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풀이

마태복음 11:16-24 어깨동무

心貧者 2018. 12. 19. 14:40

어깨동무

마태복음 11:16-24절                                                                                                      2015/ 5/ 17(주일)

11:16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11:17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11:18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그들이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11:19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11:20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11:21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11:22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11:23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

11:2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

 

시리아의 수도는 다마스커스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에는 이곳을 다메섹으로 번역해 놓았습니다.

다마스커스, 다메섹

현존하는 도시 중 가장 오래 된 도시로 제가 꼭 한 번 방문하고 싶은 곳입니다.

 

거기에 가면 우마야드 모스크(Umayyad Mosque)’가 있습니다.

전 세계에 있는 이슬람사람들이 가장 방문하고 싶은 모스크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모스크가 유명세를 타는 이유는 이슬람 세계의 전설적인 전쟁 영웅인 살라딘(Saladin, 1137-1193)의 묘가 그곳에 안치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군 전쟁 중에서 가장 치열했던 전투가 제 3차 원정입니다.

사자의 심장을 가졌다고 하는 영국의 사자심왕, ‘리처드가 이끌었던 십자군 전쟁입니다. 그런데 그 유명한 영국의 사자심왕 리처드의 십자군을 물리치고 대승을 이끈 사람이 바로 살라딘입니다.

그래서 이슬람사람들은 전설적인 영웅 살라딘의 묘가 있는 우마야드 모스크를 성지로 여기고 꼭 한 번 가보고 싶어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요.

우마야드 모스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아주 특별한 의미가 있는 곳이라는 사실입니다. 모스크의 한 가운데 헤롯 대왕에 의해 참수를 당한 세례 요한의 머리가 묻혀 있는 무덤 교회가 있기 때문입니다.

모스크 안에 세례 요한의 머리가 묻힌 무덤교회가 있는 것입니다.

아주 흥미롭지요.

그래서 제가 꼭 한 번 이 곳에 가 보고 싶은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이 되는 1-2절을 보겠습니다.

11:1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명하기를 마치시고 이에 그들의 여러 동네에서 가르치시며 전도하시려고 거기를 떠나 가시니라

11:2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님이 12제자와 함께 본격적인 사역을 시작할 때, 세례 요한이 옥에 갇히게 됩니다.

사해 동쪽 마케루스요새에 있는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마케루스 요새에 갇혀 있던 세례 요한은 결국 헤롯대왕의 의해 참수를 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참수당한 머리가 조국 이스라엘이 아닌 이방인의 땅 시리아 다마스커스 우마야드 모스크가 세워진 자리에 묻히게 됩니다.

조국 이스라엘이 아니라 이방인의 땅에 그 머리가 묻힌 것입니다.

할례 받지 못한 자의 죽음처럼 죽음 이후 에도 치욕을 겪은 것입니다.

 

세례요한, 어떤 사람입니까?

성경, 특히 복음서에 따르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길을 친히 예비하고 그 길을 평탄케 하신 분입니다.

3:3 그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 하였느니라

 

메시야가 오실 길을 준비하고, 그리고 메시야가 오실 길을 곧게 하는 그리스도의 예비자입니다.

세례요한, 그는 세상의 어떤 권세, 세상의 어떤 힘 앞에서도 거칠 것 없는 소리로 그 시대의 부정을 폭로한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곧 광야의 예언자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세례요한은 사람들이 쓰고 있던 위선의 가면을 사정없이 벗겨냈던 이스라엘의 마지막 예언자였습니다.

 

예수님의 평가는 더 대단합니다.

1111절 전반부만 보겠습니다.

11:1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하나님 아들 곧 그리스도의 예비자,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 마지막 예언자, 그리고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사람.

이것이 성경에 증거 된 세례 요한입니다.

세례요한의 핵심 메시지, 3가지입니다.

첫째, 3: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

둘째, 3:6 자기들의 죄를 자복(회개)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

셋째, 3: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이것이 세례요한의 핵심 메시지입니다.

 

따라서 권력의 핵심 속에 있는 헤롯 대왕이나 기득권 세력의 충심 축에 있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입장에서 볼 때 세례 요한은 보통 불편한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반면 오랫동안 식민지 수탈에 시달려왔던 백성들의 눈에 비추어진 세례요한은 희망 그 자체였습니다.

 

희망, 마지막 희망은 항상 메시야에 대한 갈망, 기대를 만들어 냅니다.

실제로 수탈에 시달린 백성들은 혹 그가 오시기로 약속된 메시야일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게 됩니다. 그리고 그 기대는 세례 요한의 제자라는 적극적인 행동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을 향해 단호하게 말합니다.

3:28 내가 말한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

 

나는 그리스도(메시야)가 아니다

그러면서 이런 의미 있는 말을 더하여 남깁니다.

3:30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이것이 세례 요한이 가지고 있는 진면목입니다.

 

그런데, 그러던 세례요한이 마케루스요새에 있는 감옥에 갇히자 마음의 변화가 찾아옵니다.

지금까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감정.

바로 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이 다가온 것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손 놓고 가만히 있을 수만 없었습니다.

어떤 적극적인 행동이 필요했습니다.

그러자 세례요한은 자신의 제자들을 예수님에게 보냅니다.

그리고 단도직입적으로 묻습니다.

 

마태복음 11장입니다.

11:2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11:3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주님 두렵습니다.

이제는 말씀해 주시지요.

오실 그분이 당신 맞습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그러자 예수님이 자신의 입장을 세례 요한에게 분명하게 밝히십니다.

마태복음 114-5절입니다.

11: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11:5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이것을 제가 새번역으로 다시 읽어드리겠습니다.

11:4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가서, 너희가 듣고 본 것을 요한에게 알려라.

11:5 눈 먼 사람이 보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 환자가 깨끗하게 되며, 듣지 못하는 사람이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며, 이 복음을 듣는다.

 

우선 여기서 언급된 이들을 보십시오.

좀 구체적으로 살펴봅시다.

첫째 눈 먼 사람, 둘째 다리 저는 사람, 셋째 나병 환자, 다섯째 듣지 못하는 사람, 여섯째 죽은 사람, 그리고 마지막 일곱째 가난한 사람.

이 사람들의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 같이 율법에 보호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해 율법을 행할 수도 없고, 율법의 보호도 받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대속의 은총, 그 구원을 얻을 수 없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보고도 들어 갈 수 없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율법에 의해 버림받은 그 사람들 곧 눈 먼 사람이 보고, 다리 저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 환자가 깨끗하게 되며, 듣지 못하는 사람이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며, 이 복음을 듣는 일이 나로 인해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율법의 약속이 이들에게도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이들도 성전의 주인이 되는 세상이 열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례 요한, 당신이 기다리던 메시야의 나라 그리스도의 나라 곧 하나님 나라가 아니고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세례요한 처럼 사람들이 를 의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말 메시야가 맞을까?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왜요?

예수님의 겉모습만 보고 사람들은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런 섣부른 결론을 내립니다.

1119절 전반부만 봅니다.

11:19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라

죄인과 함께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방탕한 사람.

세리와 죄인의 친구요 창녀와 어울리는 건달 정도로 보았다는 것입니다.

 

이는 세례 요한도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제자를 급히 보낸 것입니다.

오실 그분이 당신이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세례 요한이 이런 갈등을 할 정도이니 세상이야 오죽하겠습니까?

 

그래서 114절의 말씀이 중요합니다.

가서 듣고 본 것을 요한에게 알리라는 것입니다.

보는 것만을 믿고 신뢰하는 세례요한과 같은 세상을 향해서 알리라는 것입니다.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 그 사실을 있는 그대로 듣고 본 것을 고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 재미있는 것은 이에 대한 세례요한의 반응이 성경 어디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요한에게 분명 전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 어디에서 그에 대한 반응, 응답이 없습니다.

다만 14장에서 요한의 목이 참수 당한 이야기만 나올 뿐입니다.

성경어디에서 세례 요한 반응과 응답이 없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입니다.

 

이런 배경 속에서 말씀하신 비유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내용입니다.

11:16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11:17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피리를 불면 춤을 추고, 곡을 하면 우는 시늉이라도 하는 것이 당시 팔레스타인 아이들이 노는 게임의 법칙이었습니다.

어느 동네나 다 통하는 놀이의 법칙입니다.

그런데 장터의 아이들이 그 법칙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유일하게 한 동무만 게임의 법칙에 충실했지 어느 누구도 동조하거나 동참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마치 이 게임에서 소외당한 아이처럼 지금 자신이 그 꼴을 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가난하고 소외 된 이들의 동무, 그 이웃으로 오신 분이 누구입니까?

우리 예수님 아닙니까?

그런데 사람들이 동무(친구) 대접은커녕, 오히려 자신은 외면하고 배척했다는 것입니다. 원수 취급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자신의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이런 저주의 말씀하게 된 것입니다.

11:20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11:21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11:22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11:23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

11:24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

 

묵은 포도주를 마셔 본 사람은 묵은 것이 더 좋다고 합니다.

그래서 새 것을 마시려 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자기 삶의 습성을 좀처럼 바꾸려 하지 않습니다.

주님이 볼 때 그 삶이 소경이요, 그 인생이 앉은뱅이요 문둥이요 죽은 자인데, 그 가난한 인생의 옛 습성을 도대체 바꾸러들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동무가 되시고 우리의 친구가 되시고 우리의 벗이 되시는 예수님이 천국의 천국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가슴을 치는 심판의 말씀으로 애곡하여도 가슴을 치는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부흥이 멈추었다고 해도 여전히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많습니다.

인구비례를 따질 때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제일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많은 축에 듭니다.

하지만 제가 지금까지 의문을 떨치지 못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과연 주님의 동무가 몇이나 될까?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 분의 손과 발이 될 수 있는 동무는 과연 몇이나 될까?

배고픈 사람을 먹일 때 주님과 함께 먹이고, 목마른 이에게 물을 줄 때 주님과 함께 주고, 헐벗은 사람을 입힐 때 주님과 함께 입히고, 병든 사람을 고칠 때 주님과 함께 고치는 그런 참된 동무는 과연 몇이나 될까?

이 의문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 고 제 자신에게 조용하게 묻지요?

너는 주님의 동무가 맞는가?’

말씀을 마칩니다.

여러분, 그렇다면 누가 진정한 주님의 동무가 될 수 있을까요?

그 해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는 말씀이 아까 미처 읽지 못했던 19절 후반부에 나옵니다.

11:19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라

 

이것에 대해 지나 주일 오후에 살펴 본 야고보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야고보서 2장입니다. (새번역)

2:15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 날 먹을 것조차 없는데,

2:16 여러분 가운데서 누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하게 하고, 배부르게 먹으십시오" 하면서, 말만 하고 몸에 필요한 것들을 주지 않는다고 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2:17 이와 같이 믿음에 행함이 따르지 않으면, 그 자체만으로는 죽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라라는 말씀이 바로 이것을 두고 한 말씀입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삶이 주님의 동무임을 입증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무늬만 그리스도인입니까?

 

여러분, 친구 있으시죠?

누가 참된 친구, 진짜 친구입니까?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 의리 있는 친구가 진짜 친구 아닙니까?

그리고 자신과 함께 뜻을 같이 하는 동무가 참 친구 아닙니까?

 

여러분이 이 시대의 진정한 주님의 동무, ‘어깨동무가 되십시오.

소경을 보게 하는 그 현장에 여러분도 함께 하시고, 앉은뱅이가 걷는 그 현장에도 함께 있으십시오.

그리고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고, 귀머거리가 들고, 죽은 자가 살아나는 그 현장에서도 주님과 함께하십시오.

그리고 가난한 자들에게 천국 복음을 전파하는 그 현장에도 함께 하십시오.

어느 것 하나 놓치지 마시고 우리 주님과 어깨동무하고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그 구원의 현장에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