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은성수도원

心貧者 2011. 4. 7. 15:44

얼마 전 은성수도원이라는 곳을 다녀왔다. 현재 은성수도원은 장로회신학대학교 소속이다. 이 학교의 신학대학원생들은 졸업할 때까지 한 번은 이곳을 다녀와야 한다. 2박 3일 동안의 '주말 경건 훈련'을 반드시 패스해야만 졸업을 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개인적으로 필자도 자의 반 타의 반, 아니 완전한 타의에 의해 은성수도원을 방문했다.

은성수도원은 장로회신학교(장로회신학대학교) 1기 졸업생인 엄두섭 목사님이 세운 영성 훈련장이다. 그런데 은성수도원이 장신대의 경건 훈련장이 된 계기는 주선애 교수님에게서 시작된다. 평소 영성 훈련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던 그녀는 엄 목사님이 고령에 이르러 쇠약해지자 수도원을 인수하신 다음 장신대에 기증을 하였다. 현재 은성수도원장은 오방식 교수로 장신대에서 영성 훈련을 가르치고 있다.

사실 필자뿐 아니라 장신대의 대다수 학생들은 은성수도원의 존재 자체를 잘 모른다. 게다가 이 수도원이 학교 소속이라는 사실은 더더욱 알지 못한다. 학생들은 그런 상태에서 경건 훈련을 떠나기 때문에 도대체 여기서 무엇을 하는지에 관한 아무런 정보를 갖고 있지 않았다. 필자 역시 '그냥 학교에서 의무적으로 가라고 하니까 2박 3일 잘 쉬었다 와야지'라는 생각으로 가볍게 첫발을 내디뎠다.

그러나 은성수도원에 도착하자마자 이런 마음이 이내 사라졌다. 은성수도원은 포천시의 한적한 산자락에 위치해 있었다. 깊은 산속은 아니었지만 수도원 전체를 감싸고 있는 묘한 운치와 웅장한 정기가 마치 신선들이 나타날 듯 연하일휘 속에 와 있는 듯했다. 수도원 입구에 도착하자마자 필자는 작은 현판 하나에 눈을 떼지 못했다. 그 현판에는 한자로 은성(隱聖)이라는 두 글자가 박혀 있었다. 필자는 '아, 은성의 뜻이 이것이었구나'고 생각을 하고선 왠지 모르게 2박 3일간의 여정이 결코 가볍고 만만할 것 같지만은 않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런 생각을 잠시 접은 후, 우리 일행은 수도원 전체를 간단히 둘러보았다. 우리의 시선은 수도원 군데군데 놓여 있는 허름한 건물들에 사로잡혔다. 언뜻 보기에 방갈로 같기도 하고 창고 같기도 한 괴기한(?) 건축물이 이틀 동안 머물면서 기도해야 할 독방(cell)이라고 한다. 수도원은 총 20명을 수용하는데 개개인 모두가 독방을 사용한다. 특이한 점은 독방 건물 하나하나에 이름이 있다는 것인데 그 글자 모두가 한자로 적혀 있었다. 왜 한자로 표기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필자는 이곳이 낯설지 않고 다소 정겹게 느껴졌다. 왜냐하면 필자는 한국사를 전공했기 때문이다. 동양사나 한국사 전공자들은 아시겠지만 역사를 하는 사람들에게 한자는 자기 몸의 일부처럼 느껴질 정도로 친근하다. 물론 동시에 매우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도 있지만 말이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어느덧 수도원 곳곳에 적혀 있는 한자들이 너무 친숙해서 마치 고향에 온 것만 같았다. 고향의 향취에 흠뻑 젖어 있을 즈음 관리하시는 장로님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빨리 수도장(修道場)으로 모이세요." 이후 3일간의 일정에 대해 간략히 설명을 들은 후 개강 예배를 드렸다.

은성수도원에서는 나름대로의 수도 방식과 반드시 지켜야 할 중요한 원칙 한 가지가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은성수도원의 규모는 총 수용 인원이 20명이다. 규모로 볼 때는 그렇게 크지 않다. 필자와 함께 주말 경건 훈련에 참석한 학우들도 정확히 20명이었다. 가고 싶어도 더 갈 수도 없고 안 가고 싶어도 안 갈 수 없다. 반드시 학교에서 일괄적으로 편성한 조(組)에 따라 20명을 채워야 한다. 참석한 모든 수도인은 각자 독방을 사용한다. 거기서 자신을 닦는 데에만 전념해야 한다. 그리고 경건 훈련에 참석한 학생들은 3조로 나누어져 3명의 선생님들이 본문 말씀을 제시하면 학생들은 그 본문을 가지고 묵상과 기도로 본문에서 얻은 교훈을 함께 나누고 교제한다. 나머지 시간은 전체 예배와 각자 기도 시간이다. 그러나 실제로 개인 기도 시간이 있긴 하지만 주어진 본문 말씀의 양이 만만치 않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기도할 시간은 거의 없다.

수도원 생활에서 특기할 만한 또 다른 점은 새벽 예배 시간이다. 이때에는 모두가 일어나서 말없이 아주 천천히 한 바퀴를 돈다. 마치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신 것처럼 짓누르는 짐의 무게를 딛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한 발 한 발 내딛는다. 이른바 '걷기 묵상'이다. '주님 이 죄인을 긍휼히 여겨 주세요'라고 읊조리면서 서서히 땅과 하나가 되어 나를 세상에 맡긴다.

절대 침묵

은성수도원에서는 반드시 지켜야 할 규칙이 있다. '절대 침묵'이다. 이를 어길 경우, 관리하시는 분들의 매서운 눈에서 레이저 광선과 같은 따가운 시선이 발광한다. 필자를 비롯한 동료 학우들에게 절대 침묵을 지키기란 터져 나오는 재채기를 참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었다. 우리 모두는 세상의 소음에 너무 쉽게 노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침묵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필자는 마치 예비군 동원 훈련장에 끌려온 것만 같았다. 아마 예비군 훈련을 경험해 본 남자들은 아시리라. 가정, 직장, 학교 등 나름대로 각자의 삶의 자리에 있다가 동원 예비군 훈련에 들어가면 평소에 한 번도 입지 않던 옷을 입은 것처럼 도무지 무언가가 불편해서 견딜 수가 없다. 그 분위기도, 군인 아저씨들의 반공적 훈계도 받아들이기 어렵다. 하지만 세상의 직업이 무엇이든 훈련장에서는 모두 준(準)군인의 입장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국가에서 인정하는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준수한 사람으로 간주된다. 이에 순응하지 않으면 국가의 의무에 반하는 불량 감자로 낙인찍힌다. 마찬가지로 필자는 침묵이라는 익숙하지 않은 불편함을 안고 준(準)수도사가 된 듯 묵언 훈련을 견뎌 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학교 당국에 의해 요주의 인물이 되어 NP(Non-Pass)의 상태를 면할 수 없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해 보면 침묵 시간은 주님을 만날 수 있는 절호의 찬스이기도 하다. 거기서는 딱히 다른 할 일이 없다. 애오라지 주님과의 대화만 가능하다. 찬스는 잡으라고 있는 것 아닌가? 필자가 출발하기 전 '가벼운 마음으로 쉬고 돌아가자'는 안이한 마음이 사라진 이유이다. 사실 처음에는 그냥 나 자신을 기쁨에 던져 넣어 버리자고 생각했다. 단순히 엔조이하려고 했고 현재를 즐기고자 했다(carpe diem).

그런데 은성(隱聖)과 침묵(沈黙)이라는 두 글자가 나를 긴장하게 했다. 현재를 즐기려는(carpe diem)마음에서 '그래 이왕 온 김에 소나무 뿌리 하나는 뽑고 가야지'라는 열정(enthusiasm)으로 변했다. 정말이지 나름대로 침묵을 지키려고 노력하면서 선생님들이 주신 본문에 나를 던져 넣자마자 마치 내가 성서 본문의 주인공이 된 듯한 착시 현상을 느꼈다. 처음의 카르페 디엠에서 시작하여 열정(enthusiasm), 즉 틸리히의 표현을 빌리면 '하나님 안에서의 마니아(in+theos+mania)'가 된 듯했다. 어느덧 필자가 즐기려는 느긋한 마음에서 말씀의 깊은 세계로 완전히 심취해 버렸기 때문이다. 필자는 점심 후 식당에서 설거지를 하다가 우연히 눈에 띄는 글귀 하나를 발견하였다. 그것이 나로 하여금 열정을 넘어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즉 '죽음을 기억'하는 영적 깨달음을 얻게 했다. 이 글귀는 한 무명의 시인이 기록한 짤막한 시(詩)였는데 원문을 그대로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偉大(위대)한 사람은 思想(사상)을 말하고 平凡(평범)한 사람은 時事(시사)를 말하고 淺薄(천박)한 사람은 人間(인간)을 말한다." 필자가 이 시를 보는 순간 문득 무명 시인이 중요한 무언가를 놓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가 누리는 한 가지 사실 '영원성'이다. 여기서 필자는 그가 놓친 것을 부언하고 싶다. '天子(천자)는 永遠(영원)을 말한다'고 말이다. 세인들은 이 세상의 것만 말하지만 하나님의 자녀들(천자)은 현재에서 영원(eternality)을 살아간다. 이것은 세인들에게는 역설적이지만 영원성을 누리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상식의 세계이다.

드디어 수도원 생활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기도 시간이 왔다. 지도하시는 선생님들은 무념 기도와 유념 기도를 적절히 드리라고 했는데 필자는 좀처럼 무념 기도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죽음을 묵상하면서 '죽음'이라는 두 글자가 나를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과연 나의 존재는 엔트로피 법칙(열역학 2법칙)에 의해서 모든 것이 무화되는 과정을 거친 후 다시 엔탈피 법칙(열역학 1법칙)에 의해서 다른 무언가의 물질로 남을 수 있을 것인가? 그렇다면 과연 그 의미가 무엇일까?'는 생각과 '지금 생각하고 있는 나의 존재가 과연 정신의 기능인가? 아니면 뇌 속의 물리적 전기화학작용으로 생기는 물질의 일부인가?'는 생각이 나를 사로잡았다.

   
 

▲ 거룩함의 의미를 되새겨 보자. 은성(隱聖)의 참뜻이다. (사진 제공 김종만)

 

거룩함을 숨겨라

그리고 또 하나 필자의 마음을 흐리게 한 것은 은성(隱聖)이라는 두 글자였다. 은성은 말 그대로 '거룩함의 숨김'이다. 거룩함을 숨기는 것, 그 자체가 하나님의 속성이요 계시 사건이 아닌가? 하나님의 존재의 본질은 '없이 계시는 분'이다. 다시 말하면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신이며 계시로서의 하나님이다. 인간은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실 때에만 그를 알 수 있다. 소위 계시로서의 하나님이다. 계시(啓示)란 무엇인가? 그것은 열어서 보이는 것이다. 연다는 것은 닫혀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열어서 세계에 보여 주신다. 인간은 하나님이 열어서 보여 주시는 만큼만 알 수 있다.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 그를 알 수 없다. 그것이 신적 거룩함의 본질이다.

오늘날 기독교를 보자.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드러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드러나 있는 정도가 아니라 노골적으로 권력화되어 있다는 데 있다. 우리는 거룩함을 겸손히 숨기기는커녕 오히려 개신교를 종교의 으뜸으로 규정하고 공격적인 전도 마케팅에 혼신을 기울여 왔다. 이 때문에 타 종교와의 마찰은 물론, 세인들로부터 따가운 눈초리만 받았다. 한발 더 나아가 세인들이 기독교에 대해 가지는 거부감도 결코 만만치 않다. 이유는 종교가 권력 유기(遺棄)를 따르지 않고 권력 친화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지금껏 개신교 단체들의 행태를 보면 자신들의 이익에 상반되는 것에는 종교의 이름을 빙자해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이익을 관철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이들의 특징은 타 종교, 타 문화, 타인에 대한 배려는 전혀 없이 오로지 이익의 유무에 따라서만 움직인다. 시나브로 이런 단체의 존재 이유에 대한 의구심이 절정에 달했고 급기야 해체 운동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개인도 마찬가지다. 성도들 또한 자신의 신앙을 잘 숨기지 않는다. 여기서 숨긴다고 해서 신앙생활을 소극적으로 하라는 말이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소극성은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 발생하는 신적인 합일을 은폐하라는 말이다. 그 대신에 겸손의 인성이 관계성과 사회성을 통해 드러나야 한다. 다시 말해 은혜는 숨기되 겸손과 봉사의 인간적인 면은 사회적 영성을 통해 나타나야 한다. 그러나 성도의 삶은 정반대이다. 은혜는 드러나되 사회적 영성은 제로에 가깝다. 신앙에서의 지행합일이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자신이 받은 은혜를 절대화하여 모든 이들에게 주입하려 한다. 온건한 타협은 있을 수 없다. 공격적 설득만이 존재한다. 이런 일련의 신앙 행위에서 우리의 거룩함은 심각하게 노출되어 있다. 심각하다는 것은 거룩함이 은폐되어 있지 않고 오히려 드러내지 말아야 할 치부까지 드러냈다는 말이다. 결국 권력과 맘몬만을 추구하는 기독교 단체나 경직된 개개 그리스도인들은 결국 '정오의 악마'로 불리는 '아케디아(Akedia)', 즉 영적 무기력(태만) 상태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기독교의 알짬은 하나님의 계시 사건이다. 하나님은 계시 가운데 계신다. 그것이 하나님의 존재 양식이다. 즉 하나님은 계시로서 존재하는 신이다. 계시로서의 하나님은 감추어져 있고 '없이 있는 신'이다. 그런 점에서 신적 거룩함은 감추어져 있다. 이는 출애굽기 3장 14 상반절에서 명확하게 나타난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결국 이 말은 하나님의 은폐와 개방이라는 이중성을 동시에 나타낸다. 하나님은 무언가로 명명될 수 없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감추어진 신일 뿐만 아니라 스스로 있는 것의 존재 양식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개방된 하나님이다.

이런 관점으로 본다면 성도는 누구인가? 성도는 하나님의 계시 사건에 참여함으로써 그를 따라 거룩함을 숨기고 살아가는 자들이다. 성도는 세상을 향해 거룩함을 나타내는 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있는 듯 없는 듯 그것을 가린 자들이다. 비록 성도가 세상에 대해 철저히 거룩한 침묵으로 살아간다 해도 세인들은 하나님의 이중적 존재 양식처럼 우리의 거룩함을 저절로 알게 될 것이다.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여, 거룩함을 숨겨라. 은성(隱聖)이 곧 계성(啓聖)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