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4:30-34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유할까?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유할까?
마가복음 4:30-34 2018/06/24, 성령강림 후 제5주4:30 또 이르시되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교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까
4:31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4:32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풀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나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
4:33 예수께서 이러한 많은 비유로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대로 말씀을 가르치시되
4:34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다만 혼자 계실 때에 그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해석하시더라
하나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모두에게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지난 주 목요일이 하지夏至였습니다.
하지를 기점으로 전후90일 동안 스님들이 골방에 들어가서 행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무엇이라고 합니까?
하안거(夏安居)라고 합니다.
부처님의 말씀과 씨름하는 90일 간의 시간을 불가에서는 하안거라고 부릅니다.
반면 동지를 기점으로 전후 90일 동안 수님들이 수행하는 것을 동안거라고 합니다. 겨울 내내 골방에 들어가서 부처님 말씀과 씨름하지요.
불교의 하안거 동안거처럼 우리 신앙의 선배들도 100년 전부터 하나님의 말씀과 씨름하는 특별한 시간이 있었었습니다.
그것을 무엇이라고 합니까?
‘사경회’라고 부릅니다.
여름 사경회, 겨울 사경회이지요.
한국교회가 가지고 있는 아주 독특한 전통으로 네비우스(Nevius, J. L.) 선교사가 내건 선교 정책 3 가지 즉 자진 전도, 자력 운영 그리고 자주 치리의 원칙에 따라 스스로 성경을 공부하자는 운동이 바로 사경회입니다.
무엇을 공부했을까요?
기록에 따르면 4복음서, 예수의 생애, 바울서신, 교리문답, 주기도문, 십계명, 그리고 삼위일체 신학과 신앙이 담긴 사도신경을 공부했다고 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응용과목으로 주일학교 교수법 · 경영법 · 기도법 · 개인전도법 · 상담 · 회의법 등 다양한 과목을 공부했다고 합니다.
여선교회 같은 경우는 아동교육 · 건강위생법 · 새 생활운동 등 실제적인 과정도 공부했다고 합니다.
사경회는 보통 이렇게 운영되었습니다.
새벽 기도회부터 시작하여 오전에는 주로 성경 공부를 합니다.
그리고 점심 먹고 오후에는 반을 나누어(분반공부이지요.) 일반상식 과목을 공부했다고 합니다.
그 다음에는 이 점이 가장 중요한데, 마태복음 28장 마지막 주님의 명령처럼 모두가 흩어져 나가 축호전도(逐戶傳道)와 노방전도(路傍傳道)를 했다고 합니다.
마28:17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
28:18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그렇게 해서 한국 교회는 두 가지를 체험하게 됩니다.
하나는 심령의 부흥입니다.
또 하는 교회의 부흥이지요.
성령으로 말미암은 새 생명의 역사, 교회 부흥의 역사를 강력하게 체험하게 됩니다.
이것이 60, 70년대 여름부흥사경회 겨울부흥사경회로 그 전통이 이어지다가 80년대 이후부터는 여름산상성회 겨울산상성회로 그 명목만 겨우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그마저도 사라지는 추세이지요.
참 안타갑지요.
스스로 성경을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점점 잃어버린다는 것은 아주 불행한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다음세대인 우리 자녀들에게도 부끄러운 일이지요.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가르치고 배울 때 많은 역사가 나타났지만 그런 일을 지속적으로 이룬 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특히, 성경을 스스로 공부한다거나 그 반대로 성경을 제대로 가르친다는 것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 고민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막4:30 또 이르시되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비교하며 또 무슨 비유로 나타낼까
여기에 보면 예수님의 고민 하나를 엿보게 됩니다.
예수님이 가지셨던 가장 본질적인 고민인데, 바로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치는 일입니다. 그래서 공동번역은 이 부분을 이렇게 번역해 놓았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무엇에 견주며 무엇으로 비유할 수 있을까?’
그렇게 해서 찾아 낸 방법, 수사학이 비유입니다.
비유로 어떤 이미지를 연상하게 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치신 것이지요.
하나님의 나라, 무엇이 가장 먼저 연상되십니까?
보통은 금은보화입니다.
사도 요한이 받은 계시록
21:11 하나님의 영광이 있어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 같이 맑더라
또 무엇이 연상될까요?
황금성입니다.(이강산노래)
계21:18 그 성곽은 벽옥으로 쌓였고 그 성은 정금인데 맑은 유리 같더라
여하튼 ‘하나님 나라는 이것이다’라고 총체적으로 그릴 수 있는 언어는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비유로만 나타날 뿐 ‘서술’이나 ‘묘사’가 없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유일한 서술이자 묘사는 예수님이 아닌 사도 요한이 받은 묵시인데, 요한계시록 21장 3-4절에 나옵니다.
21: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21: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이처럼 누구나 동의 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나라를 객관적으로 설명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는 이해의 영역이 아니라 믿음의 영역이라고 우리가 말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 믿음의 역사를 우리 주님이 기대하시면서 비유의 방법을 사용하셨다는 것입니다.
비유를 뜻하는 그리스어는 ‘파라볼레 parabole’입니다.
‘옆에 던져놓는다’는 뜻입니다.
어떤 현실과 실제를 설명하기 위해 그와 비슷한 이미지를 옆에 놓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자면 바리새인의 외식, 그들의 허의의식을 예수님은 무엇으로 비유하십니까?
‘회칠한 무덤’입니다.
진실과 성실이 없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회칠한 무덤으로 비유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비유를 살펴 볼 때 우리가 꼭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비유에 사용되고 있는 이미지, ‘비유 점’입니다.
예를 들자면 아빠 곰은?
뚱뚱해
엄마 곰은?
날씬해.
이것이 특징을 잡아내는 ‘비유 점’입니다.
자 그렇다면, 왜 우리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겨자씨 한 알이 심기어진 상태’로 비유했을까요? 이전에도 한 번 설명을 드렸는데, 오늘은 세 가지의 관점으로 간략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겨자씨 한 알과 같다는 것은
첫째 하나님의 나라가 마치 겨자씨 한 알처럼 지극히 보잘 것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생명력,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유대인에게 있어서 겨자씨는 아주 보잘 것 없는 존재를 뜻합니다.
‘작은 것’, ‘변변치 못한 것’과 동의어로 쓰일 정도로 아주 보잘 것 없지요.
실제로 유대 문헌에는 ‘겨자씨만한 핏방울’ 또는 ‘겨자씨만한 위협’이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하는데 이것은 법정에서 자기 잘못을 변호할 때 쓰는 말로, 우리말로 표현하면 ‘새 발의 피’ ‘눈꼽만큼’이라는 뜻입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겨자씨 한 알이 땅 곧 우리 심령 안에 심기어지자 어떠한 변화가 일어납니까?
4:31 겨자씨 한 알과 같으니 땅에 심길 때에는 땅 위의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4:32 심긴 후에는 자라서 모든 풀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나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수 있을 만큼, 그 어떤 풀보다 더 큰 가지들을 뻗어내는 생명력과 함께 공중의 새들이 깃들일 만큼 그 이상의 능력과 가치를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 비유는 당시 유대인들 특히 다윗왕국에 사로잡힌 바리새인들에는 적절한 비유가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하나님 통치)는 다윗의 왕국처럼 멋지고 화려하게 나타나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찾아낸 왕국의 ‘비유 점’은 ‘백향목’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과 다윗 궁전의 주재료인 ‘백향목’입니다.
에스겔 17:22-23
17:22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내가 백향목 꼭대기에서 높은 가지를 꺾어다가 심으리라 내가 그 높은 새 가지 끝에서 연한 가지를 꺾어 높고 우뚝 솟은 산에 심되
17:23 이스라엘 높은 산에 심으리니 그 가지가 무성하고 열매를 맺어서 아름다운 백향목이 될 것이요 각종 새가 그 아래에 깃들이며 그 가지 그늘에 살리라
선지자 에스겔이 각종 새가 깃들일 나무로 지목한 것은 겨자풀이 아니라 이스라엘 높은 산, 시온에 심겨진 백향목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가 겨우 겨자풀이라니요?
사실 겨자 풀은 모든 풀보다 크지만 아무리 크게 자라봐야 3m 정도입니다. 그러니 새들이 가지에 둥지를 틀 수 잇을 정도는 아닙니다.
게다가 겨자 풀은 번식력이 좋아서 급속히 제멋대로 퍼질 뿐만 아니라, 토양을 망가뜨리기 때문에 농민들이 가장 기피하던 식물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겨자 씨 한 알이 자란 겨자 풀로 비긴 것일까요?
여기서 두 번째, 비유의 의미가 숨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겨자 풀처럼 한번 심기어지기만 하면 ‘스스로 자란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아주 잘 자란다는 것입니다.
반면 백향목은 어떻습니까?
좋은 백향목을 얻기 위해 이만저만 사람의 손이 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겨자 풀은요?
한번 심겨지기만 하면 사람의 손이 없어도 사람의 노력이 없어도 ‘스스로 아주 잘 자란다,’는 것입니다.
백향목처럼 사람의 손에 의해 다듬고 가꾸어질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는 파루시아, 강림하는 것입니다.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가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것이지요.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우리 안에 거할 수 있도록 날마다 죽는 것입니다.
내 나라는 죽고, 파루시아 ; 강림하는 하나님 나라를 살리는 것.
이것이 겨자 풀이 주는 두 번째 의미입니다.
세 번째 비유가 주는 의미가 있습니다.
억센 생명력입니다.
다시 말에 하나님 나라는 땅, 곧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높은 자나 낮은 자나, 부유한 자나 가난한 자나, 남자나 여자나, 주인이나 종이나,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이 없다는 것입니다.
롬 3:22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롬10:11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10:12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10: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골3: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3:11 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차별 없이 만유 안에 계신 그리스도처럼 차별 없이 만유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강림하는 것.
이것이 겨자씨 한 알이 땅에 심겨져 풀처럼 자란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 이후 마가는 이런 첨언을 답니다.
마가의 사족이지요. 4:33 예수께서 이러한 많은 비유로 그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대로 말씀을 가르치시되
4:34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다만 혼자 계실 때에 그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해석하시더라
왜 이런 사족을 달았을까요?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는 들을 귀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유, 그 생명의 말씀을 들을 마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막4:9 또 이르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4:10 예수께서 홀로 계실 때에 함께 한 사람들이 열두 제자와 더불어 그 비유들에 대하여 물으니
4:11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나니
4:12 이는 그들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함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시고
계속해서 4장 23절입니다.
4:23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또 하나는 앞의 것과 이어지는 문제인데 바로 믿음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신뢰이지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여러 비유, 특히 겨자씨 한 알에 대한 비유를 마치자마자 일어난 사건 하나가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마가복음 4장 35절 이후에 나오는 제자들이 큰 광풍을 만나 사건입니다.
그 때 우리 주님이 하신 말씀의 결론이 이것입니다.
4:39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4:40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그러니 구하고 찾고 두드리십시오.
두려움과 걱정을 몰아내고 의에 이르는 믿음을 갖게 하는 보혜사 성령을 구하고 찾고 두드리십시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