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서 4:5-11 요나 그리고 나
요나 그리고 나
요나서 4:5-11 2018/07/01 성령강림 후 6주4:5 요나가 성읍에서 나가서 그 성읍 동쪽에 앉아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려고 그 그늘 아래에 앉았더라
4:6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넝쿨을 예비하사 요나를 가리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그의 괴로움을 면하게 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넝쿨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였더니
4:7 하나님이 벌레를 예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넝쿨을 갉아먹게 하시매 시드니라
4:8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쪼이매 요나가 혼미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이르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하니라
4:9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하시니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하니라
4:10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4:11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하나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모두에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존재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고린도후서 2장입니다.
2:15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하나님 앞에서 드리는 그리스도의 향기’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가져야할 자기 정체성이라는 것이 바울의 설명입니다.
동시에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정체성이지요.
바울이 이렇게 정의한데에는 두 가지의 과제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의 삶이 하나님을 향한 봉헌제물, 곧 향기 나는 제물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썩은 악취가 나서 모든 이들의 눈을 찌푸리게 하는 봉헌 제물이 아니라 모든 이들, 심지어 멸망하는 사람들에게까지 기쁘게 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는 봉헌 제물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반드시 감당해야할 몫이 있습니다.
제가 늘 강조하는 부분이자 제 목회의 초점인데, 앞서 나오는 말씀 2장 14절입니다.
고후2:14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입니다.
이것을 공동번역 성경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향기’라고 번역해 놓았는데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향기’가 충만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아주 적절한 번역이지요.
이것이 바울이 전도 여행을 통해 꿈꾸었던 교회의 모습이자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그리스도를 아는(일치) 지식의 향기’입니다.
또 하나는 우리의 삶이 모든 이들에게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차별 없이 퍼져나가는 그리스도의 향기이지요.
그래서 공동번역 성경은 고린도후서 2장 15절을 이렇게 번역해 놓았습니다.
고후2:15 우리는 하느님께 바치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이 향기는 구원받을 사람에게나 멸망당할 사람에게나 다 같이 풍겨 나가(야합니다.)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같은 향을 받아들이는 이들의 반응이 전혀 다르다는 것입니다.
고후2:16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
어떤 이들에게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사망에 이르는 냄새가 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에게는 그 향기가 생명에 이르는 냄새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의미심장한 말을 남깁니다.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
‘하나님께 드리는 그리스도의 향기’
아무나 그 향기를 감당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의 말씀처럼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만이 감당할 수 있는 향기입니다.
그래서 그 향기를 바울은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인물은 요나입니다.
요나, 요한의 축약형입니다.
(마16:17 ‘바요나 시몬’, 요21:15 ‘요한의 아들 시몬’)
마 16:1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요21:15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요나는 하나님의 선지자입니다.
북왕국 이스라엘, 여로보암 2세 때 활동했던 하나님의 선지자입니다.
바울처럼 이방민족이었던 ‘니느웨 사람’을 ‘하나님께 드리는 구원의 제물, 향기의 제물’로 바쳐야 했던 하나님의 선지자였습니다.
그래서 요나를 구약의 바울이라 부릅니다.
하지만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자신이 감당해야할 몫을 거부했던 아주 문제적인 인물이기도 합니다.
‘요나’
어쩌면 성경에 나오는 무수한 인물 중에서 우리와 가장 성정이 비슷한 인물일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의 제목을 ‘요나 그리고 나’로 잡은 것입니다.
‘요나’라는 거울 속에 우리 자신의 모습이 아주 적나라하게 비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좀 늦기는 했지만 지금이 밴댕이와 병어 철입니다.
드셔보셨나요.
밴댕이 하면 생각나는 말, 무엇이 있습니까?
‘밴댕이 소갈딱지’
무슨 뜻입니까?
‘편협하고 쉽게 토라지는 사람들을 빗댄 말이지요.’
요나가 바로 그런 인물이자 우리가 바로 그런 인물이지요.
요나서 1장입니다.
요나에게 임한 하나님의 명령이자 예언인데 1장 1절입니다.
1:1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1:2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하시니라
‘니느웨’ 또는 ‘니느베’라고도 부릅니다.
‘니느웨’ ‘니느베’ 어느 것을 사용해도 다 좋습니다.
신흥 강대국 앗시리아의 수도이지요.
요나서는 니느웨를 1장 2절에서 ‘큰 성읍’이라 일컫습니다.
‘크다‘는 표현은 일차적으로 도시의 규모를 가리키는 물리적인 말일 것입니다. ‘서울’이나 ‘뉴욕’처럼 대도시를 뜻하지요.
하지만 여기서 사용된 ‘큰 성읍’의 이미지는 그 이상의 뜻을 품고 있습니다.
바로 인간의 욕망입니다.
욕망의 도시이지요.
문제는 그 욕망이 크면 클수록 사람과 사람, 민족과 민족이 갈라지는 갈등을 야기 한다는 것입니다.
욕망이 크다는 것은 결국 갈등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는 말이 됩니다.
그리고 그 갈등은 폭력과 억압과 그리고 착취를 낳게 되지요.
아주 큰 폭력과 아주 악랄한 착취를 낳게 됩니다.
그러니 ‘큰 성읍 니느웨’를 하나님이 차마 두고 보실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선지자 요나를 하나님이 친히 지목해서 니느웨를 향한 구원의 말씀과 함께 멸망의 경고를 하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계획과 달리 아주 치명적인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지목한 요나가 이를 거부한 것입니다.
이유는 아주 간단했습니다.
적대국가인 앗시리아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생각이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둘째 치고, 꼴도 보기 싫은 원수를 대할 마음이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혹입니다.
절대 그런 일은 없겠지만 혹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 한다면, 분명히 자비와 긍휼이 큰 하나님이 니느웨를 향한 징계와 심판을 철회 하시고 용서하실 텐데, 그 꼴을 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밴댕이 소갈딱지’ 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요나는 그 누구보다 하나님을 잘 아는 선지자였습니다.
문제는 여호와에 대한 그의 지식이 그의 마음으로까지는 전달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가 긍휼과 자비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지만 문제는 하나님의 마음은 헤아리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에 대한 지식 곧 하나님의 속성은 잘 알고 있었지만 하나님의 마음은 전혀 헤아리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지자 요나의 한계이지요.
슬픈 것은,
요나의 한계가 오늘 목회자로 부름 받고 세워진 저의 한계로 고스란히 비추어지고 있다는 현실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헤아리는 데까지는 미치지 못하는 목회.
그러니 때로는 섭섭하기도 하고, 때로는 제풀에 지쳐 화가 나기도 했지요.
어찌되어든 망할 나라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하는 것이 선지자 요나의 사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요나가 어느 길을 택합니까?
1:3 그러나 요나가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배삯을 주고 배에 올랐더라
못난 일이지만 이것이 우월의식에 사로잡힌 요나뿐만이 아니라 밴댕이 소갈딱지 같은 우리의 모습이지요.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여’
이 말씀이 자꾸 천둥처럼 들리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요나와 그리고 니느웨 성을 포기하지 않고, 표적 하나를 베푸십니다.
훗날 바리새인들이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 강압적으로 요구했던 표적, 그 표적을 베풀어 주십니다.
1:17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으므로 요나가 밤낮 삼 일을 물고기 뱃속에 있으니라
2:1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2:2 이르되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2:3 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에 던지셨으므로 큰 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
2:4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2:5 물이 나를 영혼까지 둘렀사오며 깊음이 나를 에워싸고 바다 풀이 내 머리를 감쌌나이다
2:6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
2:7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
2:8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모든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
2:9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 하니라
2:10 여호와께서 그 물고기에게 말씀하시매 요나를 육지에 토하니라
핵심은 2장 9절이지요.
새번역 성경으로 다시 읽어드립니다.
2:9 그러나 나는 감사의 노래를 부르며, 주님께 희생제물을 바치겠습니다. 서원한 것은 무엇이든지 지키겠습니다. 구원은 오직 주님에게서만 옵니다."
그렇게 해서 마침내 도착한 니느웨에서 요나는 외칩니다.
거리와 거리, 골목과 골목을 누비면서 하루 동안만 외치지요.
3:4 요나가 그 성읍에 들어가서 하루 동안 다니며 외쳐 이르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지는데, 그 다음절인 3장 5절입니다.
3:5 니느웨 사람들이 ①하나님을 믿고 ②금식을 선포하고 ③높고 낮은 자를 막론하고 굵은 베 옷을 입은지라
회개의 역사 곧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정말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마치 소설과 같은 이야기이지요.
하지만 이 일에 못마땅한 유일한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누구입니까?
바로 요나였습니다.
이일이 얼마나 못마땅했던지 이런 강짜를 하나님 앞에 놓습니다.
4:1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
4:2 여호와께 기도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4:3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하니
그렇게 요나는 하나님 앞에서 구원의 향기, 긍휼의 향기가 되지 못하고 초막하나 지어놓고 박 넝쿨 그늘 밑에 들어가 요즈음 말로 일인시위에 들어갑니다.
‘멸망하는지 멸망하지 않는지 어디 두고 보자’는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도 물러서지 않고 일인시위에 들어간 자리, 그 박 넝쿨을 말라버리십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요나는 이판사판이라고 생각했는지, 하지 말아야할 말까지 하나님 앞에서 쏟아 놓게 됩니다.
4:8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쪼이매 요나가 혼미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이르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하니라
그 때 하나님이 헛된 우월 의식에 사로잡힌 요나에게 천둥과 같은 말씀 하나를 주십니다.
4:9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하시니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옳으니이다 하니라
4:10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4:11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말씀을 마칩니다.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이것이 천지를 지으신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이자 마지막 추수 때가 임박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드려진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부름 받은 우리가 그리고 우리 한국교회가 지금 어떤 길을 택하고 있습니까?
혹,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동족의 붕괴만을 지켜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혹, 인종이 다르고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나그네 된 난민을 거부하는데 앞장서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하지만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게 하신 주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