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26:1-12 깨끗하게 살기
깨끗하게 살기
시편 26:1-12 2019/11/11 성령강림 후 25주26:1 내가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사오며 흔들리지 아니하고 여호와를 의지하였사오니 여호와여 나를 판단하소서
26:2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양심을 단련하소서
26:3 주의 인자하심이 내 목전에 있나이다 내가 주의 진리 중에 행하여
26:4 허망한 사람과 같이 앉지 아니하였사오니 간사한 자와 동행하지도 아니하리이다
26:5 내가 행악자의 집회를 미워하오니 악한 자와 같이 앉지 아니하리이다
26:6 여호와여 내가 무죄하므로 손을 씻고 주의 제단에 두루 다니며
26:7 감사의 소리를 들려 주고 주의 기이한 모든 일을 말하리이다
26:8 여호와여 내가 주께서 계신 집과 주의 영광이 머무는 곳을 사랑하오니
26:9 내 영혼을 죄인과 함께, 내 생명을 살인자와 함께 거두지 마소서
26:10 그들의 손에 사악함이 있고 그들의 오른손에 뇌물이 가득하오나
26:11 나는 나의 완전함에 행하오리니 나를 속량하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26:12 내 발이 평탄한 데에 섰사오니 무리 가운데에서 여호와를 송축하리이다
하나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모두에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창세기 3장을 보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은 아담과 하와가 이 전에 없었던 감정 하나를 가지게 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두려움입니다.
한자로 불안不安이라고 합니다.
‘평안이 없다’라는 말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특징인 ‘샬롬’과 ‘안식’이 사라진 상태이지요.
창:9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3:10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보호함이 없어) 두려워하여(창피하여×) 숨었나이다
이후 ‘불안, 두려움’은 죄의 열매, 죄의 가장 중요한 속성이 됩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의 꿈은 법관이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어느 날 갑자기 수도원으로 들어간 것도 ‘지금 당장 죽으면 지옥 갈 것 같다’라는 사후세계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었습니다.
희대의 사기극 면죄부.
그 면죄부를 시골의 촌로와 과부들이 돈을 주고 사기 위해, 몇날 며칠 줄을 서고 심지어 뒷돈까지 주고 예약한 것은 지옥에 대한, 지옥 형벌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었습니다.
마태복음 6장을 보시기 바랍니다.
산상설교 중간에 우리 주님이 이런 강력한 말씀을 하십니다.
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그런데 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려 할까요?
돈 때문에 당하는 지옥과 같은 현실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불안’이지요.
마태복음 16장, 17장 그리고 20장에서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 예고가 연속해서 나옵니다.
그 때, 제자들을 향한 주님의 말씀은 이것이었습니다.
마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이 때 요구되는 것이 진정성 integrity) 자기 십자가를 지고 (이때 요구되는 것이 책임감accountability) 나를 따를 것이니라.
하지만 제자 곧 따르는 이들의 반응은 정반대로 나타났습니다.
마18:1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마20:20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20:21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엇을 원하느냐 이르되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제자들이 바라던 따름에 대한 보상은
바로 세상의 힘, 세상의 권력이었습니다.
왜 그들이 따름에 대한 보상으로 세상의 힘과 권력을 요구했던 것일까요?
권력, 세상의 힘 때문에 당하는 지옥과 같은 현실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역시 ‘불안, 두려움’ 때문입니다.
그런데 16세기의 수도사인 십자가의 성 요한은 그런 우리를 향해 이렇게 권면합니다.
불안이라는 낯선 강도를 만났을 때,
그리고 그 강도에게 좌절을 맛본 이들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보다 쉬운 것보다 보다 어려운 것을
보다 맛있는 것보다 보다 맛없는 것을
보다 즐거운 것보다 차라리 덜 즐거운 것을
쉬는 일보다도 고된 일을
위로 되는 일보다도 위로 없는 일을
보다 큰 것보다도 보다 작은 것을
보다 높고 값진 것보다 보다 낮고 값없는 것을
무엇을 바라기보다 그 무엇도 바라지 않기를
세상의 보다 나은 것을 찾기보다 보다 못한 것을 찾아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하여 온전히 벗고, 비고, 없는 몸 되기를 바라라. (십자가의 성요한, <가르멜의 산길> 성바오로출판사)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권면을 뒷전으로 밀어내고 일상의 일에 몰두합니다.
먹고 사는, 현실이 더 중요하다 여긴 것이지요.
누가복음 14장입니다.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자 많은 사람들을 초대합니다.
그 때 보였던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눅14:16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14:17 잔치할 시각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이르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
14:18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①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밭을 샀으매 아무래도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14:19 ②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14:20 ③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장가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그러니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걱정하지 말고,
몸을 감싸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라는 주님의 음성이 전혀 들려지지 않는 것입니다.
바로 죄의 열매, 죄의 가장 중요한 속성.
그 두려움이라는 옛 습관이 우리 삶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시편 26편을 반복해서 읽으면서 드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과연, 시인의 이 자신감은 어디에서 오는가? 입니다.
누구나 있을 법한, 불안과 두려움을 도저히 찾아 볼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1-3절을 새 번역으로 읽어드립니다.
26:1 주님, 나를 변호해 주십시오. 나는 올바르게 살아왔습니다. 주님만을 의지하고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26:2 주님, 나를 샅샅이 살펴보시고, 시험하여 보십시오. 나의 속 깊은 곳과 마음을 달구어 보십시오.
26:3 나는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을 늘 바라보면서 주님의 진리를 따라서 살았습니다.
나는 올바르게 살아왔습니다.
시험하여 보십시오.
주님의 진리를 따라서 살았습니다.
도대체 어떤 삶을 살았기에 이런 자신감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일까요?
만약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이런 기도를 오늘날 드렸다면 단번에 그러겠지요.
‘교만한 놈’
‘올바르게 살았다고? 샅샅이 살펴보고 시험해 보라고? 주님의 진리를 따라서 살았다고? 교만한 놈’
단 번에 호통을 칠 것입니다.
제가 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께 묻는 질문이 있습니다.
레위기 19장 2절의 명령입니다.
19:2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 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거룩 하라.
과연 그 완전함에 이룰 수 있을까라는 의문입니다.
이렇게 나약하고 이렇게 미숙하고 이렇게 어리석은데,
두려움 때문에 늘 시험을 당하고 넘어지는 것이 우리의 일상인데,
‘거룩 하라’
과연 그 완전함에 이룰 수 있을까?
과연 그런 사람이 있기는 하는가? 라는 질문입니다.
그 때 만난 말씀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시편 26편이고, 이 시의 주인공 다윗입니다.
다윗, 어떤 사람입니까?
우리아의 아내를 범하고, 그 죄를 감추기 위해 전장에서 충신 우리아를 죽인 왕입니다.
성전 건축을 위한 모든 것을 준비하고도 그 손에서 흘린 피 때문에 성전 건축을 하나님으로부터 거부당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다윗에게 있어서 완전함, 올바름, 깨끗함이란 가당치도 않은 말입니다.
그렇다면 다시 1-3절입니다.
(새)26:1 주님, 나를 변호해 주십시오. 나는 올바르게 살아왔습니다. 주님만을 의지하고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26:2 주님, 나를 샅샅이 살펴보시고, 시험하여 보십시오. 나의 속 깊은 곳과 마음을 달구어 보십시오.
26:3 나는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을 늘 바라보면서 주님의 진리를 따라서 살았습니다.
이런 자신감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바로 삶의 지향, 삶의 방향 때문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을 향한 삶의 방향, 삶의 지향이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새)26:1 주님, 나를 변호해 주십시오. 나는 올바르게 살아왔습니다. 주님만을 의지하고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26:3 나는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을 늘 바라보면서 주님의 진리를 따라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이렇게 자신의 시편을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 나를 변호해 주십시오.‘
거룩하신 하나님.
오직 주님만을 의지하는 나의 진정성(integrity)을,
한결같은 주님의 사랑.
그 사랑에 응답하고자 하는 나의 책임(accountability)
그 책임 있는 삶을 변호 해 달라는 것입니다.
다윗, 그는 자신의 상처와 연약함을 그 누구보다 잘 아는 이었습니다.
그래서 시편 끝자락에 가서 이런 청원을 하나 덧붙입니다.
26:11 나는 나의 완전함에 행하오리니 나를 속량하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26:12 내 발이 평탄한 데에 섰사오니 무리 가운데에서 여호와를 송축하리이다
(새)26:11 그러나 나는 깨끗하게 살려고 하오니, 이 몸을 구하여 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26:12 주님, 내가 선 자리가 든든하오니, 예배하는 모임에서 주님을 찬양하렵니다.
이것이 제가 전심으로 드리고 싶은, 제 자신이 산제물이 되고 싶은 참된 예배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불안, 두려움
그 죄의 습관에 지배당하지 마십시오.
특히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으로서 깨끗하게 살기를 소망한다면 더욱 그러십시오.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을 늘 기대한다면 더욱 그러십시오.
설사 세상, 아니 교회로부터도 지지를 받지 못한다 해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우리 주님도 멸시와 천대를 밥 먹듯이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의 무게에 눌려 불안이 엄습합니까?
두려움이 강도처럼 찾아옵니까?
그러면 이 말씀을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이사야 41장 10절입니다.
41:10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그리고 이렇게 찬양해 봅시다.
두려워 말라 걱정을 말라
주님계시니 아쉬움 없네
두려워 말라 걱정을 말라
주님 안에서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