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풀이

마태복음 16:1-4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

心貧者 2019. 1. 11. 14:35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

마태복음 16:1-42014/1/26(주일오후)16:1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

16: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16:3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16:4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그들을 떠나 가시니라

16:5 제자들이 건너편으로 갈새 떡 가져가기를 잊었더니

저는 오늘 염치라는 말로 말씀을 시작할까 합니다.

염치, 국어사전에 나오는 사전적 의미는 이렇습니다.

체면을 생각하거나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 이것이 염치입니다.

 

201414일자 한겨례 신문에 효암학원(경상남도 양산) 이사장 채현국씨의 인터뷰 기사가 실렸습니다. 채현국 이사장, 고령의 할아버지입니다. 이 분이 젊은 시절부터 강원도 삼척에서 흥국탄광을 운영하면서 어려움에 처한 많은 이들을 도우며 살았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탄광 산업이 좋지 않자 탄광을 처분하여 광원들에게 다 나눠주고 재야로 물러났습니다. 이곳저곳에서 그의 인생에 대한 인터뷰 요청이 많았지만 쭉 응하지 않다가 얼마 전 처음으로 한 언론사와 만나게 되었습니다. 언론사 기자가 묻습니다.

왜 그렇게 인터뷰를 마다하셨나요?”

"내가 탄광을 한 사람인데사람들이 많이 다치고 죽었다. 난 칭찬받는 일이나 이름나는 일에 끼면 안 된다."

 

다시 기자가 묻습니다.

그래도 이사장님으로부터 도움 받은 사람들이 꾀 있다고 하던데, 왜 도운 사실 마저 숨기시는지요?

그러자 이렇게 대답합니다.

"난 도운 적 없다. 도움이란, 남의 일을 할 때 쓰는 말이지. 난 내 몫의, 내 일을 한 거다. 누가 내 도움을 받았다고 말하는지는 몰라도 나까지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될 일이다."

모처럼 염치 있는 어른을 만난 것 같아 제가 한 동안 설렜습니다.

어느 날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함께 주님을 찾아와 염치없는 부탁 하나를 합니다.

16:1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 보이기를 청하니

당신이 정말 하늘로부터 온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그 옛날 예언자들이 언급했던 이 세상을 구원할 다윗과 같은 메시야라면 그 증거로써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

이미 충분한 표적을 보여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도 없이 염치없는 부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염치없는 부탁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오늘 본문 속에 숨어 있습니다.

평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보여 주지 않았던 염치없는 행동들입니다.

바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연대입니다.

다시 본문 161절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부분이 이 부분입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와서

사실 이 부분은 무심히 넘길 수 있는 대목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두 집단,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은 서로에 대한 호감이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있어서 늘 대립각을 세우는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부활 논쟁과 천국 논쟁입니다.

 

새로운 신앙 운동의 개혁을 자처하는 바리새인과 예루살렘 성전 중심에 전통적 신앙을 고수하는 사두개인은 물과 기름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그들이 손을 잡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둘 사이에 공공의 적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개혁으로 따지면 바리새인보다 더 개혁적이고, 성전 중심에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신앙으로 따지면 성전 그 자체가 되시는 예수님은 반드시 제거 해야만 할 대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의지하고 있던 유대교의 두 축, 즉 율법()과 성전(죄사함)을 기초부터 뒤흔드는 위험인물로 예수님을 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저자 마태는 그들이 예수님께 나온 이유가 염치없게도 '시험'하기 위해서였다고 꼬집고 있는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내 건 시험은 한 가지입니다.

당신이 진정으로 하늘로부터 온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그 증거로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

이런 염치없는 부탁은 이번이 처음 있었던 일이 아닙니다.

이미 마태복음 4장에서도 성령에 이끌러 광야에서 시험을 당하실 때도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요구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사탄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신명기 13장에서 하늘의 표적을 보여주는 선지자나 점치는 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미혹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단호히 그들을 경계하고 제거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13:1 너희 중에 선지자나 꿈 꾸는 자가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네게 보이고

13:2 그가 네게 말한 그 이적과 기사가 이루어지고 너희가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따라 섬기자고 말할지라도

13:3 너는 그 선지자나 꿈 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 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니라

13:4 너희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따르며 그를 경외하며 그의 명령을 지키며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며 그를 섬기며 그를 의지하며

13:5 그런 선지자나 꿈 꾸는 자는 죽이라 이는 그가 너희에게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며 종 되었던 집에서 속량하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배반하게 하려 하며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행하라 명령하신 도에서 너를 꾀어내려고 말하였음이라 너는 이같이 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할지니라

 

이러한 주님의 경고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이들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지금 아주 염치없는 요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요구는 정말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인지 알고 싶다는 진실함과 절실함에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미 그들은 예수님이 계신 곳에서 일어난 일들을 귀로도 듣고 또 실제로 본 일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병든 사람들이 고침을 받고, 귀신들이 쫓겨나고, 사람들이 먹는 친교의 식탁이 마르지 않는 것을 보면서 그들은 이미 충분한 표적을 목격했습니다.

다른 표적이 더 필요한 까닭이 없을 정도로 충분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또 구한 것이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입니다.

 

요즈음 새벽마다 복음서를 통독하면서 제가 깨닫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진실은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진실은 보고자 하는 사람에게만 보인 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비유를 들려주신 후에 때때로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어라' 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눈이 있다고 하여 다 보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 귀가 있다 하여 다 듣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볼 마음만 있다면 눈이 없어도 볼 수 있고 귀가 없어도 들을 수 있는 것이 진실이고 사랑이고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예수님의 반응은 냉담을 넘어 꾸짖음에 이룹니다.

16: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16:3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율법에 대하여, 죄에 대하여, 의의 대하여, 제법 똑똑한 척하고, 모르는 게 없는 척하지만 정작 알아야 할 것은 알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제대로 알 고 있는 것이 하나도 없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주님의 마음이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계속해서 예수님이 말을 이어가십니다.

16:4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 줄 표적이 없느니라 하시고 그들을 떠나 가시니라

 

여기서 말하는 악하다는 것은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악함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악하다는 말은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그 뜻을 거역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우리는 대개 자신의 경험이나 알량한 지식을 의지하고, 우리의 뒤를 봐줄 수 있는 힘 있는 이들을 의지하는 것이 악함입니다.

또한 쉽게 낙심하고 절망하는 것 역시 하나님을 무시하는 악함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악입니다. 음란하다는 것은 성적 타락을 말한다기보다는 하나님과 맺은 언약에 충성스럽지 못한 것을 이르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우리 인생의 주로 모셨다면, 어떤 일이 내게 손해처럼 보여도 주님의 뜻에 '아멘'하는 것이 믿음이고 신실함입니다. 그런데 그 신실함을 보여주지 못하는 것이 음란함입니다. 그러니까 악하고 음란한 세대란 하나님을 무시하며 하나님께 신실하지 못한 이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보여주는 한 가지 공통적인 특징이 있는데, 신앙을 마치 거래처럼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물질의 복을 주면 믿겠다는 것입니다. 병을 고쳐 주면 믿겠다는 것입니다. 일단 문제가 해결되는 하나님의 권능을 보여주면 그 후에 믿겠다는 것입니다.

신앙은 거래가 아닙니다.

신앙은 바라보는 중에 믿고 맡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에서 믿음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는 것입니다.

새번역으로 읽어드립니다.

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확신(보증)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표적을 거절하신 주님은 뜻밖에도 한 가지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요나의 표적'입니다.

사람들은 요나의 표적을 대개 주님의 부활을 상징하는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물론 맞습니다.

하지만, 정말 그뿐일까요? 저는 요나의 표적이라는 말 속에 중첩된 다른 의미에도 주목하고 싶습니다.

바로 트렌스폼 변화입니다.

바다에 던져진 요나그 죽음의 바다가 토해 낸 요나의 변화입니다.

생명으로의 변화입니다.

요나의 고백입니다.

2:6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

이처럼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표적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생명으로의 변화입니다.

죄와 사망에서 생명으로의 변화입니다.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에만 집중하던 이들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는 사람이 되는 변화를 맛보는 것입니다.

무리가 제자가 되고, 제자가 사도가 되는 변화의 주체 속에 나 자신이 들어가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그렇게 순종하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늘로부터 온 표적을 받은 사람의 진실한 삶인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지금도 교회의 안과 밖에는 여전히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는 악하고 음란한 이들로 넘쳐납니다.

그들의 믿음 없음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질타하고 비난만 해야 할까요?

그러기에는 시간이 너무 촉박합니다.

 

이제 우리 교회가 우리 자신이 이 시대가 구한 하늘의 표적 되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이 언급한 요나의 표적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요나가 그런 것처럼 생명으로의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죄와 사망이 삼키는 삶이 아니라 죄와 사망이 토해 낼 수밖에 없는 역동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령의 충만함으로 말미암은 권능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 씀으로 교회 밖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현존을 느끼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염치 있는 그리스도인염치 있는 교회가 되지 않겠습니까?

잊지 마십시오.

하늘로부터 온 표적은 생명으로의 변화를 갈망하는 바로 여러분 자신이라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