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창고

다시, 세상의 빛으로 - 이덕주 목사

心貧者 2018. 3. 2. 10:50



다시, 세상의 빛으로

마태 5:13-16

 이덕주 목사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이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주님을 따라 산 위에 오른 제자들에게 당부하신 말씀입니다. 주님의 부탁이고 비전입니다. 모름지기 주님을 따르는 제자와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히 살아야 할 소명이고 과제입니다.

그때 산 위에서 이 말씀을 들었던 제자들은 주님이 말씀하신 ‘소금’의 의미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에게 익숙한 율법에 소금의 용도와 의미가 정확하게 제시되었기 때문입니다. 우선 소금은 성결과 정화를 의미하였습니다. “그것에 소금을 쳐서 성결하게 하고.”(출 30:35) 그리고 소금은 변함없는 영원한 약속을 의미하였습니다. “여호와 앞에 너와 네 후손에게 영원한 소금언약이니라.”(민 18:19) 이런 구약 율법의 전통을 이어받아 주님은 소금을 화해와 평화로 해석하셨습니다.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막 9:50)

이렇듯 소금은 성결과 정화, 영원한 약속, 화해와 평화를 의미하였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그리스도인들은, 교회는, 세상에서 그런 역할을 해야 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썩어가는 세상 속에서, 갈등과 분쟁이 끊이지 않는 세상 속에서 변함없는 구원의 약속을 성취하는 교회가 되고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이었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이 또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빛은 하나님의 창조, 제일 첫 번째 작품이었습니다. 빛은 그 후 이루어진 모든 창조, 모든 질서, 모든 생명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빛은 어둠 속에서 그 능력과 영광이 드러납니다. 아무리 칠흑같이 어두운 어둠이라 할지라도 어둠은 결코 빛을 이기지 못합니다(요 1:5).

주님은 창조의 빛, 그 자체이셨습니다. 그리고 그 빛을 세상으로 반사하는 거울로 제자들을 세우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어두운 세상을 밝히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빛이 그리스도인들을 통해, 교회를 통해 세상에 투사될 때 어둠 속에 갇혔던 세상에서 하나님의 구원과 창조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됩니다. 주님은 그 빛의 작용을 ‘착한 행실’로 표현하였습니다.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여기 언급된 ‘그들’은 세상 사람들, 요즘 말로 하면 믿지 않는 사람들, 교회 밖의 사람들입니다. 구원의 대상이요 전도와 선교의 대상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은 교회 안에서 외치는 구호가 아닙니다. 교회 밖 세상 사람들의 함성이어야 합니다. 성경도 모르고 교리도 모르는 사람들이지만 그리스도인들의 ‘선한’ 행위를 보고 감격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교회로 몰려오는 날, 그 날이 구원의 완성이 이루어지는 날입니다. 그런 날을 앞당기는 것이 오늘 우리의 사명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

1백 년 전, 우리 신앙 선배들은 과연 그러하였습니다. 소금은 많아야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너무 많으면 그 맛이 씁니다. 소금은 적당히 쳐야 합니다. 조금만 있어도 맛을 내게 되어 있습니다. 삼일운동이 일어났던 1919년, 한반도에 기독교 복음이 전파된 지 30년 조금 넘은 초창기였습니다. 교파를 초월해서 교회에 다니는 신자가 15만에서 20만 정도로 전체 인구의 1% 수준이었습니다. 우리 민족의 전통 종교인 불교나 유교는 물론이고 당시 천도교가 1백만 신도를 운운한 것에 비하면 기독교는 정말 신흥종교 수준의 소수 종교였습니다.

그럼에도 기독교는 삼일운동의 모든 과정에서 주도적이고 핵심적인 역할을 감당하였습니다. 민족 지도자 모의단계에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중 16명이 기독교 대표였습니다. 또한 대중 투쟁단계에서 서울과 지방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고 투옥된 수감자 가운데 25%가 기독교인이었으며 전체 수감자 중 5% 정도를 차지하고 있던 여성 수감자의 80%가 기독교인이었습니다. 당시 기독교인이 백 명 중 한 명이 될까 말까하던 시절에, 거리에 나서 만세를 부르며 군중을 선도한 사람들 가운데 네 명에 한 명이 기독교인이었으며 치마를 입고 거리에서 만세를 부른 여성 가운데 열 명 중 여덟 명이 교인이었다는 계산입니다.

삼일운동에서 우리 감리교회 선배들의 참여와 투쟁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삼일운동 민족대표로 참여한 이필주 목사와 신홍식 목사, 오화영 목사, 최석모 목사, 신석구 목사, 정춘수 목사, 박희도 전도사, 김창준 전도사, 박동완 전도사 등 9명의 감리교 목회자들만 있지 않았습니다. 이보다 한 달 앞서 일본 도쿄에서 거행된 2·8독립선언서에 서명한 7인 대표 가운데 감리교인 전영택과 윤창석이 있었고 1월 23일 고종황제의 승하소식을 들은 춘천의 유한익 목사는 ‘상복을 입고’ 금식 기도함으로 지역주민들의 애국심을 고취하였습니다. 3월 1일, 서울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함으로 군중시위의 불꽃을 당겼던 정재용은 해주읍감리교회 전도사였고 같은 날 평양에서는 남산현교회 박석훈 목사, 원산에서는 원산중앙교회 곽명리 전도사와 이가순 전도사가 앞장서서 만세운동을 시작하였습니다. 이후 경기도 개성과 강화, 인천, 수원, 고양, 옹진, 충청도 천안과 공주, 강경, 대전, 충주, 강원도 원주와 춘천, 철원, 김화, 강릉, 양양, 고성, 통천, 평안도 영변과 태천, 진남포, 강서, 황해도 해주와 연안 등 감리교 선교구역에서는 예외 없이 만세운동이 일어났으니 “교회가 들어간 곳에서는 어김없이 만세운동이 일어났다.”는 선교사의 증언이 거짓이 아니었습니다. 교회 종소리는 믿는 자든, 믿지 않는 자든, 모두에게 만세 부르러 교회에 나오라는 신호였습니다. 그렇게 교회 예배당과 기독교 학교는 독립만세운동의 요람이고 거점이었습니다.

 

소금이 그 맛을 내려면 녹아져 없어져야 하고, 등불이 그 빛을 밝히려면 기름을 태워야 합니다. 맛과 빛은 희생을 요구합니다.

독립만세운동에도 희생이 따랐습니다. 어떤 종교, 어떤 교파 교회보다 적극적으로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감리교회였기에 그에 따른 희생도 컸습니다. 삼일독립만세운동 때 감리교회가 입은 피해는 1919년 11월 6일, 서울 정동제일교회에서 개최된 제12회 미감리회 조선매년회에 제출된 각 지방 감리사 보고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보통 감리교 연회는 봄에 열렸는데 그 해는 만세운동 여파로 총독부에서 규모가 큰 종교 집회를 금지시키는 바람에 시위가 어느 정도 잦아진 늦가을에야 열릴 수 있었습니다.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으며 진행된 회무였지만 각 지방 감리사들은 독립만세운동으로 인한 교회의 피해상황을 소상하게 보고했습니다.

우선 경성지방 감리사 최병헌 목사의 보고입니다.

“금년 3월 1일 조선독립운동으로 인하여 교역자 중에 피수되어 고초를 당함으로 교회 사업이 건둔하오며 간신히 후보자로 대리하면 얼마 못가 또 피촉되고 청년학생들은 탐정의 기찰과 수색의 심함을 견디지 못하여 어느 곳으로 도망하였는지 알 수 없사오며 설교자가 없으니 실로 답답한 사정인데 어떤 교회에서는 주일예배에 인도자가 없음으로 교우들이 기도를 하고 폐회한 일도 있으며 정동교회는 3월 1일에 이필주 목사와 박동완 전도사가 피수되고 그 후에는 정동교회에 동량과 같은 김진호 정득성 양씨가 피촉되며 배재학당 생도들과 이화학당 교사와 생도들이 다수히 피수됨으로 교우는 흩어지고 인심은 송구하야 봄부터 가을까지 저녁 집회를 정지하였으며 종로교회는 김창준 박희도 양씨가 체포된 후로 직원들은 다른 곳으로 도피하고 청년교사는 사방으로 흩어져 교회 문부를 기록할 자가 없음으로 계삭회 때 여학생으로 서기를 대리케 한 일도 있습니다.”

그 유명한 ‘제암리교회와 수촌리교회 방화사건’의 현장을 방문해서 참상을 세계에 알렸던 수원지방 노블(노보을) 감리사의 보고입니다.

“3월 1일부터 조선독립운동이 시작된 후로 교회를 심방하기에 불능한 것은 선교사들이 회당을 심방한 후에는 순사의 조사가 더욱 심함으로 9월 1일까지 교회시찰하기가 곤란하였습니다. 목사 5인과 인도자 13인이 수감되었고 교인 13명이 일본 병사에게 피살되었습니다. 그럼으로 교역자 52인이 없어졌습니다. 그 중 목사 3인은 놓여나고 1인은 보석으로 나왔습니다. 남양과 제암과 오산 구역에 7개 교당이 일병에게 파괴를 당하였고 그 근방에 329개 가옥이 불탔고 1,600인이 거처할 곳이 없게 되었고 그 지경에 참사자의 수를 분명히 알기 어려우나 믿을만한 통지에 의한 즉 신자와 불신자를 합하여 82명이라 합니다. 불탄 회당 3처는 다시 건축하였고 기타 3처 회당은 건축 중입니다. 제암회당에서 일병에게 피살된 자가 23인이나 되는 고로 금일까지 참배자는 이러한 예측 못할 변고를 당할까 무서워하는 중에 있는 이 지경 신자 334인 중이 173인은 혹은 피살 혹 피수 혹 도피하였나이다. 제암지경에 있는 교인들은 이러한 불측지사를 당하며 악형과 총검의 위험을 보았으되 신심이 더욱 독실하여 가며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면서 말하기를 ‘죽음은 언제든지 올 터인즉 나를 대신해 죽으신 주 예수께 더욱 충성하겠다.’ 하는데 불신자들은 항상 권하기를 ‘예배당에 가지 말라 일병이 또 올까 두렵다.’ 함으로 이것이 어렵습니다.”

죽은 교인들도 그러했지만 살아남은 제암리교회 교인들은 시련과 환란 중에도 오히려 돈독해 지는 믿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아오내장터 만세시위’로 역사 많은 희생자를 낸 천안지방의 윌리엄즈(우리암) 감리사의 보고입니다.

“천안 동구역은 본 구역에 중심지 되는 병점시장에서 지난 4월 1일에 장날을 이용하여 모든 사람이 시위운동을 열렬히 하는 동시에 일본 헌병에게 20여 인이 참혹한 참상을 당하는 중에 신자가 3인이었으며 그 중에 제일 비참한 것은 한 교우의 가족이 당한 사실이외다. 주인 부부는 참살을 당하였고 그의 자제는 여러 달 동안 감옥에서 상처를 치료하며 고생을 당하였고 그의 여식은 3년 징역에 선고를 받았고 그의 어린 아들 두 아이는 무의한 가련한 광경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것이외다. 큰 환란을 당하였으나 신자들이 전혀 줄지 않고 한 방향으로 전진하여 교무를 처리하는 중이외다.”

윌리엄즈 감리사 보고에 나오는 ‘비참한 한 교우의 가족’은 곧 그 유명한 류관순 열사의 가족을 의미합니다. 류관순은 서울 이화학당에 다니던 중 삼일만세운동을 맞아 사촌 언니 류예도와 함께 만세시위에 참여하였고 학교가 문을 닫은 후 고향으로 내려와 지령리교회(매봉교회) 교인들과 함께 4월 1일 아오내장터 만세운동을 준비하였습니다. 온 집안 가족이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는데 아버지 류중권 권사와 어머니 이소제는 시위현장에서 일본군의 발포로 목숨을 잃었고 시위대를 이끌던 작은 아버지 류중무 권사도 현장에서 체포되었습니다. 류관순도 물론 체포되었습니다. 류관순의 오빠 류우석은 당시 공주 영명학교 학생으로 4월 1일 공주읍 만세운동을 주도하고 현장에서 일본군이 휘두른 칼에 중상을 입고 체포되었습니다. 윌리엄즈가 이 보고서를 쓸 때까지만 해도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 중이던 류관순은 1920년 3월 1일, 삼일운동 1주년 기념 ‘옥중 만세운동’을 주도하고 혹독한 고문을 받은 끝에 1920년 9월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 때 나이 18세였습니다.

천안 아오내와 같은 날, 4월 1일 공주읍에서도 장날을 기하여 대규모 만세시위가 일어났습니다. 공주읍 만세운동은 공주읍교회 현석칠 목사와 김사현, 김관회, 이규상, 현언동, 김수철 등공주 영명학교 교사와 학생들이 주도하였습니다. 만세시위 후 공주지역 감리교 지도자 20여 명이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는데 그 상황을 공주지방 감리사 테일러(대리오)는 이렇게 보고하였습니다.

“마음이 흥분되는 형편은 독립운동에 소요로 인하여 예배를 정지하지는 아니하였고 교인의 다수가 피수되었으나 독신하는 남녀교우들이 교회를 붙들고 있는 것은 자기만 위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교회에 있는 동포를 위함이외다.”

역시 찬송가 가사, “환란과 핍박 중에도 성도는 신앙 지켰네. 옥중에 매인 성도나 양심은 자유 얻었네.” 그대로였습니다.

서울과 같은 3월 1일에 만세운동을 벌인 평양에서는 평양 남산현교회가 그 운동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담임자 신홍식 목사는 서울로 올라가 민족대표 33인 중 1인으로 활약하였고 부담임 박석훈 목사는 지방내 감리교회 목회자 및 장로교 장대현교회와 연락을 취하면서 만세시위를 준비하였습니다. 그렇게 평양 만세운동을 진두지휘한 박석훈 목사는 시위현장에서 체포되어 평양 형무소에 수감 중 ‘옥사’하였습니다. 그 외에도 평양지방에서 많은 희생자가 나왔습니다. 그 사실을 평양지방 감리사 무어(문요한)는 이렇게 보고하였습니다.

“본지방회를 개하려고 할 때에 조선목사 중 1인이 말하기를 금년 지방회는 감옥에서 개회하면 좋겠다하니, 이렇게 말한 까닭은 금번 조선독립운동으로 인하여 감옥에 있는 목사, 전도사, 권사, 속장, 학교 교사, 주일학교 교사 합수가 160인이라. 3월 1일에 이 운동이 시작된 후로 지금까지 그 영향이 있다. 각 교회 형편을 둘로 나눌 수 있으니 1은 운동 전이요 2는 운동 후라. 본래 목사의 수가 28인인데 그 중 14인은 금고 되고 4인은 사직하다. 고로 남은 이가 불과 10인이라. 집사품 받은 목사 10인 중 8인은 금고 되고 1인은 신병으로 휴직하니 년회 연말에는 2인만 남았나이다.”

“차라리 지방회를 감옥으로 가서 합시다.” 살아남은 목회자가 선교사에게 한 말입니다. 전체 지방 목회자의 80-90%가 감옥에 들어가 있거나 피신 중이어서 교회가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시련과 고난이 성도들의 믿음을 더욱 굳세게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민족의 십자가’를 지는 교회 모습에 감동을 받은 지역 주민들의 개종이 늘어나 1920-30년대 평양은 ‘조선의 예루살렘’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수난 받는 민족과 함께 하는, 민족을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는 한국교회의 모습을 증언하는 선교사 감리사들의 지방 보고가 그립습니다. 감옥에 들어가 있는 목회자들이나 밖에 있는 목회자들이나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했던 그 시절 연회가 참으로 그립습니다. 가장 북쪽에 있던 영변지방의 버딕(변조진) 감리사도 같은 보고를 하였습니다.

“금년 3월 여자대사경회를 모이기로 작정하였더니 독립운동으로 인하야 정지하고 10월로 연기하였다가 호열자로 정지하엿나이다. 3월 이후 조선독립운동사건으로 인하여 목사와 전도사 없는 곳은 영변, 태천, 신창, 북원, 운산인데 목사 2인, 전도사 2인, 권사 1인, 속장 1인, 전도부인 1인, 학교 교사 2인, 생도 5인, 남녀교우 3인인데 근일 출옥된 이는 7인이며 피신한 자는 목사 1인, 전도사 1인이외다.”

인천지방 오기선 감리사도 역시 “조선독립운동 소요 중 형편”이란 제목으로 “피촉자 131인, 입감자 52명, 면소자 26인, 기소자 28인 중 목사 2인”이라고 보고하였습니다. 오기선 감리사의 인천지방 보고에는 삼일운동 역사상 가장 많은 ‘2만 명 시위군중’이 참여한 강화읍 만세시위를 주도한 강화남구역 교회 지도자들의 투쟁이 반영되어 있었습니다. 즉 길상면 온수리의 유봉진 권사와 조인애 속장 부부, 길직리의 장흥환과 강명순, 장동원, 조종렬, 조종우, 방렬, 선두리의 염성오와 황도성, 황윤실, 황도문, 유희철 등은 ‘결사대’를 조직하고 3월 18일 강화읍 장날을 기해 강화읍내에 진출해서 2만 명 군중을 지휘하며 만세시위를 벌였습니다. 강화 만세운동으로 경찰에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된 이가 모두 43명이었는데 그 중 28인(65%)이 감리교인이었습니다.

강화 만세운동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4월 들어서 강화 전 지역에서 야간 봉화시위가 전개되었는데 강화 본도의 봉천산과 별립산, 혈구산, 진강산, 마리산, 정족산, 그리고 석모도의 낙가산과 상봉산, 교동도의 화개산으로 이어지는 야간 봉화시위는 예전에 외적을 침입을 알리는 봉홧불처럼 교인과 주민들이 하나가 되어 마을 뒷산에 올라 나라와 민족의 독립을 알리는 ‘민족의 횃불’이 되었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주님의 말씀, 그대로였습니다.

그렇게, 그 때 우리 신앙선배들은 세상의 소금으로, 빛으로 존재하였습니다. 소금으로, 빛으로 행동하였습니다. 그 결과 그 때까지 기독교에 대해 의심하며, 불신하며, 거리를 두었던 이방인들이, 믿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 심지어 기독교를 폄하하고 비판했던 사람들이 삼일운동을 거치면서, 민족의 십자가를 지고 고난의 언덕을 오르는 그 모습을 보고 기독교에 대한 인식을 바꾸었습니다. ‘충군애국’, ‘호국종교’를 입으로만 외치고 행동에 나서지 않았던 유교, 불교 신봉자들은 부끄러움을 느꼈습니다.

그렇게 해서 삼일운동을 거치면서 기독교에 입교하는 불신자들이 늘어났습니다. 독립운동이라는 기독교인들의 ‘착한’ 행실을 보고 믿지 않던 ‘그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교회를 찾아 나왔습니다. 전도는 교리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로 하는 것은 더욱 아닙니다. 진실 된 믿음의 행위, 세상을 위한 소금과 빛, 나라와 민족을 위한 자기희생이 전도와 선교의 지름길입니다. 참으로 삼일운동은 우리 민족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한국교회에 부여하신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 그 사명을 인식하고 실천하였던 은총의 계절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모든 자랑스러운 역사가 ‘과거지사’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와 상관없는 조상들의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교회 밖의 ‘그들’은 오늘 우리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그렇다고 치자. 그 자랑스러운 역사는 너희 조상들의 이야기일 뿐이다. 오늘 너희는 어떠하냐? 그처럼 감동적이고 위대했던 조상들의 믿음과 실천이 오늘 너희에게 그대로 있는가? 언제까지 조상들의 이야기만 팔 것인가?”

부끄러울 뿐입니다. 사심 없이, 순수한 믿음으로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살았던 믿음의 조상들 앞에서 부끄러울 뿐입니다. 또한 그 때, 독립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들어가 있는 기독교인들을 바라보면서 불신자들이 부끄러워했듯, 오늘 우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기는커녕 목회자의 윤리적 타락과 교회의 세속화로 세상 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울 뿐입니다. 그것은 곧 맛을 잃은 소금, 말 아래 둔 등잔과 같습니다.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소금과 등잔일 뿐입니다. 부끄러운 현실입니다.

그런데 부끄러운 것이 수치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부끄러울 때 철저히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부끄러움을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은 부끄러움이 회개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이 주님 앞에서 느꼈던 그 부끄러움(요 8:3), 주님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부인했던 베드로가 새벽 닭 울음소리에 깨우친 그 부끄러움(눅 14:72)입니다. 부끄러워하는 자만이 회복의 길을 떠날 수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부끄러움으로 시작되는 회개는 용서하시고 다시 쓰시려는 은총의 시작입니다. 이제, 우리는 부끄러움을 바탕으로 다시 세상의 소금으로, 빛으로 거듭나야 하겠습니다.

무엇을 회복해야 할까요? 무엇보다 회개를 회복해야 하겠습니다. 삼일운동 때 1%에 불과했던 기독교계가 민족독립운동의 선도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일까요? 기독교 목회자들에게 ‘민족대표’라는 칭호가 붙여졌을 때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거나 반대하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교회 종소리가 교인 뿐 아니라 불신자들에게도 동원령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여기서 삼일운동 15년 전에 일어났던 초기 부흥운동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1903년 원산에서 시작하여 1907년 평양으로 옮겨 간 초기 한국교회 부흥운동은 처음부터 끝까지 ‘회개운동’이었습니다. 철저한 죄의 회개와 윤리적 갱신이 부흥운동의 목적이고 내용이었습니다. 회개와 중생과 성화, 이것이 초기 부흥운동의 핵심이었습니다.

이런 회개의 부흥운동을 거치면서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참 기독교인’(real Christian)이 되었고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높은 수준의 성결을 실천하였습니다. 그 결과 목회자들은 교회 안에서만 아니라 교회 밖에서도 ‘지도자’로 인정받고 존경을 받았습니다. 목회자의 말이 교회 안에서만 통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밖에서도 통하였습니다. 목회자의 ‘영적 권위’(spiritual authority)가 교회의 ‘사회적 지도력’(social leadership)으로 연결된 것입니다. 초기 부흥운동 때 ‘통회자복’이 치열하게 일어났던 지역, 곧 원산과 평양, 영변, 해주, 공주, 강화, 철원, 천안 등지에서 기독교인들이 주도한 독립만세운동이 성공적으로 전개된 배경입니다. 그런 영적 회개와 윤리적 갱신이 오늘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위기의 시대를 사는 오늘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회개입니다. 회개를 통하지 않고는 구원으로, 믿음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전도도, 선교도, 사업도, 행사도 회개로 시작할 것입니다. 회개는 신앙의 출발입니다. 주님도 그러하셨지만 세례자 요한도 첫 메시지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였습니다. 웨슬리는 회개를 “구원으로 들어가는 현관이라.”고 하였습니다. 회개는 본질 회복입니다.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원래 상태, 본 모습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평화라 합니다. 오늘 한국 교회와 사회는 평화 회복을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평화로 번역되는 히브리어 ‘샬롬’(shalom)은 “완전” 혹은 “온전”을 뜻하는 ‘셸렘’(shelem)에서 파생된 것입니다. 완전한 상태, 온전한 모습, 그것이 곧 평화입니다. 반대로 깨지거나 잃어버리면 평화 없이 갈등과 대립을 반복할 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잃어버린 것을 되찾아 본래 상태로 돌려놓음으로 평화를 회복하시려 세상에 오셨습니다. 주님의 ‘회개 사역’을 잘 보여주는 것이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세 가지 비유, 즉 잃은 양과 잃은 드라크마와 잃은 아들을 되찾는 이야기입니다. 잃은 양 한 마리와, 잃은 드라크마 하나와, 잃은 아들 하나가 그토록 소중한 이유는 그 하나를 되찾아 올 때 비로소 본래의 ‘1백 마리 양’, ‘열 드라크마’, ‘두 아들’ 상황으로 회복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를 채워야 비로소 완전해 진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삼일운동은 한국교회 지도자들에게 ‘되찾는’ 회개운동이자 평화 회복운동이었습니다. 민족대표로 참여한 신석구 목사는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07년 경기도 고랑포에서 회개하고 믿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처음 믿을 때부터 민족구원을 회개운동에서 발견하였습니다.

“참으로 나라를 구원하려면 예수를 믿어야겠다. 나라를 구원하려면 잃어버린 국민을 찾아야겠다. 나 하나 회개하면 잃어버린 국민 하나를 찾는 것이다. 내가 믿고 전도하여 한 사람이 회개하면 또 하나를 찾는 것이다. 그리하여 잃어버린 국민을 다 찾으면 나라는 자연스럽게 구원받을 것이다.”

잃어버린 국민을 되찾는 것이 곧 민족 구원의 지름길이었습니다. 그러기 위해 자신부터 되찾아야 했습니다. 그에게 목회와 전도는 잃어버린 국민을 되찾아 오는 회개운동이었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삼일운동에도 참여하였습니다. 그는 친구 오화영 목사로부터 민족대표로 참여하라는 권면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즉각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보수적인 신앙을 지닌 그로서는 “과연 목회자가 정치운동에 참여하는 것이 가한가?” “이번 운동이 기독교인들만의 운동이 아니라 종파가 다른 천도교와 불교도 참여한다는데 과연 교리적으로 합당한가?” 하는 질문에 쉽게 답을 얻지 못했던 때문입니다. 그는 이 문제를 두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하늘의 응답을 얻었습니다.

“그 후 새벽마다 하나님 앞에서 이 일을 위하여 기도하는데 2월 27일 새벽에 이런 음성을 들었다, ‘4천년 내려오던 강토를 네 대에 와서 잃어버린 것이 죄인데 찾을 기회에 찾아보려고 힘쓰지 않으면 더욱 죄가 아니냐.’ 이 즉시 곧 뜻을 결정하였다.”

“잃어버린 것이 죄인데, 되찾지 않으면 더욱 큰 죄가 아닌가?” 하는 하늘의 음성을 듣고 그는 곧 뜻을 정하고 독립운동에 참여하였습니다. 주님의 음성, 그것으로 교리적인 문제. 종파 문제는 해결되었습니다. 그가 그렇게 독립운동에 참여하기로 결심한 직후 주변에 “시기상조다. 그런다고 일본이 독립을 시켜줄 것 같으냐? 계란으로 바위치기다.”며 만류하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그럴 때마다 신석구 목사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도 이른 줄 안다. 그러므로 나는 지금 독립을 거두려 함이 아니요 독립을 심으러 들어가노라.”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시 126:6)고 하였습니다만 뿌리는 자와 거두는 자가 항상 같은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다를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누구나 뿌리는 수고보다 거두는 기쁨을 기대합니다. 그러나 신석구 목사는 뿌리는 것으로 자신의 사명을 삼았습니다. 자신은 독립을 볼 수 없을 지라도 후손을 위해 독립을 심는 농부가 되겠다고 나섰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밀알의 죽음으로 비유하였습니다.

“예수님 말씀하시기를 밀알 하나가 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그냥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열매가 많이 맺을 터이라 하셨으니 만일 내가 국가 독립을 위하여 죽으면 나의 친구들 수천 혹은 수백의 마음속에 민족정신을 심을 것이다. 설혹 친구들 마음에 못 심는다 할지라도 내 자식 삼남매 마음속에는 내 아버지가 독립을 위하여 죽었다는 기억을 끼쳐 주리니 이만하여도 만족한다고 생각하였다.”

이처럼 ‘하늘의 음성’을 듣고 ‘독립의 밀알’을 심는 심정으로 운동에 참여하였습니다. 그에게 독립운동은 종교적 신념이자 소명이었습니다. 그래서 검찰이나 판사로부터 “그대는 목사로서 무슨 이유로 이 운동에 참여하였는가?”는 질문을 받고 즉각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추후에 또 할 것인가?”라는 판사의 질문에 대해서도 “물론이다. 하나님의 명령이니 어찌 거역하겠는가?” 응답하였습니다. 이렇듯 신석구 목사에게 삼일운동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회개운동이자 신앙운동이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과 교회와 민족 앞에서 철저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도 믿음에, 민족에 철저해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믿음을 끝까지 지키지 못한 실수와 오류에 대한 반성과 죄책입니다. 알려진 바와 같이 삼일운동 때 민족대표로 참여했던 인사들 가운데 일제말기 위기상황에서 신앙 지조와 민족 양심을 지키지 못하고 훼절과 반역의 행위로 ‘친일파’ 노선을 걸었던 인물들도 나왔습니다. 감리교의 경우 박희도와 정춘수가 대표적이었습니다. 민족대표는 아니었다 할지라도 한국교회 지도자로서 일제말기 신사참배와 궁성요배, 창씨개명과 강제징용 등 일제의 황민화정책에 순응함으로 ‘친일 부역자’로 낙인찍힌 많은 인물들이 있었음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지도자의 실수는 개인적인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세상은 그에게 지도력을 위임한 교회 전체의 타락과 오류로 해석합니다.

그리고 일제말기 교회 지도자들의 오류와 실패는 해방 후 민족 분단과 교회 분열의 단초를 제공하였습니다. 실수한 지도자들은 해방과 함께 일선에서 물러나 자숙하고 반성하면서 교회와 민족 앞에서 용서를 구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변명으로 일관하면서 잡은 교권을 유지하기에 급급하였습니다. 그 결과 교회 안에 갈등과 분쟁이 야기되어 해방 후 한국 감리교회는 세 차례에 걸쳐 교단분열을 경험하였습니다. 다행히 분열 후 3-5년 만에 다시 통합하여 한국 감리교회는 ‘하나의 교단’을 유지하고 있습니다만 분열의 원인이 되었던 내적 갈등 요인을 완전히 해소하지 못하고 외형적인 통합을 이루었기 때문에 교회 안에 지방색과 학연을 바탕으로 한 ‘서클정치’가 난무하였습니다. 패거리 문화에 함몰되어 감리사 선거, 감독 선거 때마다 세속 정치와 다를 바 없는 추태를 보였습니다. 선거 때마다 돌아다니는 돈 봉투로 교회는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부끄러워하며 통절하게 반성할 대목입니다.

이처럼 불신과 반목, 분열과 분쟁으로 하나 되지 못한 교회는 밖을 향해 화해와 평화를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회칠한 무덤이고 외식하는 바리새인일 뿐입니다. 밖을 향하기 전에 먼저 안을 돌보아야 할 것입니다. 해방 전후로 금욕과 청빈의 수도생활로 ‘맨발의 성자’란 별명을 받았던 영성운동가 이현필 선생이 제자들과 나눈 대화입니다.

“말세에는 거짓 선지자와 가까 영이 교회에 들어와 교인들을 현혹할 것이니 참 성령과 가짜 영을 잘 분별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가짜와 참 성령을 구별할 수 있습니까?”

“가짜 영이 임하면 성령의 불로 자신의 모든 죄가 태워 없어져 자신이 의인이 된 것으로 착각하여 남의 죄와 실수를 지적하고 정죄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참 성령이 임하면 숨겨진 죄를 기억하고 생각나게 만들어 회개하게 하시는데, 어디 숨어 있었는지 계속 죄가 드러나 남을 심판하고 정죄할 여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참 성령이 임하면 교회에 평화가 오고 가짜 영이 들어오면 교회에 분쟁이 일어납니다. 그걸 보고 참 성령과 가짜 영을 분간할 수 있습니다.”

가짜 영은 손가락을 바깥으로 향하게 만들고 참 성령은 안으로 향하게 만듭니다. 그렇게 해서 참 성령은 자복과 회개를 통해 참된 평화를 세웁니다. 되찾은 양으로, 되찾은 드라크마로, 돌아온 아들로 기쁨과 평화가 회복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회개 눈물은 평화의 우물물을 끌어 올리는 마중물입니다.

오늘 우리의 회개는 미래의 평화를 준비하는 마중물이어야 합니다. 하나 되지 못하고 서로 나뉘어 갈등하고 반목했던 우리의 죄를 반성하고 회개할 것입니다. 패거리 집단 문화와 집단 이기주의에 매몰되어 의견이 다르고 배경이 다르면 무조건 배척하고 무시했던 편파적 분쟁도 청산할 죄악입니다. 그런 다음에야, 교회 안에서 서로 대화하고 협력하고 하나 되는 모습을 보인 다음에야 우리는 세상을 향하여, 사회를 향하여 화해와 평화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백 년 전 ‘독립’을 외쳤던 삼일운동은 분단된 오늘 현실에서 ‘평화’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독립을 평화로 완성하라는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삼일운동은 아직도 우리에게 ‘미완의 독립운동’입니다. 삼일운동 때 민족대표로 참여했던 신석구 목사는 북쪽 진남포에서 해방을 맞은 후 “양을 버리고 갈 수 없다.”며 월남하지 않고 남아 있다가 반공비밀결사를 조직했다는 혐의로 북한 공산주의 정권에 체포되어 평양 인민교화소에 수감되었습니다. 칠십이 넘은 독립운동가를 감옥에 가둬둔 것이 편치 않았던 정권 담당자들이 석방조건을 제시하며 회유하였습니다. 그때마다 신석구 목사는 이렇게 대꾸하였습니다.

“나는 출옥하기를 원치 않는다. 삼팔선이 터져 통일되기 전에는 감옥이나 사회나 마찬가지다.”

아직도 평양 감옥에 아직도 갇혀 있는 신석구 목사를 구출해야 하겠습니다. 통일이 되기까지, 다시 민족이 하나가 되기까지, 한반도 전체가 민족의 감옥일 뿐입니다. 과연 그러했습니다. 남이든, 북이든 분단 70년은 불행이고 비극이었습니다. 이제 그 비극과 불행을 끝내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과거 유대 민족이 바벨론 포로 70년 비극을 마치고 ‘평화의 도성’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새 날, 새 역사를 시작하였듯, 이제 우리도 분단 70년의 비극을 종지부 찍고 한반도에 진정한 평화의 시대를 열어야 하겠습니다. 고토에 돌아온 유대 민족이 무너진 성전을 수축하는 것으로 새 역사를 시작한 것처럼 우리도 ‘무너진 교회의 권위와 지도력’을 회복하는 것으로 평화 통일의 시대를 열어야 하겠습니다. 그 새로운 역사가 교회 지도자들의 철저한 회개와 자기 정화운동으로 시작될 것은 당연합니다.

 

우리는 지난 한 달 동안 평창 올림픽을 통해 젊은이들의 평화 축제가 어떤 것인지 목격하였습니다. 남과 북의 청년들이 같은 복장의 한반도기를 들고 입장하였고 한 팀을 이루어 경기하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처음엔 남과 북의 선수들이 서먹서먹하고 오히려 적대적이기도 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하나 되어 힘을 합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세계 언론도 평창 올림픽을 평화 올림픽이라 칭송하였습니다.

그리고 올림픽과 같은 시기, 법조계에서 시작하여 문화계를 거쳐 교육계와 의료계, 종교계로 들불처럼 번지고 있는 ‘미투운동’도 목격하였습니다. 그것은 오랜 세월 관습과 전통이란 이름으로 묵인되어 오던 폭력적 지배구조와 오류문화에 대한 사회적 약자들의 고발과 시정요청입니다. 일종의 사회적 정화(social purification) 작업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우선적으로 해야 할 회개운동을 사회가 먼저 시작한 셈입니다. 이처럼 반성을 요구하는 ‘시대적 요청’에 교회는 보다 적극적으로 응해야 할 것입니다. 이미 교회는 회개운동을 경험한 바 있습니다. 다만 그 가치와 효능을 잃어버렸을 뿐입니다.

이제 교회의 고유 신앙운동의 기초인 회개와 정화 기능을 되찾아야 하겠습니다. 소금은 그 맛을 되찾아야 하겠고 등불은 켜서 말 위에 두어야 하겠습니다. 교회는 과거에 찬란했던 영적 권위와 사회적 지도력을 회복해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교회는 다시 한 번 회개운동에 적극 나서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운동은 ‘미투’(me too)를 넘어 ‘투미’(to me)로 나가야 할 것입니다. 남을 향한 것이 아니라 나를 향한 운동입니다. 피해자의 고발이 아니라 가해자의 고백이어야 합니다. 남을 정죄하는 운동이 아니라 내 자신을 돌아보는 운동입니다.

평양 감옥에서 순교하기까지 평생 ‘올곧은’ 목사의 길을 걸을 수 있었던 신석구 목사. 그가 해방직후 진남포교회 청년들의 강권에 못 이겨 회고록을 쓰기로 작정하고 펜을 들어 첫 문장을 다윗의 기도로 시작했던 것처럼 우리도 같은 기도로 삼일운동 1백주년을 맞이할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 아멘.”(시 139:23-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