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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6: 16-18 웨슬리의 산상설교 7

心貧者 2017. 3. 16. 10:05


웨슬리의 산상설교 7

마태복음 6:16-182017/03/15()

6:16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6:17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6:18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하나님 나라로 나아가는데 있어서 가장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은총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이지요.

하나님의 은총, 하나님의 은혜

표현은 다르지만 다 같은 뜻입니다.

모든 인간에게 차별 없이 임하시는 하나님의 무궁하신(끝이 없는) 사랑을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데 이것이 없이는 그 어느 누구도 천국에 들어 갈 수 없습니다.

구원의 뿌리이자 가장 큰 전제 조건이지요.

 

 

그래서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은혜하나님의 선물’(카리스)이라고 설명합니다.

선물거저주신 사랑이라는 말입니다.

에베소서 27-8절입니다.

2:7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나님의 사랑)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2:9 행위(율법의 준수: 제사법, 성결법, 도덕법)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이처럼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은혜 아래 거할까?’

어떻게 해야 천국에 들어갈 때 까지 하나님의 은총을 입을 수 있을까?’

이것이 예수님 시대와 사도 시대의 최대 관심사였습니다.

비록 유대 사회가 사두개파 바리새파 에세네파 그리고 열심당원(젤롯당) 등으로 나뉘어져 있었지만 그 어느 누구든지 예외 없는 관심 분야가 있었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은혜 아래 거할까?’

어떻게 해야 천국에 들어갈 때 까지 하나님의 은총을 입을 수 있을까?’

그리고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은 지혜의 삶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특히 유대사회의 주류이자 백성들로부터 신임과 존경을 받았던 바리새인들에게는 이것이 초유의 관심사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유대인의 전통이 구제 생활, 기도생활 그리고 금식 생활입니다.

유대인 전통에서 정한 은총의 수단들이지요.

이러한 은총의 수단은 예수님 자신뿐만 아니라 그의 제자들로 구성된 사도 시대에도 그대로 이어지게 됩니다.

다만, 유대교와 차이점이 있다면 성찬, 성례전이지요.

떡을 떼는 성찬식과 세례가 은총의 수단으로 아주 굳건하게 교회 안에 자리 잡게 됩니다.

이것이 훗날 그리스도교의 강력한 힘이자 특징이 되게 됩니다.

특히 교부시대에 가서 은총의 수단들인 구제 생활, 기도생활 금식 생활 그리고 공동식사인 성찬 생활이 아주 화려한 꽃을 피우게 됩니다.

 

그러다가 은총의 수단들인 구제라든가 기도라든가 금식이라든가 성례전이라는 것들이 점차 형식주의로 변질되게 됩니다.

은총의 수단들이 하나님의 의가 아닌 사람의 의를 나타내는 도구로 변질되게 되지요.

특히 중세시대 교황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지도자들이나 부유층들이 여기에 앞장을 서게 됩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야할 은총의 수단들이 자기 의를 드려내는 사단의 도구로 전략하게 됩니다.

그 중에 하나가 면죄부(면벌부)입니다.

 

그런데 역사 속에서 은총의 수단들이 재발견되는 시대를 맞이하게 됩니다.

바로 종교개혁 시대입니다.

종교개혁, 실은 다섯 가지의 신앙 개혁이지요.

이것을 우리가 ‘Five Solas’라고 하는데 훗날 개신교회의 기틀이자 특징이자 강력한 힘이 됩니다.

 

첫째, Sola Scriptura (오직 성경)  ‘하나님영감으로 쓰여 진 권위 있는 말씀은 오직 성경이다.’

그리고 성경은 누구에게나 공개되어 있고 문체가 명료하며 자기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계시 된 하나님 말씀의 재발견이지요.

 

둘째, Solus Christus (오직 그리스도) ‘구원의 유일한 길은 오직 그리스도이다.’

 

셋째, Sola Gratia (오직 은혜)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선물이다.

 

넷째, Sola Fide (오직 믿음) : 구원의 은혜는 오직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을 통해서이다.

하지만 이러한 믿음 역시 은혜의 수단일 뿐 그 대가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 Soli Deo Gloria (오직 하나님께 영광성직자의 권위와 하나님의 권위를 혼돈하지 마라.

 

그러면 이러한 신앙의 개혁, 종교 개혁을 타락한 우리가 어떻게 감히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역시 하나님의 은총을 통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다시 새롭게 입을 수 있는 은총의 수단들을 통해서입니다.

구제생활 기도생활 금식생활 그리고 성례전입니다.

여기에서 종교개혁 이후 하나를 덧붙이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성경 읽는 일 곧 성서일과또는 성무일과입니다.

 

감리교회를 창시한 웨슬리 목사님은 이러한 전통을 모두 수용합니다.

사도 시대’ ‘교부시대그리고 종교개혁시대의 전통을 그대로 수용하지요.

그렇게 해서 완성된 것이 감리교(Methodist) 신학의 특징 중에 하나가 Means of Grace‘ ’Method of Grace‘입니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은총의 수단들이지요.

구제생활 기도생활 금식생활 성례전 그리고 성서일과(성무일과: 성경 탐구)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행위를 곱게 보지 않는 시선들입니다.

감리교인을 향한 두 가지 곱지 않은 시선인데

하나는 마치 유대인들이 제사법이나 정결법의 행위를 통해 구원을 이루려 한 것처럼 이러한 행위들(works)을 통해 구원을 이루려고 한다든 비난입니다.

또 하나는 자기 의를 드러내는 교만의 행동이라는 비난입니다.

 

어떻습니까?

이들의 비난, 이유 있는 비난일까요?

웨슬리는 여기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지금 말하고자 하는 신앙의 핵심은 은총의 도구들이지 구원의 도구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제 행위로 예를 들겠습니다.

제 몸처럼 남을 돕는 구제의 행위로 구원받을 수 있나요?

없지요.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그 어떠한 의로운 행위도 구원에 이룰만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우리가 구제의 행위를 해야만 하는가?

그것도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해야만 하는가?

그것은 구원에 이룰 수 있는 하나님의 은총 곧 하나님의 자비를 입기 위한 행위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총을 입기 위한 행위(works)들을 구원을 추구하는 행위나 자기 의를 드러내는 교만의 행동 정도로 호도 한다면 문제가 크지요.

그래서 웨슬리는 그런 무례한 이들을 향하여 은총의 수단이라는 설교에서 이렇게 질타하면서 반박합니다.

 

당신은 당신이 사용하는 표현의 의미를 아십니까?

무엇이 행위(works)로 구원을 추구하는 것입니까?

사도 바울의 서신들에 따르면 행위(works)로 구원을 추구하는 것이란 첫째, ‘모세의 법에 의한 제의적인 행위들(ritual works)을 지킴으로써 구원을 추구하는 것 이고 둘째, ‘우리 자신의 의로움에 의한 공로(merit)에 의해 구원을 기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중간생략)

 

*즉 바울은 유대인들이 율법에 시대에 추구하는 구원의 행위들을 비난한 것이지요. 예수님도 행하셨고 그의 제자들인 사도들도 행한 은총의 수단들 그 행위들을 비난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바울 역시 하나님의 자비를 얻기 위해 구제도하고 기도고 하고 금식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제발 구원을 위한 유대인의 행위와 하나님의 자비를 위한 그리스도인의 은총의 행위들을 분별하라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웨슬리는 말합니다.

 

저는 진실로 하나님이 자신의 말씀을 이룰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 그분이 이러한 방법(은총의 수단들)으로 우리를 만나시고 축복하실 것입니다. 제가 한 행위나 제 자신의 의가 아닌 단지 하나님이 항상 기뻐하시는 그분의 아들의 공로와 고난과 사랑을 통해서입니다.

다시 정리합니다.

구제 생활은 구원의 도구가 아닙니다.

남을 돕는 행위로는 절대로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남을 돕는 구제의 행위가 하나님의 자비를 얻을 수 있는 은총의 도구는 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그분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와 고난과 사랑을 입을 수 있는 은총의 통로가 된다는 말입니다.

 

기도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 한다고그 행위로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진실하게 무릎 꿇는 그 기도의 행위가 하늘 문을 여는 은총의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시지요.

구원의 도구는 되지 못하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자비를 입을 수 있는 은총의 도구는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도 할 때 전심을 다할 뿐만 아니라 기도를 멈추게 하거나 기도 생활이 잠들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금식도 마찬가지입니다.

금식, 역시 강력한 은총의 수단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구원의 수단이 아니라 은총의 수단입니다.

금식 한다고 구원 받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자비를 얻을 수 있는 은총의 수단으로 금식이 매우 중요할 뿐만 아니라 아주 유효하고 강력하다는 것입니다.

 

우선 금식이 무엇인지 알아야겠지요?

말 그대로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에 다른 행위들 예를 들자면 재를 뿌리거나 베옷을 입는 일이 첨가되기도 하지만 금식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행위는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하지만 음식량을 줄이거나 특정 음식을 금하는 절식도 금식으로 인정되었습니다.

특히 몸이 허약한 이들이 주로 이 방법을 사용하였는데 소량의 음식을 섭취하거나 특정 음식 예를 들자면 고기를 금하는 절식을 통해서 금식을 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 가 다니엘서 1장에 나오는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가 행한 절식이지요. 이것 역시 금식으로 인정되었습니다.

 

금식의 기간, 언제부터 언제까지 해야 할까요?

반나절부터 시작해서 40일까지 아주 다양하게 설정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40일을 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또 이슬람의 라마단 기간처럼 특정한 날을 공포해서 온 공동체가 금식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욤 키푸르라고 부르는 대 속죄일 금식입니다.

9중순 10월 중순사이, 유대인의 새해인 로쉬 하샤나로부터 열흘째 되는 날에 한 금식인데 하루 동안 어떤 일도 하지 않고 금식하게 됩니다.

오늘날에는 전 지구에 흩어진 유대인들을 위해 전후 30분을 더해서 25시간 금식하지요.

 

이러한 금식의 전통은 초대교회에도 그대로 이어집니다.

예를 들자면 부활절 이전에 이틀이나 혹은 일주일을 금식합니다.

부활절 이전에 이틀은 예수님이 무덤에 머물렀을 때이고 일주일은 고난 주간을 말합니다.

보통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매주 금요일에 정기적으로 금식을 했습니다.

단 예외인 날이 있습니다.

성탄절이 있는 금요일에는 금식하지 않았습니다.

 

 

금식 왜 해야 할까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의도치 않는 금식입니다.

깊은 슬픔과 두려움이 찾아왔을 때입니다.

낙심이지요.

그 때 자연스럽게 금식하지요.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금식합니다.

 

둘째 의도적인 금식입니다.

어떤 목적을 두고 하는 금식을 말합니다.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절제 없는 삶을 견제하거나 탐심과 같은 육신의 욕망을 방지하기 위해서입니다.

또 하나는 영혼의 술 취함곧 모든 영적 감각들을 무디게 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서입니다.

 

중요한 것은 의도치 않는 금식이나 의도적인 금식이나 그리스도인들에게 다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영적 감각을 무디게 하는 것을 방지할 뿐만 아니라 영적 감각을 증진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자기 방종에 대한 자기 형벌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웨슬리 목사님이 금식을 아주 중요하게 여긴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기도의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기도와 더불어 행하는 금식을 통해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볼 수 있고 온전히 하나님만을 집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금식을 통하여 기도가 더욱 간절해질 뿐만 아니라 금식을 통하여 하나님을 더욱 열망하는 거룩한 마음씨를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웨슬리 목사님은 금식을 생활화하지요.

 

금식, 왜 그것도 꼭 해야만 하는가?

간단하게 다시 정리합니다.

첫째, 회개하는 하나님의 은총과 맞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회개 다시 말해 죄를 통회하는 이들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총과 맞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 용서받은 우리가 더 이상 죄의 종노릇하지 않고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과정인 성화의 은총과 맞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다른 은총의 도구와 마차가지로 금식도 과소평가하거나 과대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웨슬리는 금식과 관련해서 두 가지의 극단적인 입장을 경계합니다.

 

첫째 금식을 과소평가하는 금식 무용론입니다.

쉽게 말해 금식 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입니다.

주로 세대주의 역사관에 따른 율법 폐기론자들이 이런 주장을 하는데 은혜의 시대에는 금식이 필요 없다는 주장입니다.

 

어떻습니까?

이 분들의 주장이 옳은지요?

아닙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금식은 우리에게 첫째 회개의 은총, 둘째 용서의 은총 그리고 셋째 성화의 은총 자리로 인도하기 때문에 금식이 필요 없다는 율법폐기론은 설득력이 약합니다.

 

두 번째로 금식과 관련된 극단적인 입장인데 금식의 대한 과대평가입니다.

오늘 본문이 이를 경계하는 내용인데 본문 그대로 살펴보겠습니다.

6:16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6:17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6:18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한 마디로 이런 뜻입니다.

금식 참 좋은 것인데 자칫 잘못하면 과대평가해서 자기 의를 드러내는 자랑의 수단으로 변질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조심하고 또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금식을 통해서는 하나님의 의(칭위)를 획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강조합니다.

금식은 은총의 수단이지 구원의 수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한계를 분명히 알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금식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얻을 수 있는 은총의 수단입니다.

구약시대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시대에도 그리고 그의 제자들에 시대에도 그것이 유익하기에 가르치고 실천했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같은 길을 가지 않을 이유가 없지요.

 

한 번은 웨슬리 목사님이 금식과 관련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금식하지 않는 이는 기도하지 아니하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하늘가는 길에서 멀다.’

 

그러니 금식을 통하여 하늘나라로 한 걸은 더 깊이 들어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