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코필드(석호필)선교사와 이완용
3.1운동 당시 독립선언문을 작성하고 3월 1일을 거사일로 결정한 사람들로 민족 대표 33인(기독교계16, 천도교계15, 불교계 2)입니다.
그런데 훗날 3.1운동 34번째 민족대표로 추앙되어 국립 현충원에 안장된 한 선교사가 있습니다. 그가 바로 스코필드(Frank William Schofield) 선교사입니다.
그는 1889년 영국 워릭셔 주의 럭비에서 태어나 고등학교를 마쳤으나 집안이 여의치 못하여 진학하지 못했습니다. 체셔 주의 한 농장에서 식사를 제공받는 조건으로 일하며 노동자의 비참한 생활에 관심을 가졌다고 합니다. 1907년에 캐나다로 이민하여 토론토 온타리오 대학에 들어가 1911년 수의학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1916년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교장이었던 올리버 알 에비슨의 편지를 받고 그는 의료선교사로 조선에 들어왔습니다. 그는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서 세균학과 위생학을 강의했는데 1년 만에 한국어를 익혀 한국어로 강의하였다고 합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한국식으로 석호필이라고 지었는데, 석(石)은 신앙의 굳은 의지를, 호(虎)는 호랑이의 용맹을, 필(弼)은 돕는다는 의미로 한국인을 돕겠다는 마음을 나타내었다고 합니다.
1919년 어느 날 수원에서 경성으로 가는 기차에서 스코필드 선교사는 매국노인 이완용앞에서 질문을 받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당신이 교회에는 올 수 있을지 모르나 2천만 조선 동포에게 사죄하기 전에는 구원받을 수 없을 것이오!”
스코필드 선교사는 1919년 2월 5일 당시 3.1운동 거사 준비로 이갑성을 몰래 만나 3.1운동을 위한 해외 정세를 파악하는 일을 맡았고, 3월 1일 탑골 공원에서의 만세시위 장면과 일본의 탄압을 사진으로 찍고 글로 적어 해외에 알렸습니다. 그가 촬영한 3.1운동 사진은 독립운동가의 구두 밑창에 숨겨져 상해 임시정부로 전달되기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