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3:10-17 아브라함의 딸
아브라함의 딸
누가복음 13:10-17절 2014/6/8(주일)
13:10 예수께서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13:11 열여덟 해 동안이나 귀신 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더라
13:12 예수께서 보시고 불러 이르시되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하시고
13:13 안수하시니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라
13:14 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분 내어 무리에게 이르되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하지 말 것이니라 하거늘
13:15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13:16 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
13:17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매 모든 반대하는 자들은 부끄러워하고 온 무리는 그가 하시는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기뻐하니라
오늘 본문 11절을 보시면 열여덟 해 동안 병마에 시달리던 한 여인이 등장합니다.
“13:11 열여덟 해 동안이나 귀신 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18년 된 병자 참 긴 세월입니다.
며칠만 아파도 삶의 리듬이 깨지는 법입니다.
그런데 그 긴 세월을 여인 혼자 병마와 싸웁니다.
아마 하나님의 형벌처럼 다가온 질병을 고쳐보려고 백방의 노력을 다했을 겁니다.
많은 시간도 드렸을 것이고 꽤 많은 돈도 허비했을 것입니다.
“하필 왜 나일까?”
하나님을 향한 슬픔과 분노 그리고 자기 자신을 향한 절망과 좌절의 시간이 계속되었을 것입니다. 살아야할 의미도 삶에 대한 희망도 사라졌겠지요.
처음에는 참 안됐다고 함께 걱정해 주었던 이들도 그리고 이 연단의 시기가 지나면 모든 것이 잘 될 거라고 위로와 희망을 주었던 이들도 다 떠났을 때 밀려오는 고독을 더 이상 감당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18년 이라는 세월의 무게만큼 몸도 마음도 지쳤을 것입니다. 긴 병보다도 더 견디기 어려운 것은 어쩌면 외로움이었을 겁니다.
사실 오늘 본문만을 놓고 볼 때 이 여인에 대한 아무런 정보를 알 수 없습니다.
어디 출신이지? 가족들은 있는지? 결혼은 했는지?
우리가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지금 이 여인이 허리가 굽은 채 회당에 방치되었다는 것입니다. 회당 안에서 그는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니, 차라리 없으면 좋을 거추장스러운 존재였을 겁니다.
남의 시선이 부끄러워 땅만 보고 살 수밖에 없는 여인.
18년 이라는 병마의 무게만큼 그 어떤 희망도 가질 수 없는 여인.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포기 할 수 없어 회당을 삶의 자리로 여긴 여인.
그런 여인을 주목하여 바라 본 한 분이 계십니다.
누구입니까?
우리 주님이지요.
운명의 날과도 같은 그날, 등이 굽은 이 여인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회당에 들어가 2층 한 구석을 차지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 날 회당예배는 이 전과는 좀 달랐습니다.
왜냐하면 바리새파 사람들이나 서기관들의 가르침과는 질적으로 달랐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뛰어나거나 수사학적으로 세련된 것도 아니었고, 생전 듣도 보도 못한 하나님의 말씀도 아니었지만 예수님이 전하시는 말씀, 그가 풀어 해진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듣는 순간 그 어떤 뜨거움이 정수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여인의 존재를 꿰뚫은 겁니다.
이 여인의 이런 변화를 예수님은 놓치지 않습니다.
그리고 18년 동안 한 번도 주목의 대상이 되지 못했던 여인을 향해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3:12 예수께서 보시고 불러 이르시되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하시고
"여자야, 너는 병에서 풀려났다."
마치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깊은 세상을 향해 우리 하나님이 '빛이 생겨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이 여인에게도 "여자야, 너는 병에서 풀려났다." 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선포 된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되었을 까요?
그렇습니다.
고침을 받게 됩니다.
13:13 안수하시니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라
18년 동안 굽어 있던 여인의 허리가 펴진 것입니다.
열여덟 해 동안이나 여인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던 병이 마침내 떠나간 것입니다.
그러자 허리를 펼 수 있게 된 여인은 그 즉시 하나님께 영광의 찬송을 올렸습니다.
누가 들을세라 숨죽여 부르는 찬양이 아니라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는 이의 찬송이었습니다.
그런데요.
이 영광과 찬양과 기쁨은 그리 오래 가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광경을 일일이 지켜 본 회당장이 분개하면서 딴죽을 걸었기 때문입니다.
13:14 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분 내어 무리에게 이르되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하지 말 것이니라 하거늘
왜 하필 안식일에 이 일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지금 이 보잘 것 없는 여인을 고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안식일, 곧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거스르는 일은 그 어떤 것도 용납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회당장이 분개한 이유입니다.
일을 해야 할 날이 엿새나 있으니 엿새 가운데서 어느 날에든지 와서 고침을 받고 안식일에는 그렇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회당장, 정말 꽉 막힌 사람입니다.
율법의 ‘본’과 ‘말’을 구별할 줄 모르는 사람이 바로 이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당시 이스라엘 사회와 종교와 문화의 전반적인 분위기 이었습니다.
‘본’과 ‘말’을 구별할 줄 모르는 종교지도자들이 그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항상 종교지도자급에 해당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과 대립각을 세웁니다.
안식일 논쟁은 오늘 본문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1차 안식일 논쟁이 누가복음 6장에 나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안식일 날 밀 이삭을 잘라 손에 비비어 먹자 바리새인들이 시비를 겁니다.
그 때 주님이 성경에 기록된 다윗의 경우를 예를 들면서 안식일에 대한 아주 명확한 가르침을 주십니다.
6:1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으니
6:2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느냐
6: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 및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6:4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다만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6:5 또 이르시되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더라
사람이 죽는데 안식일이라고 해서 '무조건 가만히 있으라'고 말하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죽어가는 이들을 구할 생각은 하지 않은 채, 율법을 들이대고 가한지 가하지 않는지를 계산하고 따지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해야 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자 곧 사람의 아들이 안식일의 주인이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이 존재 하는 진짜 이유는 우리의 생명을 풍성하게 하기 위해 존재하는 은총의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18년 동안 굽은 허리를 편 이 여인은 예수님을 통해 진짜 안식일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안식일이라는 그 문자주의 형식주의에 사로잡힌 회당장은 양보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특단의 조치로 本을 버리고 末에 집착하는 이들을 향해 준엄하게 말씀하십니다.
13:15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13:16 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
하나님의 언약으로서 안식일의 법이 충실하게 지켜져야 한다는 것.
이것을 예수님이 반대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율법에 대한, 안식일에 대한 사람들의 외식입니다.
외식이란 문자적으로 위선이란 뜻인데 '선을 가장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위僞'라는 한자가 보여주듯이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선을 행하는 것이 외식입니다.
생명을 우선시하고 생명을 살리는 선한행실이 아니라 외식하는 선, 외식하는 행실을 더 이상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한 단어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딸'이라고 명칭입니다.
사실 우리가 주목하여 보지 않으면 그냥 지나쳐도 별 문제가 되지 않는 단어입니다.
하지만 당시 유대 사회에서 ‘아브라함’이라는 무게감을 볼 때 그냥 지나칠 만한 호칭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당시 아브라함이라는 호칭은 곧 하나님을 칭하는 호칭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여인의 혈통이 유대인이기 때문에 아브라함을 조상이라 한다한들 하등 문제될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이 여인은 오랜 세월 동안 오물 덩어리처럼 취급을 받았습니다.
아무도 그 여인을 소중한 사람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여인을 향해 주님이 이런 호칭을 부여합니다.
'아브라함의 딸아' 아주 의도적인 호칭입니다.
드디어 하나님의 은총, 하나님의 구원이 임하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의도적으로 '아브라함의 딸' 이라고 호칭한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지금 우리 주변에는 이 여인의 처지와 다를 바 없이 사는 인생들이 참 많습니다.
육체의 질병 때문에 희망의 허리가 굽은 이들.
자식을 먼저 잃고 마음의 허리가 굽은 이들.
배우지 못했다고 무시당해 자존심의 허리가 굽은 이들.
가지지 못했다고 천대 받고 인격의 허리가 굽은 이들.
그리고 늙고 병들었다고 버림받는 존귀함의 허리가 굽은 이들.
누가 이분들의 굽은 허리를 펴게 할 수 있을까요?
물론 주님이 먼저 해주셔야 합니다.
하지만 말입니다.
주님은 바로 우리를 통해 그 일을 함께 하고 싶어도 하십니다.
우는 자와 함께 울고, 애통하는 자와 함께 애통하기를 원하신다는 말입니다.
더 이상 이 땅에서 하나님의 자녀인 곧 아브라함의 딸들이 등이 굽은 채 살아가기를 원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정말 보잘 것 없지만 하나님은 지금 우리의 손을 빌어 그들의 허리를 펴주고 싶어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그 일을 감당하기를 간절히 원하고 또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우리 교회는 등이 굽은 것처럼 총체적 위기입니다.
그렇지만 또한 기회이기도 합니다.
이 세상을 향해 아브람함의 딸임을 선포하고 굽은 등을 펴는 일.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라는 말입니다.
모든 것이 무너진 것 같은 이 때, 한숨만 내뱉지 말고 새로운 세상을 위해 아브라함의 딸임을 선포하고 굽은 등을 펼 수 있는 주님의 역사가 있기를 위해 기도하시고 헌신하시는 우리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