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풀이

예레미야 애가 3:48-54 사랑의 나눔 있는 곳에

心貧者 2018. 10. 11. 14:08


사랑의 나눔 있는 곳에

예레미야 애가 3:48-54 2018/10/07() 성령강림 후 20

3:48 딸 내 백성의 파멸로 말미암아 내 눈에는 눈물이 시내처럼 흐르도다

3:49 내 눈에 흐르는 눈물이 그치지 아니하고 쉬지 아니함이여

3:50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살피시고 돌아보실 때까지니라

3:51 나의 성읍의 모든 여자들을 내 눈으로 보니 내 심령이 상하는도다

3:52 나의 원수들이 이유없이 나를 새처럼 사냥하는도다

3:53 그들이 내 생명을 끊으려고 나를 구덩이에 넣고 그 위에 돌을 던짐이여

3:54 물이 내 머리 위로 넘치니 내가 스스로 이르기를 이제는 멸절되었다 하도다

 

하나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모두에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찬양 한 곡 드리고 시작하겠습니다.

 

교회 창립 60주년 기념예배와 감사 음악회를 보내면서 제가 큰 감동과 위로를 경험했습니다.

무엇보다도 교회를 염려하고 사랑하는 이들이 참 많다는 것을 제가 깨달았습니다.

사랑과 염려, 염려와 사랑

다른 표현이지만 실은 같은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것들이겠지요.

사랑하니까 염려하고, 염려만 할 수 없어 사랑하고 지켜보고 기도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교회를 염려하고 사랑하는 이들이 참 많다는 것

이것은 우리 교회의 또 다른 자산이자 자랑일 것입니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참된 교회의 본질네 가지로 정의했습니다.

 

첫째, 하나(one)의 교회입니다.

교단이 다르고 교파가 다르고, 주장하고 내새 우는 신학이나 신앙의 모습이 달라도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는 원칙적으로 하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이 하나이듯 하나(one)의 교회입니다.

 

에베소서 44-6절입니다.

4:4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4:5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4:6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둘째, 교회의 본질은 사도성에 있습니다.

사도적 교회이지요.

사도적 교회란 다른 뜻이 아닙니다.

주님을 따르던 12 사도들, 사도들의 직임을 그대로 계승한 곳이 바로 교회라는 말입니다.

 

사도들의 직임, 세 가지입니다.

첫째 병든 이들을 치유하고

둘째 귀신 들린 자들을 온전하게 하며

셋째 가난한 이들이나 갇힌 이들에게 자유의 복음을 선포하는 사명을 계승하고, 또 이어갈 뿐만 아니라 재생산하는 것을 말합니다.

셋째 교회의 본질은 거룩함에 있습니다.

거룩함 곧 구별된 모임으로서의 교회이지요.

세상과 다른 구별됨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거룩한 공회라고 부릅니다.

거룩한 공회입니다.

 

물론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정말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가 거룩한 공회일까?’

혹 공회의 거룩 성을 상실한 것은 아닐까?‘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세우신 모든 교회는 거룩한 공회라는 것이 신앙의 선배들이 가르쳐 주신 교회의 본질입니다.

 

마지막 네 번째는 가톨릭(catholic) 곧 보편적 교회입니다.

가톨릭(catholic)이란 보편적이라는 말로 장벽이 없다는 뜻입니다.

일체의 편견이나 배타성이 없는 보편성.

그 보편성을 소명으로 삼는 곳이 바로 교회라는 곳입니다.

 

에베소서 214-16절입니다.

2: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2:17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사람과 사람이 갈등하고 갈라지고 원수가 되게 하는 일체의 편견이나 배타성을 모두 소멸하고, 화목과 평안 / 화해와 평화를 이루는 보편적 교회입니다. 나와 너를 가르는 어떠한 틈새도 어떠한 장벽도 없는 보편적 교회입니다.

 

과연 이런 모든 조건을 갖춘 모범적인 교회가 지상에 존재할까?

여러분 생각은 어떻습니까?

과연 있을까?

네 있었습니다.

바로 고린도후서 8장에 등장하는 마게도냐 교회입니다.

 

바울이 2차전도 여행을 마치고 3차전도 여행을 시작할 쯤에 아주 안타까운 소식 하나를 접하게 됩니다.

예루살렘 지역에 임한 심한 기근으로 인해 예루살렘 교인들이 아주 큰 어려움과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특히 경제적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과부들과 고아들이 아주 큰 어려움을 당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안타까운 소식을 접한 바울은 가는 곳곳마다 예루살렘 교회의 사정을 알리게 됩니다.

그때, 이 안타까운 소식을 듣고 뜨겁게 반응했던 교회가 소아시아 지역과 유럽에 설립된 교회들이었습니다.

특히 마게도냐 지역에 있는 교회가 보여 준 뜨거운 헌신은 바울도 깜짝 놀랄 정도였습니다.

 

고린도후서 8장입니다.

8:1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8:2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8:3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8:4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8:5 우리가 바라던 것뿐 아니라 그들이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에게 주었도다

 

저는 여기서 참된 교회의 모습을 세 구절에서 찾아보았습니다.

첫째 8:2 그들은 큰 환난의 시련을 겪으면서도 기쁨이 넘쳤다.

둘째, 극심한 가난에 쪼들리면서도 넉넉한 마음으로 남에게 베풀었다.

셋째, 그들은, 우리가 기대한 이상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먼저 자신들을 주님께 바치고(헌금), 우리에게 바쳤다(연보).

 

넉넉한 섬김

바로 사랑의 나눔입니다.

 

하지만 부유한 고린도 교회는 이 일에 기쁨으로 동참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마게도냐 교회의 예를 들려주면서, 연보를 할 때 피해야 할 두 가지의 태도를 고린도 교인들에게 가르쳐줍니다.

하나는 인색함으로 하지 말고, 또 하나는 억지로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요?

중심을 보시는 이가 바로 우리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으로 돌아옵니다.

눈물의 예언자.

예언자 예레미야의 별명입니다.

왜 예레미야는 눈물의 예언자라는 별명을 얻게 된 것일까?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 예레미야 자신이 겪은 고난이 특별했기 때문입니다.

하루하루를 눈물로 살 수 밖에 없는 아픔이 아주 특별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이라는 하나님의 예언으로 말미암아 동족인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배신자, 역적, 거짓 선지자, 미친놈이라고 낙인이 찍혔기 때문입니다. 좋은 것을 말하지 않고 항상 나쁜 것 부정적인 것만 말하는 삐틀어진 예언자라고 낙인을 찍혔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제 살 궁리나 하는 거짓 선지자들로부터 그런 모욕과 치욕을 당했으니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날마다 눈물이지요.

 

또 하나, 예레미야 선지자가 눈물의 선지자라는 별명을 얻은 이유는 공감 의 능력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의 고난과 아픔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여 함께 울 줄 아는 사람이었다는 뜻입니다.

오죽 했으면 예레미야서에 더하여 예레미야 애가서가 따로 묶였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예레미야 애가의 일부입니다.

여기에 보면, 유다 백성에게 닥친 고난을 본 선지자 예레미야가 아주 심하게 아파하며 우는 장면이 나옵니다.

3:48 딸 내 백성의 파멸로 말미암아/내 눈에는 눈물이 시내처럼 흐르도다

3:49 내 눈에 흐르는 눈물이 그치지 아니하고 쉬지 아니함이여

 

왜 이렇게 예레미야가 울었겠습니까?

이유는 오직 하나입니다.

동족 곧 이스라엘의 파멸이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 딸과 같이 특별히 사랑했던 이들이 파멸이라는 아주 끔찍한 선택을 했기 때문입니다.

 

새 번역으로 다시 읽어드립니다.

3:48 내 백성의 도성이 파멸되니, 나의 눈에서 눈물이 냇물처럼 흐릅니다.

3:49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쉬지 않고 쏟아집니다.

 

어떻습니까?

동족 이스라엘을 향한 예언자의 애틋한 염려와 뜨거운 사랑이 느껴지십니까?

파멸을 선택한 이들을 향한 애틋함과 염려가 느껴지십니까?

 

제가 그리 오래 신앙생활을 한 것은 아니지만 깨달은 것이 하나있습니다.

참된 사랑은 항상 눈물과 헌신이 따른다는 진실입니다.

사랑의 나눔은 반드시 애정 어린 눈물뜨거운 헌신 곧 연보가 뒤 따른다는 사실입니다.

아주 오래된 유행가인데

사랑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눈물의 씨앗이라고 말하겠어요.’(나훈아)

 

그렇습니다.

가족에 대한 사랑도, 친구에 대한 사랑도, 민족에 대한 사랑도, 하나님에 대한 사랑도, 우리 교회에 대한 사랑도 바로 눈물의 씨앗 속에서 싹트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눈물은 피할 수 없습니다.

기쁘면 기쁜 대로 슬프면 슬플 대로 눈물이 나오는 법입니다.

서로 사랑하면 피할 수 없는 것이 바로 눈물입니다.

 

그런데 사람, 참 악하고 못났지요?

선지자의 애정 어린 눈물과 헌신 앞에서도 회개는커녕, 새 쫒듯 참된 선지자를 몰아냅니다.

3:52 나의 원수들이 이유 없이 나를 새처럼 사냥하는도다

3:53 그들이 내 생명을 끊으려고 나를 구덩이에 넣고 그 위에 돌을 던짐이여

 

새 번역으로 다시 읽어드립니다.

3:52 까닭없이 내 대적이 된 자들이 새를 사냥하듯 나를 쫓습니다.

3:53 그들이 나를 산 채로 구덩이에 처넣고, 돌로 막아서 못 나오게 하였습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이 눈물을 보이신 이야기가 두 번 나옵니다.

 

하나가 요한복음 11 35 절에서 눈물을 보이십니다.

나사로의 무덤 앞에 이르렀을 때 주님이 우시지요.

함께 아파하며 눈물을 흘립니다.

사랑하는 이와 함께하는 공감의 눈물이지요.

 

또 하나는 누가복음 1941절에서 눈물을 보이십니다.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처럼 곧 멸망당할 예루살렘과 민족의 처지를 보시면서 통곡의 눈물을 흘리십니다.

선지자 예레미야와 같은 눈물이지요.

 

어떻습니까?

이제는 우리가 그 통곡의 눈물에 동참하고 그 눈물을 닦아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을 더욱 통곡하게 하고, 참된 선지자를 더욱 통곡하게 하는 못된 일에 동참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몸 된 교회인 우리가 그 눈물에 동참하고 그 눈물을 닦아드리는 일에 동참해야 하지 있겠습니까?

 

이 소명, 이 비전.

이것이 제가 교회에 걸고 있는 희망이고, 오늘도 버티고 목회하는 힘의 원동력인 것입니다.

바로 사랑의 나눔입니다.

인색하지 않는 보편적이고 거룩한 사랑의 나눔입니다.

사랑의 나눔 있는 곳에 하나님께서 계시도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