성령하나님이 기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코 내가 기도하는 것이 아니다.

주의 이름으로 사랑한다.’는 것 역시 내 안에 본질(그리스도, , )실체하시는 그분(내주 하시는 성령하나님)으로 인하여 사랑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코 내가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영성이란 무엇인가?

앞서 정리한 예수의 이름을 차용해 보자.

: ()이라는 존재의 실체(하나님)를 만나(영접)

(): 영이라는 존재의 본질(본성: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형상, 그리스도, 구원하는 자, 사랑하는 자)을 회복(거듭남, 중생)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관념적이고 관습적인 노예의 삶에서 벗어나 내 안의 진리의 영(그리스도의 영)으로 실체하시고 실존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본질(본성: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형상, 구원하는 자, 사랑하는 자)을 깨닫고 이것을 신앙(信仰)하는 것이다.

즉 요한복음 114절과 요한일서 11-3절의 상태를 추구하는 것이다.

요한복음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진리충만하더라

 

요한일서1:1-3

1: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1:2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

1: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이것이 하나님의 은총 속에서 주어진 그리스도인의 참된 영성이다.

 

영성세미나에 바라는 것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영성에 대한 그릇된 편견이나 오해 그리고 무지에서 자유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영의 사람 곧 진정한 신앙인이 되는 것이다.

 

신앙이란 무엇인가(신앙의 개념)?

주 안에 행하는 모든 삶이 곧 신앙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교회생활과 같이 종교적 행위(구제, 예배, 기도, 금식)들을 참된 신앙으로 여긴다. 그 결과 믿습니까? 아멘식의 강압적이고 일방적인 우격다짐의 신앙이 판치고 있으며(믿음: 믿는 것? / 믿어지는 것?) 눈에 보이는 종교적 외식과 그 반대로 스스로 세상과 격리되는 금욕과 절제와 수도의 삶이 곧 좋은 신앙 또는 믿음이 좋은 사람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바른 신앙이란 우리의 전인격이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모든 삶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신앙은 감성뿐만 아니라 합리적, 이성적, 과학적, 보편타당한 객관적 논리가 밑바탕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신앙의 길잡이인 성경 자체가 모순이 없는 객관적이고 보편타당한 진리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Canon: 잣대, 기준) 하나님의 말씀이 지혜의 근본이고,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하나님이 우주만물을 창조했다면, 성경과 과학의 기초인 자연 과학이 모순 될 수는 없다. 더욱이 우리 인간의 삶과 모순되어서는 절대 안 된다. 이 세상 어떤 피조물도 하나님의 목적과 설계 없이 창조된 피조물은 단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1-2. 분별력

신앙은 결국 사람의 문제이다.

인간의 모든 삶이 신앙의 문제라면 가장 기초적이고, 가장 본질적이고, 가장 절대적인 신앙의 요소를 성경에서 분별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창세기 2장을 보면 사람의 사람됨, 다시 말해 동물과 다른 사람됨의 요소 두 가지를 언급하고 있다.

그것이 무엇인가?

 

생령

창세기2: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분별력

창세기2:9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두 가지의 나무 중 무엇을 먼저 선택해야 하는가?

제일먼저 언급한 생명나무일 것이다. 그러나 처음 사람 아담은 일명 선악과라고 부르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취하게 된다. 이렇게 시작된 인간의 그릇된 분별력은 창세기 3장에 기록된 선악과 사건이후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처음 사람 아담은 왜 그릇된 분별력을 행할 수밖에 없었는가?

그것은 분별력의 기준이 절대 선이요 절대 의이신 하나님에게 두지 않고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3:6)에 두었기 때문이다. 여기서부터 우상 숭배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이다.

 

당신은 십자가를 보고 무엇을 느끼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순교와 희생을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십자가는 이러한 이미지에 앞서 인간의 분별력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누가복음22:66-71

22:66 날이 새매 백성의 장로들 곧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모여서 예수를 그 공회로 끌어들여

22:67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이거든 우리에게 말하라 대답하시되 내가 말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할 것이요

22:68 내가 물어도 너희가 대답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22:69 그러나 이제부터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 하시니

22:70 다 이르되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대답하시되 너희들이 내가 그라고 말하고 있느니라

22:71 그들이 이르되 어찌 더 증거를 요구하리요 우리가 친히 그 입에서 들었노라 하더라

 

결국 인간의 그릇된 분별력으로 인해 하나님이신 예수는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처럼 죄인의 형틀인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역사는 지금도 반복되고 있다.

 

분별력의 중요성은 다윗에게 기름을 붓는 사건에서도 잘 나타난다.

사무엘상 166-7

16:6 그들이 오매 사무엘이 엘리압을 보고 마음에 이르기를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주님 앞에 있도다 하였더니

16: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이처럼 처음 사람 아담이 분별력의 기준인 하나님을 상실한 이후, 인간의 역사는 지금까지 외모(육체)를 분별의 기준으로 삼게 된다.

그 결과 하나님과 같이 선악간의 분별력을 지니고도 인간은 악만을 선택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하마르티아의 죄인 것이다.

 

신앙생활뿐만 아니라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도 역시 중요한 것이 분별력이다.

) 교육의 목적- 분별력을 키우는 것

하위직(-노동)/ 고위직(머리-분별력)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인간의 분별력을 신앙의 절대적인 요소로 삼았는가?

이에 대한 바른 해답을 찾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왜 우리 인간을 창조 했는가?’를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한 목적은 무엇인가?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다.

시편 23:1-3

23: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3:2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23: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하나님의 본질: 영성)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하나님은 곧 자기 이름(하나님의 본질: 영성)을 위하여 우리를 창조하시고 영생으로 인도하시며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자녀로 영원히 삼는데, 그 목적이 있다.

하나님은 이러한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모든 것을 설계하고 창조하셨다.

 

하지만 인간은 이러한 하나님의 목적을 죄(스칸달론)로 인해 상실하고 말았다.

그 결과 사사시대처럼 자기 이름을 위하여 자기소견대로 의의 길로 걸어간다.

여기서 우리는 갈등하고 방황하게 된다.

 

따라서 어느 길이 진정한 생명이요 진리인지?’

이것을 분별할 수 있도록, 하나님은 인간의 분별력을 절대적인 것으로 삼은 것이다.

하나님 자신을 향한 인간의 바른 신앙을 그분이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바른 분별력은 성도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1-3. 분별력의 기준

그렇다면 신앙의 분별력을 바르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떠한 기준을 가져야 하는가?

이 문제를 풀기 전에, 우리는 우선 이런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교 종교인가, 신앙인가?’

이것을 먼저 분별해 보자.

왜냐하면 이러한 질문에 대한 해답이 곧 분별력의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흔히 사용하는 말 중에 은혜라는 단어가 있다. 이는 그리스도인이 가장 좋아하는 말이다. 누구나 은혜 받기를 원하고, 은혜 받는 것은 실제로 좋은 일이다. 그러나 잘못된 것을 은혜 받았다고 하면, 그것은 큰일이다. 따라서 은혜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은혜를 은혜답게 하는 분별력이다. 목회도 마찬가지다. 바른 목회란 성도들로 하여금 바른 분별력을 키워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는 것이다.

 

, 그리스도교가 종교인지 신앙인지?

이것을 분별하기 위한 몇 가지의 기준을 제시해 보자.

 

하나님()의 존재 곧 존재의 /이다.

타종교 역시 신이 있다고 한다. 이것이 문제이다. 왜냐하면 신은 보이지 않은 영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존재의 인식을 위해 예외 없이 모두 형상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타 종교는 신이 없다. 이렇게 단정 지을 수 있는 이유는 그리스도교의 하나님만이 유일신 절대자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그는 인간이 믿고 따를 만한 형상이 없다. 만약 타 종교에도 신이 있다면 그리스도교 신앙의 유일신 절대자 하나님은 거짓이다.

그렇다면 타종교에서 말하는 신의 실체는 무엇인가?

그것은 이것이 신이라고 여기는 인간의 희망에서 만들어 낸 상징(형상)이다.

) 그리스 로마신화

인도와 일본의 신들

단군신화

불교(一切唯心造: 마음이 모든 것을 만듬)

그리스도교(하나님)

나는 누구인가?(인본)

사망의 원인:나의 마음을 알지 못함

지식: 나의 마음을 아는 지식 안에서 깨달음

구원: 나를 아는 것이 자유(자력구원)

성선설(본래 인간의 착함)

하나님을 배제함(무신론)

하나님은 누구인가?(신본)

하나님을 알지 못함(4:6)

하나님을 아는 지식 안에서 자라남(1:10)

진리가 자유하게 함(타력구원)

성악설(본래 인간은 죄인)

하나님을 경외함(유신론)

이것을 폴 틸리히(Paul Tillich)신이란 인간 희망의 종교적 상징이다.’ 라고 정의한 다. 따라서 종교는 인본을 그 바탕으로 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종교의 신이란 인간의 목적과 희망에 의해서 만들어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 시대와 지역 그리고 문화에 따라 신의 상징과 형상이 서로 다른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유일신 절대자 하나님은 어떠한 상징도 형상도 없는 영으로 존재하는 분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교의 신앙은 인본이 아닌 신본을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피조 된 인간의 뜻과 목적이 아닌 창조주 하나님의 뜻과 목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따라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출발은 자기 자신이 기준인 인본을 부인하는데서 시작된다. 왜냐하면 신앙은 인본(인간 기준)이 아니라 신본(하나님 기준)이기 때문이다.

 

*종교에서 본 신론들

범신론

이신론(부재유일신론)

유일신론

삼위일체의 범재신론

흰두교/ 불교

신의 초월성을 부인

신의 내재성만 인정

자력구원

깨달음(열반)이 곧 구원

수레바퀴(我相)

中心(변하지 않는 본질)

無我 涅槃 救援 解脫 成佛

하지만 성철 물은 물이요 산은 산이다我相 으로부터 자유함은 불가능 즉 자력구원이 불가능함을 인정

이슬람교

유일신

절대적신의 초월성만 인정

절대적신의 내재성부인

 

인살라: ‘알라의 뜻대로

숙명론과 운명론

메카순례

라마단 금식

선행구제성전의 전사 등

종교행위로 인한 구원

자력구원

유대교

절대적 신의 초월성과

내재성인정

메시아 사상

역사적 이스라엘의

회복

(시온이즘, 유다이즘)

메시아 대망(다윗의 별)

타력구원 그러나 실상은 자력구원(신정국가재건)

 

 

기독교

절대적 신의 초월성과

내재성인정

하나님 나라

영적 이스라엘의 회복

3:4물과 성령으로

거듭남(오직 믿음, 은혜)

철저한 타력구원

 

 

 

 

성경의 권위(하나님이 있다면 예언의 말씀인 성경이 있는가? 없는가?)

유대교. 이슬람교 역시 유일신 신앙이다.

그들도 구약이 증거 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을 믿는다.

그렇다면 이들도 우리와 동일한 신앙인가?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는 다는 점에서는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이들과 엄연히 다르다.

왜냐하면 그들의 경전(유대인의 토라, 이슬람의 코란)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완전히 계시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완전히 계시한 성경 66권을 지닌 그리스도교만이 참된 신앙이다.

 

하나님의 계시는 66권으로 완성

삼위일체 하나님을 완전히 계시한 성경 66권을 가지고 있고 또 그것을 믿는다고 바른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아니다. 여기에는 또 하나의 기준이 있다.

요한계시록 22:18-19

18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

19 만일 누구든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이처럼 더하거나 제한 통일교(통일교원리강론) 몰몬교(모르몬 경, 교리와 성약 등) 구약 폐기론 자들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성경이 위인가? 교리가 위인가?

성경이다.

그렇다면 정말 교리보다 교회의 전통보다 관습적인 신앙보다 성경이 위인가?

마태복음15:1-9

1 그 때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2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전통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3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

4 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비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거늘

5 너희는 이르되 누구든지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6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

7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 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8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9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

 

성경이 위인가? 목사가 위인가?(직통계시의 위험성)

성경이다.

성경이 위인가? 내가 위인가? (QT의 위험성)

성경이다.

 

1-4. 성경에서 무엇을 분별해야 하는가?

올바른 성경해석을 원한다면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가장 기초적, 본질적, 절대적인 것을 분별해야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몇 가지 선행 작업이 필요하다.

우선 논리적(이성적)으로 생각하라.

육체를 입은 인간이 영이신 하나님을 믿는 것이 쉬운가? 어려운가?

어렵다. (, 출애굽기: 10가지 재앙, 홍해, 불기둥 구름기둥, 만나)

그러면 왜 어려운지를 논리적(이성적)으로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래야 각 사람으로 하여금 성령에 의한 자신의 신앙을 가질 수 있다.

 

자기를 부인하라.

신본적인 시각으로 우리의 시각이 전환되기 위해서는 인본적인(종교적인) 자신의 시각을 버려야만 한다. 그래야 신본적인 시각으로 성경을 볼 수 있다.

 

첫째, 자신의 오감( : 볼 수 있는 것, : 들을 수 있는 것, :냄새 맡을 수 있는 것, : 만져 볼 수 있는 것, : 맛볼 수 있는 것)을 부인해야한다.

이에 대해 노자는 그의 저서 도덕경 12장에서 五色, 五音, 五味에 집착하면 곧 장님이요 귀머거리라고 했다. 이처럼 우리의 오감으로는 영적인 역사를 알 수 없다.

 

둘째, 고정된 교리, 정형화된 철학체계, 사회정치적 이념과 사고, 고정화된 전통 등을 상대적인 가변성이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않고 영구불변의 보편타당한 절대적인 진리로 우상화하는 일을 부인해야한다.

(. 칼빈의 예정론, 변증법적 유물론, 공산주의, 할례)

 

사도행전 15장에 나오는 최초의 예루살렘회의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사도행전 151-5

1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

2 바울 및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의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라

3 그들이 교회의 전송을 받고 베니게와 사마리아로 다니며 이방인들이 주께 돌아온 일을 말하여 형제들을 다 크게 기쁘게 하더라

4 예루살렘에 이르러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을 말하매

5 바리새파 중에 어떤 믿는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셋째 모든 우상숭배에 바탕이 되는 자기(Self, ego)’를 절대적인 자리에 놓고 숭배하려는 자기중심을 부인하라.

성경에서 절대적인 것을 분별하라.

하루 밥 세끼 먹는 것.

건강을 원한다면 이보다 평범한 진리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것을 평생 동안 지킬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다. 아니 할 수도 없다.

이처럼 우리 삶 속에서 가장 지키기 쉬운 것 한 가지를 정해 놓고 내가 이 일을 평생 동안 할 수 있다고 다짐해 보지만 정작 얼마 못가는 것을 수 없이 경험하게 된다.

(作心三日)

 

그런데 성경에는 모세의 율법을 기초로 해서 하라는 것과 하지 말라는 규정이 무려 365백가지가 있다고 한다.

그것을 모두 지키는 것이 가능한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모세의 율법을 지키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하나님의 목적이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선 깨달아야한다.

즉 모세의 율법이 아니라 예수님이 증거 한 새로운 계명에 있다는 것이다.

 

요한복음18: 28-32

28 그들이 예수를 가야바에게서 관정으로 끌고 가니 새벽이라 그들은 더럽힘을 받지 아니하고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하여 관정에 들어가지 아니하더라

29 그러므로 빌라도가 밖으로 나가서 그들에게 말하되 너희가 무슨 일로 이 사람을 고발하느냐

30 대답하여 이르되 이 사람이 행악자가 아니었더라면 우리가 당신에게 넘기지 아니하였겠나이다

31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가 그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없나이다 하니

32 이는 예수께서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가리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에스겔36: 22-28

22 그러므로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이렇게 행함은 너희를 위함이 아니요 너희가 들어간 그 여러 나라에서 더럽힌 나의 거룩한 이름을 위함이라

23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더럽혀진 이름 곧 너희가 그들 가운데에서 더럽힌 나의 큰 이름을 내가 거룩하게 할지라 내가 그들의 눈 앞에서 너희로 말미암아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여러 나라 사람이 알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24 내가 너희를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인도하여 내고 여러 민족 가운데에서 모아 데리고 고국 땅에 들어가서

25 맑은 물을 너희에게 뿌려서 너희로 정결하게 하되 곧 너희 모든 더러운 것에서와 모든 우상 숭배에서 너희를 정결하게 할 것이며

26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27 또 내 영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28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준 땅에서 너희가 거주하면서 내 백성이 되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라

 

이것을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을 보고 예수님은 소경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시각으로 하나님의 절대적인 말씀을 분별하지 못하고 인본적인 시각으로 부수적인 것을 보고 이것 해라, 저것 하지 말라며 행위만 강조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곧 소경인 것이다. 이런 자가 지도자가 된다면 그 공동체는 모두 자멸할 것이다.

(15:14)

 

성경의 내용 간단한가? 아니면 복잡한가?

절대로 복잡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절대적인 것 하나만 제대로 분별하면 성경은 아주 쉽기 때문이다.

문제는 성경에서 가장 절대적인 것을 분별하지 못하기 때문에 성경의 내용이 복잡하게 보이는 것뿐이다. 파랑새가 멀리 있지 않듯이 하나님의 진리 역시 우리 삶 속에 가까이 있음을 명심하라.


1-5. 신앙의 가장 절대적인 것은 어디에 있는가?

기초에 있다.

따라서 성경의 기초, 신앙의 기초를 정립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이것에 대해서는 2장에서 자세하게 다루겠다.

기초의 중요성

인간 성품의 기초

첫째와 둘째 아이 중 누가 더 세심한가?

첫째이다.

태아일 때 둘째보다는 첫째에 대한 세심한 배려 때문이다.

(운동의 기초, 공부의 기초)

식물의 기초: 뿌리, 줄기,

왜 뿌리인가?

하나님이 기초인 뿌리를 가장 절대적인 요소로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건물의 기초

피사의 사탑(13세기 건물, 세계의 7대 불가사의)

 

1-6. 신앙의 기초

신앙의 바른 정립을 위해서는 기초 신앙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러나 신앙의 기초를 바르게 세운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부분적인 보수가 불가능하기 때문이고. 기존의 잘못된 인본적인 신앙의 사탑을 완전히 허물고 신본적인 신앙의 사탑을 새롭게 쌓아야 하기 때문이다.

신앙의 기초는 쉽지만 그것을 새롭게 세우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신앙생활이 어렵게 여겨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