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풀이

요한복음 1장 40-42 주님의 눈길

心貧者 2018. 11. 27. 11:15


주님의 눈길

요한복음 140-42                           2018/11/23()

1:40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는 두 사람 중의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1:41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1:42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몇 해 전부터 제가 어려워하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의 말을 알아듣기가 참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점점 뚜렷하게 잡혀가는데 그러면 그럴수록 사람들의 말을 알아듣기가 점점 더 어려워졌습니다.

내 귀가 멀었나?’ 할 정도로 참 어려워졌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러다가 나름대로 보안한 방법이 듣는 것과 함께 사람의 눈을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말만 들을 것이 아니라 그 말하는 사람의 눈도 함께 바라보면, 말하는 이의 뜻을 좀 더 이해하지 않을까? 하는 소박한 마음에서 대화 할 때마다 의도적으로 사람의 눈을 주목했습니다.

 

하지만 이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직접 만나 눈을 보고 대화를 나눈 다는 것도 쉽지 않았고,

무엇보다도 그렇게 깊은 대화를 나누는 것을 사람들이 원치 않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골치 아파하지요.

물론 제가 무섭게 노려보는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것도 있겠지만 거의 대부분의 경우 진실한 대화, 특히 복음적이고 성경적인 본질의 대화를 원치 않는 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요즈음 제가 주목하는 것이 주님의 방법입니다.

주님은 어떻게 하셨을까?

주님은 어떻게 사람의 말을 진심으로 알아들었을까?

그러다가 주목한 단어가 보시고라는 동사입니다.

인간을 향한 내면을 향한 깊은 관심과 관찰이지요.

복음서를 읽다보면 보시고라는 동사가 의외로 많이 나옵니다.

 

예수님이 보셨다

주님의 눈길이지요.

겉 사람을 향한 눈길이 아니라 속사람을 향한 주님의 눈길이지요.

과부인가 고아인가 어린아이인가 나그네인가 가난한 자인가 죄인인가라는 편견의 눈길이 아니라 메시아를 갈망하는 이들에게 향한 자비의 눈길이지요.

 

오늘 본문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다른 복음서의 내용과 좀 다르지만 사도 요한은 예수님과 베드로의 만남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1:40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는 두 사람 중의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1:41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1:42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사도 요한에 따르면 베드로.

누구의 전도를 받고 예수님의 제자가 됩니까?

사촌 형제인 안드레의 전도를 받고 예수님을 따르게 됩니다.

안드레

원래는 세례 요한의 제자였습니다.

그러다가 사도 요한에 따르면, 예수님을 따르는 첫 번째 제자 중에 한 사람이 됩니다.

 

어찌되었든 예수님을 먼저 만난 안드레가 사촌 형제인 시몬을 데리고 예수님께 옵니다.

첫 대면이지요.

예수님도 시몬도 첫 만남이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제일 먼저 한 일이 보시고니다.

베드로의 내면을 주목한 것이지요.

(다시)1:42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이것이 예수님과 베드로의 첫 만남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첫 만남에서 우리 주님의 눈길이 시몬을 향했다는 것이지요. 아주 중요한 대목이지요. 정말 많은 것을 암시하는 대목입니다.

 

그렇다면, 그 때 주님은 무엇을 보셨을까?

베드로의 어떤 면을 보셨을까요?

 

첫째, 어부라는 겉모습에 머무르지 않고, 내면 곧 중심을 바라보셨다는 것입니다. 시몬의 겉모습이 아니라 장차 변화될 사도 베드로의 모습을 보셨다는 것입니다.

 

반면 사람들은 시몬을 어떻게 바라봅니까?

첫째, 요한의 아들, 바요나 시몬이지요.

둘째, 갈릴리 사람입니다.

셋째, 물고기 잡는 일을 업으로 살아가는 어부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가 외모 직업 학벌에 매인 것처럼 그 때도 그러했다는 것입니다.

시몬이라는 사람의 진정한 가치를 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은 그 껍데기를 보지 않았습니다.

어디 출신인지, 제사장 가문인지

서기관처럼 얼마나 배웠는지

헤롯처럼 얼마나 영향력이 있는지

그거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오직 주님이 바라본 것은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이후 시몬의 모습 시몬의 삶입니다.

삶의 변화이지요.

그래서 그 변화에 걸 맞는 이름으로 바꾸어 줍니다.

1:42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이쯤에서 찾아볼 말씀 하나가 있습니다.

사무엘상 16장입니다.

거기에 보면 사울을 폐하고 이스라엘의 왕을 다시 추대할 때 있었던 일이 나옵니다.

이새의 아들 중에서 기름 부어 이스라엘 왕으로 삼고자 했을 때 하나 같이 하나님이 거절하십니다.

그 때 선지자 사무엘에게 하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16:6 그들이 오매 사무엘이 엘리압을 보고 마음에 이르기를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주님 앞에 있도다 하였더니

16: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언제나 그렇듯 우리 주님의 눈길은 현재가 아닙니다.

현재의 외모가 아닙니다.

중심, 곧 변화를 갈망하는 내면의 사람, 믿음이지요.

그렇게 눈에 들어온 사람이 바로 갈릴리 어부 시몬입니다.

시몬에게서 사도 베드로의 모습을 보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외모에 집착하고 속지요.

그래서 사도 야고보가 이런 경고를 교회에 남긴 것입니다.

야고보서 29절입니다.

2:9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

(개역한글) 만일 너희가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죄자로 정하리라.

 

베드로의 중심 곧 속사람을 보신 주님의 모습을 보면서 제가 깨달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래 아무 쓸데도 없는 사람의 말을 알아들으려하지 말고, 그 말의 진위를 파악하기 위해 애쓰지도 말고, 그 마음속에(그 중심 속에) 그리스도가 있는지, 하나님 나라를 갈망하는 마음이 있는지만 보자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둘째, 중심으로 보시되 주목하여 보셨다는 것입니다.

관찬하듯 주목하여 보셨다는 것입니다.

시몬을 보셨다는 것은 주님의 초점이 지금 시몬을 향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실제로 요한복음 1:42절에서 시작된 주님의 눈길은 마지막 장인 요한복음 21장에 이르기까지 그 초점이 단 한 번도 흩뜨려지지 않습니다.

세 번 씩이나 주님을 부인했지만 시몬을 향한 주님의 눈길 그 초점은 단 한 번도 흩뜨려지지 않습니다.

그렇게 해서 마지막으로 하신 주님의 말씀이 내 양을 먹이라입니다.

사도 베드로라는 그 변화된 삶의 초점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마지막 셋째 예수님의 눈길은 현재에 머물지 않고 미래를 향했다는 것입니다. 변화된 미래이지요.

본문 42절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할 단어가 장차라는 단어입니다.

현재가 아니라 장차 즉 미래를 향해 주님의 바라 봄이지요.

현실 속에 시몬, 어떤 존재입니까?

생선 비린내 나는 별 볼일 없는 존재입니다.

다혈질에다가 거친 성격을 가진 사람입니다.

사실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건질만한 것이 별로 없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현재가 아니라 장차를 바라보십니다.

현재의 시몬이 아니라 장차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변화될 베드로를 보신 것입니다.

물고기 잡는 시몬이 아니라 사람 낚는 베드로를 보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님은 베드로라는 걸쭉한 제자 하나를 건지게 됩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창세기 11장 바벨탑 사건 이후 죄의 결과로 나타난 현상 하나가 있습니다.

말의 흩어짐(갈라짐)입니다.

이로 인해 사람이 사람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는 세상이 되지요.

 

누가 이것을 치유하고 회복할 것인가?

주님과 눈길을 마주치는 사람이다.

베드로처럼 주님과 눈길을 마주친 사람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된 사람입니다.

여기에 쓰임 받을 수 있는 우리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