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강해 8:1-4 그리스도인의 자유
그리스도인의 자유
로마서 8:1-4절 2015/7/29(수)
로마서 6장과 7장이 로마서 중에서 가장 어렵고 걸림이 되는 말씀이라면 로마서 8장은 로마서 중에서 가장 쉽고 은혜로운 말씀들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로마서 8장을 가장 귀하게 여깁니다.
성서 신학자 ‘스패너’가 그 대표적인 사람인데 그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성경을 다이아반지라고 한다면 로마서는 그 반지의 다이아몬드와 같고, 특히 로마서 8장은 그 다이아몬드의 가장 빛나는 부분과 같다"고 비유할 만큼 로마서 중에서 가장 주목 받는 말씀이 바로 로마서 8장입니다.
로마서 8장, 이렇게 시작됩니다.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8: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이것이 바울이 사도로서 로마서를 쓴 이유이고, 로마서에 등장하는 바울 신학의 핵심입니다.
그 내용은 이런 것입니다.
유대인과 달리 그리스도인에게는 두 가지의 법이 존재 합니다.
하나는 율법으로 말미암은 죄와 사망의 법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그 믿음으로 말미암은 생명의 법과 성령의 법입니다.
우리가 죄 사함의 물세례와 그리고 새롭게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나는 성령 세례를 받아야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생명의 법과 성령의 법이 율법으로 말미암은 죄의 법과 사망의 법을 이겼기 때문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1절과 2절을 바꾸어서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8: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그러니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서 다시 정죄하는 율법의 삶으로 돌아갈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를 든다면, 할례의 표시가 그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그 믿음의 증표를 마음 판에 새긴 우리는 율법의 규율인 할례의 증표에 더 이상 지배받을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율법아래 있을 때는 율법에 지배를 받아 할례를 받는 것이 마땅한 일이었지만 지금은 율법이 아닌 믿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옛사람의 법을 따를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즉 예수를 믿는 그 믿음 안에서 정죄함이 없는 자의 삶 즉 생명의 법과 성령의 법에 따라 지배받는 삶을 누리며 살라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의 은혜 아래 서 하나님의 의가 드러나는 믿음의 삶을 살아 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은 믿음의 의입니다.
8장1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8장2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이것이 바로 우리가 고백하는 ‘믿음’의 실체이고, 이것이 바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의’의 실체인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이 처음부터 이런 믿음을 가진 것은 아닙니다.
사도행전 8장 1절을 보면 바울이 그리스도의 사람 스데반 집사의 죽음을 마땅하게 여기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리고 9장에 가면 대제사장의 명을 따라 대제사장의 사병을 거닐고 다메섹에 있는 상당수의 그리스도인들을 죽이기 위해 떠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이때까지 바울은 이런 종교적 신념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 그리고 그 계시된 말씀을 받은 유대인에게만 이루어지는 구원입니다.
오직 율법, 오직 유대인입니다.
율법 외에 그리고 유대인 밖에 구원을 바울은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유대인 중에 이상한 무리가 등장한 것입니다.
나사렛 사람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무리들로, 바울이 볼 때 이들의 주장은 아주 터무니없는 이단사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이 아니고도 그리고 유대인이 아니고도 구원의 길이 있다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태어 날 때부터 뼛속까지 유대인이었던 그리고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었던 바울의 입장에서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주장이었습니다.
오직 율법, 오직 유대인만 하나님의 의에 이룰 수 있는 유일한 길인데 그것이 아니라 얼마 전에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의에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결코 바울이 수용할 수 없는 이단사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따르는 제자 중에 하나였던 스데반의 죽음을 마땅하게 여긴 것이고 그리고 그 예수의 잔당들을 제거하는 것이 바울의 지상과제였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대제사장들의 사병을 이끌고 바울이 다메섹으로 향했던 것입니다.
당시 다메섹에는 유대인의 핍박을 피해 상당수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모여 공동체 생활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 첩보를 접한 바울은 하나님의 열심을 품고 다메섹으로 향한 것입니다.
바울이 가진 하나님의 열심, 오직 율법 오직 유대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반전이 일어납니다.
터무니없는 그 무리의 주장을 바울 자신도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언제지요?
다메섹 도상에서 빛으로 오신 주님을 만난 이후입니다.
그 때 바울은 유대인이 아닌 그리스도인으로서 회심을 하게 됩니다.
오직 율법, 오직 유대인이라는 도그마에 사로잡혔던 바울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믿음의 법을 깨달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첫째, 율법의 행실로 의의 이르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행실로 의에 이룬다.
돌째, 율법의 행실로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행실로 구원에 이룬다.
그리고 셋째, 그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율법의 행실, 유대인이라는 혈통, 그리고 장로의 유전으로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것을 바울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만나 이후 비로써 깨닫게 됩니다.
이런 자신의 회심 사건을 기반으로 해서 바울은 로마서를 쓴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과거에 범했던 실수처럼 당시 로마 교회를 혼란으로 빠트리고 있는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향해서 말한 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1절과 2절을 다시 읽는데, 순서를 바꾸어서 읽겠습니다.
8: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그러니 죄와 사망의 법, 즉 율법에서 생명의 성령의 법, 즉 믿음으로 신앙의 기준을 옳기라는 것입니다.
더 이상 율법의 행실로 교회를 어지럽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할례를 예를 들자면 롬 3:30절 말씀입니다.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한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그러니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롭다 하시는 행실에만 충실 하라는 것입니다.
자꾸 성도들 특히 이방인 성도들에게 유대인처럼 ‘율법’의 잣대를 대려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모든 자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이방인이든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으니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율법 아니라 오직 믿음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오늘 본문에서 주목할 한 단어가 있습니다.
8장 1절에 등장하는 ‘정죄’라는 단어입니다.
‘정죄’
그리스도인들을 가장 괴롭히는 단어이지요.
앞장 로마서 7장에서도 살펴보았지만 바울은 자신의 죄에 대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원하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악을 행하는 정죄의 상태가 우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늘 하나님 앞에 죄송스럽고 부끄럽지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인정하시는가 하면 ‘결코 정죄함이 없다’라고 선포했다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연약한 육체를 가지고 있어 그래서 늘 죄의 유혹아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정죄하지 않는 다는 사실입니다.
누구 안에 있으면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이점이 아주 중요합니다.
예수 안에 있으면 죄를 묻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정죄’
헬라어 '카타크리마'입니다.
법원에서 판사가 마지막으로 피고의 죄를 판결할 때 사용하는 법정 용어입니다.
여기에 부정관사 ‘우’가 붙으면 '우 카타크리마' ‘죄가 없음’곧 무죄가 되는 것입니다.
심판의 주이신 하나님이 우리를 '우 카타크리마' ‘죄가 없음’곧 무죄를 바로 지금 선포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라는 말의 뜻입니다.
찬송가 287장입니다.
1. 예수 앞에 나오면 죄 사함 받으며 주의 품에 안기어 편히 쉬리라
우리 주 만 믿으면 모두 구원 얻으며 영생복락 면류관 확실히 받겠네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죄와 사망의 법이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주의 품에 안기는 영생복란 면류관까지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어떠한 정죄함도 없고 완전 자유자가 되는 것입니다.
8:2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했다’
그리고 ‘생명의 성령의 법이 너를 지배한다’
인류 역사상 이보다 더 놀라운 선포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역시 죽음의 문제입니다.
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부단하게 노력한 것이 인류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을 해결한 사람이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죽음의 문제를 해결 한 인간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죄와 사망으로 말미암은 죽음의 문제를 누가 해결합니까?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법,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령의 법이 죽음의 문제 즉 죄와 사망의 문제를 해결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보다 더 놀라운 복음은 이 세상 그 어느 곳에서도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교밖에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3절과 4절입니다.
새 번역 성경이 좀 이해가 쉬어 새번역으로 읽어드리겠습니다.
8:3 육신으로 말미암아 율법이 미약해져서 해낼 수 없었던 그 일을 하나님께서 해결하셨습니다. 곧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아들을 죄 된 육신을 지닌 모습으로 보내셔서, 죄를 없애시려고 그 육신에다 죄의 선고를 내리셨습니다.
8:4 그것은, 육신을 따라 살지 않고 성령을 따라 사는 우리가,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이루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이신 예수, 그 분이 이 땅에 육신을 입고(사람의 몸) 행한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생명의 법 성령의 법을 하나님이 다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죄와 사망의 대상인 육체,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그 육체의 죄를 우리 하나님이 없애기 위해 친히 아들 예수님 육체에 죄를 선고(카타크리마)하심을 통해서 십자가를 지게 하심으로 인해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충족시켰다는 것입니다.
왜냐, 율법에 따르면 희생제사가 아니고는 죄 사함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아들 예수님의 피로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충족시켰고 더 이상 죄를 묻지 않은 은혜 아래 거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말씀의 결론인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의 의미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요한복음 14장 12절 이하를 보시면 예수님이 이런 말씀도 하십니다.
14: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14: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14: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우리에게는 두 가지의 권세가 있습니다.
첫째, 죄와 사망에서 벗어나 생명의 법 성령의 법아래 있는 믿음의 권세입니다.
이것을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 5장 24절 ‘영생’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상태를 말합니다.
두 번째, 주님의 이름으로 구하는 기도의 권세입니다.
14:13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14: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그래서 기도를 제가 ‘내어 맡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하고 하나님은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바라기는 믿음의 권세 기도의 권세로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